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도 사토리는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뉴질랜드에서 일 년, 프랑스에서 이 년을 있었으니 자그마치 삼 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오사카에서 개최된다는 월드리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일본 국가대표이자 자신의 고교 동창이기도 한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으며, 심층적으로는 일전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국대 팀의 세터로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한때 이빨을 드러냈던 두 사람이 함께 코트를 누비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시라토리자와, 아오바죠사이의 배구부를 구성하고 있던 동창들에게 모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텐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보 촬영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을 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월 중순에 개최될 S&S 시즌 생로랑 컬렉션 런웨이 준비에 돌입하며 다소 바빠졌지만 이번만큼은 꼭 시간을 내서 경기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카토시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거기다 오이카와의 합류라니. 이건 세상에 다시 없을 조합이란 말이야. 경기만 보고 다음날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와카토시는 물론이고 다른 동창들에게도 귀국소식을 귀띔하지 않은 채였다. 본가에도 들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공항 근처 호텔의 싱글룸을 예약하려다가, 키티 (이름만 이렇지, 닥스훈트다. 텐도가 뉴질랜드에서 살 때 새끼를 분양 받아 키운 반려견이다)를 생각해 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호텔의 더블룸을 예약했다. 새벽 산책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키티는 기특하게도 공항을 벗어나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까지 하드켄넬 속 몸을 웅크리고 얌전히 잠을 청했다.

 

텐도는 호텔 입구에서 내리자마자 하드켄넬의 문을 열었다. 키티가 짧은 다리를 힘껏 버둥거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로비로 들어섰다. 카운터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모델로서는 꽤 좋지 않은 버릇이다. 소속 사장이 매번 활동수명을 위해서라도 고치라고 일침을 놓아도 다듬어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였다)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방은 이십삼 층, 조식뷔페는 아침 일곱 시에서 열 시까지 이층 식당에서, 체크아웃 시간은 열두 시까지.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키를 건네 받았다. 텐도 딴에는 그렇게 자세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자세한 사항은 벨맨이 방까지 안내하며 설명해줄 것이라 했다. 카운터 끄트머리의 선인장 분재에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키티의 하네스 끈을 잡아당기며 재촉할 즈음에, 그는 제 앞에 운반키트와 함께 나타난 벨맨을 발겨나곤 눈썹을 훤히 치켜떴다. 가만 보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일단 흔한 인상이 아니니까 말이지. 텐도 또한 흔한 인상은 아니었기에, 벨맨의 입꼬리가 잔뜩 우그러졌지만 그는 애써 밋밋한 인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텐도는 작은 네 다리를 발발거리는 닥스훈트를 안아 올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벨맨이 이십삼 층 버튼을 누르자 머잖아 엘리베이터 문 두 짝이 맞물리며 닫혔다. 텐도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조용하시지. 졸업한 지 이 년도 더 됐는데.

헤에, 벨맨이 말투가 영 그렇네. 카운터에 컴플레인 넣을까?

……

그렇지, 이래야 팁을 좀 주지.

 

텐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벨맨이 이빨을 와드득 갈았다. 캐리어와 하드켄넬을 실은 운반키트 기둥을 쥔 채 엘리베이터 전판대의 달라지는 숫자만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텐도는 그의 둥그런 뒤통수부터 발꿈치까지를 주욱 훑었다. 벨맨이라기보다는 벨보이 같은 인상이었다. 저 사나운 미간 덕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조금 길었다는 것만 빼면 예나 지금이나 외관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쿄타니 켄타로. 텐도의 기억이 맞는다면 벨보이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켄타로와는 아는 사이라기보다는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얄팍한 깊이의 관계였다. 텐도가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고교 이학년을 지내고 있었을 적이었고, 그것도 고작 당시 늦여름에 열렸던 인터하이 2회전에서였다. 그러니 그 해에 켄타로는 일학년이었다. 깨끗하게 밀어버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하게 새순처럼 듬성듬성 자라있던 머리카락과, 유독 여유가 없이 구기고 있던 미간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통제도 타협도 들어먹질 않는 고약한 성미 때문에 경기 중에도 아오바죠사이 측에서 불필요한 타임아웃을 몇 번 불렀었다. 텐도의 취향은 웬만해서는 함부로 넘겨짚지 않는다는 와카토시의 눈에도 특이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그는 이 점에서 몇 번 본 적 없는 켄타로에게 반해버렸다. 듣기로는 당시 삼학년들과 마찰을 빚고 임시로 퇴부를 했다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텐도가 삼학년이 되던 해의 봄에 개최된 예선에서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다시 코트에서 뛰고 있다는 소식을 스치듯 듣기는 하였으나 그 해 늦여름의 마지막 예선에서 대전 상대는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카라스노가 되었으므로 텐도에게 켄타로에 관한 기억은 까마득한 사 년 전이 끝이었다.

 

이렇게 볼 줄이야, 너무 신기한데.

카드키는 문고리 밑에 달린 인식기에 갖다 대면 자동으로 문 열리고, 여기 키홀더에 꽂아놓아야 불 들어오니까 알아서 하고…… 잃어버리면 이천 엔이니까 간수 잘하고.

투숙객한테 반말하는 벨보이는 처음 보네.

, 진짜……

직원 교육이 엉망이네. 카운터에 확실히 문의를 해봐야……

알았다고! …….

 

말 끄트머리에 조그만 경어를 매단 켄타로가 씩씩거리며 객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키트에서 캐리어와 하드켄넬을 내려 방 한가운데에 세워놓았다. 텐도는 문턱을 넘자마자 하네스 클립을 풀고 키티를 풀어놓았다. 이 납작한 닥스훈트는 네 발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방에 배치된 협탁과 화분, 장롱, 화장대 다리에 코를 처박고 킁킁대다 이내 켄타로의 곁을 맴돌며 어슬렁댔다. 그는 다리에 새끼줄이라도 묶인 듯 어쩔 줄을 모르며 움찔거렸다. 그 주인에 그 개구만! 켄타로가 벌게진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는 동안 텐도는 여유가 묻은 눈짓으로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는 이내 구김살 없는 이불이 빳빳하게 덮인 침대에 몸을 던져 앉았다. 탄성력 좋은 매트리스가 철렁, 흔들렸다.

 

이 개 좀 어떻게 해봐! !

안 돼, 하고 말해봐. 우리 키티 이래봬도 말 되게 잘 듣거든.

개 이름이 키티……

잘 어울리지?

……

켄타로 군 고교생 시절 별명이 광견이었다며? 우리 키티도 처음엔 많이 사나웠거든. 이렇게 보니까 켄타로 군 완전 키티네!

 

그게 뭔 개소리야, . 문법적으로도 요상스럽기 그지없는 존대를 억지로 짓이겨 뱉은 켄타로가 당당히 손바닥을 내밀고 팁을 요구했다. 이거 원, 카운터에 컴플레인을 넣어도 더할 나위 없이 불량스러운 태도였지만 텐도는 순순히 지갑을 열어 천 엔짜리 지폐를 그의 유니폼 단추 사이에 끼워주었다. 팁 치고는 상당한 액수였기 때문에, 켄타로는 금세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입을 다물었다. 머잖아 흥미를 잃고 침대로 올라온 닥스훈트가 텐도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는 개를 끌어안은 채 뒤로 나자빠져 누워서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내일 올라와서 나 깨워주기. 그러자 켄타로가 다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 내일 월차 써서 안 나오는데, . 뭐 하는데? 배구경기를 보러…… 그러자 텐도가 제 턱을 핥고 있던 닥스훈트를 베개 위에 넘겨놓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나도! 큰소리로 대답하자 켄타로의 이마가 더욱 뚜렷하게 구겨졌다.

 

텐도는 고교 동창을 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켄타로가 미묘하게 인중을 뒤틀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저도 비슷한 이유에서라고 되받아쳤다. 오이카와 토오루? 텐도가 오랜 이름을 들먹이자 그는 이등분으로 접은 천 엔 지폐가 들린 손을 내보이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별일이네. 그런 부류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정작 그런 부류에 함께 속하는 편이었던 텐도가 고개를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에 켄타로는 대화를 포기하고 그에게서 받은 팁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문간을 나서며 키트 바퀴를 한 번 걷어찼다. 텐도가 침대의 풋보드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키티 군! 켄타로는 대답을 않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정교하게 돌아가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는 키트를 질질 끌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한숨을 자았다. 지랄맞게 귀찮네…… 지배인이 들었다면 상스럽다고 펄쩍 뛰었을 어투로 욕지거릴 읊었다.

 

다음날이었다. 켄타로는 입장줄을 서기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가, 호텔 인근의 분수대 주변에서 닥스훈트를 산책시킨 뒤 줄에 합류한 텐도와 맞닥뜨렸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켄타로는 부러 모른 체하며 고개를 앞사람의 뒤통수에 빳빳이 고정시켰지만, 텐도가 하네스 줄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키티 군, 부지런하잖아! 도통 어울릴래야 어울리지를 않는 별칭 덕분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나 그 주변을 지나던 직장인들 몇몇이 두 사람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울러 발치에서 경쾌하게 다리를 놀리던 닥스훈트는 저를 부르는 줄 알고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앞발을 흔들었으니 가관이었다.

 

빌어먹을 키티 소리 좀 그만하지.

어어, 또 말투 봐.

지금은 업무 중 아니거든.

그렇네, 봐줄게.

 

텐도는 굳이 친구의 경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켄타로는 골치만 아파지게 오이카와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층 관중석의 난간에서 조금 떨어진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와중에 텐도는 캐러멜맛 팝콘을 한 봉지 샀다. 선수입장식에서 그들은 그새 키가 또 자란 와카토시와, 한층 더 강력해진 서브를 기대할 만큼 근육이 붙은 오이카와를 볼 수 있었다. 오이카와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최악이야하고 중얼거렸다. 저를 알아볼까 싶어 연신 팝콘봉지로 눈 밑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텐도는 와카토시의 스파이크가 시원하게 성공할 때마다 팝콘이 다 튀도록 봉지를 치우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던 켄타로는 양측이 범실을 낼 때마다 버럭버럭 야유를 하기 일쑤였다. 이러다 쫓겨나겠어, 키티 군. 결국 텐도가 그 망할 놈의 별칭으로 다시 한 번 창피를 주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느긋한 자세를 고수하던 텐도와 달리 켄타로는 다리를 꼬고 있다 급히 벌리고, 등을 한껏 젖혀 앉았다가 앞으로 숙이는 듯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으므로 관중석이 하나 둘 비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지쳐있었다. 처음엔 함성소리에 잔뜩 흥분에 혀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던 닥스훈트도 텐도의 품에 얌전히 안겨 눈을 끔벅였다. 그들은 터덜터덜 일어나 바지춤을 털었다. 의외로 와카토시 군과 오이카와의 합이 좋았어, 와카토시는 그새 더 무시무시해졌는걸, 오이카와는 더 짜증나는 녀석이 되었고! 이런저런 주석을 다는 텐도 옆에서 켄타로는 남은 콜라를 빨며 침묵을 유지했다. 텐도는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중얼댔다. 가자마자 체크아웃 해야 해.

 

비행기는 오늘 밤에 뜨는데 말이지. 호텔에 짐 맡아달라고 하면 맡아주나?

카운터에 얘기하면 알아서 해줄걸.

호오, 그리고 키티 군은 오늘 월차를 냈고 말이지?

그거랑 이게 뭔 상관인데.

뭔 상관이긴, 비행기 뜰 때까지 나랑 놀아줘야지.

그러려고 낸 월차 아니거든?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텐도는 비죽비죽 웃으며 닥스훈트를 그의 품에 덜컥 안겼다. 켄타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열을 올리다가, 돌연 제 품에 맡겨진 닥스훈트 때문에 소스라치게 어깨를 떨었다. 그렇잖아도 주인을 닮아 사람을 가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이 강아지는 켄타로의 품에 안기자마자 혀를 내밀어 그의 턱을 핥았다. 이 복슬복슬한 짐승을 어디 내팽개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두 손 가득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로 악을 쓰는 켄타로를 두고, 텐도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온 그는 능청스럽게 새로운 예약내역을 띄운 핸드폰 화면을 켄타로에게 보여주며, 그가 뒷목을 잡을 만한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일본을 보내긴 아쉬워. 비행기를 연장해야겠어! 아니나다를까, 그 다음날을 정상출근을 하기로 되어있었던 켄타로는 턱을 발치에 떨어뜨린 채로 텐도의 느물느물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닥스훈트는 끊임없이 그의 턱과 입술을 구석구석 핥았다.

 

그래 놓고 호텔에서는 체크아웃 절차를 척척 진행했다. 예약이 이미 들어차있어 투숙일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조차 확인하지 않고 비행기는 하루를 더 연장해버렸으니 닥스훈트를 끌어안은 채 호텔 밖에서 발장난을 치고 있었던 켄타로는 정문 밖으로 나온 텐도에게서 뒤늦은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기껏 눈곱만큼의 걱정을 담아 물은 데에 텐도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한 형안으로 대답했다. 어디긴, 너네 집이지. 켄타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낮게 신음했다. 이런 인간이랑은 애초에 엮일 구실을 만들지를 않는 건데…… 텐도가 등을 떠밀며 택시를 잡으려 하자 그가 질색을 하며 앞장을 섰다. 켄타로는 텐도를 버스정류장으로 이끌었다. 대중교통이 영 시원치 않은 곳에서 몇 년을 살았던 텐도는 간만에 오르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만져보고 차창에 코를 붙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켄타로는 그의 몫까지 차비를 계산한 후에 옆자리에 앉아 연신 촌스럽다느니, 정신 없다느니 투덜거리며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켄타로는 일본식 연립주택에서 월세를 내고 생활하는 중이었다. 현관부터 비좁았기 때문에 그 동안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구라파식 양관에서 지내왔던 텐도는 신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켄타로를 앞질러가다 뒷덜미가 붙들렸다. 닥스훈트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연신 힐끔거리는 켄타로 때문에 텐도는 하드켄넬 안에 비치해두었던 배변시트를 꺼내어 거실 한 구석에 깔아야 했다. 얼마나 똑똑한데, 변도 스스로 가린다고? 텐도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켄타로가 손을 씻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닥스훈트는 배변시트 위에 오줌을 누었다. 그래도 그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 언성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난 저거 못 건드려! 여기까지 보고 나니 그는 원체 화법이 그런 식인 듯싶었다. 텐도는 두루마리 휴지를 돌돌 풀어 팔랑거려 보이며 입꼬리를 히죽 찢었다. 내가 아무리 예의를 쌈 싸먹었어도 우리집 개 실례를 키티 군한테 치우라고 할까? 켄타로는 거기에까지 무어라 중얼거리며 토를 달기는 하였지만 냉동고를 열어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던져주는 친절을 베풀기까지 했다.

 

그들은 어쩌면 알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게다가 알 필요도 없었던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캔맥주에 아이스크림이라는 엉뚱한 조합과 함께였다. 텐도는 졸업을 하자마자 배구를 그만두었으며, 해외소재의 모델대학에 합격해 외국으로 날랐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활동을 하지 않아 국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극히 적은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하면 맨 첫 면을 장식하는 위인이었으므로 이에 켄타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켄타로는 성질머리가 고약하여 좀처럼 한 군데에 정착을 하질 못했다. 그나마 배구가 아직까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레저스포츠가 전공이었고, 교수들과의 마찰이 조금 있어 일 년 동안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거 고교 때도 있었던 패턴 아니야? 텐도는 중간에 그의 말을 끊고 얄궂은 내용으로 끼어들었다가 예상대로 면박을 당했다. 어쨌든 그렇게 휴학조치를 내린 켄타로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는데, 호텔 벨맨도 그 중 하나라고 했다. 여기서 그 중 하나라 함은, 그가 휴학을 한 지 아직 반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아르바이트를 여러 번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스낵 체인점, 편의점 등에서 서빙을 하거나 카운트 업무를 보다가 곧 때려치우고 호텔 벨보이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머리를 다시 염색했다고 해서 텐도는 눈을 휘둥그래 뜨곤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기억하는 시점의 켄타로는 흑발이었기 때문에 그가 고교 이학년이 될 무렵에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가만 들여다보니 그의 머리에 어렴풋이 어두운 갈색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염색을 하고도 부루퉁해 보이기까지 하는 더러운 인상에서 흠집이 조금 잡혔으나 과묵하다는 점 (사실 심기만 안 건드리면 과묵한 편이었다)에서 어렵게 합격이 되어 벨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때, 벨보이는 할만 해?

아니. 이것도 곧 때려치울 거야.

 

켄타로가 맥주로 조금 흥건해진 아랫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대꾸하자, 텐도가 무릎을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켄타로는 기분 나쁜 웃음이라고 지적하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털어놓고는 우적우적 씹었다. 계속해서 거실과 부엌을 바삐 오가던 닥스훈트는 어느 정도 지쳤는지, 소파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개털 묻는데, . 켄타로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맥주가 세 캔 정도 들어간 후였기 때문에 말투는 조금 유순해져 있었다. 별안간 텐도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았다. 엄지와 검지로 그의 턱을 쥐고는 이리저리 돌렸다. 이건 뭐야, 켄타로가 재빨리 팔을 들어 그의 뼈다귀 같은 손을 쳐냈다. 텐도가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의문형으로 중얼댔다.

 

키티 군은 진짜 서비스직종은 안 맞는 거 같은데.

알아.

페이스는 너무 내 스타일인데 말이야, 모델 해볼 생각은 없어?

헛소리 하는 거 보니까, 맥주로 취했냐?

완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야.

헛소리 다 했으면 이거 치우고 씻어라.

나랑 내일 프랑스로 가지 않을래? 제대로 정착시켜줄게.

아 좀, 떨어지라고.

안 통하네…… 아쉽다.

 

텐도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물렸다. 켄타로는 그가 떨어져나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캔과 아이스크림 봉지를 주섬주섬 주웠다. 내가 치우라며? 텐도가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뉘이고 느긋하게 묻자, 그가 다시금 버럭 언성을 높였다. 치워줘도 지랄이야! 텐도는 이제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벅끔벅 떨어뜨리기 시작한 닥스훈트의 등허리를 어루만져주며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재수없어. 켄타로는 어깨를 떨며 부리나케 부엌으로 도망쳤다.

 

수평선을 벌겋게 태우던 낙조가 사라지고 나서야 텐도는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건네 받았다. 그래도 손님 취급은 해주는구나. 그저 내뱉어본 혼잣말에 켄타로는 거실 바닥에 앉아 건조대에 넣어놓은 빨래를 개며 뺨이 달아오르도록 볼멘소리를 했다. 목욕하면 죽여버린다, 샤워해, 샤워! 그래 놓고는 삼 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보일러를 꺼버린다는 둥 그렇게 효력은 없는 협박을 했고, 텐도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옷을 벗어놓고 샤워부스를 열자마자 선반에 꼴랑 샴푸와 둥그런 비누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것을 보고는 잇새로 푸시식, 풍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헛웃음을 지었다. 암만 둘러보았지만 변변한 린스나 바디코롱 같은 것은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거 참 투박한 인간일세. 하지만 텐도는 휘파람까지 불며 샴푸로 머리카락을 뭉치고, 비누로 몸을 문질렀다. 그는 피부를 부드럽게 가르는 비누로 사타구니를 비비며 악랄하게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안에서 뭐 하는데 웃고 지랄이야! 문간 너머로 켄타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있잖아, 정말 여기 생활이 지루해지면 연락 때려. 프랑스로 와!

 

똑같은 비누향기를 그득 묻히고 싱글침대에 몸을 구겨 누운 텐도가 그의 뒷목에다 대고 속삭였다. 켄타로는 엉뚱하게도 주인을 놔두고 제 가슴께에 웅크려 누운 닥스훈트를 실수로 밀어낼까 싶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 말을 잘근잘근 씹어 들었다. 댁한테 내가 왜.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켄타로의 목소리에 텐도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우리 업계는 너처럼 인간이 좀 싸가지가 없어도 괜찮거든. 비아냥거리기는커녕 활달하기까지 한 대꾸에 켄타로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가 머잖아 입을 열었다.

 

댁이야 말로 말본새가……

알았지, 키티 군?

 

켄타로의 말을 댕강 끊어버린 텐도는 비척비척 일어나 켄타로의 뺨에 입술을 가벼이 붙였다. 방 안에 젖어 든 적요를 응시하던 켄타로는 여태 저린 팔뚝을 감당하며 모로 누워있던 자세를 단번에 뒤집었다. 귀를 움찔거리며 꽤 단잠에 들었던 닥스훈트가 눈을 화들짝 떴다. 켄타로는 제 뺨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버벅거렸다. , …… …… 텐도는 다시 누워 베개 위에 뺨을 묻으며 능청스럽게 눈썹을 꿈틀댔다. 프랑스에선 이렇게 인사한다구? 켄타로는 턱 언저리까지 시뻘게진 채 바락바락 악을 썼다. 거짓말하지 마, 이 변태새끼…… 텐도는 이번엔 욕을 씨부렁거리는 그의 입술을 덮었다. 혀를 넣었다간 송곳니로 씹힐 거야. 영리한 판단을 한 텐도는 달착지근하게 아랫입술만 물고 떨어졌다. 이제는 그 무슨 단어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게 된 켄타로의 뺨을 잡아당기며 유쾌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이건 프랑스식 밤인사야. 켄타로는 굳어버린 사고회로에 간신히 기름칠을 해서 가장 상스러운 욕을 엄선해보았지만, 곧 허리를 넘어온 닥스훈트가 (어쩜 그렇게도 주인을 닮았는지) 입술을 핥는 바람에 입을 꾹 닫는 수밖에 없었다.

 

텐도는 눈을 둥그렇게 휘어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천장을 바로 보고 푹신한 매트리스에 등을 붙였다. 아직까지 씩씩거리며 당혹스런 숨을 몰아 쉬는 켄타로를 내버려둔 채 눈꺼풀을 닫았다. 아무 말도 않는 켄타로 대신 입술을 열어 인사했다.

 

굿나잇.







교토 서쪽 교외에 터를 잡은 아라시야마風山의 대나무숲길을 한없이 걷다 보면 아카류슈고赤龍

아카아시 家는 데릴사위를 들여 적통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고수했다. 사 대가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운명처럼 여아를 출산했는데, 오 대째에서 문득 처음으로 남아를 낳게 된 것이었다. 조모는 사내라 하더라도 가업을 전수하는 일에 있어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아이에게 케이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붉은 강보를 둘러 키웠다. 여느 곱슬머리의 아이들과는 달리 어투가 단정했고 차분했다. 처음 세상에 났을 때 어머니의 부름보다도 박새의 지저귐을 가장 먼저 들은 아이는 또래가 없이 자란 탓인지 말수가 적고 낯을 가렸다. 케이지는 집안의 손윗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조그만 산짐승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다. 홀로 별당의 툇마루에 앉아있노라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들이 귀에 들어왔다. 겁도 없이 손가락 위에 내리 앉는 직박구리의 지저귐, 다람쥐가 나무를 오르며 부리는 발재간, 죽창의 꼭대기부터 지상의 해당화 이파리들까지 어루만지는 미풍의 입김. 그리고 이따금 정체 모를 속삭임들이 드높은 하늘로부터 어지러이 쏟아져, 나무와 나무 사이를 돌아나는 바람을 타고 사라지곤 했다.

 

케이지의 일과는 단조로웠으나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마당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조모와 모친은 그를 신사 뒤켠에 있는 언덕의 사당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매일 동이 트기 전 발걸음을 하여 정수를 떠다 바치고, 언덕 정상에서 뺨에 피는 홍조와 같은 일출을 보고 하산했다. 신사로 돌아오면 문간 곳곳이 내린 발을 걷고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었다. 아침은 흰 쌀밥과 간장, , 머위뿌리, 연근과 바짝 말린 소의 살코기였다. 식사를 마치면 바로 구슬을 만들어야 했다.

 

구슬은 일 년에 네 번, 사당에 모신 영물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이었다. 승천한 적룡이 입에 물었다는 구슬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아라시야마에 인접한 동네 대장간에서는 유리를 한 묶음 싣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신사를 찾아왔다. 모친은 유리 한 판을 대청에 남겨두고 나머지를 창고에 쟁여놓았다. 이어 조모가 가마에 불을 떼면 케이지는 합판과 염료를 내왔다. 염료는 전에 만든 구슬에 색을 입히기 위함이었고, 합판은 새로이 들여온 유리로 구슬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유리 한 판이 가마에서 모조리 용융되면 솥에 옮겨 부어 내왔다. 그러고 나면 세 사람이 모여 앉아 극비棘匕로 유리를 떠서 합판에 동그랗게 파인 홈들을 채워 넣었다. 합판이 다섯 개 정도 채워지면 뒤뜰 장독과 함께 땅에 묻어 냉각시켰다. 이미 굳은 구슬들은 꺼내어 염료에 담갔다 빼낸 후, 마당에 내놓고 말렸다. 구슬을 만들고 나면 전병과 향초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이후에는 휴식을 취했다.

 

모종의 일과가 끝나고 나면, 케이지는 어김없이 고요한 별당으로 향했다. 감색의 하카마로 갈아입고 책을 읽거나 유백색 이불에 몸을 만 채로 오후 단잠에 빠지곤 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방 안보다는 마루에 나와 있기를 더 좋아했다. 그럴 때는 대개 해를 가린 잿빛 구름과 어둔 빗줄기로 시야가 컴컴했기 때문에 차라리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귀만 열어둔 채 미약하게 숨을 쉬었다. 빗방울이 묵직하게 해당화 꽃잎을 두드리는 소리, 하늘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아득한 천둥소리를 먹먹히 들었다. 그러다 보면 여느 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빗소리에 불순물처럼 섞여 드는 미묘한 잡음이 귓속으로 흘러 들곤 했다. 케이지가 이것의 정체를 육안으로 처음 확인했던 것은 그가 생의 열다섯 번째 장마를 맞던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케이지는 빗발과 꼭 닮은 청벽색의 장옷을 두른 채 마루 위에 웅크려 앉아있었다. 무릎을 세워 팔뚝을 감싸 안고, 그 안에 머리를 모로 기대어 선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베틀에 매인 실처럼 가닥가닥 곧게 낙하하는 빗줄기 사이를 불청객이 흔들었다. 케이지는 설핏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흐리게 멍울진 빗줄 너머로 백발을 늘어뜨린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은 물웅덩이로 진창이 된 땅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무성하기도 하여 얼굴을 죄 가리우는 것이었다. 그 사이로 실핏줄이 발딱 선 눈자위 하나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케이지는 턱을 무릎에 얹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몸을 휘어잡은 기묘한 느낌에 불현듯 손발이 언 탓이었다. 숲에서 쪽문으로 잘못 들어온 객인이 아닐까. 어머니를 모셔와 안내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케이지는 스스로 품을 옥죄고 있던 팔짱을 찬찬히 풀었다. 마루를 짚고 엉거주춤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 순간, 객인이 손을 들어 검지를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얼굴 언저리에 갖다 대었다. 케이지는 목기둥을 붙잡은 채로 입술을 봉했다. 객인은 여전히 충혈된 눈을 끔찍하게도 둥그러이 뜨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검지를 여전히 입가 어디쯤엔가 붙인 채였다. 말하지 마. 아무런 언어도 오가지 않았지만 케이지는 그가 침묵을 내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색의 꽃잎 사이에 구물구물 기어가는 유록빛 벌레를 본 듯 선뜩하고 짜릿한 이질감이 온몸을 압도했다. 케이지는 한참 만에야 이 낯선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검지를 제외하고 고이 말아 쥔 객인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봉긋이 튀어나온 목젖이 파도를 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일곱 개였던 것이다.

 

객인이 물감이 번지듯 서서히 희미해지고, 이내 완연히 빗속에 젖어 사라지고 나서도 케이지는 한참 기둥 옆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요괴가 분명해. 이윽고 다리가 풀린 케이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등을 처마 밑에 매달고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문득 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것을 깨달은 모친이 이마를 짚으며 걱정했으나 케이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벌건 눈으로 수풀 사이에서 오롯한 시선을 보내며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던 요괴의 잔상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은 어느 분야에서든 적당한 시간이라고보쿠토 코타로는 생각했다접때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휴직서를 냈던 야마모토 씨가 쾌차하고 회사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년할 줄 아는 영어라곤 간단한 인사말이 전부였던 사촌동생이 영국에 가더니 외국물 먹은 티를 내며 도쿄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도 일 년가려는 학교 허들 높지 않니주전 하려면 그거보단 키가 좀 더 커야 좋을 거야중교를 마칠 무렵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소릴 듣기가 무섭게 10cm 남짓 머리꼭지가 훌쩍 크는 데 걸렸던 시간도 일 년그러니 일 년이라는 것은 각양각색의 변화에 거의 공용적으로 적용되는 유통기한임이 틀림없다.


이를 테면 사랑에서도,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늘 불안하게 유동하는 마음을 정착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일 년. 정착했다 싶은 사랑이 변질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일 년 정도. 고민하고 갈등하고 숙고하며, 이별을 결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일 년. 마침내 이별을 선고 받았을 때 이별을 납득하기까지 대략 일 년. 여기서 납득은 종합적인 개념이다. 왜 헤어졌는지,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지, 상대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지, 그런 총체적인 의문들의 해답이 하나로 좁혀질 때 비로소 이별을 납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맞물린 톱니바퀴와도 같아 저 중 단 하나라도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납득은 유예된다. 이런 경우에는 가장 일반적인 유효기간인 일 년을 훌쩍 넘길 가능성이 있다. 이때부터 마음이 견디기 힘든 단내를 풍기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코타로는 다행히도 제게 연체는 없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쿠로오 테츠로는? 그걸 제가 어찌 아나. 테츠로의 마음이야 테츠로만 아는 것이다.

 

하지만 테츠로가 저를 까마득히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타로는 그것을 확신했다. 일 년이라는 유통기한은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 하루에도 몇 천 몇 만의 세포가 죽고 새로이 재생되며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지 않듯이, 그 기간 내에 벌어지는 것은 천천한 변화 그 자체였다. 아주 썩거나 아주 사라지지 않을 정도의 변화 말이다.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시간. 따라서 헤어진 지 일 년이 된 연인의 얼굴을 아주 또렷이 알아보거나, 혼잡한 인파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질척한 미련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적당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 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 동안 정리가 된 것이지 박살이 났다거나, 그래서 산산조각 흩어졌다거나 분해되었다거나 휘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암만 모른 척을 해도 여태 일 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쿠로오 테츠로를 좇는 데에 정성을 들여온 제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냔 말이다. 코타로는 목을 죈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렀다. 그의 이름을 간만에 들은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기에 자연스레 한 사람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귀에 익은, 정도가 아닌 귀에 살던 때는 일 년 전. 그러니 이제 귀에 희미한 것이 되려면 다른 일 년이 더 남은 셈이다.

 

보쿠토 씨는 어때요?

?

쿠로오 씨 실물은 처음 보잖아요. 그렇죠? 국내공연은 팔 년만이니까.

, 그렇죠……

 

코타로는 말끝을 흐지부지 늘어뜨리곤 잔에 반쯤 채워져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맞은편에 앉은 테츠로가 고개를 젖혀 웨이터를 불렀다. 머잖아 물병을 든 웨이터가 걸어와 텅 빈 코타로의 잔에 물을 다시 채워주었다. 저리 태연자약할 수도 있구나. 원래야 천연스러운 것은 테츠로의 특기였지마는. 그 깜냥이 아직 죽지 않아 일 년 전 헤어진 사람을 눈앞에 놓아두고 고기도 썰고 술도 마시고 팀장의 같잖은 농담까지 먹어 치우고, 보쿠토 씨는 한 잔 안 하세요? 제게 넉살 좋게 말문까지 터왔다. 코타로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결결이 손톱이 박혔다. 곧 축축해져 바지춤에 슬그머니 문질렀다. 손끝과 발끝에 힘이 바짝 들었으나, 이내 맥아리가 풀렸다. 일 년은 적당해도 너무 적당해서 문제야. 코타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이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팀장은 비어가는 테츠로의 잔을 습관적으로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지요.

 

쿠로오 테츠로는 스물둘에,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무용수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코타로와 함께 배구를 했었다. 테츠로가 무용단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뜻밖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전향이라고는 생각지를 않았다. 배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어디까지나 의욕을 태울 만한 취미에 불과했다. 테츠로는 진작 일 년 말미의 자율전공을 택했고, 처음 체교과에 들었던 코타로는 영 제 분야가 아니라며 고생을 해서 전과를 해야 했다. 몇 년 후에 무얼 하고 있을까. 막연했던 고민이 구체화되지는 못하고 불투명한 채로 앞당겨진 것이 전부였다. 무얼 할까. 무얼 해야 하지. 그 무렵에 테츠로는 학교 축제에 마련된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무용과 동기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가 해당과 교수에게 입단을 제의 받았다. 해외에서는 웬만해서 인지도가 높은 무용수들을 졸업시킨 교수라니, 그때부터 테츠로의 방향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타로가 그에게 고백을 했던 것은 수도권 갈라쇼에서 그의 데뷔무대이자 첫 국내무대가 있던 날의 어둔 밤. 유연한 몸이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라고. 배구를 하던 시절엔 잘 쓰지 않았던 근육의 움직임을 본 것,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몸짓을 본 것, 색다른 환희에 찬 얼굴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라고. 그 이전부터 너를 좋아해왔노라 털어놓았다. 테츠로는 커튼콜에서 받은 백장미 다발을 한아름 안은 채 눈을 찬찬히 끔벅였다. 머잖아 달을 가리운 구름이 걷히듯 희부옇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팔 년 전의 이야기.

 

보쿠토 씨는 택시 타고 들어가려고?

아뇨, 걸어서…… 집이 요 근처입니다.

잘됐네요. 쿠로오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내일모레 뵙시다.

노리오 씨도 살펴 들어가세요.

 

팔 년 전의 이야기. 다시 말하면, 유효기간이 지났어도 한참 지난 이야기. 더 이상 흐드러진 장미 다발이나, 우스꽝스럽게 버벅댄 고백이라든가, 희붓한 웃음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들은 죄 팔 년 전의 명의로 된 시간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테츠로의 말을 빌리자면 코타로는 어울리지도 않는양복을 제법 맵시 좋게 입고 있었고, 테츠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너 진짜 집이 이 근처야? 외투를 여미고 담배를 꺼내던 테츠로가 물었다. 코타로는 고개를 저었다. 헤어진 연인의 은퇴무대 기획 때문에 배급사 상부에서 독촉을 받아온 것이 벌써 몇 달째. 최근 일주일 동안은 밤잠을 설친 탓에 평소보다 축 늘어진 코타로는 편의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강장제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강장제는 계산대 옆에 붙은 소형 냉장고에 구비되어있었다. 테츠로가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것이 생각나 그 옆에 비스듬히 진열된 라이터에 먼저 눈이 갔다. 돌이켜보면 한창 연애를 했을 때도 테츠로가 담배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연애 끝에 조촐한 식을 올렸을 때도, 기분을 내자며 떠났던 프라하 여행에서도 그의 가방에서 담배 보루나 라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테츠로가 피우는 담배의 존재를, 그 상표와 브랜드와 디자인과 맛을 처음 알았던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외 공연이 있었던 당일 새벽에 (그러니까 일본 시간으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단독 보도된 기사를 통해서였다. 까만 코트에 잠기다시피 몸을 한껏 가리고 담배를 문 사진이 한 장, 그리고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낯선 남자와 얼굴이 닿아있는 사진이 한 장. 닿아있었던 것인지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보다 한참 거구였던 남자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중년의 신사였다. 테츠로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코타로는 있는 힘을 다해 오해의 여지들을 생각해보았다. 해외투어에서 생긴 인맥에 불과하고, 테츠로는 인상이 원체 어디서든 능수능란해 뵈는 구석이 있으니 아마도 남자가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담배를, 아마도 귓속말을 하려 고개를 구부리다 저런 야릇한 사진이, …… 연인의 귀국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코타로는 베개에 처박았던 고개를 번뜩 세웠다. 아니, 변명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지금 이 지랄을. 그는 테츠로가 집으로 돌아오면 스스로 해명해주기를 기대했으나, 테츠로는 아무 말도 않았다. 해외투어로 인한 출국이 잦아졌다. 도피일까. 집에 있는 시간이 한 달에 일주일은 될까 말까 한 와중 남자와 함께 찍히는 사진들은 점점 더 노골적인 태를 보였다.

 

코타로는 커다란 캐리어에 옷가지와 화장품과 잡동사니를 있는 대로 구겨 넣었다. 지퍼를 꾸역꾸역 닫고 현관 앞에 놓았다. 그리고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테츠로는,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 캐리어와 마주하게 되었다. 코타로는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 채로 중얼거렸다. 네가 나가. 그러자 한동안 마룻바닥에 정적이 끼었다. 쿠로오 테츠로는 제가 뺨을 올려 붙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취재진이 널린 해외에서 무방비하게 다닐 만큼 깡따구가 있는 놈이라면 눈곱만큼도 감사하지 않겠지만, 게다가 도쿄를 지키며 저를 기다리던 연인에게 일말의 면목도 배려도 의리도 없는 새끼라 어쩌면 되려 나더러 나가라고 역정을 낼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마음의 혓바닥이 거기까지 중얼댔을 때, 코타로는 둔탁한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테츠로가 캐리어를 집어 든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코타로는 한동안 넋을 놓고 굳게 닫혀버린 현관문을 응시했다. 이것이 일 년 전의 이야기. 코타로는 강장제를 계산대에 내밀며 지갑을 열었다. 점원이 바코드를 찍으려 강장제를 이리저리 돌리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다. 테츠로가 휘파람을 불며 진열대 가장 위쪽에 배치된 콘돔 상자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요즘은 러브모텔은 웬만한 호텔만하네.

……

그리고 코타로 군은 예전처럼 시끄럽지 않네요.

피곤해서 그런 거거든?

피곤한 놈이 두 번이나 싸?

 

두 번이나 쌀만한 몸이고 몸짓이고 목소리였는걸. 코타로는 눈을 껌벅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테츠로가 그 모습을 보고 붕어가 뻐끔거리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는 담배의 허리를 입에 물기 전에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두툼한 커튼을 젖히고 가부키초의 장난감처럼 오밀조밀한 야경을 내다보았다. 코타로는 베개 밑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꺼내어 보니 야마모토 씨의 문자였다. 막공 때 회식이 있으니 저녁 스케줄을 비워두라는 내용이었다. 코타로는 다시 핸드폰을 끄고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눈꺼풀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허릿짓을 하는 내내 테츠로의 이름 한 번 부르지 않았던 성대인데 마구 고함을 내지른 듯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너 막공이 언제냐.

언제였더라…… 돌아오는 주 목요일인가 그럴걸.

, 그래.

그건 왜?

……

커튼콜 때 꽃다발이라도 주게?

 

스물두 송이, 당시 제 나이만큼 꽂힌 백장미 다발을 끌어안고,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다 마침내 누그러지게 웃던 남자애. 그 밤 까만 머리가 주홍빛 가로등에 붉디붉게 젖어가던 애. 코타로는 테츠로의 웃음기 어린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모로 돌아누웠다. 낯선 외제의 담배 향기를 맡았다. 수천 수만의 세포가 죽고 재생되는 날이 거듭되어 일 년 치가 축적되었다. 그 동안 테츠로는 하루에 두세 번의 공연을 소화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골초가 되어있었고, 보다 섹스에 능숙해졌으며, 영양가 없는 농담이 늘어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코타로의 시선이었다. 저는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이것은 테츠로가 말해줄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그가 세 손가락으로 뺨을 지그시 눌러오며 입을 열었다. 코타로 군은 말수가 줄어든 거 빼면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지. 그리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머잖아 불명하게 잦아들었으나.

 

코타로는 무언가 묻고 싶어졌다. 실은 일 년 전, 아니 훨씬 오래 전부터 테츠로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때는 합당하게 들렸을지 몰라도 지금은 뱉어놓기 부끄러운 질문들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들. 그리고 쓸데없는 체력소모는 제게만 불이익이라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착실하게 깨달아온 코타로는 어느 때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한 편인지 가려낼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입술을 닫았다. 침묵을 쌓았다. 그러자 테츠로가 인공적인 고요에 응해주었다. 코타로는 불현듯 등 뒤에 담배를 물고 앉은 이 남자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팔 년 전 가로등 밑의 그와 과연 같은 사람인가. 같다면 돌아갈 수 있는가…… 글쎄. 지금 이 순간에도 테츠로는 몇 초 이전의 테츠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걸. 그렇다면 제 앞에 새로이 나타난 쿠로오 테츠로를 어찌할 것인가. 코타로는 밤을 지새워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납득하자. 그 방법밖에는. 그리고 감히 짐작하건대, 이것은 다시 일 년이 걸릴 것이었다. 여태 그만하면 적당했으니까.




 



관계에 있어 칼이나 도끼 같은 것이 유효했으면 좋겠다고기를 썰면 우아한 마블링이 나오고나무를 베면 말발굽 같은 나이테가 나오듯이 관계를 잘랐을 때 보여질 깨끗한 절단면을 기대한다늘어진 실밥이나 끊어지지 않은 힘줄 없이 깨끗하게 분리될 수는 없을까매번 생각하지만 완전한 것은 없다먼저 이별을 고하는 쪽이 악을 자처하는 것이라면 붙잡는 쪽은 무엇을 자처하는 것일까이것은 이분법적인 판단과 결부할 일이 아니다지난번 근섬유가 다 찢기고 뼈대만 덜렁덜렁하게 남은 채 토오루에게 한 번 더를 요청 받았을 때 알았다이것은 아무래도 더럽다왜 또헤어지자는 말에 지친 목소리로 인상을 잠시 구겼던 걔를 보면서 짐짓 불평했다불공평해대체 왜…… 그런 식의 의문은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라는 간곡함에는 따라붙지 않는다공평하게 나누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마침내 절단하는 것이 좋다. 이별을 읊는 내게 왜, 를 묻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절절한 폭력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봐. 그렇게 말하는 걔에게 똑같이 반문한다면 말할 것이 있을까. 그래도 오래 만났잖아. 대개는 그런 식으로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오래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은 인연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적절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헤어짐에 만남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새 헤어짐은 말뿐인 헤어짐이, 만남에 비해 가벼운 차원의 행위가 되어있다. 헤어짐이 나의 혓바닥 밑에 고여있다. 대개는 토오루가 지쳐 보인다고 말한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걔는 스스로 탈진을 자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에 수치를 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역시 토오루만큼이나 너덜너덜해졌다. 젖은 빨래처럼 햇볕 밑에서, 이 관계에 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노력하고 싶지 않다.

 

나 오늘 공연하는 거 알잖아.

근데.

꼭 큰일 치르기 전에 그런 말 해야 되겠어?

……

이따 밤에 다시 얘기하자. 공연도 안 보러 올 거지?

갈 거야.

알았어.

 

안구가 뻐근해졌다. 가로등불 밝은 도보에서 언쟁을 벌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깨가 뭉쳤다. , 도대체 뭣 땜에 그래. 왜 그러는데. 익숙한 패턴이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이다. 왜냐는 질문에 꼭 대답할 필요는 없다. 정확한 답을 제시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이유가 필요해질 때부터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토오루는 돌아앉아 피크를 챙겼고, 나는 등을 구부려 책상에 뺨을 대었다. 기타가방에 지퍼를 채운 걔가 성큼성큼 걸어와 입을 맞추었다. 수명이 다 된 랜턴이 깜빡이듯 아주 잠깐 따뜻했다. 걔의 큼지막한 손이 내 등을 슬슬 어루만졌다.

 

나중에 얘기하자구. ? 이따 봐.

 

현관문이 닫히기까지 나는 대답을 않았다. 얘기라면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입술을 뾰족하게 모아 볼을 부풀렸다가, 이내 바람을 뺐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토오루와 처음 헤어질 뻔하던 날에 걔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는 처음으로 걔의 구차한 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오이카와 토오루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믿었기에, 이별의 국면을 비껴나갔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나 스스로 걔의 말을 잔뜩 포장하는 불찰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이 관계를 고쳐보자는 의미 따윈 없었잖아. 우리는 망가진 채로 이어졌고, 나는 이 녹슨 느낌이 싫었다. 싫은 것은 아무래도 이 크나큰 마음으로 넘기기에 가볍다. 진저리가 날 때가 정말로 그만두어야 할 때다. 흉부까지 욕지기가 찰 즈음에 이별을 혀에 담고 나면 그걸 먼저 말하는 건 항상 나였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이후로 별다르지 않았던 토오루는 토오루 그 자체였다. 사람도 사랑도 모두 시간을 달리는 것들인데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연히 변질되는 것에 어거지로 방부제를 친 느낌이다. 나는 속이 곯아터진 지 오래였다.

 

어스름이 질 즈음에 부스스 일어나 외투를 껴입었다. 신발에 발을 구겨 끼우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쳐 신었다. 로비를 나섰을 때는 핏빛 낙조를 보았다. 나는 메트로에 몸을 싣고 문 옆에 비스듬히 서서 졸린 눈을 했다. 끄트머리 좌석에 앉은 젊은 여자들이 핸드폰 화면을 공유하며 시시덕거렸다. 언뜻 그네들의 입에서 토오루의 이름을 들었다. 같은 역에서 내리겠구나, 짐짓 생각했다.

 

장내는 안내원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혼잡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어중간한 곳에 끼어 서서, 음향장치가 설치된 무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팜플렛과 핫팩을 든 사람들이 상기된 뺨을 하고 저들끼리 두런거렸다. 발목을 꺾으며 기다렸다. 별안간 장내 조명이 하나 둘씩 꺼져가더니 완전히 소등되었다. 찬찬히 무대 앞쪽과 천장에 설치된 조명이 점화했다. 뱃속까지 둥둥 울리는 악조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드러머가 스틱을 돌리고 베이스가 깊이 깔렸다. 일렉을 쥔 오이카와 토오루가 중앙에 서서는 스탠딩 마이크에 입술을 붙였다. 분해할 수 없는 가사들이 걔의 구강에서 번역되었다. 훌륭한 발성이었음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언뜻, 걔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 명 가까이 되는 객석에서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저것보다 좀 더 구질구질했다. 울먹임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걔가 내지른 가사의 어미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번뜩 그런 언어의 일련이 뇌리에 스쳤을 때, 마치 그것은 애당초 토오루의 혓바닥에 들러붙은 한 구절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앞으로 몇 곡이 더 이어지고, 나는 평소 귀에 익은 데시벨보다 두 배는 큰 음파가 온몸을 휘젓는 탓에 고통스러워졌다. 전력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는 밴드와, 전력을 다해 소리를 지르고 환호하는 관객들은 망가진 채 돌아가는 태엽 같다. 잠시 후 마지막 곡이 멎고, 귀를 찢는 함성 속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누군가 앵콜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여섯 명씩 입을 모아 소리를 키워나갔다. 앵콜, 앵콜, 앵콜. 머잖아 장내가 곧 앵콜을 부르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귓구멍이 먹먹해졌다. 이제는 씨근덕대는 호흡을 잠재울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밀도 있게 붙은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역행했다. 아마도 토오루는 미리 지정해놓은 앵콜곡을 부르러 무대 위에 다시 올라올 것이다. 그것은 단 한 번이 될 것이고, 앵콜을 외치던 사람들도 곡이 끝나면 주섬주섬 갈 채비를 할 것이다. 심장이 쿵쿵 뛴다. 하지만 머잖아 진정된다. 다시 듣는 노래는 처음 들었을 때만큼 혈관에 녹지 못할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부른다고 올 리가 있나. 관객들이 부르짖는 앵콜은 사실 오이카와 토오루의 목소리다. 그건 걔가 마지못해하는 것이기도 하고 원하는 대로이기도 하다. 이미 끝나버린 노래인데 다시 불러 무슨 감상을 얻나. 머리를 쨍하게 뒤덮는 앵콜을 뒤로하고 장내를 빠져 나왔다. 무대가 끝나고 비참해질 토오루를 생각하며, 나는 여태 내가 비참했던 횟수를 세었다. 앵콜, 앵콜, 앵콜.

 

부르지도 않을 것이며,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오늘도 그곳 앞에 비스듬히 섰다핸드폰을 확인하니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팔 분 정도 남아있다그 정도면 무언가 관찰하고 사려하기에는 꽤 넉넉해두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밀착해본다유심히 보고 있으면 자그만 변화를 하나라도 더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같은 일이 몇 번 거듭되면 더 이상 우연으로 넘길 수가 없는 노릇이다어쩌면 그것은이 의심을 견고한 믿음으로 전복시키기 위한 중첩의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아직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말이야하지만 이건 확실해인형의 입술이 어제와 미묘하게 다르다.


주상복합건물 맞은편에 위치한 가게는 겉보기에 협소하고 자그만 크기와는 달리 두툼한 유리로 된 진열장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면 꽤 이것저것 자리잡을 만큼 넉넉했다. 체인점 따로 없이 이 동네에는 거의 유일한 인형가게이지만 질 좋은 마네킹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목재와 플라스틱, 철심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공구가게로도 이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도보 측에 바짝 붙은 강화유리 진열장에는 크기가 거의 사람만한 구제관절인형들이 받침대에 의존하여 서있었다. 가장 질 좋은 것들이 앞세워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안쪽에는 플라스틱 마네킹이 대부분이었지만 도보 측에 전시되는 것은 철심과 파이프를 이어 만들고 위에 매끄러운 목재 피부를 덮은 인형들로, 관절 마디마디가 세세하게 조형되어 작은 이음쇠와 나사들로 연결되어있었다. 무광의 살구빛으로 페인트칠이 된 인형들은 사흘에서 나흘 간격으로 다른 갈아입는다. 개장이 평소보다 늦을 때에는 나신으로 오도카니 서있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은 이목구비도 오밀조밀 조각되었다. 두상을 덮은 머리털은 직접 어루만져보지 않아도 보드랍다. 윤기가 흐르는 것이 인모人毛를 쓴 게 틀림없다. 인조모를 사용한 좀 더 저렴한 인형들은 가게 안쪽에 비치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두 달 전에 가구회사의 마케팅부서에 취직을 하고 인근으로 이사를 한 이레 줄곧 맞은편 가게의 인형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 안목이 비켜나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고유의 밝은 잿빛 인모가 사용된, 진열장 한가운데에 지지대를 딛고 선 인형이었다. 다른 인형들에 비해 광대가 낮고 턱이 더 갸름했다. 눈가에는 조그만 눈물점이 찍혔다. 이목구비는 수작업으로 그리고 색을 채운다고 한다. 아직 가게를 직접 방문할 용기가 나질 않아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안켠에 있는 쪽방에서는 종일 이 채색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촉이 얇은 수성펜으로 꼼꼼하게 밑바탕을 그려놓고 물감으로 덮는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코팅을 해서 칠이 벗겨지지 않도록 보존한다고 했다. 채도 낮은 연갈색으로 채운 인형의 두 눈에는 똑같은 크기의 동공이 또렷하게 찍혀있어 형형해 보이기까지 했다. 테두리는 혈색이 도는 살구색, 안쪽으로 기울수록 짙은 주색이 도는 생기 어린 입술은 어제 분명히,

 

타십니까?

, ! !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허겁지겁 올라타 발권기에서 표를 뽑았다. 정말 선불교통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나.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출근으로 혼잡한 시간대인 만큼 남은 좌석이 없다. 천장에 붙박인 손잡이를 쥐었다. ,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러니까 인형, 그래, 그것의 입술은 어제 분명히 밋밋한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 묘하기까지 한 표정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일자로 다문 입술이었을 것이다. 뺨엔 불그스름하게 홍조까지 비벼놓고 정작 입술을 굳게 다물려 놓아서 야릇한 인상이 되었다. 허나 방금 전에 본 것은 어땠더라. 어제완 또 다르게 기이한 인상. 무색의 손이 척추를 바짝 쥔 것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장담컨대 어제까지만 해도 수평이던 입꼬리는 가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입술의 양쪽 끝단을 귓불에 좀 더 가까이, 아주 조심스럽게 당겨놓은 듯이 빙긋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펜으로 그리고 붓으로 칠해서 벗겨지지 않도록 코팅까지 했다는 입술이.

 

에에, 사와무라 씨가 잘못 본 거 아닐까.

두 달 전부터 그랬다니까요.

회사가 많이 힘들지……

그게 아니라구요.

아니면 뭐, 얼굴을 갈아 끼운다든가 하는 게 아닐까? 구제관절인형이라며. 그러면 언제든 분해할 수 있잖아.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마다 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래도 버스 기다리면서 멍 때리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낫네! 그가 갈퀴 같은 손으로 내 등을 몇 번 뚜덕거렸다. 일리는 있지만 뭔가…… 속이 죄 개운해지도록 옳다구나 싶은 답은 아니다. 숙취에 절여진 것처럼 아직 두가 지끈거린다. 요즘은 일을 하다가도 간혹 그것에 대한 생각들로 골똘해져 상사에게 전에 없던 꾸중을 듣기 일쑤였으니, 인형에게 정기를 쪽쪽 빨아 먹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자 방석에 궁둥이를 붙이고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어도 아침에 보았던 방긋한 입술은 뇌리에서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의 미약한 변화를 위해 새 얼굴을 그려 끼워 넣는다고? 그것도 값비싼 전시용 목재인형에다가 말이지. 그렇다면 이 가게 주인은 아주 비효율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최근에는 일몰이 더 앞당겨졌다. 겨울이 깊어가는 탓에 이전에는 일곱 시 즈음 지상을 삼키던 어스름이 여섯 시를 웃도는 시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일지를 쓰고 퇴근카드를 찍은 후에 부서 건물을 나왔더니 벌써 하늘 한가운데가 은홍빛이었다.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서성거리며 버스를 기다릴 동안은 어둔 쪽빛이 하늘을 스멀스멀 잡아먹어, 어느 새 수평선만이 자색광으로 붉어있었다. 혈색 좋은 손바닥이 푸르딩딩한 그림자에 잠겼으니 머잖아 이대로 어두워질 것이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타 마침 운 좋게 눈앞에 자리한 빈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섯 정거장을 지나쳐 내리면 바로 가게 앞일 것이다. 거긴 내가 출근을 할 때 개장을 해서 오후 아홉 시에 폐장을 한다. 하차를 하고 진열장 앞에 서면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옅은 어둠에 잠긴 도보를 보는 인형의 그늘진 얼굴을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땐 거리가 훨씬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군데군데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밝았다. 협소한 골목 귀퉁이를 차지한 쓰레기통이 덜컹거렸다. 길고양이들이 훌쩍 올라타고 발로 차는 소리다. 나는 서류가방을 고쳐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점보다는 조그만 의류매장과 서점, 방물가게가 늘어진 거리다 보니 이 시간에 부쩍 한산했다. 나는 주춤거리며 인형가게의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가게 뒤켠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강한 역광을 쪼이는 인형의 얼굴이 시커맸다. 나는 좀 더 고개를 길게 빼어 인형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몇 보를 두고 떨어진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비친 입술선이 아주 유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침과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 햇빛으로 투명했던 피부가 잔잔한 어둠 속에서 창백한 빛을 띠었다는 것밖에는. 나는 다시 턱을 당기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광대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늘을 헤쳐보았다. 한참 눈을 끔벅이다, 이내 가느다랗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빛이 다 지고 난 탓인지 어딘가 또 기묘하게 달라 보이는 낯이다. 인형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머리를 싸매었다. 뭐랄까,

 

동공이 좀 더 커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화살처럼 머리를 스치자마자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단정한 자세로 서있는 인형의 전신을 훑었다. 잘못 본 것일까? 혀 밑 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좁은 보폭으로 다시금 다가갔다. 고개를 비스듬히 구부려 살펴보았다. 기억하기로는 오늘 아침, 연갈색의 홍채가 좀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부쩍 줄어든 빛의 양에 홍채가 이완하여 동공이 커지기라도 한 듯 더 뚜렷하고 큼지막한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뒷목이 선뜩해져 등을 홱 돌렸다. 부리나케 횡단보도 앞으로 뛰어가 양복재킷 앞섶을 움켜쥐었다. 주먹 안에서 단추가 매달린 옷접이 잔뜩 우그러졌다. 신호가 바뀌었을 때 도망치듯 횡단보도를 내달렸다. 뒤통수로 오롯한 시선이 바싹 따라오는 기분에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다리를 움직였다. 유리문을 온몸으로 밀고 쏟아지듯 들어가 로비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서야 겨우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스크 쪽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시던 경비원이 나를 곁눈질로 흘금거렸다. 마침내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벽에 기대자 절로 얼굴에 오른 손바닥이 마른 세수를 했다.

 

「뭐야, 무섭다 그거.

아무도 안 믿으니까 진짜 내가 미친 건가 싶고.

「가게는 들어가봤어?

아직.

「나 같으면 쳐다볼 엄두도 못 낼 거야. 애초에 인형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고…… 귀신이 들린 거면 어떡해.

하긴 아사히 너 예전부터 귀신엔 질색을 했었지.

「팔다리가 달린 사람 형상의 인형은 영혼을 담기에 좋은 몸이래. 그래서 막 사람처럼 움직인다고…… 이건 괴담이 아니고, 진짜로! 예전에 센다이 살 때 하야토 병을 고쳤던 무당 기억나지? 그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처럼. 혹은 진짜 사람. 거기까지 사고가 미치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사람을 인형처럼 꾸며 파는 가게라든가, 각각 다른 사람들의 신체부위를 조합해서 인형을 만들어놓고 내다 파는 가게에 관한 괴담은 어릴 때 종종 들어왔었다. 나는 아직도 센다이 무당에 대한 맹신으로 줄줄 늘어지는 아사히의 이야기를 끊어먹었다. , , 있잖아. 그거 혹시 진짜 사람 아닐까? 너무해, 하고 중얼거리던 아사히는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너무 멀리 갔나. 걔는 한참을 답이 없더니 내가 맘으로만 잘근잘근 씹던 말을 제가 대신 해주었다.

 

……그건 좀 멀리 간 거 같은데……

그런가.

「으응.

근데 귀신 들렸다는 네 얘기도 많이 멀리 갔어.

「다이치, 너무해!

 

나는 통화를 끝내고 천장에 매단 커튼을 젖혔다. 바로 맞은편의 가게라 창문으로 보면 도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비스듬한 시야로는 건물의 옥상 꼭지까지가 한계라, 처마 밑으로 오목하게 굽어있는 진열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뚫어 볼 수 없는 이 교묘한 사각지대를 있는 힘껏 응시하며 지그시 상상해본다. 지금쯤 저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깨끗이 닦은 창문에 부옇게 지문자국이 나는 것도 잊고 손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에 코를 한참 붙여놓고 진열장 위로 드리워진 검은 처마를 묵묵히 구경했다.

 

문득 가게 전방의 보도를 밝히고 있던 빛이 껌뻑 사라졌다. 나는 창을 밀어낼 듯 이마를 댄 채 그 광경을 주시했다. 퇴근 후 바로 욕실에 뛰어들어 감은 머리가 체 마르지 않아 창가에 물기가 맺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의 정문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 문고리를 잠그고, 자물쇠를 둘러 한 번 더 닫아건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찾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으니 폐장시간이구나. 가게에서 새어 나오던 노르스름한 불빛도 꺼지고 없다. 몇 시간이 더 지나면 간간히 저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길 것이고, 진열장에 선 인형들은 저들끼리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꼭 그맘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동안 저 좁다란 가게에서 복작복작, 저들끼리만의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는지.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티셔츠 끝단을 쥐었다.

 

참을 수 없이 궁금하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벽녘이 밝기 전에 살그머니 내려가 전봇대 뒤에 쭈그려 우스꽝스러운 꼴로 정찰한다고 해도 결국 동이 틀 때까지, 주인이 돌아와 개장 준비를 할 때까지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회사동료들의 말마따나 내가 여태 헛것을 본 걸 가지고 두 달 동안 헛수고를 했다는 사실, 취업 스트레스의 후유증에선지 무슨 이유에선지 대단한 망상을 해왔다는 사실이나 깨닫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래도 확인하지 않고 다시 몇 날 며칠을 덜 마른 빨래 개듯 찝찝한 마음으로 순환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찬찬한 걸음으로 소파로 가 앉는다. 양말을 신고 리모컨을 주워 티브이를 튼다. 채널을 돌려보니 잘 시청하지 않는 방송사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때울 만한 예능 프로그램의 심야 재방송 특선을 방송해주고 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올까 하다가 고개를 젓고 탄산음료로 마음을 바꾸었다. 고작 맥주 한 캔에 눈이 풀릴 정도로 알코올에 취약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맨정신에 가까우면 좋을 것이다.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사이다 한 캔을 땄다. 따가운 탄산이 목구멍을 씻었다.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은 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다 여겨왔던 것에 대해 사뭇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예로부터 인체의 형상을 한 인형에는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설화가 있었죠.

맞아요,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도 하니까.

그런데 그게 설화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죠. 우리가 왜, 귀신에 쓰인다고 하는 건 요즘 쉽게 납득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귀신이 쓰이는 거.

미령과 과학을 접목시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요…… 일단 우리는 그렇게 믿으니까요. 우리 몸을 움직이게끔 하는 건 영혼이 아닌 뇌와, 그 명령에 직결된 근섬유라든지……

그러니까 인형 같은 것에 영혼이 깃들 수는 있어도, 그래서 무언가를 사려하고 사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움직이거나 표정을 짓거나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에요. 무당들도 자주 그렇게 주장해왔지요.

결국 이것은 인체의 영역인 것이군요.

그렇죠. 인간人間의 영역이겠지요.

 

, 세상에.

 

눈을 막 떴을 때 반사적으로 깨달은 것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등받이 위로 고개를 푹 젖혀놓고는 두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머리를 번쩍 일으켰다. 예능은 끝난 지 한참 된 것인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배경에 깔린 성우의 목소리가 귀에 편안하게 날아들었다. 잠이 쏟아질 만도 했어. 화면의 형형한 불빛에 얼핏 벽시계가 비쳤다. 새벽 한 시. 나는 쿠션에서 궁둥이를 벌떡 떼어 일어났다. 허둥지둥 커튼을 도로 젖히고 유리창에 이마를 붙였다. 채도 없는 어둠에 잠긴 거리에는 승용차 하나 지나다니질 않았다. 도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나는 뒷걸음질로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패딩을 끌어내렸다.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는 부풀어진 몸집에 뒤뚱거리며 운동화를 내다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는 핸드폰을 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엇 하나라도 이상한 감이 있으면 사진을 찍을 요량이었다.

 

복도의 백열등은 밝다. 몇 층 되지 않는 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기에는 눈에 부담스럽게 띄어 비상구를 선택했다. 정문에 바짝 붙은 비상구 계단난간을 몇 번 돌아 내려오니, 로비의 경비원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가를 훔치며 슬쩍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나도 태연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유유히 로비를 빠져 나왔다. 햇빛이 더 없는 겨울밤의 공기가 피부를 후볐다. 두툼한 패딩을 입었음에도 미세한 틈을 한기가 껴안았다. 보도블록을 밟고 서니 차도를 가운데 두고 맞은편 도보 측에 컴컴한 어둠이 내리 앉은 인형가게가 시야를 메웠다. 횡단보도 앞에 쭈뼛대며 섰고, 보행자신호등은 아직 적신호를 비추고 있지만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횡단보도를 건너도 될 것 같았다. 쫓기는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차도를 가로질렀다. 높다란 가로등 불빛의 파장이 부연 젖빛으로 공중에 퍼졌다. 먹칠을 한 듯 시커먼 진열장에 희미한 빛이 뚝뚝 흘렀다. 인형이 멀뚱히 서있다.

 

잿빛머리의 인형은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가게주인이 퇴근 전에 옷을 갈아 입힌 모양인지, 아까는 프랑스식 외투와 실크자수가 놓인 복대를 착용하고 니삭스와 반질반질한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래로 떨어질수록 자줏빛이 선명해지는 전통 하카마를 입었다. 머리엔 생화 장식을 꽂았는데, 기다란 속눈썹이나 달떡 같은 얼굴에 잘 어울렸다. 침침한 빛 속에 배색으로 왜곡된 홍채가 살아있는 듯 형형했다. 엷은 피부 밑에 실핏줄이 잠들어있는 듯 불그스름한 입술이나 보얀 피부를 보면 엄청난 수작업을 요했을 것이 틀림없다. 목재인형임에도 어루만지면 내 손바닥과 같은 살성을 가진 살갗이 부드럽게 달라붙어올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썹을 치켜떴다. 배꼽에 정갈하게 모은 손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열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을 끔벅이지도 못하고 화한 기운이 안구 전면에 끼쳐올 때까지 부릅뜬 채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눈을 힘주어 감았다 도로 슬그머니 떠보았다. 머릿속이 진창으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구제관절인형이 아니라 마네킹이었던가?

 

……구제관절 아니었나……?

 

두 달 동안 봐온 게 헛것이 아니라면 분명 진열장에 배치된 인형들은 죄 구제관절인데. 그래서 팔뚝과, 어깨와, 무릎 같은 곳은 각자 다른 두 토막에 나사를 조여 이음쇠를 만들어놓았다. 팔꿈치가 완성되는 지점에서 팔목과 팔뚝이 본연 분리되어있는 것, 손가락도 마디마디 짧은 나무토막을 이음쇠에 연결하여 구부릴 수 있게 만든 것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확인해왔건만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배 위에 애매하게 깍지를 낀 두 손은 상아석고처럼 본래 그 모양으로 빚어진 듯 분리된 마디가 보이지 않았다. 갈래갈래 뻗은 손금과 함께, 저 스스로 맞잡은 곳에 옴폭 파인 살갗. 목재를 반질반질하게 갈아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고 코팅을 했다고 하기에는 피부가 섬유질의 피막으로 덮인 실리콘으로 감싼 듯 보드라워 보이잖은가. 나는 미간을 당겨 한껏 구겼다. 아무래도 이상해. 하카마의 소매를 걷어보면 팔뚝조차 이음접이 사라지고 없을 것 같다. 만약 내일 아침, 개장을 하기 전에 다시 진열장 앞을 찾아왔을 때 구제관절인형으로 돌아가 있다면 인형의 기이한 정체를 밝힐 확실할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꽁꽁 언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카메라 어플을 누르는 엄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렌즈를 통해 보아도 매끈하게 빚어진 손이다. 꼭 쥐면 온기가 녹아날 것 같다. 촬영버튼을 누르자 찰칵, 정적을 부수는 셔터음이 짧게 터져 어깨를 떨었다. 황급히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도로 구겨 넣었다. 싸늘한 공기에도 후드 안쪽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한숨을 길게 뽑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온몸이 살얼음으로 뒤덮였다. 아직 주머니에 웅크린 손등 옆으로 애매하게 저 혼자 빠져 나오던 엄지도 패딩 나일론 위에 우뚝 멎었다.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칼바람에 건조한 안구가 한 층 더 뻑뻑이 아려오자 다급히 올라온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수근은 꿈쩍도 않으니 팔을 들어 눈물을 닦을 길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막처럼 시계를 그득 가렸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걷힌 시야로 인형의 얼굴이 다시금 드러났다. 연갈색의 홍채, 그것의 면적은 좀 더 좁혀졌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거든. 입꼬리는 귀에 닿도록 활짝, 꽃잎으로 물을 들인 것 같은 윗입술 아래로는 가지런한 앞니의 일련. 인형이 내게 환하게, 저 젖빛 화광만큼이나 은은하게 웃어주었거든. 위화 없이 천천하고 자연스러운 미소.

 

나는 바로 기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꼿꼿하게 굳은 몸에서 다리가 삐걱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몇 걸음을 물러나다 조화롭지 않게 튀어나온 보도블록 모서리에 발을 헛디뎠다. 다행히 아주 고꾸라지기 전에 바닥을 짚었다. 인형은 계속해서 웃는 채였다. 손바닥의 엷은 피부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는지 미미하게 쓰라렸지만 나는 허둥지둥 블록을 딛고 일어나 내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가 빠지도록.

 

영혼이 깃든 인형의 설화에서 뻗어 나온 괴담이 있죠. 제가 보기에는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요.

그게 뭐죠?

이건, 오히려 반대에요. 이렇게 말해볼까요? 인형에 영혼이 깃드는 걸 인형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 말이죠.

그럼 이번 것은 사람이 인형이 되는 것이겠군요.

그런 셈이죠. 인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었더라, 라는……

 

다음날이었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신발장 앞에 기대어 앉아 밤을 새었다. 오묘한 빛깔의 서광을 보고 나서야 밤이 꼬박 기운 것을 알았다. 나는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눌렀다. 매끈한 손. 이렇게 따로 놓고 보니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의 것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장딴지가 찡하게 저렸다. 과연 내가 간밤에 본 것은 헛것이나, 망상에서 비롯된 환영 따위가 아니었을까. 가슴이 섬뜩하게 뛰기 시작했지만 용기를 내어 현관문을 열었다. 날은 밝았고 개장시간은 빠듯하게 십 분 정도가 남았다. 진열장에 멀뚱히 서있을 인형의 손이 여전히 매끄럽다면, 얼굴이 방싯 웃고 있다면 내가 대단한 착각을 한 것으로 치고 이 허튼 짓을 당장에 그만두자. 그렇게 다짐하고는 다시 도보로 나왔다.

 

머뭇거리며 진열장 앞에 섰을 때, 나는 허파 가득 채웠던 공기를 기다랗게 흘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구름 같은 입김이 얼굴을 스쳤다. 마디마디 끊어진 관절, 그 사이를 탄탄하게 조인 이음쇠와 나사의 향연. 반질반질하게 다듬어 코팅을 한 목재 피부, 밋밋한 무표정의 입술, 뚜렷한 연갈색 홍채와 가운데 점처럼 찍힌 동그란 동공. 어제의 일은 마치 꿈과 같다. 하지만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이 꿈이 아니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쇠꾸러미를 든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찢어진 눈으로 나를 진득이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습니까?

……

……

가게 구경 좀 하려고요.

 

주인은 문을 열어주고는 쪽방 문 앞에 세워두었던 목재부터 안아 옮겼다. 나는 그를 힐금거리고는 진열장 가까이 다가갔다.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얼굴만 보아왔던 인형의 오롯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분주한 쪽방을 곁눈질하고 슬그머니 인형의 소매를 거둬보았다. 팔꿈치 역시 스프링과 나사가 연결되어있었다. 팔목을 덥석 쥐어보았다. 역시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차디찬 목재였다. 일순간 팔등에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나는 그걸 벅벅 긁어 한기를 몰아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이질감이라는 것이 불쑥 공기에 섞여 날았다. 주인은 쪽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 옆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목례를 하고 가게를 빠져 나왔다. 다시 밖으로 나와 두툼한 강화유리 한 겹을 두고 보는 인형은 발그레한 뺨과 어울리지 않게 무감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른 아침산책을 시작한 사람들이 도보에 슬금슬금 모이기까지, 나는 한참 발을 떼지 못하고 인형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였다. 나는 고민 끝에 텅 빈 채 묵혀두었던 오래된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간밤에 찍은 인형의 사진과 함께 날짜를 적었다. 키보드 앞에서 몇 번이고 머뭇거렸다. 마음먹고 차분하게 쓰기로 한 관찰일지, 였지만 어째선가 그는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이것은 아무래도 인간人間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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