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계
오늘은 열려 있다.
나는 별 대단한 고민 없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요즘 도쿄는 우기다. 그런데 우기라고 해서 장대비가 매몰차게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미야기의 장마에 비해서는 훨씬 유했다. 그래도 도로는
다 흘려 보내지 못한 습기를 받들었다. 딱 그만큼의 비였다. 오색
불빛들이 맨바닥에 뚝뚝 묻어났다. 우에노 공원 호수에 핀 연잎 같다.
유독 비가 쏟아질 때 카페가 문을 열었다. 아닌가? 몇
번인가 안개만 잔뜩 낀 날에도 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 개장을 하는 카페인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직장을 다닌 게 햇수로 이 년째고, 한두 달에 한 번은
들르는 꼴이었으니까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인데 불과 한 달 전까지 감을 잡지 못했다. 개장시간이 매일
다르다. 들쑥날쑥 개장시간이 가게의 의의라든지…… 정체성에
일조를 하나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브루스 (ブルース)였다, 이름은. 그러니까 개장시간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농밀하고
졸린 음악처럼 참 느릿느릿하기도 했다. 약불에 중탕시킨 버터와 초콜릿처럼 걸쭉하고, 점성이 높아서 주걱으로 한 번 젓는 것도 귀찮아지는 만큼의 게으름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끈질겼다. 대개는 성의가 없다기보다 무심함에 가깝다는
평도 들었다. 손님들을 이리저리 방치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나도
아주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우선 그 제멋대로인 개장시간부터가 그랬다. 문패에는 분명 「17:00PM-02:00AM」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그 시간대가 지켜지는 일은 드물었다.
생맥주 한 잔이요.
안주는요?
그냥……
기본 드려요.
카페의 입구는 조그맸다. 지하 1층에 있는 곳이라 밑으로 꺼지는 계단을 내려가야 했는데, 지상의 1층과 2층을 차지한 프렌차이즈 바에 비해 간판이 작아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그 입구는 유명 베이커리, 화장품 로드샵, 그리고 1층과 2층을
다 먹은 브랜드 옷가게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려 부은 시멘트처럼 붙박여있었다. 내려가면 카페는 꽤
널찍했는데, 널찍한 것치고는 공간 활용도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전부
일인용 테이블로 도배되어있었으니 인테리어 초심자가 봤다고 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 만했다. 두 명이서
온 손님들은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더 끌어다 앉곤 했다. 그래도 거기 생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거스름이 용서가 되었다.
지하에 위치한 카페답게 어둑어둑했고, 조명도 쓸데없이 밝은
걸 쓰지 않았다. 딱히 이렇다 할 인테리어는 없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건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맞은편 벽에 보이는 커다란 시계였다. 얼마나 커다랗느냐면, 그쪽에는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나 소파가 죄 없고 시계만 덩그러니 붙어있는 정도였다. 그걸 떼내려면 성인 남자
서너 명은 달려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커다란 시계는 그 크기가 압도적이어서 아주 잠깐, 손님들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시키고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다 보면 금세 관심 밖이
되었다. 나는 같이 올 사람도 없거니와, 이 가게에서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저 시계와 바텐더뿐이라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계와 바텐더에 관해 특이한
사실을 알아냈다.
먼저 시계는, 보통의 시계보다 더 느리게 갔다. 정확히 어느 비율로 느리게 가는지 깨닫기까지는 인내가 필요했다. 신경을
곤두세워 살핀 결과, 이 시계는 1분이 구십 초였다. 그러니까 초침이 한 칸을 옮겨갈 때 일반적인 시간으로는 1.5초를
소비하는 셈이었다. 그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지만 다른 손님들도 대충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걸 움직이는 인테리어쯤으로 생각했다. 카페 입구에는 폐장시간이
새벽 두 시로 되어있었는데, 그때 즈음에 손님들이 핸드폰으로 진짜 시간을 확인하고서 하나 둘씩 일어서는
걸 보며 버티고 앉아있어도 바텐더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있던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
혼자 끈덕지게 테이블 앞에 남았는데도 바텐더는 천장 모퉁이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얼음을 깎고 잔을 닦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가게의 폐장 시간이 이 내부의 시계에 의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심은, 내가 아니었다면 매일이 다른 퇴근시간까지
가게에 홀로 남겨져 있었을 바텐더로 향했다.
폐장 안 하나요?
아직 폐장시간이 아니라서요.
저 시계는 고장 난 것 같은데요.
부지런히 싱크를 닦던 바텐더가 턱을 뻗어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아주
짧게 시선이 이마에 떨어지고,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시계가
고장이 났든 그가 싱크를 닦든 스피커에는 입 속에서 늘어진 은빛 실타래처럼 음악의 맥박이 꾸물꾸물 뛰었다. 바텐더는
걷어붙인 팔 그대로 손을 씻었다. 거뭇한 조명 아래서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고장 난 게 아니라,
느리게 가고 있는 것뿐인데요.
그는 짧게 대꾸하고 다 씻은 잔들을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설치된 진열대에 매달아놓았다. 그는 아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를, 나름 긴 시간 동안 스무 번 정도 봤을까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스무 번이라는 건 상당히 적은 숫자인데 이 년은 또 생각보다 길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를 많이 보지 않고도 오래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이 년 전에는 신장이 지금보다
미묘하게 작았고 약간 왜소했고 곱슬이 더 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도 아니고
방문만 열었다 하면 보이는 가족도 아니고 적당한 때에, 무언가 변했다 싶을 때 꾸준히 보아와서 나는
그의 변화를 함께 했다. 우리는 이상한 사이였다. 그는 이
가게가 무료했는지 그런 이상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내게 주문 외의 다른 말을 걸어온 것은
내가 시계의 비밀을 안 바로 그 한 달 전이었다.
대뜸, 서비스 맥주를 주겠다고 그랬다. 그 ‘서비스 맥주’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는데, 내가 들러 착석한 후 다른 손님들이 나갈 때까지 앉아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오곤 했다. 카페는 개장시간이 뒤죽박죽인 것도 있었지만 그 타이밍에 내가 들를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거긴 내가 자고 있을 때 열기도 했고, 퇴근을 좀 남겨두고 근무를
보고 있을 때 폐장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안 맞았다. 그래서
마침 딱, 나도 가게도 열려있는 몇 안 되는 날들에 그가 많이 반가워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억지로 표정을 꾸며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가 한두 달 만에 고개를 내밀면 그가 어둔 빛들을 반사해대는 접시와 와인병 사이로
웃었다.
폐장시간은 가게 안에서 보니까 알아도, 개장시간은 모르지 않아요?
그렇죠.
그럼 출근시간은 어떻게 해요? 매일 다르잖아요.
매일 다르죠. 하지만 세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가게는 오후 다섯 시에 문을 열어서 새벽 두 시에 문을 닫아요. 그러니까
영업시간은 총 아홉 시간인데 여기 아홉 시간 하고 바깥에 아홉 시간 하고는 다르죠. 그거랑 이거랑 14,400초 차이가 나는데…… 그러니까 네 시간 차이인 거예요. 스가와라 씨 입장에서 따지면 열세 시간을 일하는 셈이고. 그러면
다시 오후 다섯 시에 문을 열기까지 열다섯 시간이 남는데…… 이 역시 내부의 이야기고, 스가와라 씨한테는 우리 가게가 스물두 시간 하고 삼십 분 동안 폐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거지요. 그가 들어도 소용 없을 것 같은 긴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가
‘서비스’로 내온 맥주 거품층이 얇아질 때까지 두꺼운 잔
유리를 손톱 끄트머리로 쳐보기만 했다. 어어, 그렇군요. 어렵사리 짧은 대답을 내놓은 후에 뒷머릴 긁었다.
그 정도면 격일 근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말이 그렇게 되나요?
복잡하네요.
차라리 바깥의 시간도 가게의 시간과 같았다면, 이렇게 머리
굴릴 일은 없을 텐데요. 그는 내 말을 듣고 짧게 웃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가게는 있을 필요도 없을 거예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그나저나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직원들이 그렇게 부르잖아요. 나는 사와무라가 몇 번 연락을 하고
데리러 왔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내일은 회식이 있다. 설사
카페가 오늘과 같은 시간에 개장한다고 해도 들를 수가 없다. 나는 새로이 채워진 맥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거의 다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잔이 묵직해서 보니까 아직 반도 못 비웠다. 내
한 모금은 어린아이 한 줌만큼 작았다. 같이 마셔요. 에, 근무 중 음주? 둘밖에 없으니까.
그는 땅콩과 프라첼로 구성된 기본 안주를 한 접시 더 내왔다. 나는
묵직히 걸린 채로 묵묵히 초침을 미는 시계를 흘끔거렸다. 퇴근까지는 한참 먼 것 같고, 밖엔 몇 시려나. 우리는 마주앉아 맥주를 좀 더 마셨다. 사람 두 명이 덩그러니 앉아있기에 널찍한 카페 홀에는 여전히 졸음이 쏟아지는 블루스가 흐르고 0.5초가 더 느린 시계 초침소리가 귓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말이 적지는 않았지만 또 번거롭게 많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아둔하지 않고, 되려 영리한 편인 것 같아서, 그가 가진 모종의 친절함과 간결함이
계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것은 내 과대해석일 것이다.
그는 그런 것들이 이미 피부 밑으로 흡수된 것 같았다. 친절함, 까지는 무신경하더라도 그의 간결함을 생각하노라면 이 준수한 얼굴을 한 청년이 평범하게 느껴지다가도 문득 신비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말만 하는구나 싶었다. 나와 그는 말마디 없이 맥주를 더 홀짝였고, 나는 그 새에 손목시계를 몇 번 훔쳐보았다. 새벽 세 시 십오 분이다. 출근이 아홉 시까지고 집에서는 여덟 시에 나가야 하니 지금 돌아가서 씻어도 서너 시간밖에는 못 자겠다. 그래도 그 잠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가? 나는 핸드폰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남자는 고개를 들긴 했지만 어딜 가느냐고 묻진 않았다.
그에게는 테이블에 앉고 일어서는 풍경들이 익숙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저,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도 그가 말이 없었다. 홀을 가로질러 계단 초석을 밟았을 때야 남자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손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느려지고 있어요.
네?
시계.
그가 불현듯 등 뒤에 말을 꺼내고 무릎에서 경첩소리가 났다. 나는
그의 얼굴보다 내 무릎을 먼저 보았다. 거기엔 뼈가 아닌 다른 종류의 이음쇠가 있는 것 같았다. 그 후에 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입구에서
보는 카페 홀의 풍경은 습지에 공고히 지어진 굴 속 같다.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에게서 저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런 낯을 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점점 더. 나중에는 초침이 옮겨가는 데 3초가 걸릴지도 몰라요. 조금 먼 미래의 얘기지만, 뭐.
처음으로 남자가, 필요하지 않은 말을 했나 싶었다.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말은 듣기에 불편했다. 이곳을 또 방문할 때는 아마 다음 달 초가 될 것 같다. 그때는
또 얼마나 느려져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불편함이 피부에 닿았다. 그 말에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그러고 보니 남자는 대답만
하고 나는 질문만 해왔구나.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샐쭉 웃었다. 어쩐지
창피해졌다. 어설피 같이 미소를 걸자, 그가 웃는 입을 하고
그런 얘길 했다.
사실…… 조금 힘들어요.
인어의 세습
인테리어를 더 할까 봐요.
근 한 달 만에 들렀을 때 남자가 대뜸 한 말이었다. 그는
뒷머리를 조금 자른 것 같았다. 내부 조정을 조금 했던 것인지 테이블이 한 칸씩 밀려있었다. 나는 가방을 벗어 의자에 놓으며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요? 뭐를 더요? 그가 혹여 저 시계를 뗄 생각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 벽과 인접한 측면 벽 쪽이 너무 휑해서, 거기에
뭘 채워 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액자만한 게 없죠, 그럼. 생각 없이 뱉은 말에 그가 제 턱을 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와인잔을
찍은 사진이나 핀업걸이 그려진 일러스트를 끼워 넣은 액자는 시중 인테리어샵에서 쉽게 살 수 있었다.
액자, 액자가 역시 좋겠죠.
네, 액자요. 별 소용없는 짤막한 대화가 잠시
이어지다 끊겼고, 남자는 500cc 생맥주용 잔을 꺼냈다. 내가 시키는 게 늘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복불복
개장시간의 탓도 있지만, 여하튼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들르는 손님을 기억해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무슨 정을 느꼈는지 그에게 언젠가 밥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의자를 바싹 끌어당겼다. 여전히 안쪽 벽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시계가 눈에 들어찼다. 얼마나 느려졌을까? 대충 봐서는 모르겠다.
인어를 걸어다 놓으면 좋겠어요.
맥주와 기본안주를 내오며 그가 그렇게 말했다. 네? 멍청히 되묻고 눈을 껌뻑이는 동안 그가 의자를 끌어다 내 앞에 앉았다. 인어
그림이요. 그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아아, 인어요. 그거 멋지네요. 멋진데, 왜 하필 인어일까. 나는 인어가 징그럽다. 어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인어도 그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람의 것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살갗 위를 덮고 있을 미끌미끌한 비늘이나, 거기에서 둥둥 풍겨올 비린내 같은 것들을 상상하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혹
정말 물고기처럼, 몸통을 두 동강으로 잘라내도 고통 한 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그 신비로운 동물은 바다에 산다고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인어는 내가 생각하는 낯섦 중에 제일 낯설다. 어째 불가사의하고
또한 친숙해서 그렇다. 몸통 반쪽이 인간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어디엔가 존재할 것만 같은 동물이라 꺼림칙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봐버린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그게 그렇게 아름답게 생겼을 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다 동화를 통해 인어를 보고 자라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인어 그림이 걸린다면 틀림없이 그 동화의
전형이 걸리겠지. 맥주를 마시자 입술 창구로 허옇게 거품이 묻어났다.
그걸 혀로 핥기까지, 남자는 잠자코 나를 지켜보다 뜬금없는 소릴 했다.
인어의 유래를 아세요?
유래요?
네.
그와 내가 어딘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어의
존재가 아니라 유래를 묻는 사람이라니, 내심 반가웠다. 그리고
그건 맥락이 무엇이 되었든 ‘생맥주요?’를 제외하고 그가
내게 물어온 드문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번 것처럼 역시, 대답하기가
어렵다. 인어의 유래를 내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딱히 일상에 지장이 가지 않을뿐더러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다만 인어는 불편한 동물이죠. 어긋나게 내놓은 대답에 그는 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주었다.
인어는 중간층인 것 같아요. 중간 단계에 있는 동물 말예요.
진화나 퇴화의?
네.
그렇지 않고서야, 반인반수일 리가 없다. 애초에 인어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물고기가 인간으로
진화하다 멈춘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이 물고기로 퇴화하다 멈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어라는 것은 애매한 동물이다. 그렇다면 왜 물고기는 사람이
되려 했나. 혹은 왜 사람은 물고기가 되려 했나.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요? 빤한 목소리로 묻자 잠자코 얘길 듣던 그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가 든 유리잔을 흔들며
대답했다. 나는 후자요. 거품층이 사라진 맥주는 까딱거리는
잔 속에서 곧 흘러 넘칠 것 같았다.
못 견뎌서, 물로 간 게 아닐까요.
아아.
……
못 견뎌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그리고 앞으로 몇 시간을 더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어가 바다에 살 리 없죠. 그렇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진회색의 심해에서. 꼭, 그…… 습지에 잠긴 동굴 같은 곳에.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때마침 바다 깊은 곳의 묵직한
물결 같은 노래가 가게 안에 넘실댔다. 가뜩이나 야심한 시간에 졸음마저 쏟아지게 만드는 블루스였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비워낸 맥주잔을 옆으로 밀고 고개를 괴어 비스듬히 누웠다.
아아, 졸려요. 내 목소리가 중얼중얼했다. 그는 거의 비우지 않은 맥주잔을 달그락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졸려요? 졸려요. 더듬어보면 내일이 주말이었다. 오늘은 아마 그가 퇴근을 할 때까지 카페에 남아도 좋을 것 같았다. 모로
누운 시선이 시간을 읽는 데 결렸다. 나는 묵직한 고개를 들어올려 느릿느릿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 사십 몇 분이다.
그는 일어나서 식탁을 치웠다. 아직 반이나 남은 제 잔은 놔두고
내가 다 비워버린 유리잔과 땅콩 부스러기가 뒹구는 접시를 가지고 갔다. 나 누운 식탁 외에도 다른 손님들이
있다가 간 자리들을 싹싹 닦고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아일랜드 식탁 앞 싱크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접시 덜그럭거리고 잔이 끼리끼리 예민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스피커의 블루스를 잡아먹었다. 가사들이 흐물흐물 들려왔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a love). 자요? 그는 싱크 너머에서 가끔씩 나를 불렀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아니요, 하는 나긋나긋한 대답을 내놓았다. 싱크대 수압이
워낙 세서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규칙적으로 나를 불렀다. 자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물 소리가 멎을 때쯤에 졸음이 조금 달아났다.
내일 주말이면 일 없겠네요.
그으렇죠.
그럼 더 마셔요?
그건 안 되죠. 그쪽, 도
퇴근을 해야 하고……
그쪽, 하고서 말을 흐렸다.
남자는 설거지를 마치고 더워 그런지 셔츠를 걷어 올린 채로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미적지근해져서
아까보다 맛이 삭았을 맥주에 손을 댔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호칭을 불러버린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머리를 받치고 있었던 팔뚝이 저릿저릿해진 탓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그는 잔 끄트머리에서 입술을 떼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뭐 대단한 거라도 물은 것처럼 그랬다. 그는 내 졸린 눈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반달처럼
웃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토오루, 요.
그는 어느 새 맥주를 저만치 치워 놓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토오루, 하고 소리 내어 혀에 물어보았다. 둥글둥글한 이름이다. 그의 유순한 구석과 잘 어울린다. 스가와라 씨도 알려주세요. 그가 손끝으로 내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재촉했다. 예? 멍청하게 반문하자 그가 제 이름만큼이나 둥그렇게
웃었다. 뒤의 이름이요. 문득 콧방울에 닿은 토오루의 손가락에서
기이한 느낌이 났다. 그건 얇게 가공한 조개껍데기 같기도 했고 은박지를 뜯어 딱풀로 붙인 것 같기도
했다. 살갗이며, 동시에 살갗이 아닌 피부조직의 경계가 희미하게
코끝에 느껴졌다. 미적거리던 눈을 또렷이 떴다. 코우시예요, 대답하자 그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코우시, 코우시. 그가
몇 번을 되뇄다. 코우시, 집이 어디에요. 다시 잠이 쏟아졌다. 요 며칠간 야근을 좀 했던 게 문제인가. 잘 모르겠다. 그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코우시, 어디 살아요. 집주소는
복잡하다. 대로변에 살고 있질 않아서 그렇다. 나도 내 집주소를
다 외고 다니진 않는다. 교통비 말고 내가 택시를 잘 잡아 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긴자거리에……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위층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죄 차지한 건물 모퉁이에 편의점에 있는데, 그
편의점을 끼고 돌면 전혀 다른 세계처럼 펼쳐진 풍경이 있고, 종이를 접어다 놓은 것처럼 납작하게 눌린
집들과…… 긴자거리에……
긴자거리, 긴자거리, 그리고
더 이상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는 난생 처음 보는 곳에 있었다. 천장은 아치형이고 잿빛으로 컴컴해서 굴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았다. 마땅히
스위치가 없는 것 같아서 눈이 뻐근한 핸드폰 불빛에 의존하여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누워있던
곳이 카페에 딸린 숙직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숙직실 내부를 비춰보았다. 캄캄하기만 했지만 옷장에 옷걸이도 있었고 매트리스, 담요, 베개, 거울이 있었다. 앉은뱅이
식탁 하나와…… 어째 숙직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여러 가지들이 찬 듯싶다. 나는 부스스한 뒷머리를 털었다. 손목에 찬 시계는 오전 아홉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숙직실 밖으로 나오니 주방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왜 그리 곯아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어의 노래라도 들은 것처럼. 그게 세이렌의 노랜가, 인어의 노랜가? 여하튼 둘 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아침 댓바람인데 카페는 여전히 어둑어둑했고 저녁식사 후에나 들을 법한 블루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빛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방에 들르지 않고 출구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보았다. 거기엔 유리문을 통해 빛이 들어왔다. 문고리를 만져보았는데 잠겨있었다. 문패에 <OPENED>라고 쓰인 쪽이 안쪽으로 돌려있는
것을 보아서는, 폐장시간이다. 폐장한 카페, 아침, 도마 위로 칼 다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블루스. 이상한 조합이다.
코우시, 일어났어요?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서 토오루가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햄과 피망
볶는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동굴 같은 컴컴함을 눈 앞에 두고 이마에 댕그랑 댕그랑 부서지는 이른 오전의
빛을 맞았다. 밥 먹으러 와요. 그가 손짓했다. 나는 어정쩡히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정수리에 번지던 자연광이 점점
희미해졌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어두워졌고, 나는 알맞게 컴컴한 곳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천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전구알에 빛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전등은 별로 실용적이지 않다. 그는
양손에 접시를 들고 걸어왔다.
문득 생각했다. 빛이 낯설다.
심인광고
연애라는 말이 너무 가벼워졌다고
나는 생각해요. 연戀도 애愛도 절대로 가벼운 감정들이 아닌데 그 둘이 만나면 시시껄렁해져요. 외로워서
그리워하는 거 아니잖아요. 외로워서 사랑하는 거 아니고……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얘기들을 토오루는 손깍지를 끼고 듣고 있었다. 주말 새벽이었다. 원래 퇴근시각보다 세 시간 정도 늦게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육체도 정신도 피로함을 호소했는데, 호소하는 것이 전부였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도 감은 채로 정신이 깨어있었다. 낯선 곳에 우연히 들른 호텔 방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일어나서 바깥바람을 좀 쐬고 다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 신호등
앞에서 카페의 현판이 <OPEN>으로 돌려진 것을 보았다.
나는 줄곧 저녁을 먹을 즈음이 조금 넘어 가게가 열려있는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새벽에 열린 것은 처음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신호등 불이 바뀔 때까지 가게의 조그만 입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밖에선
아마, 새벽 세네 시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빛이 있다면 가로등이었다. 웅성거리는 빛들을 전구알 안에 동그랗게 모아놓은. 가로등은 겨우 제 발 밑을 밝혀놓았으니 빛이 사방에 스미지 못하고 주위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있었다. 네온사인 활발한 저녁 즈음에 들여다보는 카페의 내부는 전등 각각이 희미해서 다른 가게들에 비해 어두웠는데, 새벽에는 가로등쯤으로 보였다.
화장품 로드샵도 개방식 문고리에다 자물쇠를 채워놨고 브랜드 의류 매장도 셔터를 내려 닫고 있었다. 거리에는 엔진을 가동하며 바퀴 자국을 남기고 가는 동력들의 소음 하나 없었다.
고요하고, 어둠인데, 그 커다란 샵들 사이에
애매하게 낀 돌멩이처럼 움츠리고 있는 카페의 유리문 속에 자근자근한 빛이 모여있다. 널찍한 대로변에
저 좁다란 곳만이 촛불 같이 심약하고 끈질기게 움트고 속닥거리고, 그런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 아귀의 빛을 본 물고기처럼 이끌리듯 신호등을 건넜다. 인어는 혹 아귀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텅 빈 테이블 사이에 토오루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이
괴연한 시각에 들른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돈 안 가지고 왔어요.
했는데, 그가 맥주 두 잔을 내왔다. ‘단골이니까’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한두 달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하는 사람도
단골이라고 입을 삐죽거렸는데 그가 안주까지 가져다 놓으면서 히죽 웃었다. 밖에서 보았을 땐 불그스름했던
가게가 내부로 들어오니 막상 밝진 않았다. 여전히 촛불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밖에서 본 건 빛이 번진 자국이었구나, 싶었다. 토오루는
방금 전까지 설거지라도 하고 있었는지 손이 차가웠다.
잠이 안 왔어요.
그래서 여기 왔어요?
네, 뭐……
코우시 씨는 여자친구 없구나.
그 말에 내가 버럭, 장난스런 화를 낸 시점으로 어쩌다 화제는 연애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꼭 삼 년 전이라고 그가 그랬다.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삼 년 전이라고 했다. 나는 짧은 연애를 많이 거듭했다고 고백했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았다. 단기에 지친 것 같았다. 연애라는 말이 너무 가벼워졌다고 나는 생각해요. 웃으며 말했는데
그는 꽤 진지한 낯을 하고 들었다. 외로워서 그리워하는 거 아니잖아요. 외로워서 사랑하는 거 아니고……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토오루는 기다란 팔로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비스듬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에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워하다 보니까 외로워지고, 사랑하다 보니까 외로워지데요. 나는 잔을 입에 문 채로 눈을 굴렸다.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여 고개를 주억거려 동조했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훔칠 때까지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코우시 씨랑 있을 땐 외롭지 않아요. 토오루가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대꾸를 하기엔 독백에 가까운 말이어서, 나는 잔을 쥔 채로 보리빛 일렁이는 맥주 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우리의
침묵 사이를 여전한 블루스가 메웠다. 저 노래가 나오지 않는 시간은 언제일까. 저녁 즈음에 찾아와도 흐르고 있고, 아침에 나와도, 이 새벽 한가운데에도 멀쩡히 들리고 있으니 졸리고 나른한 이 노랫가락은 쉬지 않고 가게를 행성처럼 맴도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코우시 씨가 좋아요. 침묵을 깬 그의 말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연애, 하고 싶어요.
……
코우시 씨랑.
다급하게 잔을 내려놓았지만 다급하게 꺼낼 말이 없었다. 나는
손마디를 꺾으며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그는 몇 마디를 꺼내놓곤 팔꿈치를 탁자에 얹고 나를 기다렸다. 말을 꺼내기 전에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밀려왔다. 한참 만에 다문 입을 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단호한 한 마디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토오루가 내 혀끝을 주시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느낀 빛만큼이나 낯설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내놓았다.
……왜요?
그것도 아주 멍청한 질문이었다. 토오루는 정자세로 나를 곧이
보았다. 나에 비해 그의 눈은 분명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장난치는 거죠? 웃어넘기려던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토오루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웃으며 말했다. 둘밖에 없잖아요. 그의 답이 조금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애매했다. 나는 손을 탁자
밑으로 넣었다. 손마디를 힘껏 쥐어 뜯었다. 그러나 이내
그것도 힘이 빠져 손을 도로 테이블 위에 얹었다. 둘밖에 없다. 거기서
그가 무엇을 이끌어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식은땀이 돋는 와중에 일관적으로 나른하고 졸린 노랫말이 귓등을
스쳤다. 알아들을 수 있는 짧은 영어들로,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if love
makes you lonely),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요?
유일하므로.
코우시 씨가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매일 목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컵을 쥐고 덜그럭거리는 내 손목을 그가 가만히 잡고 말했다. 외로워서가 아니에요. 문득 요즘 들어 심신은 피로해도 외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와 말을 섞게 되며 알고
보니 내가 외로웠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늘 나름대로 바쁘고, 나름대로
짜증나는 일들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한결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제각각의 방향으로 날뛰고 있었고 그 와중에 한 곳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면 토오루였다. 그래서
가끔 달리기를 멈추고 이 가게를 기웃거릴 여유라는 게 내게 생겼다. 그저 거기에 덩그러니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나도 외로워서 토오루 씨를 찾아오는 건 아녜요……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침을 삼켰다. 지금은 무슨 말이든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외로워서 서로를 만나는 게 아닌데, 만나다
보니 외롭지 않게 되었을 뿐인데. 이해할 수 있는데 한편으론 단정하기 어려웠다. 인생에 질문이 전부여서 답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뻐끔거렸다. 그가
기다려주어도 충분히 기다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앞으로 바싹 끌어왔던 몸을 저만치 뒤로 밀었다. 사뭇 심각했던 얼굴이 도로 장난스런 미소를 걸고 있었다. 잠시 꿈을
꾼 듯 눈앞이 번쩍였다. 내가 얼떨떨한 낯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가 손가락을 주무르며 손장난을 했다. 나를 곧이 보던 시선을 거품이 흐르는 잔 벽에 넌지시 내려두고서
웃음기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 안 알려주는 건데.
……
연애하면 이름 가르쳐준다고 하고.
그는 말마디마다 웃고 있었지만 어째 웃는 것 같질 않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다 비우지 못한 잔을 그 쪽으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상 흔들림에 따라 작게 요동치는
맥주의 표면을 구경하던 그가 그제야 고갤 들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얼버무렸다. 저는, 어, 갈게요. 이제 좀 졸린 것 같아요. 빤히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하고 말았다. 나는
도망치듯 입구로 달려갔다. 동이 터오는지 영 캄캄하던 바깥에 희미한 빛줄기가 비쳤다. 문고리를 쥐고 돌리자 그가 등 뒤에서 나지막이 소리쳤다. 코우시
씨, 당분간 잘 지내요. 나는 문을 열다 말고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생뚱맞은 소릴 했다.
이 시계의 새벽 두 시가 여기 바깥의 새벽 두 시와 맞물리는 때가 있어요.
……그게 언젠데요?
언제든요.
시계가 점점 느려지고 있으니까…… 맞물릴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무책임한 투로. 그가 몇 발자국 다가왔다. 나는 문을 열고 뒷걸음질했다. 이제 거리에 바퀴 훑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없어도
주위가 푸르스름하고 선명하다. 토오루는 문턱을 넘지 않은 채 문고리를 잡고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웃는 듯 웃지 않고 있었다. 가게 안쪽에서 희미하게 블루스가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늘 똑같은 노래였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 꼭 만나요.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뒤를 돌아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뒤통수
너머로 조용히 경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면 큰일이라도 날까 열심히 앞을 보고 집까지 걸었다. 도착해서는 바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내 무게를 견디는 스프링이
푹 꺼졌다가 다시 위로 솟아올랐다. 내 몸이 매트리스 위에서 몇 번의 잔물결을 일으켰다. 시야에 새벽빛 닿아 푸르스름한 백지의 천장이 꽉 들어찼다. 그날
밤, 슬그머니 집에서 기어 나와 대로변 횡단보도를 기웃거렸다. 가게
현판에는 <CLOSED>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
다음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두 시간하고 삼십 분이 넘었는데도 가게는 열리지 않았다.
그 달 초에 나는 딱 두 가지의 일을 했다. 하나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었다. 늘 하던 일이다. 같이 신입으로 들어왔던
동료가 승진을 했다. 나는 그대로였다. 그만큼 꽁무니 빠지게
일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고, 내게 특출 난 뭔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불만은 없었다. 다이치와 포차에서 술을 마시며 한숨은 쉬었다. 한숨이 전부여서, 담배꽁초도 아니고 꽁초 짓이겨진 재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즈음에 파트타이머가 들어와서 혼자서 다 타던 커피를 나누어 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에게 동질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나는 스물여덟이고
걔는 스물셋이었다. 커피를 타는 스물셋 파트타이머는 옆에서 함께 커피를 타는 스물여덟 정규직원을 수상쩍은
눈으로 봤다. 나름 여러 가지의 변화가 있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대로인 회사생활이었다.
다른 하나는 심인광고지를 돌리는 일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심인광고라는
것을 해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광고지에 적을 말이 별로 없었다. 그의 키, 모른다. 얼핏
보아선 180대 초중반 같았다. 정확히는 모른다. 그래서 그냥 180대 초중반이라고 적었다. 체중? 미간을 있는 힘껏 구겼다.
사람을 찾는데 체중이라도 달아보고 연락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부분에 X를 치고 넘겼다. 핸드폰번호야 알 길이 없다. 흰 피부에, 갈색머리에…… 어떤
갈색머리냐고 하면, 몇 번을 벗겨낸 우리집 마룻바닥처럼 채도 낮은……
이래서야 광고지를 제대로 적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제대로 알고 쓴 정보는 이름뿐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의 사진 한 장 없었기 때문에 인상착의를 심혈을 기울여 썼음에도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직업은 바텐더…… 라고 적었지만 이제 그가 정말로 바텐더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퇴근을 하면 엉터리 심인광고지를 여기저기에 붙였다. 그 다음날 보면 몇 개는 떼여있었다. 그를 찾는 걸 도와줄 사람들이
떼어간 건지 순찰경이 떼어간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뭐야?
아, 다이치.
다이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내 팔뚝 밑에 깔린 심인광고지를 뺐다. 오이카와
토오루? 이게 누구야? 어떤 관계라고 명명할 수가 없어서
나는 대충 지인이라고 대답했다. 다이치는 흔한 사진 한 장 안 붙어있는 심인광고를 꽤 심도 있게 읽더니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사진을 붙여놓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걔 말에 냉큼 대답했다. 사진이 없어.
어쩌다 사라진 거야?
……몰라.
어디 있는지 아예 모르겠어? 짐작도 안 가?
나는 다이치가 돌려준 심인광고지를 가방 안에 넣었다. 문득
내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인광고지를 붙이며 가끔 불쑥불쑥 드는 생각이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그만둘 맘은 나지 않았다. 기계의 부속과 부속을 빗는 부품처럼 광고지를 붙였다. 한 장씩 붙일 때마다, 그리고 한 장씩 사라질 때마다 내가 점점
더 작아졌다. 몇 년 전, 입사를 할 때 큰맘 먹고 산 시계가
슬슬 고장 나는 듯했다. 휴대폰보다 2분 정도가 느렸다. 나는 탁자 앞에 팔베개를 하고 머리를 처박았다.
아니, 짐작은 가.
팔뚝과 팔뚝 안에서 협소해진 공간에 밀집된 공기 사이에 목소리가 꾸역꾸역 눌러앉았다.
그런데 내가 못 찾아가겠어……
우는 남자를 위한 블루스
가게가 문을 닫은 지 한 달째였다. 아니, 그 한 달 사이에 언제 한 번은 열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게 내가
기웃거린 시간은 아니었다. 여전히 심인광고를 붙이고 다녔고,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쑥쑥 줄어들었다. 창피함과 한심함의 크기가 내 크기와 반비례했다. 내가 작아질수록 나를 제외한 공간이 커져갔다. 거기서 나만 덩그러니
조그맸다. 매일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점점 쭈그러들었다.
장식용이라고만 생각하던 손목시계의 시간도 함께 느려졌다. 장식용이라곤 생각했지만 점점 더뎌지는
초침이 신경 쓰였다. 그 즈음에 나는 외롭다,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었다. 나는 새벽 두 시마다 알람을 맞춰두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조금 졸다가도 새벽 두 시만 되면 알람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무책임하게까지 들리던 토오루의 말이 머릿속을 공전했다. 이 시계의
새벽 두 시가 여기 바깥의 새벽 두 시와 맞물리는 때가 있어요. 그때 꼭 만나요, 그때 꼭 만나요.
그 와중에 반가웠던 것은 블루스였다. 주말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그 노래가 나왔다. 카페에서 내내 흐르고 있던 것 말이다. 중간부터
틀어서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가게에 있었을 때 언뜻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던 몇 구절이 귓구멍에 딱
맞아 들었다. 그래, 그 노래구나. 가사를 더듬어 핸드폰으로 찾아보았는데 딱히 음원은 없었다. 대중화되지
않은 블루스라서 그런지 일본 온라인 서비스에는 등록되지 않은 곡이었다. 나는 동영상 사이트에서나 그
노랠 찾아 켜놓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들 가운데에 유일하게 귀에 집히는 구절들이
몇 초의 간격으로 지나갔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what it is to be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love makes you lonely,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주중에는 회사에 나가고 심인광고지를 돌리고, 주말엔 침대 위에
드러누워 블루스를 들었다. 그게 뭔갈 해소시켜주지는 못했지만 나름 기분을 내게는 했다. 내친김에 캔맥주도 따보았다. 토오루가 만들어준 것보다 맛은 덜했다. 블루스가 없이 침대 위에 누워있노라면, 이전에 그랬듯 낯선 호텔
방에 내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침대 옆에 딱 붙은 창문으로 햇살이 들이닥쳤다. 빛의 온도와 각도에 따라 그때그때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핸드폰과
손목시계와 햇빛의 조화가 번거로워, 천장까지 올라가 있던 발을 바닥까지 쳤다. 그 너머로 햇빛이 우물우물 갇혔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위가 주황빛으로
따가울 일도 없었다. 빛이 어느 정도 차단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주위는 여전히 외로웠다. 예전과 비슷했다. 제각각의 방향으로 날뛰고 있었고, 어디를 봐도 외로이 달리고 있어서
언뜻 보면 외롭지 않게 보였다. 결국은 모두가 홀로 있으니 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건 지난 얘기였다. 홀로 있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꿈이라도 꾸듯 맛보고 나니까 외로움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잘
보고, 잘 느꼈다. 거기에 알레르기라도 생긴 듯 예민해졌다. 참말 홀로 있을 때 정확히 발음해보았다. 외로워. 남들 앞에선 부러 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됐든 먼 사람이 됐든
내놓는 답은 거의 비슷했다. 그럼 누굴 만나면 되잖아. 그런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이치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거야?”하는 말이 나올 테지만. 그러게. 어쩌라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 ‘외롭지 않음’과 직결된 토오루를 부정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딸릴 수도 있고. 복합적으로, 뭐든, 나로 하여금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러 가는 길에 그의 가게를 지나쳤다. 여전히 <CLOSED>
문패를 내걸고 있었다. 가라아케를 먹으러 갔는데 생맥주가 함께 나왔다. 맛이 없었다. 울고 싶어졌고, ‘외롭다’라고 발음하고 싶어졌다. 회사 동료들 앞에서 그건 추레한 짓이었기
때문에 두통을 핑계로 먼저 퇴근을 했다. 동료들 앞에서 우는 것보다 한층 더 추레하게 거리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식당을 빠져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찾아 블루스를 틀었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what it is to be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love makes you lonely,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그가 나를 외롭게 한 적은 없었지. 다만 사랑하지 않는 게
너무 외로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간다. 무엇을 하고 있을지도 짐작이 간다. 폐장시간에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여태의 기억을 토대로 지어지는 이미지의 건축구가 있다. 카페에서 자고 일어난
그 아침의 숙직실을 기억한다. 단순한 가게의 숙직실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이것저것 많았던. 아치형 터널 모양의 천장과, 벽을 더듬어도 찾기 어렵던 스위치와. 그는 기다랗게 뻗은 몸을 굴 속에서 오므린 것 같았다. 문득 그날의
밤이 의아해진다. 그도 나와 숙직실에서 함께 잠을 잤을까.
도보를 조금 더 걷자 신호등이 나왔다. 적신호다. 나는 앞에 멈춰서 컴컴한 유리문을 들여다보았다. 현판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안에는 땅 밑으로 꺼지는 계단이 있고, 어둔
조명이 있고, 찾아도 나오질 않는 블루스가 흐르고, 동굴
같은 숙직실이 있고, 토오루가 있다. 머리에 하나씩 밝혀지면서
노랫말처럼 되뇐다. 토오루는 굴 속으로 갔다, 토오루는 굴
속으로 갔다. 창백한 피부 껍질을 떠올리면서. 토오루는 왜
인어가 되었나, 왜 뭍을 견딜 수 없었나…… 그 사람 웃는
입이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조금 힘들어요. 나 역시 근래 들어 뭍이 힘들다. 그를 따라 인어가 되는 것일까? 신호등이 청신호로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그 좁다란 유리문 앞에 멈춰 서서, 뒤집힌 현판과 함께 안쪽에 선명히 잠긴 자물쇠를 보았다. 가방을
멘 어깨가 무겁다. 잠시 가방을 벗어 바닥에 두고 문 앞에 무릎을 모아 쭈그려 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젯밤에 가게 앞에 붙여놓은 광고지가 또 뜯어지고 없다. 꼭
누군가 내게서 기회를 앗아가는 것 같다. 몸을 말아 앉으니 한층 더 작아진 기분이다. 나 이외의 공간이 불어나며 스스로 단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눈을 뜨고 자는 생선들이 내 뇌리에서 퍼덕였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그는,
「삐, 삐, 삐, 삐」
볼륨이 최고조로 올라가있던 핸드폰 알람이 새벽 같잖게 요란하게도 울렸다.
새벽 두 시다. 알람을 끈 후에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한 시 오십팔 분이다. 나는 손목을 감싸고 있던 시계를 풀어 내동댕이쳤다. 가죽 끈이 가방 옆에 뒤집어졌다. 잔뜩 오므려 세운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머리를 처박았다. 아, 괴롭다. 외롭다. 인어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저 시계가 느린 건지 핸드폰이 빠른 건지도 모르겠다. 이끼가 낀 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단칸이지만 지느러미를 퍼드득 움직여도 한 사람이 더 누울 공간이 있다. 그런데
나밖에 없다. 이런 건 싫다. 손목시계는 이 분이 더 느리다. 그리고 앞으로는 삼 분, 사 분으로 더 느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홀로 이 분이 더 느린 세상에서 살고, 삼 분, 사 분으로 느려질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일까? 잔뜩 웅크린 다리가
저려왔다. 지느러미가 되려나 봐, 지느러미가.
다리 위로 고갤 내리꽂고 있음에도 눈을 질끈 감았다. 발끝에
힘을 주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게 만드는 아릿한 감각이 퍼진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종아리가 찌릿찌릿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 발이 더 굳기 전에
무릎을 묶고 있던 팔을 풀었다. 맞은편에 세워진 가방 앞에 나동그라진 손목시계가 보였다. 손을 뻗었다. 가슴과 팔에 짓눌린 무릎이 뼈가 빠진 것 같은 통증을
호소했다. 손끝이 가죽 띠에 닿았다. 무릎이 파삭파삭 꿇렸다. 아, 외로워. 인어의
한 맺힌 노래 같다. 외로워. 그 말이 혀끝에서 굴러 나왔을
때, 문득 내 옆에 버티고 있던 유리문이 철렁거리며 열렸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코우시 씨.
……
토오루는 방금 자다 깬 듯 머리가 부슬부슬했다. 그의 다리
뒤로 여전히 벽 한 칸을 차지한 시계가 보였다. 어딘가 이상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모두 그대로였다. 바늘들은
두 시를 가리킨 상태에서 미동이 없었다. 며칠 전에 고장이 났거나, 배터리가
다 닳은 것일 수도 있다. 거 봐요, 고장 났다고 했잖아요, 하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시계에 팔을
뻗은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맨바닥을 더듬더듬 짚으니 그제야 시계가 뒤집혔다. 두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우시 씨, 그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간만에 그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이었다. 가라아케집에 있다 온
탓에 양장 위로 기름 냄새가 짙게 배어있었다. 그에게선 협소한 공간에서만 맡을 수 있는 좁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불현듯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종이뭉텅이가 눈에 들어왔다.
뒷면이 거칠게 뜯긴 흔적이 있었다. 심인광고지였다. 한
장이 아니라 몇 장이 뭉치로 들려있었다. 나는 가라아케집에서도 거리에서도 울지 않았던 추레한 울음이
다시금 눈자위를 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내 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려
내가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간만에 본 얼굴에 멍해진 머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정리해야 할 줄
모르고 방황했다. 하고 싶은 말이야 너무 많았다. 그 동안
무얼 했는지, 시계는 왜 저렇게 된 건지, 그리고 내가 잘못했다는
조금 우스운 말까지 늘어놓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그것들은 막상 성대를 투과하지 못했다.
내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토오루의 손이 불현듯 내 양장 옷깃을 꽉 그러쥐었다. 그는 팔에 쥐가 난 사람처럼 미동 없이 그러고서 숨을 멈추었다. 나도
그와 함께 숨을 죽였다. 불이 다 꺼지고 비상등 하나만 덩그러니 켜진 카페 안에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대로 흐르고만 있을 것 같은 곡조가 새어 나왔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what it is to be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love makes you lonely,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다만 사랑하지 않아 외롭다면
only
when you are lonely by not loving love
그것이 사랑입니다
that
is what it is to be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구간이 지나고, 내 숨소리가 조금씩
증폭했다. 울고 싶다. 같이 울고 싶다. 추레해서 보이기 싫었던 울음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와
끌어안고 목이 다 쉬도록 울면서, 내가 그의 바다로 헤엄쳐 들었음을 알리고 싶다. 인어가 되고 싶다. 아니, 이미
인어인 것 같다. 뭍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어가 되고 싶다. 고개를
내밀고 수면 위의 노래들을 즐기는 인어가 되고 싶다. 그가 이미 그렇게 했잖는가. 나를 자신의 심해로 끌어들였지 않나. 홀로 있는 게 아니다. 같이 있다. 재작년부터 우리는 줄곧 심해에 함께 있었다. 그가 내게 손짓했다. 와달라고. 뭍을
견딜 수 없어 물로 갔다고. 뭍만큼이나 물이 외로웠다고. 그래서
나는 인어가 될 줄을 알면서도 뻗친 그의 손을 잡아서, 나도 외로웠다고. 당신이 없는 뭍이 너무 외로워 차라리 물로 가겠다고 그랬다. 나는
목구멍 깊이 끓어 흐느꼈다.
외로워요.
내 등을 그러쥔 그의 팔을 갈퀴처럼 붙잡고 외로움을 끓였다. 뚜껑을
닫아둔 냄비처럼 끓어 넘쳤다. 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물로
돌아가든 뭍으로 다시 나오든 나랑 있어줘. 그는 나를 들어올렸다. 얽힌
지느러미가 심해로 미끄러졌다. 어둑어둑한 곳에 굴렀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 입맞춤을 퍼부어댔다. 나는 그의 뒷목을 그러쥐며 악을 썼다. 토오루, 외로워요. 외로워요. 그는 내 온몸을 조여 안으며 화답해주었다.
나도요……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