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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츠키, 뱀과 이브 (해가님 커미션)

치아카 2016. 7. 1. 21:04



선배가 맘에 든 건 이학년이 되어서였다. 좋아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똑 부러지게 확언할 수 없지만 그거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선배와 제대로 대화란 걸 하게 된 것도 이학년부터다. 새내기 OT는 필수가 아니라는 주변 말을 주워듣고 부러 가지 않았고, 일학년을 보낼 동안은 뾰족한 목표 없이 괜찮다는 강의는 이것저것 찔러보았다. 그나마 불참 시 페널티가 있다는 경고장을 받고 발 뒤축을 질질 끌어 참석한 것이 이학년 학과 진입생 파티였다. 거기서 그가 나눠주는 스케줄러와 학교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펜을 받았다. 재수를 했다는 그는 졸업반 스물네 살이었다.

 

조용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수다스럽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든 통하지 않나. 특별한 구석은 없는데 그런 이유로 튀지도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사람. 그래서 처음엔 맘에 들었다. 꽤 나랑 닮은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로서는 늘 적당히가 최선이었고, 그도 나름대로 적당한 사람 같았다…… 꼭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수강신청에 실패하고 삼사학년 권장용 전공선택강의를 무리하게 들으며 그와 시선이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몇 번 얽히면서였다. 어느 때부터다, 라기 보다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듯 천천히 경과하면서…… 그러니까, 시답잖게 느껴졌던 과정이라는 것이 그에게 꼭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시꺼먼 흑발도 아니요, 또 허옇게 질린 백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채도를 차지하고 있을 법한 잿빛 머리카락이 이미 그에 대한 설명을 절반 해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 어중간한 사람이었다.

 

츠키시마, 동아리 지원한 거 있어?

아뇨.

새내기 땐 해봤어?

그다지……

레저 클럽 들어오는 건 어때? 동아리 하나쯤은 해야지.

거기선 뭐 하는데요.

당구 좀 치다가…… 소모임으로 술 마시고?

 

선배는 당구를 못 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고백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꽤 별볼일 없는 투로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놨다. 그냥 술동이야, 술동. 그가 능숙하게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어깨를 후려쳤다. 알고 보니 그는 레저 클럽 말고도 배구 동아리에도 들어있었다. 병행하기 힘들지 않나요? 걱정은 둘째치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가 어느 쪽으로 해석했든 괜찮아라는 대답이 일관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상답안을 내놨다. 진짜 괜찮다든가, 혹은 괜찮은 척이라든가, 모 아니면 도라기보다는 그 말을 기계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안 괜찮다는 말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많은 것들이 나를 상당히 귀찮게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떨까.

 

나는 적당한 사람이다. 적당함과 어중간함은 다르다고…… 이전에는 몰랐지만 선배를 보며 조금씩 알아간다. 둘 모두 100%는 아니라는 성향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는 상당한 차이를 띤다. 적당하다 보면 안주하게 되고, 또 잔가지도 많이 쳐내게 되는 법이지 않은가. 아직까지 불만족스럽진 않다. 적당한 것으로는 안 된다는 계기를 만들어줄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 식이다. 어중간함이라 하면, 적당함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상태가 아닐까. 쉽게 말하면 발전된 적당함말이다. 적당함을 인지한 이후에,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때 바로 어중간함이 되는 것이다. 선배는 레저 클럽에서 당구는 못 쳤지만 참견은 잘한다고 했다. 배구에선 포지션 뭐예요? 세터. 그런데 주전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믿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차차 깨달아가며 나는 선배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일 그의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그를 가까이하지도 않을 정도로 꼴사납게 보고 있지 않았을까. 어중간함이라는 것은 참으로 그렇다. 본래 의욕이 앞서지 않는 이들은 적당한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나. 지금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사람을 더 완벽하게 완성시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건 아무래도, 없는 것이다. 어중간한 사람은 그 자체로 이물감이다. 특유의 원근 없는 거리로,

 

츠키시마는 연애 안 해?

……관심 없는데요.

에헤이, 지금 안 하면 너 나중에 후회한다.

 

알아가고 싶다는 듯 굴지만 사실은 알지 못해도 상관 없는 거지. 그는 쓸데없는 것엔 부러 고개를 더 들이밀고, 진정 중요한 것은 조용히 물러서 응시하며……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으로 사고를 맺는다. 이게 최선을 다하는 그만의 방법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그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난 구석 없이 그렇게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팔을 벌릴 때마다 내가 피부를 거친 뼛조각으로 사뭇 느끼는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군집 속에 내가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그가 최선을 다하는 방법으로써 중요한군집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

 

있지, 츠키시마.

.

 

또한 내가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고 만다는 것 말이다. 있지, 있지, 얘기 하나 들어줄래. . 꼭 비밀로 해야 한다. 왜 저한테 비밀 얘길 해요? 츠키시마는 뭐랄까, 한 귀로 듣고 흘려줄 것 같달까…… 거기서 그는 암묵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래서 그가 무슨 비밀을 들려주든 내가 들을지언정 그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와 비밀을 나누기보다, 비밀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시점에서 엿들은 것마냥 밀려드는 죄책감. 선배는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일주일 전 스포츠관에서 폐장시간에 일어난 낙하사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요약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는 핵심만 골라 말해주었다. 얼마 전에 체육관 조명이 떨어져서 주전세터가 중상을 입었다. 물론 사고였다. 하지만 내심 기분 좋았다. 당분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되었는데…… 당분간이 아니면 좋겠다. 미친놈같이 보일진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미친놈이 맞고…… 요즘 주말마다 신사에 가서 빌고 있다. 걔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츠키시마, 츠키시마. 듣고 있어? , 듣고 있어요.

 

그가 나를 제 자취방에 초대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마실래? 맥주를 땄지만 내가 고개를 저어서 그가 두 캔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오늘 병문안 갔다 왔어. 그는 냉장고를 뒤져 세 번째 맥주를 따며 말문을 텄다. 나는 그가 거실 바닥 위에 깔아준 요에 어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몸을 엉거주춤하게 일으켰다. 시야에 수직으로 뒤집힌 소파다리만 멀뚱히 보다가 갑자기 쨍한 부엌 조명을 바로 보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올리자, 그가 조명 밝기를 줄여주고 탁자 앞에 다릴 꼬고 앉았다. 캔을 입가에 가져갈 때마다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베갯잇을 쥐었다 펴며 따분한 손장난을 하다가, 눈을 내리깔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병문안은 왜 가요?

친했으니까. 안 가면 이상하잖아.

친했어요?

.

 

선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세 번째 맥주를 모조리 비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안중 밖이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맘에 드는 사람도 뭣도 아니었다면……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뭘 하고 있었으려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냉국에 빠지는 그런 비밀을 전해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집에 고치를 친 누에처럼 움츠려 누워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문득 그가 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텅 빈 맥주캔이 탁자 유리와 시원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성긴 걸음으로 이불을 헤집다 말고 조그맣게 웃었다. 뭐야, 내가 츠키시마 군 잡아먹기라도 해? 그 말에 내가 미간을 찌푸릴 때 즈음 그가 부엌 스위치를 내렸다. 좁은 방이 완연한 어둠에 잠겼다. 안경을 벗어 더듬더듬 베개 옆에 얹어놓으니 더욱 사방이 침침했다. 그만큼 우물쭈물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제 와 그를 미워해볼걸, 미워하려는 시도라도 해볼걸,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더 삐뚤었다면…… 바특 비틀어진 그를 똑같이 비틀어 보았다면 되려 정직하게 바로 선 그의 모습을 단번에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착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아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는 선배의 수더분한 구석보다도 묘하게 추잡스러운 이면들이 예각으로 날아와 머리에 박히지만, 그게 전부다.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맘에 들지 않지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 평소라면 쉽게 묻힐 한숨이 숨죽인 고요 속에서 두각을 보였다. 문득 선배가 내 팔뚝 위로 손을 얹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힘있게 주무른다. 그가 뭘 하는지 안다. 나를 협박하는 것이다. 내 편이 되어줄 거지? 하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저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면서. 그는 그런 것을 세련되게 요구하지만, 나에겐 재간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면 요구보단 구걸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건 싫다. 나는 다시 기력이 다하고, 입을 열어서 뭐든 그르칠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공범자가 된 기분. 아니, 애초에 선배의 범행이 아니지만 그는 꼭 제가 모든 일을 꾸민 것처럼 군다. 눈을 감으니 어둠 속에서 푸른빛으로 울렁거리는 벌레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눈꺼풀을 닫은 채로 열심히 눈을 굴리는 와중, 내 팔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뒷덜미를 눌렀다. 낮지는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얘기 하나 해줄까.

……

까마득한 옛날에, 신이 에덴동산을 만들었는데,

 

아담을 만들고, 그 다음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지.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선물로 주면서 그런 거야. 여기 있는 거 너네 맘대로 해도 상관없는데, 선악과는 건들지 말아라. 츠키시마, 이거 무슨 얘긴지 알지? 이브는 꽤 똑똑한 인간이었던 거야. 시키는 대로 구부정하게 말 잘 듣는 녀석들 중엔 똑똑한 애들 별로 없잖아. 선악과란 게 대체 뭐길래, 싶다가 눈치를 좀 챘겠지. 저걸 먹으면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리고 웃기잖아. 에덴동산을 선물로 덜컥 줘놓고서 정작 거기서 자라는 걸 먹지 말라니까, 누군들 의심을 못하겠어. 이브가 한참 궁금해하던 와중에 뱀이 나타난 거지. 따 먹어보라고 유혹을 하지 않든? 이 뱀이라는 생물도 신이 만든 건데 말이야, 이브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모든 게 너무 모순적인 거야. 신이란 작자가 인간도 선악과도 만들고 뱀도 만들었는데, 정작 그것들의 양상은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으니까…… 그때 즈음 깨달은 거지. 인간이 평생 말이나 잘 듣고 살다 죽으라고 있는 존잰 아니구나. 그래서 과감하게 그걸 베어 먹었어. 그래서 이브는 이성과 지혜를 얻고 그 대가로 괴리와 낙담도 얻게 된다. 츠키시마, 적당히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가 허를 찔러왔다. 내내 그의 검지 지문이 진하게 묻었을 뒷목이 절절하게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에 선명한 잇자국이 났을 것이다. 선배가 검지로 곧추 세워 내 뒷덜미에 원을 그렸다. 앞과 뒤로 이야기의 흔적들이 지그시 남는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자는 쾌차 후 복귀할 것이고, 그는 다시 주전에서 내려올 것이며, 또 괜찮단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를 누빌 것이다. 그리고 제일 괜찮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은 바로 내가 되지 않겠는가. 적당히 살아가는 내게 그와의 관계에서 남는 것은 이런 종류의 불편함. 붙잡고 놓지 못할 어중간한 마음들.

 

결국 이것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