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토 코타로는 이전부터 일관적으로 귀찮은 축에 속했다. 기운이 넘치면 넘치는 대로, 풀이 죽으면 죽는 대로 줄기차게 사람을 성가시게 했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빌려 말하자면 주변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손이 많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맴도는 이들이 많았으니 그러한 성가심이 오히려 코타로에게 끈끈하게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더 깊은 것은 모르지. 이것은 코노하의 감상에 불과했다.

 

일학년 때 이미 주전으로 발탁되었던 코타로를 기억한다. 코노하 아키노리 역시 몇 번의 연습경기 이후 일찍이 주전이 되었다. 당시 부원들 중에는 삼학년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그저 일 년 정도의 경험이 좀 더 풍부한 게 전부였던 선배들은 떼로 들어온 일학년들에 애를 먹었다. 특히 코타로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때 그의 목줄을 잡았던 건 다름아닌 코노하였다. 코타로와 같은 포지션이기도 했지만 워낙 처세에 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꼭 그런 것만이 그가 코타로를 떠맡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두 해라는 시간보다도 훨씬 까마득하게 의문으로 남았다. 그만큼 당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코타로와 코노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나니 겨울 이후에 찾아온 봄만큼이나 낯설어졌다.

 

예정보다 늦게 끝났지, 오늘?

힘들어 죽겠어요, 엉엉.

덜 한다고 덜 힘든 것도 아니잖냐.

…… 보쿠토 얘는 그새 어디 갔지.

그냥 집에 가서 씻는다고 아까 아카아시랑 먼저 하교하더라.

 

사루쿠이는 대답을 마치고 등에 메었던 가방을 가슴으로 끌어 야키소바빵을 꺼냈다. 포장지를 뜯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걸 다 해치울 때까지는 쪽지시험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고, 그날 유키에가 점심시간에 오므라이스를 두 그릇이나 해치웠던 것을 이야기하며 낄낄댔다. 코노하는 어깨를 으쓱대며 간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수평선이 뺨처럼 붉어질 즈음에 그들은 건너편 도보에서 익숙한 주택을 지나쳤다. 일찍이 하교를 했다던 코타로가 떠올라 코노하는 문득 발걸음이 멎었다. 두어 걸음이 앞선 사루쿠이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거긴 왜 보냐? 그의 외침에 코노하는 얼버무렸다. 보쿠토 샤워하는 거 구경. 그게 거기서도 보여……? 보일 리가 있냐? 히죽 웃는 코노하의 민둥한 낯을 보며 사루쿠이는 이맛살을 접었다. 그는 빵을 다 먹고 빈 봉지를 버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침묵으로 빈 짧은 간극 이후에 그가 골똘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보쿠토 걔는 너랑 하교를 같이 했었지? 코노하는 보도블록에 밑창을 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이 같으니까.

 

코노하는 좀 더 먼 곳에 살았다. 하굣길에 코타로는 제 집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들은 그림자가 좀 더 길어질 때까지 걸으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멈춰 서면 그제야 코타로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걸음을 멈출 즈음이 되면 코노하는 제가 매일 여닫는 대문 앞에 서서 코타로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얕은 과거의 일이 된 것에 두 사람 어느 한 쪽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의심이란 걸 품을 만큼 관계의 간극이 넓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혹 이질감을 느꼈다고 해도 드러내놓을 정도의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나빠진 건 없어. 코노하는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나빠질 것도 없었지…… 코타로도 그렇게 여길 터였다. 사소한 건 따져 묻지 말자. 째째해지니까.

 

이전부터 손이 많이 가던 코타로는 코노하의 손을 탔다. 코타로에겐 좀처럼 적당함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의 극적인 면들이 적당함으로 중화될 수 있는 곳에 살뜰하게 분산시키는 일을 코노하가 주로 자청하곤 했다. 떠맡은 일도 아니거니와 나서서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 해가 흐르고 후배가 들어왔다. 세터일 거야, 짐짓 생각했는데 정말로 세터였다. 그에게는 손마디를 꺾고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코노하는 어째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한숨 놓겠구나. 코타로는 한창 부활동에 재미를 보며 푹 빠져있었고, 후배는 그런 그에게 꽤 만족스러운 스파이크를 칠 수 있는 길을 터줄 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삼학년이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되었을 때, 후배는 코타로에게 토스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코노하는 더 말할 게 없다고 말한다.

 

손기술이 좋은 후배의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케이지는 처세에도 능했지만 그보다도 꼼꼼한 구석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나이답지 않게 예의가 바르고 생각이 깊었으나 고리타분하거나 원칙주의자 같은 면은 없었다. 펄펄 끓어 냄비 밖으로 넘치기 시작하려는 하얀 거품 같은 코타로에게는 한 컵의 미지근한 정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전부터 코노하가 입이 아프도록 말한 중화에는 꼭 알맞았다. 이제는 케이지의 손을 타게 된 코타로를 보며 부원들이 장난 삼아 계승, 이라고 하는 것에 코노하는 반은 동의했으나 반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자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했고 거창한 제목을 달만한 벼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리어 이것이다. 여태 그래왔듯이 중화를 찾았을 뿐인데 그게 하필 사람이더라. 잠깐 머물다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물연이라는 말은 없어도 인연이라는 말은 있듯이.

 

.

……

주장님이 너무 잘생겼어?

, 존나 키스하고 싶어.

우웩.

 

그렇지, 인연이라는 말은 있듯이. 코노하는 입을 찢어 웃었다. 코타로가 으레 지어 전염이 된 표정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중화인가. 빤한 시선을 포장시키는 너른 웃음이나, 그득 찌푸린 얼굴이나. 이전부터 코타로는 그런 농담을 자주 해왔고, 코노하는 그에 응하는 더욱 찐득한 농담을 몇 배는 더 해왔다. 얼핏 스스럼없음을 호소하기 위해 과격하게 뚫어놓았던 경계가 이제 와 묽어져 돌아보니 손 쓸 수도 없이 너저분하더라는 이야기. 마음껏 후비고 찢어놓아 실밥이 가닥가닥 늘어진 이것을 이제 어찌 할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듯 마주보고 넋을 잃었다. 우웩, 토악질을 하는 시늉을 하던 코타로는 가슴을 문지르며 코노하의 뒷목을 흘깃거렸다. 키스하고 싶어, 가느다란 눈을 하고 능청스레 대꾸하던 코노하 때문에 하마터면 설득 당할 뻔했다. 웃으며 입술을 부딪칠 뻔했다. 우리의 등 뒤에 어느 새 남은, 더럽게 짓이겨진 경계. 코타로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것은 언제까지 인연일 것인가.

 

코노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 문을 닫고 속옷을 내렸다. 수압이 강한 샤워기를 들고 정수리에 그득 쌓인 생각들을 씻어낼 작정이었는데, 고작해야 머리칼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그는 대충 샤워를 마친 뒤 수건을 목에 두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코타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부하냐?」 잠시 후에 예상과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공부를 왜 해! 미쳤어?」 그는 오기로 책장에 꽂아둔 문제집을 몇 권 꺼냈다. 펼치고 나니 금방 풀 마음이 사라졌지만. 방이 인큐베이터처럼 좁다랗게 느껴져 창문을 젖혔다. 샤프가 깔짝대는 소리를 가르고 아득히 차도를 긋는 공기의 움직임이 들려왔다. 문득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코타로였다.

 

.

「심심해.

그럼 공부하세요.

「코노하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지……?

됐고, 목소리가 왜 그래.

「누워있어서.

누워서 뭐 하는데.

「생각.

……쓸데 있는 생각이냐?

「네 생각?

완전 쓸데 있어.

 

코노하는 유쾌하게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왠지 모르게 눈이 뻑뻑해져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노하는 문제집을 덮고 침대에 꾸역꾸역 올랐다. 함께 막힌 목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했다. 이전부터 갈피 없는 통화를 오래도록 붙들고 있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점점 말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그 즈음에 코노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근데 너 안 졸리냐? 코타로도 부정 없이 하품을 하며 통화를 갈무리 지었다. 핸드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몸을 완전히 젖혔으나 말과는 달리 졸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코노하는 무늬 없는 밍밍한 천장을 오롯이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말이 바닥나기도 하는구나.

 

*

 

코타로는 다정하면 바닥까지 다정해지는 사람이었다. 우악스러운 유쾌함 밑에는 제 편을 받쳐주는 다정함이 초석처럼 깔려있었다. 아키노, 아키노. 지금은 유별나다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부원들 사이에 약속처럼 굳어진 코노하의 별칭은 다름아닌 코타로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는 스스로 애정을 담아 개조한 이름을 줄기차게 불러댔지만 해가 거듭되며 점차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묘한 일이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야금야금 갉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코노하라는 성씨가 되려 어색했으므로 어깨를 붙잡거나 등을 치는 것으로 부름을 대신했다.

 

코노하 씨! 케이지가 이름을 부르며 공을 보내주었을 때 그는 문득 코타로가 불러주곤 했던 별칭이 그리워졌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틸고무의 표피를 후려치는 손바닥에 평소보다 몇 배의 힘이 들어갔다. 제법 위력 좋은 스파이크를 날린 후에는 케이지로부터 멀리 에두른 칭찬이 이어졌다. 앞으로 코노하 씨한테 공을 좀 자주 보내야겠어요. 그러자 코타로가 머리털을 바짝 세우며 발을 굴렀다. 그럼 나는, 나는! 그러니까 보쿠토 씨도 선전해야지요. 연습하세요. 케이지는 딱 잘라 그를 끊어먹었다. 코노하는 스스로도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코타로의 입을 틀어막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학년이 되고 어느 순간까지 이 수평한 관계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일 터. 너 없을 땐 코노하가 고생을 많이 했지. 사루쿠이는 케이지가 이학년이 되어서야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케이지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고정된 시선으로 코노하의 뒤통수를 확대했다. 특수렌즈를 쓰지 않으면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도 않을 자그마한 물체를 관찰하듯이 아주 천천하게 조심스럽게. 그런 눈길이었다고, 적어도 사루쿠이는 주장한다.

 

자자, 아카아시! 스파이커가 연습을 하려면 세터가 필요하지 않겠어? 코타로는 케이지의 등을 떠밀다 말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잠시 주어진 쉬는 시간에 그새 소란스러워졌다. 코미와 사루쿠이가 팔을 얽어 가마를 만드는 것을, 와시오는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넓적다리 하나가 쑥 들어가도록 넓혀놓은 공간에 코노하를 강제로 태웠다. 엉거주춤 다리가 붙들린 채로 코미의 어깻죽지를 후려갈기다, 급기야는 와시오에게 손짓을 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코타로의 심연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버스 뒷좌석에서 멀미를 할 때처럼. 뭔가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짐짓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아직 고교생이고, 저런 장난들은 삼 년 전부터 줄곧 해온 것들, 익숙한 풍경인데 가슴이 뻐근했다. 토스 올려달라고 해놓고 뭐 하십니까? 케이지는 손마디를 풀며 코타로를 재촉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코노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짚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보쿠토 코타로와, 혹은 아카아시 케이지와. 찰나에 마주쳤으나 코노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코타로도 어영부영 허리를 숙여 네트 밑으로 넘어갔다.

 

진짜 봄고 예선이 얼마 안 남았네.

한 달? 한 달 맞나?

나 네 옷에 토해도 돼?

미쳤냐 진짜. 근데 전국은 우리 이학년 때도 가봤잖아?

 

코노하는 간만에 코타로와 함께 하교를 했다. 자율연습을 마치고 탈의실에 기어들어갔을 때는 그가 마침 세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턱 밑으로 수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닦아내지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너도 이제 집 가냐? 코타로가 그랬다.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체육관을 나왔을 때는 비로소 이런 일들이 지금은 아득히 떠나온 고향처럼 낯설다는 걸 알아챘다. 그런 감정들을 증명하듯이 엉뚱하게도 신호등을 앞에 두고 길을 잘못 들었다. 좁다란 골목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며 코노하는 얼마 남지 않은 예선 얘길 꺼냈다. 코타로는 그렇게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눈썹을 치켜 뜬 채로 입꼬리를 찢었다. 저건 일학년이었을 때부터 줄곧 지어오던 표정이다. 한때 코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긁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태연함이냐, 뻔뻔함이냐, 멍청함이냐, 도대체 무엇이냐. 어렴풋이 답에 근접하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감이었다. 물론 그것도 맞았다.

 

우리 부원들이 좀 강하잖냐? 어디 가서도 안 꿀려. 코타로는 말을 마치고 골목 끄트머리에 위치한 편의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드 먹자. 그는 지갑을 꺼내 흔들며 계단을 밟았다. 코노하는 코를 훌쩍이곤 문 앞에 그 뒤를 따르다 유리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일 년 전 예선을 앞두고 코타로는 사뭇 다른 말을 했던 것 같다. 날 믿어, 에이스잖아! 아주 미미한 변화들을 미리미리 주워담지 못하고 수북이 쌓인 고지서처럼 한꺼번에 훑으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쭈그려 앉아있으니 머잖아 계산을 마친 코타로가 하드 두 개를 덜렁덜렁 들고 나왔다. 그는 하드봉지로 코노하의 뺨을 찔렀다. , 차가워. 그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그걸 받아 들고는 포장지를 벗겼다. 두 사람은 혓바닥에서 하드를 녹이며 마저 도보를 걸었다.

 

시시콜콜한 화제로 돌려볼까 하는 노력들은 간단히 무산되었다. 배구로 만났기 때문일까, 이야기는 강화훈련과 봄고에서 맴돌았다. 어느새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코노하는 눈을 끔벅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대문 앞에서 코노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있잖아, 네 집 지나쳐온 거 같아. 어째 미안한 투였지만 코타로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몇 년 전에는 밥 먹듯이 있던 일. 석양을 우산 삼은 코타로의 뒷목이 붉어졌다. 하드를 다 먹고 남은 막대를 입에 문 채였다. , 그리고 난 너 믿으니까. 그는 코노하의 어깨를 밀며 걸음을 물렸다. 그런 말은 아무래도 너무해. 그는 대문에 선명한 지문을 남기며 고개를 숙였다. 코타로는 뒷걸음질로 그에게서 멀어지며, 그의 연한 머리칼 밑으로 귓불이 해 지는 하늘빛에 젖는 것을 보았다. 과연 하늘빛이었다.

 

차라리 확 비틀어졌다면 어땠을까. 코타로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부스 안에 우두커니 서서 골똘해졌다. 강한 수압이 그의 두피를 강타한 탓에 종일 고된 연습으로 기운이 쑥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속눈썹에 묵직하게 맺힌 물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수도를 잠그었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떨어내며 되뇐다. 차라리 아주 비틀어졌다면, 모두가 움찔할 만큼 뒤집어졌다면. 이런 건 뭐랄까, 아주 자그마한 블록 한 조각이 사라진 레고를 보는 기분이랄까. 못내 성가시지만 그 한 조각이 없어도 별다른 흠 없이 잘만 서있는 조형물을.

 

아아…… 싫다.

뭐가, 공부? 설마 배구가 싫진 않을 테고?

엄마 아들은 공부랑 배구 말고도 신경 쓸 게 많답니다!

여자친구?

아니……

그럼 그냥 친구?

 

어어 친구……, 코타로는 말끝을 잘근 씹었다. 머리가 다 마르자 주저 없이 베개에 뒤통수를 뉘였다. 국어 시간에 좀 더 집중할 걸 그랬어. 개운치 못한 맛, 달콤쌉싸하게 혓바닥을 도는 맛, 잘못 삼킨 생선가시처럼 위장을 날카롭게 긋는 무언가. 각각 다른 곳에서, 코타로와 코노하는 한숨지었다. 나는 내가…… 너에게 좀 더, 아주 조금 더 특별하길 바랐어. 결국은 이것이었다. 유치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짧게 웃었다.

 

코노하 씨한테 올릴게요. 며칠 후, 케이지는 부활이 끝나고서도 코트를 서성거리더니 공을 가지고 다가왔다. 코노하는 짙은 눈꺼풀을 느릿느릿 끔벅였다. ? , 코노하 씨요. 그들이 마주하고 선 거리만큼의 침묵이 마룻바닥을 기었다. 늘 쉴 새 없이 뼈마디를 정리하는 손이 공을 감싸 쥔 채로 가만히 복부 앞에 놓여있었다. 코노하는 이런 것에 그러마, 하고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제 자신이 잠시 싫었다. 그러나 이윽고 뒷목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보쿠토는?

……

……

코노하 씨도 스파이커잖아요.

?

예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스파이크 연습 안 하십니까?

 

아까 시뮬레이션도 했고, 본연습이라면 이미 두 시간 정도, 갖은 핑계가 떠올랐지만 코노하는 머쓱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코타로는 보이지 않아.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코트로 들어왔다. 올립니다. 케이지는 그가 왼편 끄트머리에 선 것을 확인하고 유키에에게 부탁을 했다. 유키에가 공을 던지자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케이지의 손끝에 닿았다. 코노하 씨! 케이지의 목소리로 제 이름이 불리는 건 아무래도 어설펐다. 마침 좋은 위치로 날아온 공을 후려쳤다. 내가 후려친다면 코타로는 찍어 누른다는 느낌이지. 아마 케이지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코노하는 그런 생각의 일련을 뽑아놓고 돌아보았으나 케이지의 낯은 읽어내지 못할 만큼 단정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토스를 더 칠 때마다 팔에 힘이 붙었다. 연달아 스파이크의 기회가 떨어진다는 건 상당한 체력소모를 유도하는 일이면서도 반비례적으로 온몸의 열을 돋구는 일이기도 했다. 에이스는 코타로니까, 코노하에게 좀처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맞았다. 이런 것도 계승일까요. 턱 밑에 고인 땀방울을 닦아내던 케이지가 무심코 중얼댔다. 묻는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투라서, 코노하는 그가 흘려놓은 말을 한 모금 정도 혀끝으로 맛보았을 뿐이었다. 대개는 코타로의 공을 올려오던 케이지가 자신의 타점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칭찬을 해주었더니 저는 세터고 코노하 씨는 우리 팀의 스파이컨데,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묵묵하게 되받아 쳤다. 문득 네트를 쳐둔 체육관 쇠문 너머로 코타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담 다 받았어, 아카아시! 그는 다리를 힘껏 휘저어 들어오다 땀에 젖은 코노하를 발견하고 문턱에서 멈춰 섰다. 그 역시 턱을 닦다 말고 코타로와 마주했다. 케이지는 네트 너머로 떨어진 공을 주워오며 대꾸했다. 오셨으면 몸 풀고 토스 칠 준비하세요. , , 그래, 코타로는 더듬대며 허둥지둥 가방을 내던지고 탈의실 문을 어깨로 밀었다. 코노하는 손을 털고 허리를 구부려 운동화 뒤축을 고쳐 신었다. 이제는 지켜보며 감탄할 시간이야. 아카아시 케이지만이 유도할 수 있는 보쿠토 코타로의 완벽한 스파이크를. 내가 세터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케이지가 코트 선을 밟아 나왔다. 그림자가 유하게 진 얼굴로 내려다보며 그랬다.

 

코노하 씨는 뭔가 계속 아쉬운 얼굴이네요.

?

……

반년만 있으면 졸업이니까? 하하하.

 

코타로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뭐야, 코노하도 연습하고 있었던 거냐구. 그가 얼띤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코노하는 입술을 내밀어 우스꽝스러운 낯을 만들었다. 그건 뭐냐, 뽀뽀? 코타로는 이맛살을 구기며 맞받아치고는 키트에서 새 공을 하나 꺼내왔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을 세며 코노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로 헐떡이던 호흡을 메웠다. 뒤축이 단정해진 운동화와 함께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이제 보쿠토 토스 올려줘. 케이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밀어내는 순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덤덤한 케이지의 목소리가 귓불을 잡아당겼다. 아쉬워요. 코노하는 눈썹을 치켜뜨고 돌아보았다. 알 듯 말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무어라 대답하지도, 반문하지도 못하고 입꼬리를 찢어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케이지는 혼잣말을 하는 투였다.

 

저도 아쉽습니다.

 

*

 

재미있는 사실 알려줄까. 우리 졸업하면 삼학년 주전은 아카아시뿐이야. 코노하가 느닷없이 꺼낸 말에 코타로는 제 옆에 늘어져있던 담벼락을 짚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 아카아시 어떡해! 그들은 다시 간만에 나란히 하교를 하던 중이었다. 코노하의 옅은 머리칼이 좀 더 짙게 얼룩져있었다. 걱정 마, 너 같은 후배만 안 들어오면 되거든요? 코노하는 코타로의 너른 등을 후려치며 볼멘소릴 했다. 너무하잖아! 팔을 꺾어 손바닥으로 등을 비비는 코타로의 왼손에는 샌드위치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코노하가 쏜 것이었다. 남은 빵 조각을 우물거리던 코타로가 잠깐의 침묵 끄트머리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키노.

……

……

.

너 진짜 대학 가?

그럼 안 가? 넌 뭐하게. 실업배구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니까…… 대학 가면, 더 이상 못 보나? 초석의 표면 같은 코타로의 목소리에 코노하는 잠시 발끝을 주춤거렸다. 걸음이 느려졌다. 평소엔 의심치도 않았던 것들이 스물스물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언젠가 깨끗이 씻은 머리에 도로 채워 넣었던 의문들과 비슷한 형상을 띤 언어들의 중추였다. 우리가 그만큼 특별한가. 이것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튀어 올랐다. 코노하는 붙어있던 입술을 겨우 떼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대학 좀 따로 간다고 못 보겠냐?

아니 그러니까,

너 맨날 강의 끝나면 학교 들러서 아카아시 찾아 삼만 리 하는 거 벌써 상상된다, .

나 지금 네 얘기 하고 있는데.

 

코타로는 오랜만에 맹물 같은 표정이었다. 활짝 웃는 게 아니면 마구 일그러뜨리는 애. 그런 애가 물 위를 부유하는 듯 가만한 낯을 하고 있었다. 파도가 친다. 두 사람은 그것을 느꼈다. 코노하의 귀 밑에 저무는 빛은 해 지는 하늘을 닮은 물빛. 아키노, 한 번 더 불러보자 그 색이 더욱 짙어졌다. 비추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서 체외로 고여내는 빛. 이 순간까지도 나름의 유치한 고민들을 실타래처럼 뭉쳐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내가 너에게 좀 더 특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좀 더. 비웃음 살 감정들이 두려워 그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관계는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 삼키듯 닥치는 대로 짙어져, 마침내 그것이 좀 더 정교한 무늬로 옅어지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진 것이라고. 두 사람은 마침내 골목의 허리에서 오도카니 멈췄다. 좀 더 분명하게 서로의 눈을 살폈다. 확실치 않은 것을 확인하는 시간은 괴로웠다.

 

밀물과 썰물은 몇 번이고 들이닥쳤다 빠져나가, 마침내 그들의 관계를 이만큼까지 깎아놓았다고. 코타로와 코노하가 기억하는 처음의 그것은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여서, 그 누구도 함부로 들기 어려운 것이라, 그것이 차라리 개운하고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침식의 시간을 거친 그것을 지금 들여다보니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조약돌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놓았다가 가끔 꺼내 보기에 좋은, 어루만지기에 좋은 것. 코타로가 문득 코노하의 팔목을 움켰다. 가느다란 뼈대를 그러잡은 손아귀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는 부드러이 빠졌다. 매끄러운 눈에 실과 실을 이은 듯 서로를 팽팽하게 마주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묻지 못할 유치한 의문들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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