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곳 앞에 비스듬히 섰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팔 분 정도 남아있다. 그 정도면 무언가 관찰하고 사려하기에는 꽤 넉넉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밀착해본다. 유심히 보고 있으면 자그만 변화를 하나라도 더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일이 몇 번 거듭되면 더 이상 우연으로 넘길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 의심을 견고한 믿음으로 전복시키기 위한 중첩의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직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이건 확실해. 인형의 입술이 어제와 미묘하게 다르다.
주상복합건물 맞은편에 위치한 가게는 겉보기에 협소하고 자그만 크기와는 달리 두툼한 유리로 된 진열장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면 꽤 이것저것 자리잡을 만큼 넉넉했다. 체인점 따로 없이 이 동네에는 거의 유일한 인형가게이지만 질 좋은 마네킹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목재와 플라스틱, 철심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공구가게로도 이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도보 측에 바짝 붙은 강화유리 진열장에는 크기가 거의 사람만한 구제관절인형들이 받침대에 의존하여 서있었다. 가장 질 좋은 것들이 앞세워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안쪽에는 플라스틱 마네킹이 대부분이었지만 도보 측에 전시되는 것은 철심과 파이프를 이어 만들고 위에 매끄러운 목재 피부를 덮은 인형들로, 관절 마디마디가 세세하게 조형되어 작은 이음쇠와 나사들로 연결되어있었다. 무광의 살구빛으로 페인트칠이 된 인형들은 사흘에서 나흘 간격으로 다른 갈아입는다. 개장이 평소보다 늦을 때에는 나신으로 오도카니 서있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은 이목구비도 오밀조밀 조각되었다. 두상을 덮은 머리털은 직접 어루만져보지 않아도 보드랍다. 윤기가 흐르는 것이 인모人毛를 쓴 게 틀림없다. 인조모를 사용한 좀 더 저렴한 인형들은 가게 안쪽에 비치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두 달 전에 가구회사의 마케팅부서에 취직을 하고 인근으로 이사를 한 이레 줄곧 맞은편 가게의 인형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 안목이 비켜나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고유의 밝은 잿빛 인모가 사용된, 진열장 한가운데에 지지대를 딛고 선 인형이었다. 다른 인형들에 비해 광대가 낮고 턱이 더 갸름했다. 눈가에는 조그만 눈물점이 찍혔다. 이목구비는 수작업으로 그리고 색을 채운다고 한다. 아직 가게를 직접 방문할 용기가 나질 않아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안켠에 있는 쪽방에서는 종일 이 채색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촉이 얇은 수성펜으로 꼼꼼하게 밑바탕을 그려놓고 물감으로 덮는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코팅을 해서 칠이 벗겨지지 않도록 보존한다고 했다. 채도 낮은 연갈색으로 채운 인형의 두 눈에는 똑같은 크기의 동공이 또렷하게 찍혀있어 형형해 보이기까지 했다. 테두리는 혈색이 도는 살구색, 안쪽으로 기울수록 짙은 주색이 도는 생기 어린 입술은 어제 분명히,
타십니까?
아, 예! 예!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허겁지겁 올라타 발권기에서 표를 뽑았다. 정말 선불교통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나.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출근으로 혼잡한 시간대인 만큼 남은 좌석이 없다. 천장에 붙박인 손잡이를 쥐었다. 자,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러니까 인형, 그래, 그것의 입술은 어제 분명히 밋밋한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 묘하기까지 한 표정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일자로 다문 입술이었을 것이다. 뺨엔 불그스름하게 홍조까지 비벼놓고 정작 입술을 굳게 다물려 놓아서 야릇한 인상이 되었다. 허나 방금 전에 본 것은 어땠더라. 어제완 또 다르게 기이한 인상. 무색의 손이 척추를 바짝 쥔 것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장담컨대 어제까지만 해도 수평이던 입꼬리는 가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입술의 양쪽 끝단을 귓불에 좀 더 가까이, 아주 조심스럽게 당겨놓은 듯이 빙긋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펜으로 그리고 붓으로 칠해서 벗겨지지 않도록 코팅까지 했다는 입술이.
에에, 사와무라 씨가 잘못 본 거 아닐까.
두 달 전부터 그랬다니까요.
회사가 많이 힘들지……
그게 아니라구요.
아니면 뭐, 얼굴을 갈아 끼운다든가 하는 게 아닐까? 구제관절인형이라며. 그러면 언제든 분해할 수 있잖아.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마다 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래도 버스 기다리면서 멍 때리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낫네! 그가 갈퀴 같은 손으로 내 등을 몇 번 뚜덕거렸다. 일리는 있지만 뭔가…… 속이 죄 개운해지도록 옳다구나 싶은 답은 아니다. 숙취에 절여진 것처럼 아직 두가 지끈거린다. 요즘은 일을 하다가도 간혹 그것에 대한 생각들로 골똘해져 상사에게 전에 없던 꾸중을 듣기 일쑤였으니, 인형에게 정기를 쪽쪽 빨아 먹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자 방석에 궁둥이를 붙이고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어도 아침에 보았던 방긋한 입술은 뇌리에서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의 미약한 변화를 위해 새 얼굴을 그려 끼워 넣는다고? 그것도 값비싼 전시용 목재인형에다가 말이지. 그렇다면 이 가게 주인은 아주 비효율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최근에는 일몰이 더 앞당겨졌다. 겨울이 깊어가는 탓에 이전에는 일곱 시 즈음 지상을 삼키던 어스름이 여섯 시를 웃도는 시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일지를 쓰고 퇴근카드를 찍은 후에 부서 건물을 나왔더니 벌써 하늘 한가운데가 은홍빛이었다.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서성거리며 버스를 기다릴 동안은 어둔 쪽빛이 하늘을 스멀스멀 잡아먹어, 어느 새 수평선만이 자색광으로 붉어있었다. 혈색 좋은 손바닥이 푸르딩딩한 그림자에 잠겼으니 머잖아 이대로 어두워질 것이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타 마침 운 좋게 눈앞에 자리한 빈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섯 정거장을 지나쳐 내리면 바로 가게 앞일 것이다. 거긴 내가 출근을 할 때 개장을 해서 오후 아홉 시에 폐장을 한다. 하차를 하고 진열장 앞에 서면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옅은 어둠에 잠긴 도보를 보는 인형의 그늘진 얼굴을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땐 거리가 훨씬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군데군데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밝았다. 협소한 골목 귀퉁이를 차지한 쓰레기통이 덜컹거렸다. 길고양이들이 훌쩍 올라타고 발로 차는 소리다. 나는 서류가방을 고쳐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점보다는 조그만 의류매장과 서점, 방물가게가 늘어진 거리다 보니 이 시간에 부쩍 한산했다. 나는 주춤거리며 인형가게의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가게 뒤켠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강한 역광을 쪼이는 인형의 얼굴이 시커맸다. 나는 좀 더 고개를 길게 빼어 인형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몇 보를 두고 떨어진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비친 입술선이 아주 유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침과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 햇빛으로 투명했던 피부가 잔잔한 어둠 속에서 창백한 빛을 띠었다는 것밖에는. 나는 다시 턱을 당기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광대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늘을 헤쳐보았다. 한참 눈을 끔벅이다, 이내 가느다랗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빛이 다 지고 난 탓인지 어딘가 또 기묘하게 달라 보이는 낯이다. 인형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머리를 싸매었다. 뭐랄까,
동공이 좀 더 커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화살처럼 머리를 스치자마자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단정한 자세로 서있는 인형의 전신을 훑었다. 잘못 본 것일까? 혀 밑 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좁은 보폭으로 다시금 다가갔다. 고개를 비스듬히 구부려 살펴보았다. 기억하기로는 오늘 아침, 연갈색의 홍채가 좀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부쩍 줄어든 빛의 양에 홍채가 이완하여 동공이 커지기라도 한 듯 더 뚜렷하고 큼지막한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뒷목이 선뜩해져 등을 홱 돌렸다. 부리나케 횡단보도 앞으로 뛰어가 양복재킷 앞섶을 움켜쥐었다. 주먹 안에서 단추가 매달린 옷접이 잔뜩 우그러졌다. 신호가 바뀌었을 때 도망치듯 횡단보도를 내달렸다. 뒤통수로 오롯한 시선이 바싹 따라오는 기분에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다리를 움직였다. 유리문을 온몸으로 밀고 쏟아지듯 들어가 로비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서야 겨우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스크 쪽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시던 경비원이 나를 곁눈질로 흘금거렸다. 마침내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벽에 기대자 절로 얼굴에 오른 손바닥이 마른 세수를 했다.
「뭐야, 무섭다 그거.」
아무도 안 믿으니까 진짜 내가 미친 건가 싶고.
「가게는 들어가봤어?」
아직.
「나 같으면 쳐다볼 엄두도 못 낼 거야. 애초에 인형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고…… 귀신이 들린 거면 어떡해.」
하긴 아사히 너 예전부터 귀신엔 질색을 했었지.
「팔다리가 달린 사람 형상의 인형은 영혼을 담기에 좋은 몸이래. 그래서 막 사람처럼 움직인다고…… 이건 괴담이 아니고, 진짜로! 예전에 센다이 살 때 하야토 병을 고쳤던 무당 기억나지? 그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처럼. 혹은 진짜 사람. 거기까지 사고가 미치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사람을 인형처럼 꾸며 파는 가게라든가, 각각 다른 사람들의 신체부위를 조합해서 인형을 만들어놓고 내다 파는 가게에 관한 괴담은 어릴 때 종종 들어왔었다. 나는 아직도 센다이 무당에 대한 맹신으로 줄줄 늘어지는 아사히의 이야기를 끊어먹었다. 야, 야, 있잖아. 그거 혹시 진짜 사람 아닐까? 너무해, 하고 중얼거리던 아사히는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너무 멀리 갔나. 걔는 한참을 답이 없더니 내가 맘으로만 잘근잘근 씹던 말을 제가 대신 해주었다.
「……그건 좀 멀리 간 거 같은데……」
그런가.
「으응.」
근데 귀신 들렸다는 네 얘기도 많이 멀리 갔어.
「다이치, 너무해!」
나는 통화를 끝내고 천장에 매단 커튼을 젖혔다. 바로 맞은편의 가게라 창문으로 보면 도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비스듬한 시야로는 건물의 옥상 꼭지까지가 한계라, 처마 밑으로 오목하게 굽어있는 진열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뚫어 볼 수 없는 이 교묘한 사각지대를 있는 힘껏 응시하며 지그시 상상해본다. 지금쯤 저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깨끗이 닦은 창문에 부옇게 지문자국이 나는 것도 잊고 손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에 코를 한참 붙여놓고 진열장 위로 드리워진 검은 처마를 묵묵히 구경했다.
문득 가게 전방의 보도를 밝히고 있던 빛이 껌뻑 사라졌다. 나는 창을 밀어낼 듯 이마를 댄 채 그 광경을 주시했다. 퇴근 후 바로 욕실에 뛰어들어 감은 머리가 체 마르지 않아 창가에 물기가 맺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의 정문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 문고리를 잠그고, 자물쇠를 둘러 한 번 더 닫아건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찾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으니 폐장시간이구나. 가게에서 새어 나오던 노르스름한 불빛도 꺼지고 없다. 몇 시간이 더 지나면 간간히 저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길 것이고, 진열장에 선 인형들은 저들끼리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꼭 그맘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동안 저 좁다란 가게에서 복작복작, 저들끼리만의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는지.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티셔츠 끝단을 쥐었다.
참을 수 없이 궁금하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벽녘이 밝기 전에 살그머니 내려가 전봇대 뒤에 쭈그려 우스꽝스러운 꼴로 정찰한다고 해도 결국 동이 틀 때까지, 주인이 돌아와 개장 준비를 할 때까지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회사동료들의 말마따나 내가 여태 헛것을 본 걸 가지고 두 달 동안 헛수고를 했다는 사실, 취업 스트레스의 후유증에선지 무슨 이유에선지 대단한 망상을 해왔다는 사실이나 깨닫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래도 확인하지 않고 다시 몇 날 며칠을 덜 마른 빨래 개듯 찝찝한 마음으로 순환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찬찬한 걸음으로 소파로 가 앉는다. 양말을 신고 리모컨을 주워 티브이를 튼다. 채널을 돌려보니 잘 시청하지 않는 방송사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때울 만한 예능 프로그램의 심야 재방송 특선을 방송해주고 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올까 하다가 고개를 젓고 탄산음료로 마음을 바꾸었다. 고작 맥주 한 캔에 눈이 풀릴 정도로 알코올에 취약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맨정신에 가까우면 좋을 것이다.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사이다 한 캔을 땄다. 따가운 탄산이 목구멍을 씻었다.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은 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다 여겨왔던 것에 대해 사뭇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예로부터 인체의 형상을 한 인형에는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설화가 있었죠.
맞아요,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도 하니까.
그런데 그게 설화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죠. 우리가 왜, 귀신에 쓰인다고 하는 건 요즘 쉽게 납득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귀신이 쓰이는 거.
미령과 과학을 접목시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요…… 일단 우리는 그렇게 믿으니까요. 우리 몸을 움직이게끔 하는 건 영혼이 아닌 뇌와, 그 명령에 직결된 근섬유라든지……
그러니까 인형 같은 것에 영혼이 깃들 수는 있어도, 그래서 무언가를 사려하고 사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움직이거나 표정을 짓거나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에요. 무당들도 자주 그렇게 주장해왔지요.
결국 이것은 인체의 영역인 것이군요.
그렇죠. 인간人間의 영역이겠지요.
아, 세상에.
눈을 막 떴을 때 반사적으로 깨달은 것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등받이 위로 고개를 푹 젖혀놓고는 두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머리를 번쩍 일으켰다. 예능은 끝난 지 한참 된 것인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배경에 깔린 성우의 목소리가 귀에 편안하게 날아들었다. 잠이 쏟아질 만도 했어. 화면의 형형한 불빛에 얼핏 벽시계가 비쳤다. 새벽 한 시. 나는 쿠션에서 궁둥이를 벌떡 떼어 일어났다. 허둥지둥 커튼을 도로 젖히고 유리창에 이마를 붙였다. 채도 없는 어둠에 잠긴 거리에는 승용차 하나 지나다니질 않았다. 도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나는 뒷걸음질로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패딩을 끌어내렸다.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는 부풀어진 몸집에 뒤뚱거리며 운동화를 내다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는 핸드폰을 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엇 하나라도 이상한 감이 있으면 사진을 찍을 요량이었다.
복도의 백열등은 밝다. 몇 층 되지 않는 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기에는 눈에 부담스럽게 띄어 비상구를 선택했다. 정문에 바짝 붙은 비상구 계단난간을 몇 번 돌아 내려오니, 로비의 경비원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가를 훔치며 슬쩍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나도 태연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유유히 로비를 빠져 나왔다. 햇빛이 더 없는 겨울밤의 공기가 피부를 후볐다. 두툼한 패딩을 입었음에도 미세한 틈을 한기가 껴안았다. 보도블록을 밟고 서니 차도를 가운데 두고 맞은편 도보 측에 컴컴한 어둠이 내리 앉은 인형가게가 시야를 메웠다. 횡단보도 앞에 쭈뼛대며 섰고, 보행자신호등은 아직 적신호를 비추고 있지만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횡단보도를 건너도 될 것 같았다. 쫓기는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차도를 가로질렀다. 높다란 가로등 불빛의 파장이 부연 젖빛으로 공중에 퍼졌다. 먹칠을 한 듯 시커먼 진열장에 희미한 빛이 뚝뚝 흘렀다. 인형이 멀뚱히 서있다.
잿빛머리의 인형은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가게주인이 퇴근 전에 옷을 갈아 입힌 모양인지, 아까는 프랑스식 외투와 실크자수가 놓인 복대를 착용하고 니삭스와 반질반질한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래로 떨어질수록 자줏빛이 선명해지는 전통 하카마를 입었다. 머리엔 생화 장식을 꽂았는데, 기다란 속눈썹이나 달떡 같은 얼굴에 잘 어울렸다. 침침한 빛 속에 배색으로 왜곡된 홍채가 살아있는 듯 형형했다. 엷은 피부 밑에 실핏줄이 잠들어있는 듯 불그스름한 입술이나 보얀 피부를 보면 엄청난 수작업을 요했을 것이 틀림없다. 목재인형임에도 어루만지면 내 손바닥과 같은 살성을 가진 살갗이 부드럽게 달라붙어올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썹을 치켜떴다. 배꼽에 정갈하게 모은 손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열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을 끔벅이지도 못하고 화한 기운이 안구 전면에 끼쳐올 때까지 부릅뜬 채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눈을 힘주어 감았다 도로 슬그머니 떠보았다. 머릿속이 진창으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구제관절인형이 아니라 마네킹이었던가?
……구제관절 아니었나……?
두 달 동안 봐온 게 헛것이 아니라면 분명 진열장에 배치된 인형들은 죄 구제관절인데. 그래서 팔뚝과, 어깨와, 무릎 같은 곳은 각자 다른 두 토막에 나사를 조여 이음쇠를 만들어놓았다. 팔꿈치가 완성되는 지점에서 팔목과 팔뚝이 본연 분리되어있는 것, 손가락도 마디마디 짧은 나무토막을 이음쇠에 연결하여 구부릴 수 있게 만든 것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확인해왔건만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배 위에 애매하게 깍지를 낀 두 손은 상아석고처럼 본래 그 모양으로 빚어진 듯 분리된 마디가 보이지 않았다. 갈래갈래 뻗은 손금과 함께, 저 스스로 맞잡은 곳에 옴폭 파인 살갗. 목재를 반질반질하게 갈아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고 코팅을 했다고 하기에는 피부가 섬유질의 피막으로 덮인 실리콘으로 감싼 듯 보드라워 보이잖은가. 나는 미간을 당겨 한껏 구겼다. 아무래도 이상해. 하카마의 소매를 걷어보면 팔뚝조차 이음접이 사라지고 없을 것 같다. 만약 내일 아침, 개장을 하기 전에 다시 진열장 앞을 찾아왔을 때 구제관절인형으로 돌아가 있다면 인형의 기이한 정체를 밝힐 확실할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꽁꽁 언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카메라 어플을 누르는 엄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렌즈를 통해 보아도 매끈하게 빚어진 손이다. 꼭 쥐면 온기가 녹아날 것 같다. 촬영버튼을 누르자 찰칵, 정적을 부수는 셔터음이 짧게 터져 어깨를 떨었다. 황급히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도로 구겨 넣었다. 싸늘한 공기에도 후드 안쪽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한숨을 길게 뽑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온몸이 살얼음으로 뒤덮였다. 아직 주머니에 웅크린 손등 옆으로 애매하게 저 혼자 빠져 나오던 엄지도 패딩 나일론 위에 우뚝 멎었다.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칼바람에 건조한 안구가 한 층 더 뻑뻑이 아려오자 다급히 올라온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수근은 꿈쩍도 않으니 팔을 들어 눈물을 닦을 길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막처럼 시계를 그득 가렸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걷힌 시야로 인형의 얼굴이 다시금 드러났다. 연갈색의 홍채, 그것의 면적은 좀 더 좁혀졌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거든. 입꼬리는 귀에 닿도록 활짝, 꽃잎으로 물을 들인 것 같은 윗입술 아래로는 가지런한 앞니의 일련. 인형이 내게 환하게, 저 젖빛 화광만큼이나 은은하게 웃어주었거든. 위화 없이 천천하고 자연스러운 미소.
나는 바로 기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꼿꼿하게 굳은 몸에서 다리가 삐걱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몇 걸음을 물러나다 조화롭지 않게 튀어나온 보도블록 모서리에 발을 헛디뎠다. 다행히 아주 고꾸라지기 전에 바닥을 짚었다. 인형은 계속해서 웃는 채였다. 손바닥의 엷은 피부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는지 미미하게 쓰라렸지만 나는 허둥지둥 블록을 딛고 일어나 내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가 빠지도록.
영혼이 깃든 인형의 설화에서 뻗어 나온 괴담이 있죠. 제가 보기에는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요.
그게 뭐죠?
이건, 오히려 반대에요. 이렇게 말해볼까요? 인형에 영혼이 깃드는 걸 인형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 말이죠.
그럼 이번 것은 사람이 인형이 되는 것이겠군요.
그런 셈이죠. 인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었더라, 라는……
다음날이었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신발장 앞에 기대어 앉아 밤을 새었다. 오묘한 빛깔의 서광을 보고 나서야 밤이 꼬박 기운 것을 알았다. 나는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눌렀다. 매끈한 손. 이렇게 따로 놓고 보니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의 것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장딴지가 찡하게 저렸다. 과연 내가 간밤에 본 것은 헛것이나, 망상에서 비롯된 환영 따위가 아니었을까. 가슴이 섬뜩하게 뛰기 시작했지만 용기를 내어 현관문을 열었다. 날은 밝았고 개장시간은 빠듯하게 십 분 정도가 남았다. 진열장에 멀뚱히 서있을 인형의 손이 여전히 매끄럽다면, 얼굴이 방싯 웃고 있다면 내가 대단한 착각을 한 것으로 치고 이 허튼 짓을 당장에 그만두자. 그렇게 다짐하고는 다시 도보로 나왔다.
머뭇거리며 진열장 앞에 섰을 때, 나는 허파 가득 채웠던 공기를 기다랗게 흘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구름 같은 입김이 얼굴을 스쳤다. 마디마디 끊어진 관절, 그 사이를 탄탄하게 조인 이음쇠와 나사의 향연. 반질반질하게 다듬어 코팅을 한 목재 피부, 밋밋한 무표정의 입술, 뚜렷한 연갈색 홍채와 가운데 점처럼 찍힌 동그란 동공. 어제의 일은 마치 꿈과 같다. 하지만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이 꿈이 아니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쇠꾸러미를 든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찢어진 눈으로 나를 진득이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습니까?
……
……
가게 구경 좀 하려고요.
주인은 문을 열어주고는 쪽방 문 앞에 세워두었던 목재부터 안아 옮겼다. 나는 그를 힐금거리고는 진열장 가까이 다가갔다.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얼굴만 보아왔던 인형의 오롯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분주한 쪽방을 곁눈질하고 슬그머니 인형의 소매를 거둬보았다. 팔꿈치 역시 스프링과 나사가 연결되어있었다. 팔목을 덥석 쥐어보았다. 역시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차디찬 목재였다. 일순간 팔등에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나는 그걸 벅벅 긁어 한기를 몰아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이질감이라는 것이 불쑥 공기에 섞여 날았다. 주인은 쪽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 옆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목례를 하고 가게를 빠져 나왔다. 다시 밖으로 나와 두툼한 강화유리 한 겹을 두고 보는 인형은 발그레한 뺨과 어울리지 않게 무감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른 아침산책을 시작한 사람들이 도보에 슬금슬금 모이기까지, 나는 한참 발을 떼지 못하고 인형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였다. 나는 고민 끝에 텅 빈 채 묵혀두었던 오래된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간밤에 찍은 인형의 사진과 함께 날짜를 적었다. 키보드 앞에서 몇 번이고 머뭇거렸다. 마음먹고 차분하게 쓰기로 한 관찰일지, 였지만 어째선가 그는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이것은 아무래도 인간人間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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