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맘에 든 건 이학년이 되어서였다. 좋아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똑 부러지게 확언할 수 없지만 그거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선배와 제대로 대화란 걸 하게 된 것도 이학년부터다. 새내기 OT는 필수가 아니라는 주변 말을 주워듣고 부러 가지 않았고, 일학년을 보낼 동안은 뾰족한 목표 없이 괜찮다는 강의는 이것저것 찔러보았다. 그나마 불참 시 페널티가 있다는 경고장을 받고 발 뒤축을 질질 끌어 참석한 것이 이학년 학과 진입생 파티였다. 거기서 그가 나눠주는 스케줄러와 학교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펜을 받았다. 재수를 했다는 그는 졸업반 스물네 살이었다.

 

조용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수다스럽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든 통하지 않나. 특별한 구석은 없는데 그런 이유로 튀지도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사람. 그래서 처음엔 맘에 들었다. 꽤 나랑 닮은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로서는 늘 적당히가 최선이었고, 그도 나름대로 적당한 사람 같았다…… 꼭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수강신청에 실패하고 삼사학년 권장용 전공선택강의를 무리하게 들으며 그와 시선이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몇 번 얽히면서였다. 어느 때부터다, 라기 보다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듯 천천히 경과하면서…… 그러니까, 시답잖게 느껴졌던 과정이라는 것이 그에게 꼭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시꺼먼 흑발도 아니요, 또 허옇게 질린 백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채도를 차지하고 있을 법한 잿빛 머리카락이 이미 그에 대한 설명을 절반 해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 어중간한 사람이었다.

 

츠키시마, 동아리 지원한 거 있어?

아뇨.

새내기 땐 해봤어?

그다지……

레저 클럽 들어오는 건 어때? 동아리 하나쯤은 해야지.

거기선 뭐 하는데요.

당구 좀 치다가…… 소모임으로 술 마시고?

 

선배는 당구를 못 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고백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꽤 별볼일 없는 투로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놨다. 그냥 술동이야, 술동. 그가 능숙하게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어깨를 후려쳤다. 알고 보니 그는 레저 클럽 말고도 배구 동아리에도 들어있었다. 병행하기 힘들지 않나요? 걱정은 둘째치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가 어느 쪽으로 해석했든 괜찮아라는 대답이 일관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상답안을 내놨다. 진짜 괜찮다든가, 혹은 괜찮은 척이라든가, 모 아니면 도라기보다는 그 말을 기계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안 괜찮다는 말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많은 것들이 나를 상당히 귀찮게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떨까.

 

나는 적당한 사람이다. 적당함과 어중간함은 다르다고…… 이전에는 몰랐지만 선배를 보며 조금씩 알아간다. 둘 모두 100%는 아니라는 성향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는 상당한 차이를 띤다. 적당하다 보면 안주하게 되고, 또 잔가지도 많이 쳐내게 되는 법이지 않은가. 아직까지 불만족스럽진 않다. 적당한 것으로는 안 된다는 계기를 만들어줄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 식이다. 어중간함이라 하면, 적당함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상태가 아닐까. 쉽게 말하면 발전된 적당함말이다. 적당함을 인지한 이후에,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때 바로 어중간함이 되는 것이다. 선배는 레저 클럽에서 당구는 못 쳤지만 참견은 잘한다고 했다. 배구에선 포지션 뭐예요? 세터. 그런데 주전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믿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차차 깨달아가며 나는 선배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일 그의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그를 가까이하지도 않을 정도로 꼴사납게 보고 있지 않았을까. 어중간함이라는 것은 참으로 그렇다. 본래 의욕이 앞서지 않는 이들은 적당한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나. 지금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사람을 더 완벽하게 완성시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건 아무래도, 없는 것이다. 어중간한 사람은 그 자체로 이물감이다. 특유의 원근 없는 거리로,

 

츠키시마는 연애 안 해?

……관심 없는데요.

에헤이, 지금 안 하면 너 나중에 후회한다.

 

알아가고 싶다는 듯 굴지만 사실은 알지 못해도 상관 없는 거지. 그는 쓸데없는 것엔 부러 고개를 더 들이밀고, 진정 중요한 것은 조용히 물러서 응시하며……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으로 사고를 맺는다. 이게 최선을 다하는 그만의 방법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그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난 구석 없이 그렇게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팔을 벌릴 때마다 내가 피부를 거친 뼛조각으로 사뭇 느끼는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군집 속에 내가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그가 최선을 다하는 방법으로써 중요한군집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

 

있지, 츠키시마.

.

 

또한 내가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고 만다는 것 말이다. 있지, 있지, 얘기 하나 들어줄래. . 꼭 비밀로 해야 한다. 왜 저한테 비밀 얘길 해요? 츠키시마는 뭐랄까, 한 귀로 듣고 흘려줄 것 같달까…… 거기서 그는 암묵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래서 그가 무슨 비밀을 들려주든 내가 들을지언정 그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와 비밀을 나누기보다, 비밀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시점에서 엿들은 것마냥 밀려드는 죄책감. 선배는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일주일 전 스포츠관에서 폐장시간에 일어난 낙하사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요약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는 핵심만 골라 말해주었다. 얼마 전에 체육관 조명이 떨어져서 주전세터가 중상을 입었다. 물론 사고였다. 하지만 내심 기분 좋았다. 당분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되었는데…… 당분간이 아니면 좋겠다. 미친놈같이 보일진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미친놈이 맞고…… 요즘 주말마다 신사에 가서 빌고 있다. 걔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츠키시마, 츠키시마. 듣고 있어? , 듣고 있어요.

 

그가 나를 제 자취방에 초대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마실래? 맥주를 땄지만 내가 고개를 저어서 그가 두 캔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오늘 병문안 갔다 왔어. 그는 냉장고를 뒤져 세 번째 맥주를 따며 말문을 텄다. 나는 그가 거실 바닥 위에 깔아준 요에 어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몸을 엉거주춤하게 일으켰다. 시야에 수직으로 뒤집힌 소파다리만 멀뚱히 보다가 갑자기 쨍한 부엌 조명을 바로 보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올리자, 그가 조명 밝기를 줄여주고 탁자 앞에 다릴 꼬고 앉았다. 캔을 입가에 가져갈 때마다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베갯잇을 쥐었다 펴며 따분한 손장난을 하다가, 눈을 내리깔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병문안은 왜 가요?

친했으니까. 안 가면 이상하잖아.

친했어요?

.

 

선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세 번째 맥주를 모조리 비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안중 밖이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맘에 드는 사람도 뭣도 아니었다면……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뭘 하고 있었으려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냉국에 빠지는 그런 비밀을 전해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집에 고치를 친 누에처럼 움츠려 누워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문득 그가 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텅 빈 맥주캔이 탁자 유리와 시원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성긴 걸음으로 이불을 헤집다 말고 조그맣게 웃었다. 뭐야, 내가 츠키시마 군 잡아먹기라도 해? 그 말에 내가 미간을 찌푸릴 때 즈음 그가 부엌 스위치를 내렸다. 좁은 방이 완연한 어둠에 잠겼다. 안경을 벗어 더듬더듬 베개 옆에 얹어놓으니 더욱 사방이 침침했다. 그만큼 우물쭈물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제 와 그를 미워해볼걸, 미워하려는 시도라도 해볼걸,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더 삐뚤었다면…… 바특 비틀어진 그를 똑같이 비틀어 보았다면 되려 정직하게 바로 선 그의 모습을 단번에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착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아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는 선배의 수더분한 구석보다도 묘하게 추잡스러운 이면들이 예각으로 날아와 머리에 박히지만, 그게 전부다.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맘에 들지 않지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 평소라면 쉽게 묻힐 한숨이 숨죽인 고요 속에서 두각을 보였다. 문득 선배가 내 팔뚝 위로 손을 얹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힘있게 주무른다. 그가 뭘 하는지 안다. 나를 협박하는 것이다. 내 편이 되어줄 거지? 하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저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면서. 그는 그런 것을 세련되게 요구하지만, 나에겐 재간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면 요구보단 구걸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건 싫다. 나는 다시 기력이 다하고, 입을 열어서 뭐든 그르칠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공범자가 된 기분. 아니, 애초에 선배의 범행이 아니지만 그는 꼭 제가 모든 일을 꾸민 것처럼 군다. 눈을 감으니 어둠 속에서 푸른빛으로 울렁거리는 벌레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눈꺼풀을 닫은 채로 열심히 눈을 굴리는 와중, 내 팔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뒷덜미를 눌렀다. 낮지는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얘기 하나 해줄까.

……

까마득한 옛날에, 신이 에덴동산을 만들었는데,

 

아담을 만들고, 그 다음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지.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선물로 주면서 그런 거야. 여기 있는 거 너네 맘대로 해도 상관없는데, 선악과는 건들지 말아라. 츠키시마, 이거 무슨 얘긴지 알지? 이브는 꽤 똑똑한 인간이었던 거야. 시키는 대로 구부정하게 말 잘 듣는 녀석들 중엔 똑똑한 애들 별로 없잖아. 선악과란 게 대체 뭐길래, 싶다가 눈치를 좀 챘겠지. 저걸 먹으면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리고 웃기잖아. 에덴동산을 선물로 덜컥 줘놓고서 정작 거기서 자라는 걸 먹지 말라니까, 누군들 의심을 못하겠어. 이브가 한참 궁금해하던 와중에 뱀이 나타난 거지. 따 먹어보라고 유혹을 하지 않든? 이 뱀이라는 생물도 신이 만든 건데 말이야, 이브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모든 게 너무 모순적인 거야. 신이란 작자가 인간도 선악과도 만들고 뱀도 만들었는데, 정작 그것들의 양상은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으니까…… 그때 즈음 깨달은 거지. 인간이 평생 말이나 잘 듣고 살다 죽으라고 있는 존잰 아니구나. 그래서 과감하게 그걸 베어 먹었어. 그래서 이브는 이성과 지혜를 얻고 그 대가로 괴리와 낙담도 얻게 된다. 츠키시마, 적당히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가 허를 찔러왔다. 내내 그의 검지 지문이 진하게 묻었을 뒷목이 절절하게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에 선명한 잇자국이 났을 것이다. 선배가 검지로 곧추 세워 내 뒷덜미에 원을 그렸다. 앞과 뒤로 이야기의 흔적들이 지그시 남는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자는 쾌차 후 복귀할 것이고, 그는 다시 주전에서 내려올 것이며, 또 괜찮단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를 누빌 것이다. 그리고 제일 괜찮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은 바로 내가 되지 않겠는가. 적당히 살아가는 내게 그와의 관계에서 남는 것은 이런 종류의 불편함. 붙잡고 놓지 못할 어중간한 마음들.

 

결국 이것이다.



fin.

 




3


스가와라는 통학 버스 맨 뒷좌석에 몸을 구겨 앉아 차멀미를 하고 있었다. 방학 중에 야심차게 짠 시간표엔 개강일인 화요일에 맞춰 강의를 오후로 모두 밀어두었는데, 하필 그 시간대에 미어 터지는 24번 버스의 처지를 간과하고 있던 게 함정이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아 빈 속에 토기가 쏠렸다. 평소보다 삼십 분은 더 늦게 일어난 날이었다. 핸드폰에 설정해둔 알람만 세 개, 탁상시계 알람까지 도합 네 개가 사방에서 약 오 분의 간격을 두고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데 듣지 못할 리가 없다고 자신만만했던 것이 불과 어제 아닌가. 대학 진학 이후 새내기로서 일 년간은 이십 년 동안 익숙하게 들어온 잔소리나 물 끓는 소리, 덜그럭덜그럭 식기 부딪치는 소란 등으로 아침잠을 깼던 스가와라 코우시는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패턴의 알람이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 학교 갈 때 내가 깨워준다니까.

이럴 줄 몰랐지…… 거의 도착했다. 너 어디야.

「오이카와 씨는 이제 공강이라 밥 먹으러 가요.

, 네에. 전 인문관 갑니다.

 

동거를 시작한 지는 겨우 한 달이다. 스가와라가 너저분한 제 방에서 추리고 추려 5호 박스 세 개에 나눠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을 정리해서 올라온 게 이월 초였다. 본래 어머니와 따로 외곽까지 올라와 지내다가 고심 끝에 동거를 결정한 것이 작년 십이월. 쿠로오와 오이카와가 하숙집에서 저들만 굴러 나와 방을 하나 얻어 월세를 나누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그보다 반년이 일렀다. 딱히 끈끈한 뭔가 있었다기보다는 두 사람 모두 교내 배구부에서 주전으로 활동 중이었고, 그래서 통학 시간이 얼추 맞은 덕이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배구했어? 대략 이 정도로 특별하지 않은 과거사를 삽질하는 것은 미뤄두고 두 사람은 학교 후문 쪽에서 도보로는 십오 분 가량 걸리는 적당한 가격의 월셋방을 구했다. 욕실을 제외하고도 방이 두 개였다. 부엌 딸린 널찍한 거실과 침대와 옷장 한 채가 들어갈만한 넉넉한 안방. 둘이 살면 넓고 셋이 살면 적당한 곳에 스가와라가 짐을 카트에 싣고 와서는 그곳을 적당하게 만들어주었다.

 

쿠로오는 이를 두고 별난 인연이라고 했다. 오이카와는 경영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스가와라는 쿠로오와 함께 인문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굳이 필요가 있겠냐며 OT를 쏙 빼먹은 스가와라에게 그와의 재회를 터뜨려준 것이 인문관에서였다. 처음에는 이랬다. , 너 카라스노네. 너 네코마네. 그러다가 기억을 더듬어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고 나서야 빈 자리를 채운답시고 슬금슬금 옆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쿠로오와는 간간히 교양을 함께 듣고 밥을 먹으며 말을 섞었고, 통학시간이 꽤 되는 것이 걱정이라는 고민도 털어놓았고, 쿠로오는 마찬가지라는 의사를 표했다. 당시 그는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와 맞닥뜨릴 일은 없었다. 경영관과 인문관이 사선 구도로 교정의 끝과 끝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스가와라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 배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날 쿠로오가 자취를 결정했다며 예비 룸메를 소개해준답시고 오이카와를 끌어 왔는데 그가 또 단번에 아는 체를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것이 별난 인연이라는 것은,

 

순전히 스가와라 때문이었다. 고교 시절엔 서로 턱 끝도 본 적이 없었던 쿠로오와 오이카와의 사이에 어떤 긴밀한 이음쇠가 된 것이 스가와라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리 해놓고서 저만 그 연결고리에서 쏙 빠져나갔다. 정말 배구 안 해? 어느 날 오이카와가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있는 힘껏 빨며 물었다. , 하는 대답이 지나치게 간결해서 창 밖으로 지그시 보기에는 이 대화가 오이카와의 독백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쿠로오는 그런 것을 좀처럼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든 걸 궁금해하고 언짢아하는 것은 자연스레 오이카와의 몫이 되었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한결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고교 부활동은 좋은 추억이었으나 나쁜 기억을 남겼다. 집약적인 언어로써. 오이카와 본인도 이런 류의 언어를 곧잘 쓰곤 했지만 굳이 스가와라 코우시에게서까지 비슷한 냄새를 맡긴 싫었다. 쓰는 것과 듣는 건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아슬아슬했네.

너무 적응 안 돼.

뭐가?

그냥, 집이.

한 달이면 충분한 거 같은데. 점심 안 먹고 나왔지?

 

대답을 듣기 전에 쿠로오는 조교의 부름에 짧게 대답했다. 이럴 거면 지정좌석을 따로 만드는 게 낫지. 스가와라는 훅 지나간 제 이름에 손을 펄럭이며 책상에 턱을 꽂았다. 코우시 군은 생각보다 맥이 없네. 스가와라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정수리를 누르는 손바닥을 버텨냈다. 정원 이백 명의 대형강의, 다섯 번째 줄의 어중간한 앞자리.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합이다. 교탁 밑에 부착된 거치대에 기다란 전선이 연결된 마이크가 매달려있었다. 성능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교수가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고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스가와라의 잠을 깨우는 데에 티끌만큼도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정말 꼴딱 조는 게 아닐까. 꿀강의라고 그래서 신청했는데, 영 맘에 안 차네. 스가와라가 고개를 모로 뉘인 채 중얼거리자 쿠로오가 그의 뒷목을 쥔 채 노트북을 켰다. 교수가 헛기침을 하기 전까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인생 편하게 사시네요, 스가와라 씨. 네가 인생 운운할 나이냐. 뒷방 늙은이처럼 말하지 마. 지는……

 

강의가 끝나고서는 십오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 시간을 인문관 지하 일층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한 조각씩을 사는 대신 오이카와에게 열렬히 문자 공세를 날리는 데 다 써먹었다. 오이카와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귀가하면 얼굴도 보고 속옷도 섞어 접고 밥상머리에서 쌀밥 식혀가며 얘기할 사람들인데 굳이 학교에서 비경제적으로 문자를 보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성질 급한 스가와라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도 매주 월, , 금에는 체육관 C동에서 온몸을 땀으로 적시는 쿠로오나 오이카와보다 스가와라의 처지가 좀 더 고달팠기 때문이다. 빨래를 제 것만 먼저 해놓으면 전기세가 어쨌다고 오이카와가 툴툴. 신발주머니에 젖은 운동복을 꺼내면 안에 땀냄새가 다 배겨서 주머니까지 세탁기에 통으로 빨아야 했고, 그러다 보면 빨래건조대 철심이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러면 먼저 빨았다는 이유로, 막 빤 것보다는 더 말랐지 않겠느냐는 설득력 있는 강요에 떠밀려 옷가지 몇 겹을 창문 난간에 널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빨래 안 하고 기다려?

「오늘 나 술 마셔」

「그럼 너 그 꼬린내 나는 거 종일 들고 다니려고?

「뭐래요 오이카와상은 꼬린내 같은 거 절대로 안 나」

 

스가와라는 답장을 않기로 했다. 뭐래? 쿠로오가 검지로 팔뚝을 꾹꾹 눌러왔다. 술 마신대. ? . 벌써 개강파티인 거야? 모르지. 그는 귀갓길에 맥주를 좀 사다 냉장고를 채워놔야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무슨 첫날부터 풀 강의야, 하고 스가와라는 볼멘소릴 하며 영 질린 낯을 했다. 조수석에서 배낭과 카트를 껴안고 투룸텔에 올라왔을 때만큼 진이 빠진다. 쿠로오는 삼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수업 잘 들어. 스가와라는 난간 밖으로 고갤 뺐다.

 

너도 늦게 들어와?

내가 왜.

배구.

아아, 배구.

……

하지 말고 그냥 집 갈까?

 

쿠로오가 느물느물 입꼬리를 찢었다. 테츠로 군, 그 웃음 너무 싫다…… 스가와라는 길게 뽑았던 고개를 도로 거두었다. 몸이 막 널은 빨래 같았다. 난간 아래로 두툼한 손바닥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윽고 웃음기 섞인 건조한 인사가 이어졌다. 쿠로오는 인문대 독서실로 향했고, 스가와라는 그대로 불문 교양을 들으러 한 층을 성큼 내려갔다. 그날, 스가와라가 붙여놓은 연강에서 짧은 오리엔테이션으로 끝난 강의는 불과 하나뿐이었고 쓸데없이 비싼 교양교재를 구입한 후에서야 익명장터에서 헌 교재들을 중고로 싸게 내놓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났을 때는 오후 네 시 사십오 분이었다. 그 즈음이면 하늘이 청록색이다. 스가와라는 백팩 끈을 조여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내 머리에서 휘발되었다. 정류장에 벤치가 구비되어있었지만 앉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금 위가 땅땅하게 부었는데도 스가와라는 고집스럽게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섰다.

 

버스를 타는 동안 선홍색 건물들을 지나왔다. 굳이 창틀에 턱을 괴고 있었더니 팔꿈치 밑으로 가느다란 사선 자국이 남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안을 하고 바로 매트리스 위로 엎어졌다. 엎어지고 나서야 빨래부터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가와라는 이미 드러누운 것을 핑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거실에 있는 일인용 매트리스는 손바닥 뒤집기에서 이긴 오이카와가 혼자 쓰는 것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맘대로 몸을 비볐다 하면 제 까탈스런 성격에 잔소릴 하지 않곤 못 배기겠지만 뭐 어떠랴. 눈을 감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셈해보았다. 쿠로오가 부활동을 끝내고 온다면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 오이카와가 술까지 마시고 들어오면 아마 시계바늘이 자정 인근. 촉박하지도 않지만 여유부릴 시간도 아니다. 내일도 오후 강의가 세 개. 그 전에는 은행에 들러 월세를 이체하고 인증서를 갱신해야 하니까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의식을 따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특별한 무언가에 다다르면 눈이 번쩍 뜨이게 된다. 안타깝게도 딱히 획기적인 것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계속 눈을 감고 있기로 했다.

 

쿠로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스가와라가 입을 벌린 지 한 시간하고 십오 분이 지나서였다. 춘곤증이라기보다는 천성적 바이오리듬에 가까운 낮잠을 주식 삼는 스가와라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습관대로 요란하지 않게 현관문을 열었고, 신발 뒤축에서 뒤꿈치를 빼내자마자 거실 매트리스에 천장을 바로 보고 자는 스가와라를 발견했다. 쿠로오는 잠시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아, 슬쩍 벌려진 스가와라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어 맞문 것이 전부였다. 그 후에는 한 바탕 샤워를 하고, 내의를 갈아입고, 빨래바구니에 그득 쌓인 옷가지들을 한아름 안아다가 세탁기에 쑤셔 넣어 세제를 붓고 돌렸다. 세탁이 오십 분, 탈수는 십오 분. 쿠로오는 뒷목에 수건을 두른 채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먹다가 탈수가 시작되었을 때 스가와라를 흔들었다.

 

코우시 군.

……

코우시.

으응.

술 마실래?

 

고꾸라져 누운 채 눈만 선뜩 뜬 스가와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게 방금 막 깬 사람한테 할 소리야? 쿠로오는 냉장고를 벌컥 열고 맥주 두 캔을 꺼내 흔들었다. 안주도 사왔어. 덧붙인 말에 그제야 스가와라가 허리를 말고 일어났다. 개강파티, 하고 쿠로오가 맥주 캔을 따주었다. 앉은뱅이 탁자를 두고 인접면에 앉아 와사비 가루에 땅콩을 섞어 흔들고, 치킨을 시키느니 마니 하는 얘기를 했다. 왜 봄비가 안 내릴까, 하고 중얼거리는 스가와라의 턱이 좀처럼 열리지를 않았다.

 

오이카와 들어오면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줄까? 단지 하루가 너무 고달팠기에, 여러모로 새롭지도 않지만 익숙지도 않았기에, 널브러져 있었을 뿐인데 저보다도 더 섬세한 듯 구는 쿠로오가 영 껄끄러웠다. 캔 끄트머릴 입술에 물고 답이 없자 쿠로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울 거 같은 얼굴을 해. 스가와라는 눈썹을 치켜 뜨고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랬나. 눈자위에 힘을 부릅 주고 맥주캔 한 쪽이 움푹 꺼질 정도로 쥐었다. 그런 거 아닌데, 하고 스가와라는 있는 힘을 다해 혼자 있고 싶어했다.

 



12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를 두고 의외의 사람이라고 했다. 상쾌군은 대학 와서 변한 거야,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종자야? 스가와라가 거기에다 대고 네가 고교 때 날 얼마나 봤다고 그러느냐, 한껏 꾸짖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새삼 그와의 인연이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이죠가 한창 치고 올라갈 때 카라스노는 주춤했고, 그 덕에 삼학년이 될 때까지는 연습경기에서조차 맞닥뜨릴 여건이 없었으므로 스가와라의 존재조차 몰랐지 않았나. 어쨌든 주전이었는데 말이다. 삼학년이 되고는 스가와라가 벤치로 가면서 예선에서도 삼 세트 중 겨우 하나 정도에 얼굴을 비췄다. 당시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꽤 성가셔했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한 세트를 코트 위에서 눈짓하며 예선 후에는 어렴풋이, 속도 참 좋은 인간이지, 하는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오이카와에게는 고교 졸업 후에야 제대로 안면을 알아갈 수 있게 된 스가와라가 귀찮다니, 힘들다니, 하는 불평을 하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이 기묘함이라는 것은 뼈가 간지러운 것처럼 시원히 긁을 수도 없는 깊은 근원에서 생겨나고 또한 머물러서, 오이카와는 내내 익숙한 척을 했다. 허둥대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을 못했다. 하지만 으레 모든 일이 그렇듯 잘 아는 척을 하다 보면 그것을 제대로 알 적정시기를 놓치는 법인데, 오이카와가 딱 그러했다. 그 적기가 언제였냐 하면…… 작년 크리스마스였다. 당시에 그는 OT에서 만나 교제한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밤거리를 춥지 않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그리 아득하지 않은 곳에서 머플러에 파묻힌 스가와라의 창백한 낯을 발견했다.

 

상쾌군은 매운 걸 엄청 먹는데 어쩜 이렇게 하얗지?

매운 거랑 피부랑 무슨 상관이야. 양념에 멜라닌이라도 있디?

매운 음식이 혈액순환을 도우니까…… 상쾌군 의외로 상식에 구멍.

됐고, 테츠로 좀 잡아와 봐. 생선 코너에 있지 않을까.

 

사월에서 오월 사이에는 봄비가 자주 내렸다. 덕분에 바람만 스쳐도 몸을 떠는 벚꽃이 빗길에 휩쓸려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처럼 장을 보자고 마음을 먹고 나온 날에도 비가 내려 신발 밑창이 자박하게 잠겼다. 오이카와는 그가 꽁지 젖은 신발끈을 다시 매듭지을 때까지 장바구니를 쿠로오와 죄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계단이 젖은 꽃잎으로 즐비한 것을 발견했고, 작년 십이월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떠올랐다. 아마 구 도쿄역 근처였을 것이다. 마주앉은 이는 그 주장임이 분명했다. 별말 없이 시선 한 올 얽어놓지 않고 함께 앉은 그들을 찰나에 지나쳤으나, 이십오 일이 바늘 한 칸으로 지났을 무렵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다시 돌아온 도쿄역에는 여전히 스가와라 코우시가 앉아있었다. 몇 시간 전과 다른 게 있었다면 그가 혼자였다는 점이었다. 단정히 앉아있었기 때문에 놀랄 일도 없이 허투루 보았다. 외로웠구나. 작년 겨울의 일을 올해 봄꽃이 만개할 때야 돌이켜본 오이카와는 요즘 따라 스가와라에게서 간극을 느꼈다. 세 명 중 키도 보폭도 제일 작은 스가와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걸음이 제일 빨랐다. 조금 밍기적거리다 보면 그의 뒤통수를 보고 있기 십상이었다.

 

중간고사로 각기 바쁜 세 명이 장을 보자고 모인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오이카와로 말하자면 이미 전공에 교양 두 개를 끝낸 상황이었고, 스가와라는 중간기간에 맞춰 배정된 교양시험 하나를 끝내고 금요일날 죄 몰려있는 전공시험 세 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쿠로오는 아직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여유를 떵떵 부리는 중이었다. 그들 중 뭘 믿고 가장 여유로운 쿠로오가 나머지 둘을 잘 구슬려 시내버스로 십 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에 간 것이었다. 미끄러운 도로에 조금 지연된 버스로 투덜거린 것은 스가와라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아 입구멍을 틀어막았다. 아침부터 맨홀에 동그랗게 고이던 비는 이른 오후까지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다리에 묻어났다.

 

필요한 것만 카트에 쓸어 담은 건 쿠로오였다. 그런데 카트를 지키고 있던 게 쿠로오가 아니라서, 그가 생선이며 유제품이며 두루마리 휴지며 리스트에 신중히 적어온 것들을 한아름 안고 카트로 돌아오면 그 안에 과자와 인스턴트 카레와 구운 땅콩, 시식만 해보고 꽂혀서 낚아챘을 냉동만두 등이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 베이커리 코너에서 쓸어온 것이 몇 개. 그것들은 죄다 오이카와가 손 뻗친 것들이다. 그는 저 먹고 싶은 것만 담아오기라도 하지, 쓸데없는 과소비로 최고봉을 달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가와라였다. 언젠가는 정어리 통조림을 다섯 개나 사다 놓고 손도 대지 않은 적이 있다. 네가 샀잖아, 왜 안 먹어. 뒤통수에 지그시 꿀밤을 먹이는 쿠로오를 피해서 스가와라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이번에도 보나마나 냄새 한 번 맡아보지 않을 낫토 네 묶음이 들어있었다. 스가와라가 휴지 줍듯 그걸 들고 왔을 때, 오이카와는 혀를 내두르며 질색했지만 아무 말도 않았다. 그래서 낫토 네 묶음도 고스란히 카운터에서 계산되었다.

 

피곤해 죽을 거 같아.

집 돌아가면 좀 자.

안 돼…… 내일이 전공이라니까. , 담배 피우고 싶다.

저번에 담배 한 번만 더 피우면 사람 아니고 개라며.

내가 언제, 누구한테.

한 달 전에, 오이카와 씨한테!

 

스가와라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이카와가 그 모습을 처음 본 게 십이월이었다. 그때 도쿄역에서 말이다. 필라멘트가 낡아서 그런지 가로등 하나가 소등되었을 때, 홀로 넋 놓고 앉아있던 스가와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쿄역을 빠져 나왔다. 그는 벽에 기대어 놀랍게도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뒤적였고, 그러다가 눈을 큼지막하게 뜬 오이카와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참 침묵 속에 서롤 응시하다가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에 오이카와가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스가와라가 덩달아 웃어 정적을 깨고 말았다. 상쾌군, 하기도 전에 스가와라가 손짓하며 그랬다. 오이카와, 라이터 있니? 그는 비흡연자였기 때문에 라이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빈 손바닥을 내보이자 스가와라는 피울 수도 없는 담배 끄트머릴 잘근잘근 씹으며 그럼 술이라도 사달라고 졸라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케를 나눠 마시며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나 사실 남자 좋아한다. 스가와라가 그렇게 실토한 건 동거를 시작하기 한 달 전.

 

물론 너네한텐 관심 코빼기도 없지만, 내 타입도 아니고, 내가 남자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남자들한테 눈 돌리는 것도 아니고, 하는 흔한 주석을 단 한 마디도 붙이지 않은 채로 스가와라는 딱 본론만 말했다. 너네가 싫으면 나도 같이 안 살아. 이때 먼저 동거를 제안해왔던 그들은 싫다기보다는, 그들 인생에 한 번도 있어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당혹스러웠으나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암묵적으로 서로는 느끼고 있었겠지만 괜찮다는 말이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경계의 이상을 더 생각할 수는 없는 뉘앙스였으므로 스가와라는 딱 저대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방이 좀 더 적당해지고…… 불안정해졌다. 각자 시간표나 대외활동의 차이로 집에 있는 시간이 제각각이었는데, 어쩌다 세 명의 신발이 현관에 모이는 날에는 소파가 물에 띄워놓은 조각배 같았다. 스가와라는 모로 눕고, 오이카와는 그의 넓적다릴 베고, 쿠로오는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친 채로.

 

집으로 돌아오고, 쿠로오가 냉장고를 열어 장본 것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조금 돕는 듯싶더니 금세 랩에 싸인 고기를 꺼내 이리저리 살피며 농땡이를 부렸다. 이건 냉동실인가? 저녁으로 먹을 거니까 그냥 냉장실에 넣어놔. 스가와라는 쿠로오의 말대로 고기를 냉장실 깊숙한 곳에 쑤셔 넣고 두유를 꺼내 빨대를 꽂았다. 쿠로오의 닦달로 오이카와는 욕실에서 세안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기름 두른 프라이팬을 달궈야 했다. 스가와라는 일 분도 되지 않아 두유를 밑바닥까지 빨아 마시고 야채를 꺼내 간장을 좀 붓고 볶았다. 이른 저녁식사였다. 버스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내일 전공이 어쩌구, 볼멘소릴 하던 스가와라는 잠시 쉬고 싶다며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소파 위에 몸을 구겨 누웠다. 오이카와가 겁도 없이 그의 종아리 위에 엉덩일 붙이고 앉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빨리 중간도 끝나고 그냥 기말까지 하이패스로 갔으면 좋겠다.

미쳤냐.

나 개강부터 종강만 바라봤잖아……

종강하면 뭐하게. 알바?

알바…… 그것도 좀 하고, 연애도 하고.

 

그러냐, 대꾸하고 스가와라는 눈을 붙였다. 쿠로오가 감자칩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무리한 농담을 던지는 개그맨의 호흡 사이로 아삭거리는 소리가 우스꽝스럽게 섞였다. 오이카와는 검지로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꼬았다. 한동안 피부가 붓는 전자파가 느껴졌다. 이번에 개그맨은 좀 더 무리한, 또한 무례한 농담을 던졌다. 기분이 영 언짢아진 쿠로오가 리모컨을 잡았다. 그가 든 감자칩 봉지로 오이카와가 손을 뻗치며 무심히 물었다. 상쾌군은 연애 생각 없어? 스가와라는 눈꺼풀을 내린 채로 동문서답을 했다. 어디서 소금 냄새 안 나? 쿠로오는 입술을 삐죽여 웃으며 과자 봉지 모가지를 돌돌 돌려 묶었다.

 

그러게, 코우시 군은 연애 안 하나.

본인들도 솔로면서 내 연애까지 생각해주고, 고마워 죽겠네.

외로워도 괜찮나 봐?

 

스가와라는 불현듯 입을 다물고 눈을 번뜩 떴다. 천장을 바로 보고 눕자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던 오이카와 손가락이 관자놀이 밑 오른뺨에 닿았다. 쿠로오가 과자 봉지를 선반에 갖다 놓고 세면대에서 짭짤해진 손을 씻는 동안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이마를 덮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천장을 가린 그의 다갈색 동공을 끔벅거리며 응시했다. 오이카와가 입을 뗐을 때 즈음에 어깨 너머에서 세면대를 후려치던 수압 강한 수도가 멎었다.

 

외로운 건 싫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런데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있잖아.

……, 그렇지.

너무 복잡한데……

 

난 그냥 그걸 게으를 때라고 부르기로 했어. 외로움도, 외롭지 않아서 생기는 모든 일들도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을 때. 스가와라는 대답을 마치고 몸을 둥글게 말아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카펫 위에서 엉금엉금 몸을 일으켜 팔뚝을 위로 곧추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진짜 공부해야 해. 그 전엔 씻어야 하고…… 스가와라는 티셔츠를 말아 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쿠로오는 욕실에서 발을 내딛다 오이카와의 반쯤 잠긴 눈을 발견했다. 이윽고 욕실 문이 닫히고, 오이카와는 소파 위에 나동그라져 눈을 감았다. 쿠로오는 뒷목을 긁으며 그의 앞에 양반다릴 하고 앉았다.

 

그런 얘길 속 시꺼먼 사람이 하면 쓰나. 그는 그런 소릴 하고 다시 tv를 켰다.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보자! 다소 경쾌한 외침이 욕실 너머의 물소리에 자박하게 잠겼다. 쿠로오가 뉴스채널을 맞춰 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을 때, 오이카와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구기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안 돌아가는 꼴도 모르는데 세상은 무슨……

 



7


오이카와가 바라던 대로 시간은 거의 급행열차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그게 그가 바라던 방향으로 갔는지는 의문이었다. 한 달하고 반 정도를 공부하면 또 금세 기말, 과제까지 겹치면 그때부터는 집에 눌러앉아있지를 못한다.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가 조바심을 내며 담요와 세면도구를 주섬주섬 싸서 중앙도서관으로 올라간 것이 삼 주 전의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는 일주일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사가 빠진 스가와라는 술을 퍼 마시러 돌아다녔고, 쿠로오는 세 번 정도 만취한 그를 데리러 나가기 위해 집에서도 양말을 신고 있었으며, 오이카와는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숙면했다.

 

사람마다 각기 역량이란 게 있고 운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의 성적도 들쑥날쑥이었다. 쿠로오는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나왔다. 이번에도 뼈를 갈아 넣은 전공들은 죄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오이카와는 희한하게도 반쯤 포기한 과목들에서 기대 이상의 점수를 얻었으며, 반대로 세 차례 정도 닥쳤던 과제로 닷새의 밤을 끙끙 앓아 붙잡고 있었던 수업에서는 실망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오이카와는 학교 포털사이트 창을 닫고 휴대폰을 집어 던지며 불만족스럽게 혀를 찼다. 난 진짜 뭐든 대충해야 하나 봐. 그러면서 또 다음 학기에 전력을 다하는 게 오이카와였기 때문에 쿠로오는 이전처럼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여러 강의에서 두루두루 모두들 그만하면 좋다, 하는 점수를 받긴 했지만 최고점은 단 하나도 받지 못했다. 옆에서 교수 욕을 한바탕 해주려고 자릴 잡고 앉은 오이카와의 곁을 뜨며, 스가와라는 제가 너무 농땡이를 피운 탓이라고 넘기고 말았다. 종강을 하고는 쿠로오가 오이카와의 옆구리를 찌르는 일이 잦아졌다.

 

, 술 마실까.

집에서?

밖에서. 쟤 데리고.

상쾌군은 그저께도 퍼 마시다 들어왔는데.

거기서 마시는 거랑 우리랑 마시는 거랑 같냐. 애가 너무 죽을상이잖아.

짐까지 싸서 도서관에서 날밤 깐 사람이 농땡이 피운 거라는데 그럼 죽을상이 아니겠어?

 

도쿄는 유월이 장마였다. 그러니 종강할 때 즈음에 비가 건물과 아스팔트 위로 퍼부어댔고 스가와라가 두 번째로 술을 진탕 마시고 쿠로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추적추적 그쳤다. 칠월이 닥치자마자 가랑비는 하룻밤 새에 멀찍이 달아났다. 바닥은 아직 증발하지 못한 웅덩이들로 축축했다. 스가와라는 양옆에 쿠로오와 오이카와를 대동하고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포차에 도착했을 땐 허여멀건 종아리 뒤축이 죄 얼룩져 엉망이 된 탓에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팔목을 잡아 끌고 물티슈를 찾을 동안 오이카와는 스스로 메뉴를 골랐다. 맥주를 시킬까 하다가 그냥 청주 두 병을 먼저 시켜놓고 차례대로 오뎅탕, 계란찜, 마파두부 한 대접. 기본 안주로 나온 땅콩을 오독오독 씹으며 오이카와가 계산서를 흔들었다. 이거는 너 혼자 다 먹는 거야, 알지? 스가와라는 버젓이 프린트된 메뉴명 사이를 비집고 앉은 마파두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뎅탕이 먼저 나오고, 스가와라가 잔 세 개를 뒤집어 청주를 따르는데 문득 쿠로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네 어디 가냐?

뭔 소리래?

나는 다음 주에 부모님이랑 잠시 삿포로 여행 갔다 오거든.

 

스가와라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의 낯을 멀뚱히 응시하다 조금 넘치게 따른 청주가 엄지에 묻은 것을 핥았다. 그으래, 하고 오이카와가 대꾸했다. 너넨 미야기 안 내려가? 쿠로오는 턱짓으로 물으며 오뎅탕을 국자로 떠 앞접시에 담아주었다. 스가와라는 제 몫의 오뎅탕이 가슴께로 밀리자마자 수저를 쥐었지만 잠시 동안은 맑은 국물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희뿌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얼굴을 적셨다. 오이카와는 성대 깊이 앓는 소리만 내더니 이윽고 턱을 괴고서 스가와라에게 답을 떠넘겼다. 그러게, 상쾌군은 갈 거야?

 

몰라.

몰라?

아직 안 정했어.

부모님 올라오신대? 우리집 꼬라지 완전 엉망인데.

글쎄, 그냥 올라오시라고 할까. 난 여기서 알바나 하고.

상쾌군 안 가면 나도 안 가지, .

 

오이카와가 오뎅탕 한 수저를 뜨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어서 나온 계란찜 때문에 탁자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물컵들을 손등으로 밀던 쿠로오가 고개를 힐끔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마파두부가 그렇게 오래 걸리나? 스가와라는 입술을 오므려 중얼거리곤 오이카와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넌 왜. 나까지 가면 상쾌군 혼자 외로우니까. 쿠로오는 미간을 구기며 탁자 밑으로 오이카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너 말을 꼭, 내가 쟤 내버려두고 가는 것처럼 한다? 그렇다고 다리를 차! 오이카와는 장딴지를 손바닥으로 비비다가 결국 샐쭉 웃었지만 스가와라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생각에 곰곰 잠겨있었다.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쭉 펼쳐 흔들어 보일 때 즈음에 그가 기다리던 마파두부 한 접시도 마저 나왔다.

 

폭이 조금 좁은 탁자에 윤기가 줄줄 흐르는 마파두부 접시까지 애써 구겨 놓고부터는 스가와라가 유독 말없이 수저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작 안 돼, 하고 오이카와가 드문드문 꿀밤까지 먹였지만 스가와라는 고집스럽게 제 잔에 스스로 청주를 부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이 오뎅탕 든 냄비 바닥을 싹싹 긁을 즈음에 스가와라 앞에 놓인 마파두부는 절반이 사라져있었고, 청주도 반이 줄어있었다. , 쟤한테서 저거 뺏어. 쿠로오의 말에 오이카와는 잽싸게 청주병을 낚아채서는 탁자 가장자리에 치워두었다. 눈빛이 흐물흐물해질 때 적당히 관두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발끝까지 거나하게 취해서 제 등과 가슴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귀가했던 것이 한두 번인가.

 

스가와라는 저 혼자 뭔가 중얼거리다 말고 탁자 위에 상체를 모로 뉘였다. 그래서 저들끼리 잔을 홀짝이며 낮은 수다를 떨던 쿠로오와 오이카와는 다시 한번 허둥지둥, 그 주변의 접시와 물컵, 빈 쟁반 등을 치워주었다. 직원을 불러서 빈 그릇들은 내가고 스가와라가 조금 남긴 마파두부와 저들끼리 먹던 계란찜을 한 구석에 정렬해두니 그가 웅크리고 누울 만한 공간이 생겼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렸다. 쿠로오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맥주를 한 병 추가 주문하고 눈 밑에 반원의 그림자를 드리운 기다란 속눈썹을 구경했다. 그가 끊임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불쑥불쑥 웅얼거릴 동안 오이카와는 쿠로오와 함께 조심스레 건배를 했고, 맥락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몇십 분이 지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쿠로오가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을 때, 한동안 또 조용했던 스가와라의 입에서 지난 몇 시간의 어딘가에 끊겼던 맥락이 아주 잠시, 되살아났다.

 

같이 있는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냐……

 

스가와라는 이번엔 몸을 휘청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일어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조금 벌린 채 잠에 빠진 그를 오이카와와 쿠로오가 번갈아 업기로 했다. 집까지는 택시를 부르기에 민망한 거리였고, 또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버스나 메트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먼저 취기가 살짝 가라앉은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등에 업었다. , 겉보기엔 말랐는데 무슨 포대자루 같다. 그가 인상을 쓰자 쿠로오가 팔뚝을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난 저걸 일주일에 최소 두 번씩은 옮겨다 놓는 거 같은데.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 전구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 미끄러지는 스가와라의 허벅다리를 끌어당겨 고쳐 업기만 세 번, 다행히 경사는 없는 좁다란 골목 샛길을 반쯤 걸었을 때 문득 오이카와가 말문을 열었다.

 

상쾌군 의중을 모르겠단 말야.

뭐가.

같이 있어주고 싶게 굴다가도…… 또 그게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그러면.

 

그러게. 나도 가끔 그런 거 느끼니까. 쿠로오가 빙글빙글 웃었다. 가로등과 가로등의 간극이 넓었다. 시야가 쨍한 다홍빛으로 밝아올 때 오이카와가 눈살을 찌푸렸다. 쿠로오는 콘크리트 위에서 선명해지다 희미해지기를 반복하는 제 그림자를 정성스레 밟아 걸었다. 암묵적인 고요가 좁은 샛길을 기었다. 근데 나는 알 것 같아. 이번엔 쿠로오가 먼저 운을 떼며 손을 뻗었다. 오이카와는 한사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어쨌거나 몇 분을 더 걷고서는 저도 팔뚝이 저리다고 해서 스가와라의 둥근 몸은 쿠로오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많이 업어본 솜씨로 오이카와보다 수월하게 그의 하반신을 받쳤고, 두 사람은 느린 속도로 다시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알아? 이번엔 오이카와가 그림자를 밟으며 물었다. 곁눈질로 본 쿠로오의 그림자 위에 작은 짐짝처럼 얹힌 스가와라의 음영이 우산처럼 있었다.

 

얘는 외롭고, 나는 안 외로워서 그래. 오이카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사뭇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고 웃었다. 상쾌군 대단하네, 하고 그는 쓸쓸히 감탄했다. 외로운 사람은 그렇게 외로운 만큼 멀리 있나. 외로움이라는 건 어떤가. 상태라 해야 할지 감정이라 해야 할지부터가 상당히 까다롭지 않나. 또한 그 속성도 다분히 배타적이라,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더 외로워지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 것일까. 오이카와는 한 걸음 느리게 다리를 움직여, 앞서가는 쿠로오 테츠로의 등 위에 젖은 빨래처럼 널린 잿빛 뒤통수를 멀리에 보았다.

 

……상쾌군?

 

오이카와는 선잠에서 깨어 욕실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다. 잠이 든 스가와라를 번갈아 업으며 집에 도착한 게 새벽 두 시였다. 쿠로오는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바로 거실 매트리스에 누워버렸고, 네 방으로 들어가라며 한 소리 하려던 오이카와도 바득바득 신경질을 낼 기운이 쪽 빨려 바닥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스가와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저도 그 옆에 벌렁 누워버렸다. 불을 끄고 눈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인기척에 예민한 귀가 잠을 깨웠다. 오이카와는 눈 밑을 꾹꾹 누르고 제 침대를 한 번 돌아보았다. 쿠로오가 벽을 본 채 등을 모로 뉘고 있었다. 그는 쿠로오의 맨등을 힘껏 노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함께 산 지가 일 년이 넘었으니 이제 잠버릇 정도 모를 리가 없다. 부풀지 않는 날개뼈를 쏘아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 머리를 들이밀었더니 스가와라가 물기 없는 욕조 안에서 몸을 비비며 뒤척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침대로 가자. 오이카와는 그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끼우고 흔들었다. 밀어내려는 듯 허우적거리던 손이 어깨에 걸쳐지긴 하였으나 힘주어 밀쳐내진 못하고 스르르 풀렸다. 오이카와는 밑으로 늘어지는 스가와라를 일으켜 세우다 말고 그의 반듯한 이마를 보았다. 숱 많은 눈썹과 단정한 콧대 같은 것이 시야를 메웠다. 새끼손가락이 꽂힐 정도의 자그마한 틈을 내고 숨쉬는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등 뒤에 자지 않고 있던 쿠로오가 다가와 서있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눈을 느릿느릿 끔벅이며 욕조 난간을 쥐고, 한동안 태아처럼 관절을 웅크린 스가와라 코우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아보자고 하면 어떻게 굴까. 흔쾌히 안아라, 하겠지. 키스하자고 하면. 머뭇거리다가도 허락하겠지. 한 번만 자자고 하면, 질색하다가도 어영부영 넘어가주겠지. 그런데 사귀자고 하면, 그건 안 되겠지. 그것만큼은 모든 단호한 속성을 가진 말들로 내치겠지. 특별히 댈 핑계도 이유도 없겠지. 싫다고 하면 그만인 고백들. 함께 있어도 나눌 수 없는 영역들이 있고 몸은 섞어도 마음까진 죽어도 섞지 않겠다는 그런 게,

 

그게 외로움인가.



 

8월


결국 스가와라는 팔월 중순에 미야기행을 결정했다. 도전장이라도 내밀 듯이 개강 전까진 돌아오지 않겠다고 확인 사살까지 했다. 그래서 오이카와도 가족들에게 선뜻 미야기로 내려가겠다고 통보를 했고, 쿠로오는 그들보다 조금 이른 날짜에 삿포로로 몸을 날랐다. 연락해, 하는 쿠로오의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인 것인지는 몰라도 스가와라는 미야기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제 셀카며, 오이카와의 사진이며, 창 밖의 풍경을 잔뜩 찍어 그에게 보냈다. 오이카와는 순행 방향으로 앉는 것을 선호했지만 스가와라가 바득바득 우겨 역행 좌석에 앉아 삶은 계란, 구운 오징어, 캐러멜 다섯 개를 시켜놓고 열심히 뜯었다. 그리고 배가 불러 노곤해질 때 즈음엔 오이카와의 어깨에 머릴 대고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으면서 미야기의 간이역에 도착하자마자 새침하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선 당분간 만나지 말자. 어차피 도쿄 가면 실컷 볼 거잖아.

 

오이카와는 미야기에 내려간 일주일 동안은 조금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친척집을 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고, 간만에 아오바죠사이에 들러 초면인 입부생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눴으며, 때마침 방학을 맞아 미야기에 들른 이와이즈미와 재회했다. 끈덕진 인사를 나누고 동네 경기장에서 그와 배구공을 만지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몇 년 새에 더 가속이 붙은 스파이크를 때렸다. 그는 놀랍게도 카라스노의 전 주장과 같은 대학을 다녔다. 이와이즈미는 제 입으로 그 얘길 꺼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전 주장이면 누구야. 사와무라 다이치?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작년 십이월의 도쿄역을 상기했다.

 

너 예전에 그 네코마 미들브로커랑…… 카라스노 세터랑 동거한다며?

으응.

어때? 지낼 만해?

나름 잘 맞아.

카라스노 세터는 뭐하고 지낸대냐?

이와짱이 언제부터 상쾌군 안부를 다 챙기고 그랬어?

미친놈아, 내가 챙기겠냐. 사와무라가 궁금해하니까 그런 거지.

 

그으래? 오이카와는 말꼬릴 길게 늘였다. 검지 끝으로 입술을 툭툭 치며, 적당한 말을 생각해냈다. 미간이 좁혀지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배구공의 부틸고무 표피를 슬슬 쓰다듬으며 오이카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무슨 생각에선가 외로워한단 얘긴 죽어도 전하기 싫었다. 결국은 바쁘게 지내지 뭐, 하는 말로 타협을 봤다. 이와이즈미는 김이 쭈욱 샌 낯을 하고 오이카와의 품에 배구공을 집어 던졌다. 그러더니 잠깐의 침묵을 혀에 감고서, 또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카라스노 세터는 사와무라 안부 궁금해하지 않디?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아아…… 멍하니 그물 진 네트를 쳐다보며 새삼 머릴 얻어맞았다. 그러고 보니 스가와라의 입에서 한 번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 그으냥…… 오이카와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카라스노 주장은 미야기 안 내려와?

내려왔다는데.

상쾌군도 왔는데……

, 그래? 그럼 만났겠네, 둘이.

 

글쎄, 오이카와는 혀끝까지 엎어진 말을 도로 밀어 넣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만났으면, 그러면 뭐 어쩌려고. 불쑥 외로워하더라는 말이 튀어나갈 뻔했지만 그 대신 재채기가 나왔다. , 넌 여전하네. 이와이즈미는 등짝을 후려치며 통쾌하게 말했다. 본인이 스파이커인 거 자각 좀 해줄래, 이와짱! 오이카와는 얼얼한 등허리를 싹싹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치고 올라온 생각이, 만났을 수도 있겠구나. 오이카와의 눈이 흐려졌다. 여기서 당분간 만나지 말자. 뭔가 작정한 듯 청유하던 스가와라의 희멀건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와이즈미와 헤어진 후, 오이카와는 본가로 돌아가 핸드폰을 잡고 안방을 굴렀다. 연락한 사람은 쿠로오였다.

 

쿠로오는 나흘 동안은 삿포로를 여행하다가 잠시 도쿄로 돌아왔다. 그 다음은 교토에 있는 신사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어깨에 핸드폰을 얹어놓고 뺨을 붙여 통화를 하던 도중 찬장을 열어보고는 뜬금없이 물었다. 찬장에 있는 참치캔 내가 먹어도 돼? 실상 스가와라가 별 생각 없이 산 것이었지만 오이카와가 좋다고 허락을 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 쿠로오는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캔을 땄다. 그리고 그는 숟가락 하날 가져와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혼자 있으니까 엄청 편해. 오이카와는 쿠로오에게 기념품이든 뭐든 사오라고 닦달을 했다. 두 사람은 낄낄대며 두서없이 이어진 통화 끝에 팔월 말에 도쿄에서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쿠로오는 깔끔하게 딴 캔 속에 숟가락 끄트머릴 들이밀고 눈 깜짝할 새에 참치를 해치웠다.

 

그는 설거지를 대충 해놓고 거실에 허리를 세워 앉았다. 삿포로에서 입은 옷들이 세탁기에서 잘 탈수되는 동안 tv를 켜고 예능 재방송을 봤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나서, 잠시 떠나간 곳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그는 부엌에 오고 가며 세탁기를 몇 번 확인했고, 탈수를 오 분 정도 남기고서 이번에 막 대학생으로서 처음 종강을 맞았을 코즈메와도 간단한 통화를 했다. 교토로 여행을 가기 전에 한 번 놀자는. 코즈메는 저답게 귀찮아했지만 두 시간 후에 고교 정문으로 나오겠다는 답을 주었다. 쿠로오는 통화를 마치고 작동이 멈춘 세탁기 문을 열고 차가운 옷가지들을 우르르 쓸어 꺼냈다. 그는 그것들을 널기 전에 빨래건조대에 나흘 전에 널려서 아무도 정리하지 않았던 마른 빨래들을 먼저 접었다. 오이카와의 옷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스가와라의 속옷과 이전에 알코올을 쏟았던 가을용 니트 한 벌. 쿠로오는 수납장을 열고 개킨 속옷을 차곡차곡 쌓은 뒤, 제 턱까지 쌓인 옷을 한아름 껴안고 옷장을 열어 젖혔다. 수납칸에 오이카와의 옷을 먼저 채워 넣고, 측칸 옷걸이에 스가와라의 니트를 걸다가 그는 문득

 

가쿠란 한 벌을 발견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가쿠란은 스가와라 코우시가 짐을 챙겨 입주했을 때부터 줄곧 있었다. 실로 꿰맨 천 소재의 이름표가 왼쪽 가슴께에 붙어있는 검정 가쿠란. 다만 그 중앙부가 휑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쿠로오는 눈을 치켜 뜨고 퀴퀴한 가쿠란 소매를 매만지다가, 손가락 사이를 벌려 단추와 단추의 간격을 얼추 어림잡아 보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분명, 위에서부터 두 번째 단추가 있어야 할 곳에 듬성듬성 뽑혀 나온 실밥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단추가 뜯겨 휑한 곳을 쓰다듬다 말고 다시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지만.

 

노는 중이야?

「오늘은 쉬는 중.

먼저 연락하랬으면서 왜 연락이 없냐.

「미안.

 

그는 코즈메와 만나기 한 시간 전에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조금 긴 연결음 뒤로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선뜩 튀어나왔다. 쿠로오는 단추 얘기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누구누구 만났어? 심드렁하게 물으니 꼭 마주 접은 색지처럼 역시 심드렁한 답이 돌아왔다. 그냥 여러 사람…… 쿠로오는 입꼬리를 힘껏 밀어 웃었다. 코우시 군은 좋겠다. 나 지금 잠깐 도쿄 왔는데 집에 혼자라 엄청 외로워. 그러자 반대편에서 숨을 멎게 하는 침묵이 찾아왔다. 쿠로오의 입가에서 애써 만들어놓았던 웃음기가 가셨다. 단추 얘길 꺼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흘 전, 삿포로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달려있었던 단추. 하지만 스가와라가 선수를 쳤다.

 

「외롭냐?」

 

묻기보다는 꼭, 조소의 투가 어려있어서 쿠로오는 그마저도 웃어 넘기질 못하고 대답을 않았다. 꺼놓지 않은 tv에서 꼭 보고 싶지 않을 때 등장하는 개그맨이 다시 한 번 무리한 농담을 시도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크게 기사가 한 번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쿠로오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꺾어 리모컨을 주웠다. tv의 잡음이 소음되자 제가 얼마나 오래도록 침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외롭냐? 스가와라는 반복해서 질문하지 않았지만, 어째 쿠로오는 대답을 재촉 받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는 말은 쉬웠지만 그렇게 대답하기는 싫었다. 화제를 돌리기도 어려웠다. 어영부영 고요가 가느다란 호흡처럼 이어지는 와중, 스가와라가 누구에게선가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맥박을 싹둑 끊었다.

 

「나도.」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fin.





1 summer time


「열두 시야」

 

나는 메신저를 확인했지만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이따금 저런 식의 텍스트가 전송되었다. 우리는 시간에 관한 강박이 있었다. 정확히는 서로의 시간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었다. 왜인진 모르겠다. 서로 시간의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꼭 알 필요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 이만큼 멀구나, 하고 느낄 수는 있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시계는 누가 발명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마침내, 저런 시계를. 탁상 시계가 따로 있어도 늘 벽시계를 먼저 보게 된다. 눈높이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걸어둔 벽시계를 말이다. 그걸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경이감마저 든다. 열두 시야. 걔 메신저 텍스트를 떠올리고는 눈자위로 더듬더듬 가늠해보았다. 현재 오후 여덟 시 삼 분이다. 여덟 시간.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이것이 신비하게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시차가 열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걔가 점심 먹을 때면 나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짬이 날 때 즈음엔 걔가 자고 있었다. 내가 자고 있으면 걔가 방금 점심을 먹었다, 지금 오후 세 시다, 이런 메신저를 보내왔고 걔가 눈을 붙일 땐 반대로 내가 그런 류의 문자들을 보냈다. 그러니까 서로 답장할 일이 없다. 읽기만 하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여덟 시간으로 확 준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다만 서로의 시간을 알고 싶다. 어디까지 왔나.

 

이와짱.

.

도망갈 바에는 아예 외국으로 나는 게 좋겠지?

그게 뭔 소리냐.

 

어디 즈음에 있나.

 



2 a clock


시계는 어쩜 저렇게 생겼을까. 장장 세 시간의 연습을 마치고 잠깐 가진 휴식시간 동안 체육관 벽에 기대어 앉아 시계를 올려다봤다. 빤히 쳐다볼수록 저 둥그스름한 자태가 신비스럽다. 다리 사이에 수통을 하나 넣고 손 끄트머리로 꼭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초침과 분침, 시침을 부지런히 돌리는 시계를 따라가본다. 각각 맞물린 톱니바퀴의 규칙적인 회전으로 저들은 각자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저들도 프라이드라는 게 있으려나. 시계가 없으면 뭣도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꼭 지구처럼 생겼다. 코우시가 한 말이었다. 언제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재작년 여름방학 즈음이었나. 둘이 방 안에 누워있었다. 나는 침대에, 걔는 바닥에. 누워서 치킨너겟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편의점에서 사오자고, …… 뭐 그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부터 둘 다 함구했다. 누가 먼저 입을 다물었는지 역시 잘 떠오르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시계를 보고 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야 닿을 높이에 못 박아 걸어둔 시계를 보며 걔가 먼저 그런 말을 꺼냈다. 지구. 나는 동조했다. 그러게, 꼭 지구 같다. 지구가 굴러야 하루가 흐르는 것처럼,

 

시계도 굴러야 하루가 지나지. 사실 시계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편의상 만들어진 거니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편의상 만들어진 것들은 모조리 양날의 검이다. 그렇지 않은가? 시계 때문에 시간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에 대한 강박이 움을 텄다. 하지만 시계가 발명된 이상, 그리고 대중화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네 집에서 내 집이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지, 뭐 그런 쓸모 없는 것조차도 다 셈을 하고 앉아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게 십 분이 걸리든 열 시간이 걸리든 솔직히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우리는 상관한다. 중요하다.

 

언젠가부터 시간에 적당히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해질녘에 집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 하던 것이 오후 여섯 시 삼십 분이 되면 집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지는 노을을 보면서 지금이 여섯 시 반인지 일곱 시인지를 구분하고 셈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러는 것을 뼈가 자지러지도록 느끼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린다. 메신저. 거기는 지금 몇 시야.

 

시계는 왜 저렇게 높이 걸어두는 거지.

그러게.

 

꼭 시간이 우릴 내려다보는 것 같잖아. 일 년 전에 나와 공유하던 시간을 떠버린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렇게 말했다.

 



3 needles


시계에는 바늘이 있다. ‘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하튼 폭이 좁고 몸이 기다랗게 빠진, 날카로운 그런 것이다. 바늘은 원판 위에서 시간을 정확히 가리킨다. 네 시 삼십구 분 이십사 초면 정확히 네 시 삼십구 분 이십사 초를 가리킨다. 애초에 시간이라는 게 정확히 짚이는 것인가 싶었는데 시계라는 것은 놀랍게도 그런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누웠다. 절로 팔이 머리맡에 올라간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꼈다. 문득 그런 틈들을 파고들어오던 걔 손이 생각난다.

 

이 침대 위에 걔와 나란히 누웠던 적이 있다. 나란히 눕기만 했는가, 겹쳐 누웠던 적도 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맨살을 맞추고 끼우며 부대꼈다. 벌러덩 넘어가버린 걔 머리카락을 죄 쓸어다 이마에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얼굴을 가리면서 감긴 걔 눈도 봤고 제 볼을 누르던 손등도 봤다. 나긋나긋하게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 부활동 때문에 여섯 시 전에는 나가야 한다고 산통을 깼던 것도 기억난다. 이렇게 보면 시계는…… 시간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을 믿고 설치는 호랑이굴의 여우인가. 모르겠다.

 

「오후 네 시야」

 

메신저 알림이 떠서 봤더니 걔였다. 그렇구나, 하고 다시 엎어져 누웠는데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자?

 

누워서 핸드폰을 쥐고 있다간 껌뻑 잠이 들 것 같다. 나는 몸을 세워 바로 앉았다.

 

「아니」

「왜 아직도 안 자」

「네가 불러서」

 

미스터 윌링턴 오늘 무단 휴강. 어쩌다? 오는 길에 범퍼로 앞차량 들이 받혔나 봐. 대애박. 나는 등을 구부리고 걔랑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가끔 이런 식의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걔가 슬그머니 먼저 대화를 유도한 건 오랜만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것이 조마조마했다. 뒷목이 뻐근해질 즈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올려 꺾으니 시야에 시계바늘이 들어왔다. 벌써 새벽 한 시. 나는 슬슬 모로 누웠다. 불쑥 딴 얘길 꺼낸다.

 

「너 혹시 여름에 잠시 오니」

「갑자기 왜?

「그냥」

 

딱히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니…… 졸업할 때까진 계속 여기 붙들려있을 거 같아」

 

그래도 실망스럽다. 벌써 한 시 넘었어. 나 잘게. 시계의 도움을 받아 핑계를 댔다. 그래, 잘 자. 걔의 텍스트는 거기서 멎는다. 나는 핸드폰을 협탁에 치워두고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 시간을 짚는 소리가 난다. 사뿐한 발소리 같기도 하고, 지그시 묻어나는 지문 같기도 한. 그것은 꼭 하루 동안 내가 걸은 걸음들을 농축해 놓은 것처럼 분명한 소리를 낸다. 시계는 내 방에 걸린 이후로 수천 수만 번을 자전했다. 빙글빙글 돌았다. 걔도 함께 돌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제자리걸음. 나는 둥그런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음에도 여전히 걔 꽁무니를 바라보고 있다.

 



4 rotational


시계는 가끔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12개의 숫자 안에서만 돌고 도니까, 시간이 꼭 반복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미 지나온 시간도 언제든 다시 와줄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에 다리를 묶으면서도 그걸 너무 쉽게 본다. 시간에 발목이 잡혀 끌려가면서 시간이 우릴 끌어주고 있구나, 한다고. 그게 아냐, 멍청아. 시간이 끌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끌려가는 거라니까.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가 없어.

 

일요일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라서 나는 유독 분주하다. 엄마가 유리창에 락스를 뿌릴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청록색 걸레에 시꺼먼 이물질이 묻어났다. 나는 욕실로 달려가 다라이에 그걸 한 번 뒤집어 빨고 벅벅 문질렀다. 물기를 꽉 짜내고 거실로 돌아오니 유리창이 어제보다 맑아져 있었다. 바닥을 다시 한 번 싹 닦고 먼지를 홀랑 뒤집어 쓴 채로 욕실에 뛰어든다. 물과 공기가 같은 비례로 차오른 타일 큐브 안에서 좋은 향기를 찾는다. 씻고 나오니 엄마가 얼음통에 넣은 맥주를 꺼내놓고 병어포를 굽고 있었다.

 

낮술이야?

, 엄마 낮술하는 거 첨 봐?

아들내미한테도 한 잔 주시나요?

예에, 앉으시지요.

 

나는 맥주와 병어포가 든 접시를 거실 앉은뱅이 탁자로 옮겼다. 엄마가 먼저 소파 밑에 양반다릴 하고 앉았다. 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tv를 트니 어제 저녁에 했던 토크쇼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다시 봐도 보는 재미가 쏠쏠한 프로그램이라 엄마는 따로 채널을 돌리지 않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토크쇼에서는 며칠 전 런던에서 있던 노동조합 시위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엄마는 북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뜻밖의 얘길 꺼냈다.

 

스가가 런던 가지 않았던가.

……

?

갔지.

어떻게 지낸대?

…… 낸들 아나.

 

너무 빤한 거짓말을 했나. 엄마가 맥주캔에 입술을 붙이며 피실피실 웃었다. 나는 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무릎을 모아 가슴에 붙여 둥글게 앉았다. 취기가 오르는지 목이 화끈해진다. 손바닥은 평소보다 차갑다. 나는 손마디를 뚝뚝 꺾었다. 엄마는 tv에 시선을 붙박은 채로 말을 잇는다.

 

아직 맘 있니?

…… 몰라.

그땐 엄마가 미안.

……

정말로.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tv 소릴 작게 줄여놓은 탓인가, 어쨌든. 나는 다시 팔을 뻗어 맥주를 가져온다. 시원한 탄산이 혓바닥과 목구멍을 긴다. 정말 미안해. 엄마는 중얼거린다. 엄마만 미안해할 거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더 곱씹고 싶지 않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고 있다. 그리고 지났다.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어. 갑자기 영 적성에 안 맞아서 한 모금 빨고 말았던 담배를 찾고 싶다. 나는 발끝을 오므렸다. 무릎을 더욱 움츠렸다. tv에서는 영국 시민들을 인터뷰한 영상자료를 내보내고 있다. 구라파식 연립 주택과 곡선이 들어간 큐브형 철제 가로등이 군데군데 서있다. 하늘은 흐리고 비둘기보단 까마귀들이 더 많이 보인다. 쟤는 저런 곳에서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엄마 목소리가 귓불에 매달렸다.

 

영국 보내줄까?

……

이번에 너 종강하면……

……

만나러 가볼래?

 

과연, 시간이란 어떤 것일까. 한 번 떠나오면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그것. 그 당연한 진리를 비웃듯이 12개의 숫자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회전하는 시계는 그 어느 가구의 벽에나 걸려서……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게끔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것일까.

 



5 trace up


「짐은 다 쌌어?

 

어젯밤 걔는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몇 시다, 그런 것 없이. 낯설었지만 반가웠다. 다 싸고 한 번 더 체크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나리타에서 히드로까지 얼마나 걸릴까. 걔 말로는 열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고 그랬다. 예약한 비행기표를 받고 보니 정말 그 정도 걸리는 듯싶었다. 열두 시간. 열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 더 많다. 하절기가 아니면 걔와 나의 거리는 대략 그만큼이다. 시간을 거리로 셈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 우리는 몇 시간의 거리를 두고도 서로의 뒤를 좇기에 바쁘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결국 지구는 둥그니까. 시계도 둥글고 말이지. 나는 이코노미석에 등을 파묻었다. 열두 시간인데 이코노미석이라니. 나중에 착륙하고 나서 일어서면 온몸이 비명을 지르겠다. 그래도 복도 끝에 위치한 좌석이라 뒷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좌석을 길게 뒤로 뉘일 수 있어서 좋았다. 어젯밤 걔랑은 별 이상한 대화를 다 나눴다. 걔는 영국 음식이 아주 맛없다는 말도 했고, 그래서 매운 게 당긴다고도 했다. 올 때 좀 싸오면 안 되냐고.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타박을 줬다. 거기 빵은 있어? 엄청 많지. 우유빵. 뭔 빵이든 무튼 빵은 넘친다. 그럼 됐네, 하고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활주로를 따라 비행기가 머리를 들이박기 시작한다. 핸드폰은 당연히 전동이 꺼져 있다. 볼 게 없다. 뭘 볼까. 창문을 내다봤다. 나리타 공항이 그 형태도 잘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르게 스치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위가 거북해진다. 더 탄탄해진 중력에 온몸을 순환하던 피가 바싹 긴장한다.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다. 하늘 구경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장난감처럼 작아진 도시의 불빛들이 전부다. 그것도 이내 잿빛 구름에 휩쓸린다. 창문을 부연 구름이 뒤덮는다. 그 사이사이로 어둠의 덩어리가 보인다. 나는 붕 뜬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을 꾹 감았다 떠보았다. 눈도 얼얼하다. 손목에 찬 시계가 시야에 들어온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이다. 여덟 시간…… 나는 의식적으로 셈해본다. 거긴 오후 아홉 시 이십 분이겠다. 시계바늘을 아홉 시 이십 분으로 돌려놨다. 나는 오늘이고 걔는 어제. 아니면 걔가 오늘이고 내가 내일인가. 시간은 신비롭다. 같은 행성에 사는 누군가의 아침이 누군가의 밤이다.

 

열두 시간은 길다. 특히 그 동안 계속 앉아있으려면. 나는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화장실을 핑계로 복도를 서성거렸다. 엉덩이와 오금이 저리다. 그러는 동안 창문에는 빛이 번지고 이제야 붉은 하늘과 벽돌빛 구름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빈 틈 없이 장밋빛의 수증기 덩어리로 그득 채워진 하늘을 본다. 영원히 몸을 떠맡기고 싶은 대해의 파도 같다. 포근해 보인다, 좋다. 그래도 뒷목은 계속 뻐근하고 다리가 쑤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간을 건너가는 일은 참으로, 어렵구나. 간절한 만큼.

 

Passengers, our flight will land in twenty minutes. Please fasten your seatbelt and turn off your mobiles. Thank you.

 

어렵지만, 시간은 지난다.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을 부탁했다. 창문을 열어달라, 좌석을 바로 세워달라, 착석해달라. 나는 활짝 열린 창문으로 내다본다. 영국을. 아직 영국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영국 땅 위를 날고 있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인간은 참 많은 걸 발전시켰다. 나는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납덩이에 올라타 그런 생각에 잠긴다.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을 방법을 고안 중이다. 어떻게든…… 끌려가고 있지만은 않도록. 노력 중이다. 문득 신선한 기내에서 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납덩이는 온갖 소음을 일궈내며 착륙한다. 바퀴가 떨어지고 활주로에 무사히 안착한다. 부드럽지만 격렬하게 땅 위를 밟는다. 시간을 달리는 기분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격동적으로, 쭈뼛 서는 머리털부터 뒤집히는 내장까지 모든 걸 엎질러놓을 만큼의 위력을 가지며. 눈을 감는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고 속이 쓰려온다.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그만큼 여유를 되찾은 몸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눈물이 걔를 만나는 나보다도 먼저 시간을 앞지르려 한다. 아직은 안 돼.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히드로의 입국 절차가 복잡했다. 나는 여권을 쥔 채로 외국인 전용 줄에 서서 십오 분을 더 기다렸다. 나는 조금 부스스한 상태일 것이다. 머리를 매만졌다. 검사원이 내 얼굴을 흘끗 보고는 타자를 친다. 입국도장을 찍고 여권을 돌려준다. 나는 그걸 냉큼 받고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부스를 나왔다. 사람이 붐빈다. 택시 팻말을 든 기사들도 있고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팔짱을 낀 채 서서 목을 쭈욱 뽑는 사람들도 있다. 어지럽다. 나는 자동문 밖을 주춤주춤 나서며 고개를 휘젓는다.

 

토오루.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토오루, 한다. 성급하게 나오려고 했던 눈물이 다시 눈 위에 번진다. 손등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짜릿함이 눈자위에 퍼진다. 그리고 도로 손등을 내리기도 전에 어떤 무지막지한 힘이 나를 그러안는다. 활주로에 바퀴를 내리던 비행기처럼, 부드럽지만 격정적이다. 멀리서 날아와 나를 들이받는다. 나는 손등을 거둔다. 내 가슴팍에 닿은 둥그런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바래지 않은 색의 머리카락이다. 나는 거두었던 손을 다시 들어올려 걔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토오루.

……

토오루……

 

어제까지만 해도 짐은 다 쌌느니 일본 음식을 좀 싸오라니 말이 많던 애가 지금 그 말밖에 하질 못한다. 토오루. 지금 걔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온전히 내 이름이 전부다. 나는 목구멍이 꽉 막힌다. 코우시, 하고 조그맣게 발음해본다. 실로 간만에 중얼거리는 이름이다. 이젠 괜찮다. 시간이 멈춘다. 볼 위로 뜨거움이 무너진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걔 머리를 꼭 그러안는다. 그러자 눈 앞으로는 고개를 위로 꺾어야 볼 수 있는 철탑시계와, 내 손등을 묶은 손목시계가 보인다. 그들의 시간은 같다. 비로소, 걔와 나의 시간이,

 

만난다. 내가 앞질러 왔다. 너에게로 왔다. 가까워진, 너의 등도 아닌 얼굴을 보았다. 시간의 회전이 멈춘다. 우리의 시간이 꽉 맞물린다. 나는 갈퀴처럼 너를 뭉쳐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서로의 이름을 되짚는다. 바늘이 숫자를 한 점, 한 점, 고르게 짚었던 것처럼 우리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서로의 이름에 발자국과 지문을 남긴다. 그렇다. 시간에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인류의 노력이다. 아주 작은 반짝임이지만 분명히, 이 순간은, 결실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너무 뒤처지지도 앞지르지도 않은 그러한 상태로.

 

우리는 오래오래 운다. 피부에 서로가 닿는다. 우리의 모든 것, 거리도 몸도 마음도 시간으로 맞물린다. 머리가 하얘진다. 너무 어렵게 돌아왔다. 너무나도 어려운, 그만큼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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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계


오늘은 열려 있다.

 

나는 별 대단한 고민 없이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마자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요즘 도쿄는 우기다. 그런데 우기라고 해서 장대비가 매몰차게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미야기의 장마에 비해서는 훨씬 유했다. 그래도 도로는 다 흘려 보내지 못한 습기를 받들었다. 딱 그만큼의 비였다. 오색 불빛들이 맨바닥에 뚝뚝 묻어났다. 우에노 공원 호수에 핀 연잎 같다. 유독 비가 쏟아질 때 카페가 문을 열었다. 아닌가? 몇 번인가 안개만 잔뜩 낀 날에도 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 개장을 하는 카페인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직장을 다닌 게 햇수로 이 년째고, 한두 달에 한 번은 들르는 꼴이었으니까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인데 불과 한 달 전까지 감을 잡지 못했다. 개장시간이 매일 다르다. 들쑥날쑥 개장시간이 가게의 의의라든지…… 정체성에 일조를 하나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브루스 ()였다, 이름은. 그러니까 개장시간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농밀하고 졸린 음악처럼 참 느릿느릿하기도 했다. 약불에 중탕시킨 버터와 초콜릿처럼 걸쭉하고, 점성이 높아서 주걱으로 한 번 젓는 것도 귀찮아지는 만큼의 게으름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끈질겼다. 대개는 성의가 없다기보다 무심함에 가깝다는 평도 들었다. 손님들을 이리저리 방치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나도 아주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우선 그 제멋대로인 개장시간부터가 그랬다. 문패에는 분명 「17:00PM-02:00AM」이라고 써져 있었지만 그 시간대가 지켜지는 일은 드물었다.

 

생맥주 한 잔이요.

안주는요?

그냥……

기본 드려요.

 

카페의 입구는 조그맸다. 지하 1층에 있는 곳이라 밑으로 꺼지는 계단을 내려가야 했는데, 지상의 1층과 2층을 차지한 프렌차이즈 바에 비해 간판이 작아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그 입구는 유명 베이커리, 화장품 로드샵, 그리고 1층과 2층을 다 먹은 브랜드 옷가게 사이에 벌어진 틈을 메우려 부은 시멘트처럼 붙박여있었다. 내려가면 카페는 꽤 널찍했는데, 널찍한 것치고는 공간 활용도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전부 일인용 테이블로 도배되어있었으니 인테리어 초심자가 봤다고 해도 그런 소리가 나올 만했다. 두 명이서 온 손님들은 다른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더 끌어다 앉곤 했다. 그래도 거기 생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거스름이 용서가 되었다.

 

지하에 위치한 카페답게 어둑어둑했고, 조명도 쓸데없이 밝은 걸 쓰지 않았다. 딱히 이렇다 할 인테리어는 없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건 입구에 들어오자마자 맞은편 벽에 보이는 커다란 시계였다. 얼마나 커다랗느냐면, 그쪽에는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나 소파가 죄 없고 시계만 덩그러니 붙어있는 정도였다. 그걸 떼내려면 성인 남자 서너 명은 달려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커다란 시계는 그 크기가 압도적이어서 아주 잠깐, 손님들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안주를 시키고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다 보면 금세 관심 밖이 되었다. 나는 같이 올 사람도 없거니와, 이 가게에서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저 시계와 바텐더뿐이라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계와 바텐더에 관해 특이한 사실을 알아냈다.

 

먼저 시계는, 보통의 시계보다 더 느리게 갔다. 정확히 어느 비율로 느리게 가는지 깨닫기까지는 인내가 필요했다. 신경을 곤두세워 살핀 결과, 이 시계는 1분이 구십 초였다. 그러니까 초침이 한 칸을 옮겨갈 때 일반적인 시간으로는 1.5초를 소비하는 셈이었다. 그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지만 다른 손님들도 대충은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걸 움직이는 인테리어쯤으로 생각했다. 카페 입구에는 폐장시간이 새벽 두 시로 되어있었는데, 그때 즈음에 손님들이 핸드폰으로 진짜 시간을 확인하고서 하나 둘씩 일어서는 걸 보며 버티고 앉아있어도 바텐더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있던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 혼자 끈덕지게 테이블 앞에 남았는데도 바텐더는 천장 모퉁이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얼음을 깎고 잔을 닦고 했다. 그제야 나는 이 가게의 폐장 시간이 이 내부의 시계에 의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심은, 내가 아니었다면 매일이 다른 퇴근시간까지 가게에 홀로 남겨져 있었을 바텐더로 향했다.

 

폐장 안 하나요?

아직 폐장시간이 아니라서요.

저 시계는 고장 난 것 같은데요.

 

부지런히 싱크를 닦던 바텐더가 턱을 뻗어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아주 짧게 시선이 이마에 떨어지고,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시계가 고장이 났든 그가 싱크를 닦든 스피커에는 입 속에서 늘어진 은빛 실타래처럼 음악의 맥박이 꾸물꾸물 뛰었다. 바텐더는 걷어붙인 팔 그대로 손을 씻었다. 거뭇한 조명 아래서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고장 난 게 아니라,

 

느리게 가고 있는 것뿐인데요.

 

그는 짧게 대꾸하고 다 씻은 잔들을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설치된 진열대에 매달아놓았다. 그는 아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를, 나름 긴 시간 동안 스무 번 정도 봤을까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스무 번이라는 건 상당히 적은 숫자인데 이 년은 또 생각보다 길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를 많이 보지 않고도 오래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이 년 전에는 신장이 지금보다 미묘하게 작았고 약간 왜소했고 곱슬이 더 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도 아니고 방문만 열었다 하면 보이는 가족도 아니고 적당한 때에, 무언가 변했다 싶을 때 꾸준히 보아와서 나는 그의 변화를 함께 했다. 우리는 이상한 사이였다. 그는 이 가게가 무료했는지 그런 이상함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내게 주문 외의 다른 말을 걸어온 것은 내가 시계의 비밀을 안 바로 그 한 달 전이었다.

 

대뜸, 서비스 맥주를 주겠다고 그랬다. 서비스 맥주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는데, 내가 들러 착석한 후 다른 손님들이 나갈 때까지 앉아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오곤 했다. 카페는 개장시간이 뒤죽박죽인 것도 있었지만 그 타이밍에 내가 들를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거긴 내가 자고 있을 때 열기도 했고, 퇴근을 좀 남겨두고 근무를 보고 있을 때 폐장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안 맞았다. 그래서 마침 딱, 나도 가게도 열려있는 몇 안 되는 날들에 그가 많이 반가워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억지로 표정을 꾸며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가 한두 달 만에 고개를 내밀면 그가 어둔 빛들을 반사해대는 접시와 와인병 사이로 웃었다.

 

폐장시간은 가게 안에서 보니까 알아도, 개장시간은 모르지 않아요?

그렇죠.

그럼 출근시간은 어떻게 해요? 매일 다르잖아요.

매일 다르죠. 하지만 세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가게는 오후 다섯 시에 문을 열어서 새벽 두 시에 문을 닫아요. 그러니까 영업시간은 총 아홉 시간인데 여기 아홉 시간 하고 바깥에 아홉 시간 하고는 다르죠. 그거랑 이거랑 14,400초 차이가 나는데…… 그러니까 네 시간 차이인 거예요. 스가와라 씨 입장에서 따지면 열세 시간을 일하는 셈이고. 그러면 다시 오후 다섯 시에 문을 열기까지 열다섯 시간이 남는데…… 이 역시 내부의 이야기고, 스가와라 씨한테는 우리 가게가 스물두 시간 하고 삼십 분 동안 폐장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거지요. 그가 들어도 소용 없을 것 같은 긴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가 서비스로 내온 맥주 거품층이 얇아질 때까지 두꺼운 잔 유리를 손톱 끄트머리로 쳐보기만 했다. 어어, 그렇군요. 어렵사리 짧은 대답을 내놓은 후에 뒷머릴 긁었다.

 

그 정도면 격일 근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말이 그렇게 되나요?

복잡하네요.

 

차라리 바깥의 시간도 가게의 시간과 같았다면, 이렇게 머리 굴릴 일은 없을 텐데요. 그는 내 말을 듣고 짧게 웃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가게는 있을 필요도 없을 거예요. 알 듯 모를 듯한 말이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그나저나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직원들이 그렇게 부르잖아요. 나는 사와무라가 몇 번 연락을 하고 데리러 왔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내일은 회식이 있다. 설사 카페가 오늘과 같은 시간에 개장한다고 해도 들를 수가 없다. 나는 새로이 채워진 맥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거의 다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잔이 묵직해서 보니까 아직 반도 못 비웠다. 내 한 모금은 어린아이 한 줌만큼 작았다. 같이 마셔요. , 근무 중 음주? 둘밖에 없으니까.

 

그는 땅콩과 프라첼로 구성된 기본 안주를 한 접시 더 내왔다. 나는 묵직히 걸린 채로 묵묵히 초침을 미는 시계를 흘끔거렸다. 퇴근까지는 한참 먼 것 같고, 밖엔 몇 시려나. 우리는 마주앉아 맥주를 좀 더 마셨다. 사람 두 명이 덩그러니 앉아있기에 널찍한 카페 홀에는 여전히 졸음이 쏟아지는 블루스가 흐르고 0.5초가 더 느린 시계 초침소리가 귓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말이 적지는 않았지만 또 번거롭게 많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아둔하지 않고, 되려 영리한 편인 것 같아서, 그가 가진 모종의 친절함과 간결함이 계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것은 내 과대해석일 것이다. 그는 그런 것들이 이미 피부 밑으로 흡수된 것 같았다. 친절함, 까지는 무신경하더라도 그의 간결함을 생각하노라면 이 준수한 얼굴을 한 청년이 평범하게 느껴지다가도 문득 신비해지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까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말만 하는구나 싶었다. 나와 그는 말마디 없이 맥주를 더 홀짝였고, 나는 그 새에 손목시계를 몇 번 훔쳐보았다. 새벽 세 시 십오 분이다. 출근이 아홉 시까지고 집에서는 여덟 시에 나가야 하니 지금 돌아가서 씻어도 서너 시간밖에는 못 자겠다. 그래도 그 잠이란 게 얼마나 소중한가? 나는 핸드폰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 남자는 고개를 들긴 했지만 어딜 가느냐고 묻진 않았다. 그에게는 테이블에 앉고 일어서는 풍경들이 익숙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 감사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했는데도 그가 말이 없었다. 홀을 가로질러 계단 초석을 밟았을 때야 남자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게 손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느려지고 있어요.

?

시계.

 

그가 불현듯 등 뒤에 말을 꺼내고 무릎에서 경첩소리가 났다. 나는 그의 얼굴보다 내 무릎을 먼저 보았다. 거기엔 뼈가 아닌 다른 종류의 이음쇠가 있는 것 같았다. 그 후에 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입구에서 보는 카페 홀의 풍경은 습지에 공고히 지어진 굴 속 같다. 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에게서 저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런 낯을 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점점 더. 나중에는 초침이 옮겨가는 데 3초가 걸릴지도 몰라요. 조금 먼 미래의 얘기지만, .

 

처음으로 남자가, 필요하지 않은 말을 했나 싶었다.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말은 듣기에 불편했다. 이곳을 또 방문할 때는 아마 다음 달 초가 될 것 같다. 그때는 또 얼마나 느려져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불편함이 피부에 닿았다. 그 말에는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그러고 보니 남자는 대답만 하고 나는 질문만 해왔구나.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샐쭉 웃었다. 어쩐지 창피해졌다. 어설피 같이 미소를 걸자, 그가 웃는 입을 하고 그런 얘길 했다.

 

사실…… 조금 힘들어요.





인어의 세습


인테리어를 더 할까 봐요.

 

근 한 달 만에 들렀을 때 남자가 대뜸 한 말이었다. 그는 뒷머리를 조금 자른 것 같았다. 내부 조정을 조금 했던 것인지 테이블이 한 칸씩 밀려있었다. 나는 가방을 벗어 의자에 놓으며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요? 뭐를 더요? 그가 혹여 저 시계를 뗄 생각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 벽과 인접한 측면 벽 쪽이 너무 휑해서, 거기에 뭘 채워 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액자만한 게 없죠, 그럼. 생각 없이 뱉은 말에 그가 제 턱을 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와인잔을 찍은 사진이나 핀업걸이 그려진 일러스트를 끼워 넣은 액자는 시중 인테리어샵에서 쉽게 살 수 있었다.

 

액자, 액자가 역시 좋겠죠. , 액자요. 별 소용없는 짤막한 대화가 잠시 이어지다 끊겼고, 남자는 500cc 생맥주용 잔을 꺼냈다. 내가 시키는 게 늘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그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복불복 개장시간의 탓도 있지만, 여하튼 한두 달에 한 번 꼴로 들르는 손님을 기억해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무슨 정을 느꼈는지 그에게 언젠가 밥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의자를 바싹 끌어당겼다. 여전히 안쪽 벽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시계가 눈에 들어찼다. 얼마나 느려졌을까? 대충 봐서는 모르겠다.

 

인어를 걸어다 놓으면 좋겠어요.

 

맥주와 기본안주를 내오며 그가 그렇게 말했다. ? 멍청히 되묻고 눈을 껌뻑이는 동안 그가 의자를 끌어다 내 앞에 앉았다. 인어 그림이요. 그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아아, 인어요. 그거 멋지네요. 멋진데, 왜 하필 인어일까. 나는 인어가 징그럽다. 어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인어도 그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람의 것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살갗 위를 덮고 있을 미끌미끌한 비늘이나, 거기에서 둥둥 풍겨올 비린내 같은 것들을 상상하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혹 정말 물고기처럼, 몸통을 두 동강으로 잘라내도 고통 한 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그 신비로운 동물은 바다에 산다고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인어는 내가 생각하는 낯섦 중에 제일 낯설다. 어째 불가사의하고 또한 친숙해서 그렇다. 몸통 반쪽이 인간이라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어디엔가 존재할 것만 같은 동물이라 꺼림칙하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봐버린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그게 그렇게 아름답게 생겼을 것 같지도 않다. 우리는 다 동화를 통해 인어를 보고 자라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인어 그림이 걸린다면 틀림없이 그 동화의 전형이 걸리겠지. 맥주를 마시자 입술 창구로 허옇게 거품이 묻어났다. 그걸 혀로 핥기까지, 남자는 잠자코 나를 지켜보다 뜬금없는 소릴 했다.

 

인어의 유래를 아세요?

유래요?

.

 

그와 내가 어딘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어의 존재가 아니라 유래를 묻는 사람이라니, 내심 반가웠다. 그리고 그건 맥락이 무엇이 되었든 생맥주요?’를 제외하고 그가 내게 물어온 드문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번 것처럼 역시, 대답하기가 어렵다. 인어의 유래를 내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딱히 일상에 지장이 가지 않을뿐더러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다만 인어는 불편한 동물이죠. 어긋나게 내놓은 대답에 그는 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주었다.

 

인어는 중간층인 것 같아요. 중간 단계에 있는 동물 말예요.

진화나 퇴화의?

.

 

그렇지 않고서야, 반인반수일 리가 없다. 애초에 인어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물고기가 인간으로 진화하다 멈춘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이 물고기로 퇴화하다 멈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어라는 것은 애매한 동물이다. 그렇다면 왜 물고기는 사람이 되려 했나. 혹은 왜 사람은 물고기가 되려 했나.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요? 빤한 목소리로 묻자 잠자코 얘길 듣던 그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가 든 유리잔을 흔들며 대답했다. 나는 후자요. 거품층이 사라진 맥주는 까딱거리는 잔 속에서 곧 흘러 넘칠 것 같았다.

 

못 견뎌서, 물로 간 게 아닐까요.

아아.

……

못 견뎌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그리고 앞으로 몇 시간을 더 도돌이표 같은 대화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어가 바다에 살 리 없죠. 그렇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진회색의 심해에서. , …… 습지에 잠긴 동굴 같은 곳에.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때마침 바다 깊은 곳의 묵직한 물결 같은 노래가 가게 안에 넘실댔다. 가뜩이나 야심한 시간에 졸음마저 쏟아지게 만드는 블루스였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비워낸 맥주잔을 옆으로 밀고 고개를 괴어 비스듬히 누웠다. 아아, 졸려요. 내 목소리가 중얼중얼했다. 그는 거의 비우지 않은 맥주잔을 달그락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졸려요? 졸려요. 더듬어보면 내일이 주말이었다. 오늘은 아마 그가 퇴근을 할 때까지 카페에 남아도 좋을 것 같았다. 모로 누운 시선이 시간을 읽는 데 결렸다. 나는 묵직한 고개를 들어올려 느릿느릿 바늘을 움직이는 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 사십 몇 분이다.

 

그는 일어나서 식탁을 치웠다. 아직 반이나 남은 제 잔은 놔두고 내가 다 비워버린 유리잔과 땅콩 부스러기가 뒹구는 접시를 가지고 갔다. 나 누운 식탁 외에도 다른 손님들이 있다가 간 자리들을 싹싹 닦고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아일랜드 식탁 앞 싱크에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접시 덜그럭거리고 잔이 끼리끼리 예민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스피커의 블루스를 잡아먹었다. 가사들이 흐물흐물 들려왔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a love). 자요? 그는 싱크 너머에서 가끔씩 나를 불렀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아니요, 하는 나긋나긋한 대답을 내놓았다. 싱크대 수압이 워낙 세서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그는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규칙적으로 나를 불렀다. 자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물 소리가 멎을 때쯤에 졸음이 조금 달아났다.

 

내일 주말이면 일 없겠네요.

그으렇죠.

그럼 더 마셔요?

그건 안 되죠. 그쪽, 도 퇴근을 해야 하고……

 

그쪽, 하고서 말을 흐렸다. 남자는 설거지를 마치고 더워 그런지 셔츠를 걷어 올린 채로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미적지근해져서 아까보다 맛이 삭았을 맥주에 손을 댔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호칭을 불러버린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머리를 받치고 있었던 팔뚝이 저릿저릿해진 탓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그는 잔 끄트머리에서 입술을 떼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뭐 대단한 거라도 물은 것처럼 그랬다. 그는 내 졸린 눈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반달처럼 웃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토오루, .

 

그는 어느 새 맥주를 저만치 치워 놓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토오루, 하고 소리 내어 혀에 물어보았다. 둥글둥글한 이름이다. 그의 유순한 구석과 잘 어울린다. 스가와라 씨도 알려주세요. 그가 손끝으로 내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재촉했다. ? 멍청하게 반문하자 그가 제 이름만큼이나 둥그렇게 웃었다. 뒤의 이름이요. 문득 콧방울에 닿은 토오루의 손가락에서 기이한 느낌이 났다. 그건 얇게 가공한 조개껍데기 같기도 했고 은박지를 뜯어 딱풀로 붙인 것 같기도 했다. 살갗이며, 동시에 살갗이 아닌 피부조직의 경계가 희미하게 코끝에 느껴졌다. 미적거리던 눈을 또렷이 떴다. 코우시예요, 대답하자 그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코우시, 코우시. 그가 몇 번을 되뇄다. 코우시, 집이 어디에요. 다시 잠이 쏟아졌다. 요 며칠간 야근을 좀 했던 게 문제인가. 잘 모르겠다. 그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코우시, 어디 살아요. 집주소는 복잡하다. 대로변에 살고 있질 않아서 그렇다. 나도 내 집주소를 다 외고 다니진 않는다. 교통비 말고 내가 택시를 잘 잡아 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긴자거리에……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까딱였다. 위층은 패밀리 레스토랑이 죄 차지한 건물 모퉁이에 편의점에 있는데, 그 편의점을 끼고 돌면 전혀 다른 세계처럼 펼쳐진 풍경이 있고, 종이를 접어다 놓은 것처럼 납작하게 눌린 집들과…… 긴자거리에……

 

긴자거리, 긴자거리, 그리고 더 이상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는 난생 처음 보는 곳에 있었다. 천장은 아치형이고 잿빛으로 컴컴해서 굴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았다. 마땅히 스위치가 없는 것 같아서 눈이 뻐근한 핸드폰 불빛에 의존하여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누워있던 곳이 카페에 딸린 숙직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숙직실 내부를 비춰보았다. 캄캄하기만 했지만 옷장에 옷걸이도 있었고 매트리스, 담요, 베개, 거울이 있었다. 앉은뱅이 식탁 하나와…… 어째 숙직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여러 가지들이 찬 듯싶다. 나는 부스스한 뒷머리를 털었다. 손목에 찬 시계는 오전 아홉 시 이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숙직실 밖으로 나오니 주방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왜 그리 곯아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어의 노래라도 들은 것처럼. 그게 세이렌의 노랜가, 인어의 노랜가? 여하튼 둘 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아침 댓바람인데 카페는 여전히 어둑어둑했고 저녁식사 후에나 들을 법한 블루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빛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방에 들르지 않고 출구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보았다. 거기엔 유리문을 통해 빛이 들어왔다. 문고리를 만져보았는데 잠겨있었다. 문패에 <OPENED>라고 쓰인 쪽이 안쪽으로 돌려있는 것을 보아서는, 폐장시간이다. 폐장한 카페, 아침, 도마 위로 칼 다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블루스. 이상한 조합이다.

 

코우시, 일어났어요?

 

고개를 돌렸다. 주방에서 토오루가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햄과 피망 볶는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동굴 같은 컴컴함을 눈 앞에 두고 이마에 댕그랑 댕그랑 부서지는 이른 오전의 빛을 맞았다. 밥 먹으러 와요. 그가 손짓했다. 나는 어정쩡히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정수리에 번지던 자연광이 점점 희미해졌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어두워졌고, 나는 알맞게 컴컴한 곳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천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전구알에 빛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전등은 별로 실용적이지 않다. 그는 양손에 접시를 들고 걸어왔다.

 

문득 생각했다. 빛이 낯설다.

 




심인광고


연애라는 말이 너무 가벼워졌다고 나는 생각해요. 도 애도 절대로 가벼운 감정들이 아닌데 그 둘이 만나면 시시껄렁해져요. 외로워서 그리워하는 거 아니잖아요. 외로워서 사랑하는 거 아니고……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얘기들을 토오루는 손깍지를 끼고 듣고 있었다. 주말 새벽이었다. 원래 퇴근시각보다 세 시간 정도 늦게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육체도 정신도 피로함을 호소했는데, 호소하는 것이 전부였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도 감은 채로 정신이 깨어있었다. 낯선 곳에 우연히 들른 호텔 방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결국 일어나서 바깥바람을 좀 쐬고 다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 신호등 앞에서 카페의 현판이 <OPEN>으로 돌려진 것을 보았다. 나는 줄곧 저녁을 먹을 즈음이 조금 넘어 가게가 열려있는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새벽에 열린 것은 처음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신호등 불이 바뀔 때까지 가게의 조그만 입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밖에선 아마, 새벽 세네 시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빛이 있다면 가로등이었다. 웅성거리는 빛들을 전구알 안에 동그랗게 모아놓은. 가로등은 겨우 제 발 밑을 밝혀놓았으니 빛이 사방에 스미지 못하고 주위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있었다. 네온사인 활발한 저녁 즈음에 들여다보는 카페의 내부는 전등 각각이 희미해서 다른 가게들에 비해 어두웠는데, 새벽에는 가로등쯤으로 보였다.

 

화장품 로드샵도 개방식 문고리에다 자물쇠를 채워놨고 브랜드 의류 매장도 셔터를 내려 닫고 있었다. 거리에는 엔진을 가동하며 바퀴 자국을 남기고 가는 동력들의 소음 하나 없었다. 고요하고, 어둠인데, 그 커다란 샵들 사이에 애매하게 낀 돌멩이처럼 움츠리고 있는 카페의 유리문 속에 자근자근한 빛이 모여있다. 널찍한 대로변에 저 좁다란 곳만이 촛불 같이 심약하고 끈질기게 움트고 속닥거리고, 그런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 아귀의 빛을 본 물고기처럼 이끌리듯 신호등을 건넜다. 인어는 혹 아귀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텅 빈 테이블 사이에 토오루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이 괴연한 시각에 들른 것을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돈 안 가지고 왔어요.

 

했는데, 그가 맥주 두 잔을 내왔다. ‘단골이니까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한두 달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하는 사람도 단골이라고 입을 삐죽거렸는데 그가 안주까지 가져다 놓으면서 히죽 웃었다. 밖에서 보았을 땐 불그스름했던 가게가 내부로 들어오니 막상 밝진 않았다. 여전히 촛불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밖에서 본 건 빛이 번진 자국이었구나, 싶었다. 토오루는 방금 전까지 설거지라도 하고 있었는지 손이 차가웠다.

 

잠이 안 왔어요.

그래서 여기 왔어요?

, ……

코우시 씨는 여자친구 없구나.

 

그 말에 내가 버럭, 장난스런 화를 낸 시점으로 어쩌다 화제는 연애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꼭 삼 년 전이라고 그가 그랬다.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삼 년 전이라고 했다. 나는 짧은 연애를 많이 거듭했다고 고백했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기분이 별로 들지 않았다. 단기에 지친 것 같았다. 연애라는 말이 너무 가벼워졌다고 나는 생각해요. 웃으며 말했는데 그는 꽤 진지한 낯을 하고 들었다. 외로워서 그리워하는 거 아니잖아요. 외로워서 사랑하는 거 아니고……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토오루는 기다란 팔로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비스듬히 보다가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에요.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워하다 보니까 외로워지고, 사랑하다 보니까 외로워지데요. 나는 잔을 입에 문 채로 눈을 굴렸다.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여 고개를 주억거려 동조했다. 입가에 묻은 거품을 훔칠 때까지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코우시 씨랑 있을 땐 외롭지 않아요. 토오루가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대꾸를 하기엔 독백에 가까운 말이어서, 나는 잔을 쥔 채로 보리빛 일렁이는 맥주 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우리의 침묵 사이를 여전한 블루스가 메웠다. 저 노래가 나오지 않는 시간은 언제일까. 저녁 즈음에 찾아와도 흐르고 있고, 아침에 나와도, 이 새벽 한가운데에도 멀쩡히 들리고 있으니 졸리고 나른한 이 노랫가락은 쉬지 않고 가게를 행성처럼 맴도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코우시 씨가 좋아요. 침묵을 깬 그의 말에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연애, 하고 싶어요.

……

코우시 씨랑.

 

다급하게 잔을 내려놓았지만 다급하게 꺼낼 말이 없었다. 나는 손마디를 꺾으며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그는 몇 마디를 꺼내놓곤 팔꿈치를 탁자에 얹고 나를 기다렸다. 말을 꺼내기 전에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밀려왔다. 한참 만에 다문 입을 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단호한 한 마디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토오루가 내 혀끝을 주시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느낀 빛만큼이나 낯설었다. 나는 늘 그랬듯이, 답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내놓았다.

 

……왜요?

 

그것도 아주 멍청한 질문이었다. 토오루는 정자세로 나를 곧이 보았다. 나에 비해 그의 눈은 분명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장난치는 거죠? 웃어넘기려던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토오루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웃으며 말했다. 둘밖에 없잖아요. 그의 답이 조금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애매했다. 나는 손을 탁자 밑으로 넣었다. 손마디를 힘껏 쥐어 뜯었다. 그러나 이내 그것도 힘이 빠져 손을 도로 테이블 위에 얹었다. 둘밖에 없다. 거기서 그가 무엇을 이끌어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식은땀이 돋는 와중에 일관적으로 나른하고 졸린 노랫말이 귓등을 스쳤다. 알아들을 수 있는 짧은 영어들로,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if love makes you lonely),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요?

유일하므로.

 

코우시 씨가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걸 알고 있어요. 그래도 매일 목 빼고 기다리고 있어요. 컵을 쥐고 덜그럭거리는 내 손목을 그가 가만히 잡고 말했다. 외로워서가 아니에요. 문득 요즘 들어 심신은 피로해도 외롭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와 말을 섞게 되며 알고 보니 내가 외로웠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늘 나름대로 바쁘고, 나름대로 짜증나는 일들이 있고, 그리고 그것은 한결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제각각의 방향으로 날뛰고 있었고 그 와중에 한 곳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면 토오루였다. 그래서 가끔 달리기를 멈추고 이 가게를 기웃거릴 여유라는 게 내게 생겼다. 그저 거기에 덩그러니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나도 외로워서 토오루 씨를 찾아오는 건 아녜요……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침을 삼켰다. 지금은 무슨 말이든 함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외로워서 서로를 만나는 게 아닌데, 만나다 보니 외롭지 않게 되었을 뿐인데. 이해할 수 있는데 한편으론 단정하기 어려웠다. 인생에 질문이 전부여서 답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뻐끔거렸다. 그가 기다려주어도 충분히 기다려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앞으로 바싹 끌어왔던 몸을 저만치 뒤로 밀었다. 사뭇 심각했던 얼굴이 도로 장난스런 미소를 걸고 있었다. 잠시 꿈을 꾼 듯 눈앞이 번쩍였다. 내가 얼떨떨한 낯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그가 손가락을 주무르며 손장난을 했다. 나를 곧이 보던 시선을 거품이 흐르는 잔 벽에 넌지시 내려두고서 웃음기 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 안 알려주는 건데.

……

연애하면 이름 가르쳐준다고 하고.

 

그는 말마디마다 웃고 있었지만 어째 웃는 것 같질 않았다. 나는 더듬거리며 다 비우지 못한 잔을 그 쪽으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상 흔들림에 따라 작게 요동치는 맥주의 표면을 구경하던 그가 그제야 고갤 들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얼버무렸다. 저는, , 갈게요. 이제 좀 졸린 것 같아요. 빤히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하고 말았다. 나는 도망치듯 입구로 달려갔다. 동이 터오는지 영 캄캄하던 바깥에 희미한 빛줄기가 비쳤다. 문고리를 쥐고 돌리자 그가 등 뒤에서 나지막이 소리쳤다. 코우시 씨, 당분간 잘 지내요. 나는 문을 열다 말고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생뚱맞은 소릴 했다.

 

이 시계의 새벽 두 시가 여기 바깥의 새벽 두 시와 맞물리는 때가 있어요.

……그게 언젠데요?

언제든요.

 

시계가 점점 느려지고 있으니까…… 맞물릴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무책임한 투로. 그가 몇 발자국 다가왔다. 나는 문을 열고 뒷걸음질했다. 이제 거리에 바퀴 훑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없어도 주위가 푸르스름하고 선명하다. 토오루는 문턱을 넘지 않은 채 문고리를 잡고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웃는 듯 웃지 않고 있었다. 가게 안쪽에서 희미하게 블루스가 반복재생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늘 똑같은 노래였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 꼭 만나요.

 

나는 문이 닫히기 전에 뒤를 돌아 횡단보도를 가로질렀다. 뒤통수 너머로 조용히 경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면 큰일이라도 날까 열심히 앞을 보고 집까지 걸었다. 도착해서는 바로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내 무게를 견디는 스프링이 푹 꺼졌다가 다시 위로 솟아올랐다. 내 몸이 매트리스 위에서 몇 번의 잔물결을 일으켰다. 시야에 새벽빛 닿아 푸르스름한 백지의 천장이 꽉 들어찼다. 그날 밤, 슬그머니 집에서 기어 나와 대로변 횡단보도를 기웃거렸다. 가게 현판에는 <CLOSED>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 다음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스물두 시간하고 삼십 분이 넘었는데도 가게는 열리지 않았다.

 

그 달 초에 나는 딱 두 가지의 일을 했다. 하나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었다. 늘 하던 일이다. 같이 신입으로 들어왔던 동료가 승진을 했다. 나는 그대로였다. 그만큼 꽁무니 빠지게 일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고, 내게 특출 난 뭔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불만은 없었다. 다이치와 포차에서 술을 마시며 한숨은 쉬었다. 한숨이 전부여서, 담배꽁초도 아니고 꽁초 짓이겨진 재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즈음에 파트타이머가 들어와서 혼자서 다 타던 커피를 나누어 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에게 동질감을 느낀 건 아니었다. 나는 스물여덟이고 걔는 스물셋이었다. 커피를 타는 스물셋 파트타이머는 옆에서 함께 커피를 타는 스물여덟 정규직원을 수상쩍은 눈으로 봤다. 나름 여러 가지의 변화가 있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대로인 회사생활이었다.

 

다른 하나는 심인광고지를 돌리는 일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심인광고라는 것을 해봤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광고지에 적을 말이 별로 없었다. 그의 키, 모른다. 얼핏 보아선 180대 초중반 같았다. 정확히는 모른다. 그래서 그냥 180대 초중반이라고 적었다. 체중? 미간을 있는 힘껏 구겼다. 사람을 찾는데 체중이라도 달아보고 연락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부분에 X를 치고 넘겼다. 핸드폰번호야 알 길이 없다. 흰 피부에, 갈색머리에…… 어떤 갈색머리냐고 하면, 몇 번을 벗겨낸 우리집 마룻바닥처럼 채도 낮은…… 이래서야 광고지를 제대로 적을 수가 없었다.

 

결국 제대로 알고 쓴 정보는 이름뿐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의 사진 한 장 없었기 때문에 인상착의를 심혈을 기울여 썼음에도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직업은 바텐더…… 라고 적었지만 이제 그가 정말로 바텐더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퇴근을 하면 엉터리 심인광고지를 여기저기에 붙였다. 그 다음날 보면 몇 개는 떼여있었다. 그를 찾는 걸 도와줄 사람들이 떼어간 건지 순찰경이 떼어간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뭐야?

, 다이치.

 

다이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내 팔뚝 밑에 깔린 심인광고지를 뺐다. 오이카와 토오루? 이게 누구야? 어떤 관계라고 명명할 수가 없어서 나는 대충 지인이라고 대답했다. 다이치는 흔한 사진 한 장 안 붙어있는 심인광고를 꽤 심도 있게 읽더니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사진을 붙여놓으면 더 좋을 텐데, 하는 걔 말에 냉큼 대답했다. 사진이 없어.

 

어쩌다 사라진 거야?

……몰라.

어디 있는지 아예 모르겠어? 짐작도 안 가?

 

나는 다이치가 돌려준 심인광고지를 가방 안에 넣었다. 문득 내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인광고지를 붙이며 가끔 불쑥불쑥 드는 생각이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그만둘 맘은 나지 않았다. 기계의 부속과 부속을 빗는 부품처럼 광고지를 붙였다. 한 장씩 붙일 때마다, 그리고 한 장씩 사라질 때마다 내가 점점 더 작아졌다. 몇 년 전, 입사를 할 때 큰맘 먹고 산 시계가 슬슬 고장 나는 듯했다. 휴대폰보다 2분 정도가 느렸다. 나는 탁자 앞에 팔베개를 하고 머리를 처박았다.

 

아니, 짐작은 가.

 

팔뚝과 팔뚝 안에서 협소해진 공간에 밀집된 공기 사이에 목소리가 꾸역꾸역 눌러앉았다.

 

그런데 내가 못 찾아가겠어……

 




우는 남자를 위한 블루스


가게가 문을 닫은 지 한 달째였다. 아니, 그 한 달 사이에 언제 한 번은 열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게 내가 기웃거린 시간은 아니었다. 여전히 심인광고를 붙이고 다녔고,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쑥쑥 줄어들었다. 창피함과 한심함의 크기가 내 크기와 반비례했다. 내가 작아질수록 나를 제외한 공간이 커져갔다. 거기서 나만 덩그러니 조그맸다. 매일 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점점 쭈그러들었다. 장식용이라고만 생각하던 손목시계의 시간도 함께 느려졌다. 장식용이라곤 생각했지만 점점 더뎌지는 초침이 신경 쓰였다. 그 즈음에 나는 외롭다,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되었다. 나는 새벽 두 시마다 알람을 맞춰두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조금 졸다가도 새벽 두 시만 되면 알람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무책임하게까지 들리던 토오루의 말이 머릿속을 공전했다. 이 시계의 새벽 두 시가 여기 바깥의 새벽 두 시와 맞물리는 때가 있어요. 그때 꼭 만나요, 그때 꼭 만나요.

 

그 와중에 반가웠던 것은 블루스였다. 주말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그 노래가 나왔다. 카페에서 내내 흐르고 있던 것 말이다. 중간부터 틀어서 제목은 알 수 없었지만, 가게에 있었을 때 언뜻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던 몇 구절이 귓구멍에 딱 맞아 들었다. 그래, 그 노래구나. 가사를 더듬어 핸드폰으로 찾아보았는데 딱히 음원은 없었다. 대중화되지 않은 블루스라서 그런지 일본 온라인 서비스에는 등록되지 않은 곡이었다. 나는 동영상 사이트에서나 그 노랠 찾아 켜놓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들 가운데에 유일하게 귀에 집히는 구절들이 몇 초의 간격으로 지나갔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what it is to be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love makes you lonely,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주중에는 회사에 나가고 심인광고지를 돌리고, 주말엔 침대 위에 드러누워 블루스를 들었다. 그게 뭔갈 해소시켜주지는 못했지만 나름 기분을 내게는 했다. 내친김에 캔맥주도 따보았다. 토오루가 만들어준 것보다 맛은 덜했다. 블루스가 없이 침대 위에 누워있노라면, 이전에 그랬듯 낯선 호텔 방에 내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침대 옆에 딱 붙은 창문으로 햇살이 들이닥쳤다. 빛의 온도와 각도에 따라 그때그때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핸드폰과 손목시계와 햇빛의 조화가 번거로워, 천장까지 올라가 있던 발을 바닥까지 쳤다. 그 너머로 햇빛이 우물우물 갇혔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위가 주황빛으로 따가울 일도 없었다. 빛이 어느 정도 차단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주위는 여전히 외로웠다. 예전과 비슷했다. 제각각의 방향으로 날뛰고 있었고, 어디를 봐도 외로이 달리고 있어서 언뜻 보면 외롭지 않게 보였다. 결국은 모두가 홀로 있으니 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건 지난 얘기였다. 홀로 있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꿈이라도 꾸듯 맛보고 나니까 외로움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잘 보고, 잘 느꼈다. 거기에 알레르기라도 생긴 듯 예민해졌다. 참말 홀로 있을 때 정확히 발음해보았다. 외로워. 남들 앞에선 부러 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 됐든 먼 사람이 됐든 내놓는 답은 거의 비슷했다. 그럼 누굴 만나면 되잖아. 그런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이치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거야?”하는 말이 나올 테지만. 그러게. 어쩌라는 걸까.

 

어쩌면 나는 내 외롭지 않음과 직결된 토오루를 부정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딸릴 수도 있고. 복합적으로, 뭐든, 나로 하여금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러 가는 길에 그의 가게를 지나쳤다. 여전히 <CLOSED> 문패를 내걸고 있었다. 가라아케를 먹으러 갔는데 생맥주가 함께 나왔다. 맛이 없었다. 울고 싶어졌고, ‘외롭다라고 발음하고 싶어졌다. 회사 동료들 앞에서 그건 추레한 짓이었기 때문에 두통을 핑계로 먼저 퇴근을 했다. 동료들 앞에서 우는 것보다 한층 더 추레하게 거리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식당을 빠져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찾아 블루스를 틀었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what it is to be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love makes you lonely,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그가 나를 외롭게 한 적은 없었지. 다만 사랑하지 않는 게 너무 외로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이 간다. 무엇을 하고 있을지도 짐작이 간다. 폐장시간에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여태의 기억을 토대로 지어지는 이미지의 건축구가 있다. 카페에서 자고 일어난 그 아침의 숙직실을 기억한다. 단순한 가게의 숙직실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이것저것 많았던. 아치형 터널 모양의 천장과, 벽을 더듬어도 찾기 어렵던 스위치와. 그는 기다랗게 뻗은 몸을 굴 속에서 오므린 것 같았다. 문득 그날의 밤이 의아해진다. 그도 나와 숙직실에서 함께 잠을 잤을까.

 

도보를 조금 더 걷자 신호등이 나왔다. 적신호다. 나는 앞에 멈춰서 컴컴한 유리문을 들여다보았다. 현판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안에는 땅 밑으로 꺼지는 계단이 있고, 어둔 조명이 있고, 찾아도 나오질 않는 블루스가 흐르고, 동굴 같은 숙직실이 있고, 토오루가 있다. 머리에 하나씩 밝혀지면서 노랫말처럼 되뇐다. 토오루는 굴 속으로 갔다, 토오루는 굴 속으로 갔다. 창백한 피부 껍질을 떠올리면서. 토오루는 왜 인어가 되었나, 왜 뭍을 견딜 수 없었나…… 그 사람 웃는 입이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조금 힘들어요. 나 역시 근래 들어 뭍이 힘들다. 그를 따라 인어가 되는 것일까? 신호등이 청신호로 바뀌었다.

 

나는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그 좁다란 유리문 앞에 멈춰 서서, 뒤집힌 현판과 함께 안쪽에 선명히 잠긴 자물쇠를 보았다. 가방을 멘 어깨가 무겁다. 잠시 가방을 벗어 바닥에 두고 문 앞에 무릎을 모아 쭈그려 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젯밤에 가게 앞에 붙여놓은 광고지가 또 뜯어지고 없다. 꼭 누군가 내게서 기회를 앗아가는 것 같다. 몸을 말아 앉으니 한층 더 작아진 기분이다. 나 이외의 공간이 불어나며 스스로 단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그는 무얼 하고 있을까. 눈을 뜨고 자는 생선들이 내 뇌리에서 퍼덕였다. 내 짐작이 맞다면 아마도 그는,

 

「삐, , , 삐」

 

볼륨이 최고조로 올라가있던 핸드폰 알람이 새벽 같잖게 요란하게도 울렸다. 새벽 두 시다. 알람을 끈 후에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한 시 오십팔 분이다. 나는 손목을 감싸고 있던 시계를 풀어 내동댕이쳤다. 가죽 끈이 가방 옆에 뒤집어졌다. 잔뜩 오므려 세운 무릎을 두 팔로 껴안고 머리를 처박았다. , 괴롭다. 외롭다. 인어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저 시계가 느린 건지 핸드폰이 빠른 건지도 모르겠다. 이끼가 낀 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단칸이지만 지느러미를 퍼드득 움직여도 한 사람이 더 누울 공간이 있다. 그런데 나밖에 없다. 이런 건 싫다. 손목시계는 이 분이 더 느리다. 그리고 앞으로는 삼 분, 사 분으로 더 느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홀로 이 분이 더 느린 세상에서 살고, 삼 분, 사 분으로 느려질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일까? 잔뜩 웅크린 다리가 저려왔다. 지느러미가 되려나 봐, 지느러미가.

 

다리 위로 고갤 내리꽂고 있음에도 눈을 질끈 감았다. 발끝에 힘을 주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게 만드는 아릿한 감각이 퍼진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종아리가 찌릿찌릿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 발이 더 굳기 전에 무릎을 묶고 있던 팔을 풀었다. 맞은편에 세워진 가방 앞에 나동그라진 손목시계가 보였다. 손을 뻗었다. 가슴과 팔에 짓눌린 무릎이 뼈가 빠진 것 같은 통증을 호소했다. 손끝이 가죽 띠에 닿았다. 무릎이 파삭파삭 꿇렸다. , 외로워. 인어의 한 맺힌 노래 같다. 외로워. 그 말이 혀끝에서 굴러 나왔을 때, 문득 내 옆에 버티고 있던 유리문이 철렁거리며 열렸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코우시 씨.

……

 

토오루는 방금 자다 깬 듯 머리가 부슬부슬했다. 그의 다리 뒤로 여전히 벽 한 칸을 차지한 시계가 보였다. 어딘가 이상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모두 그대로였다. 바늘들은 두 시를 가리킨 상태에서 미동이 없었다. 며칠 전에 고장이 났거나, 배터리가 다 닳은 것일 수도 있다. 거 봐요, 고장 났다고 했잖아요, 하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어정쩡하게 시계에 팔을 뻗은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맨바닥을 더듬더듬 짚으니 그제야 시계가 뒤집혔다. 두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우시 씨, 그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간만에 그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이었다. 가라아케집에 있다 온 탓에 양장 위로 기름 냄새가 짙게 배어있었다. 그에게선 협소한 공간에서만 맡을 수 있는 좁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불현듯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종이뭉텅이가 눈에 들어왔다. 뒷면이 거칠게 뜯긴 흔적이 있었다. 심인광고지였다. 한 장이 아니라 몇 장이 뭉치로 들려있었다. 나는 가라아케집에서도 거리에서도 울지 않았던 추레한 울음이 다시금 눈자위를 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내 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려 내가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간만에 본 얼굴에 멍해진 머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정리해야 할 줄 모르고 방황했다. 하고 싶은 말이야 너무 많았다. 그 동안 무얼 했는지, 시계는 왜 저렇게 된 건지, 그리고 내가 잘못했다는 조금 우스운 말까지 늘어놓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그것들은 막상 성대를 투과하지 못했다.

 

내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토오루의 손이 불현듯 내 양장 옷깃을 꽉 그러쥐었다. 그는 팔에 쥐가 난 사람처럼 미동 없이 그러고서 숨을 멈추었다. 나도 그와 함께 숨을 죽였다. 불이 다 꺼지고 비상등 하나만 덩그러니 켜진 카페 안에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대로 흐르고만 있을 것 같은 곡조가 새어 나왔다.

 

외로울 때 하고 싶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you want to love when lonely, it is not what it is to be

 

사랑이 당신을 외롭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if love makes you lonely, it is no longer what it is to be

 

다만 사랑하지 않아 외롭다면

only when you are lonely by not loving love

 

그것이 사랑입니다

that is what it is to be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구간이 지나고, 내 숨소리가 조금씩 증폭했다. 울고 싶다. 같이 울고 싶다. 추레해서 보이기 싫었던 울음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와 끌어안고 목이 다 쉬도록 울면서, 내가 그의 바다로 헤엄쳐 들었음을 알리고 싶다. 인어가 되고 싶다. 아니, 이미 인어인 것 같다. 뭍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어가 되고 싶다. 고개를 내밀고 수면 위의 노래들을 즐기는 인어가 되고 싶다. 그가 이미 그렇게 했잖는가. 나를 자신의 심해로 끌어들였지 않나. 홀로 있는 게 아니다. 같이 있다. 재작년부터 우리는 줄곧 심해에 함께 있었다. 그가 내게 손짓했다. 와달라고. 뭍을 견딜 수 없어 물로 갔다고. 뭍만큼이나 물이 외로웠다고. 그래서 나는 인어가 될 줄을 알면서도 뻗친 그의 손을 잡아서, 나도 외로웠다고. 당신이 없는 뭍이 너무 외로워 차라리 물로 가겠다고 그랬다. 나는 목구멍 깊이 끓어 흐느꼈다.

 

외로워요.

 

내 등을 그러쥔 그의 팔을 갈퀴처럼 붙잡고 외로움을 끓였다. 뚜껑을 닫아둔 냄비처럼 끓어 넘쳤다. 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물로 돌아가든 뭍으로 다시 나오든 나랑 있어줘. 그는 나를 들어올렸다. 얽힌 지느러미가 심해로 미끄러졌다. 어둑어둑한 곳에 굴렀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 입맞춤을 퍼부어댔다. 나는 그의 뒷목을 그러쥐며 악을 썼다. 토오루, 외로워요. 외로워요. 그는 내 온몸을 조여 안으며 화답해주었다.

 

나도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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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이나 어둠보다 안개가 더 두렵다. 늘 애매한 것들에 둘러싸여는 있었지만 그것에 진절머리라도 난 것인지 정확히 하는 게 없으면 분통이 터졌다. 안개는 극단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다고도 할 수 없고 저렇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예컨대 오다가다사이에 있는 멈추다같은 속성에 더 가까웠다. 늘 내 입으로 토비오가 재수없다고 말해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에서 더 진보된 가증스러움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있었다. 토비오는 단순했고, 그래서 차라리 빛이나 어둠이었다. 빛에 눈이 멀면 멀었고 어둠에 시야가 차단되면 차단되는, 그런 식이었다. 그에 비하면 코우시는 안개였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안개의 속성을 혐오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일차적인 풍경은 보여주어도 막상 보고 싶은 것은 보지 못하게 해서, 빛과 어둠 속에 놓여있을 때처럼 판단이 곧추 서질 못했다. 희부연 하늘을 보며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먹구름이라고 영 시꺼멓지는 않았다. 비가 오기 직전의 구름은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애처럼 멍해 보이기도 했고 제 뒤로 꾸역꾸역 먹어가는 햇살까지 등지고 있어서 쓸데없이 허옇기까지 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쉬이 하늘의 얼룩처럼 보였다. 나는 빛이 될락말락 하얀 멍울자국을 남겨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름의 욕설을 읊조렸다. 차라리 멀어버려라, 멀어버려라……

 

내가 코우시를 더 싫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안개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줄곧 안개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서 동어를 들으니 여태 내가 부정해왔던 속성들이 죄 나의 것인 마냥 되돌아왔다. 매 다르다고 확신했던 사람으로부터 의외의, 썩 달갑지만은 않은 동일성을 발견하고 나는 뇌수로 토악질을 했다. 코우시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를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나 요즘은 토비오보다 상쾌군이 더 짜증나더라고. 하지메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몇 마디를 던지니 걔가 참 별거 아니라는 투로 받아 쳤다. 난 네가 더 짜증나더라. 나는 하지메다운 대답을 받아내고 헤벌쭉 웃었다.

 

상쾌군 엄청 의외다.

뭐가?

되게, 까졌어.

 

나는 동이 다 트지 않은 새벽에 코우시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애냐, 혼자 간다, 하고 걔는 먼저 뛰쳐나왔는데 나는 내 집에 내가 홀로 남겨진 기분이 싫어서 바득바득 데려다 준다고 우기고 뒤따라 나왔다.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한데다가 간밤에는 비까지 쏟아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치교 난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걔는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히죽히죽 잘도 웃었다. 자전거를 질질 끄는 건 멋없어서 빈손을 저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왔으나 나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며 마당에 주차된, 중학생 때까지만 타고 말았던 자전거를 끌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곧 시야가 얼룩졌다.

 

의외…… 맞아, 진짜 의외지?

 

잿빛 얼룩 속에서 코우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습관처럼 미간을 오므렸다. 말이나 하지 말걸. 안전빵을 싫어해서 미지의 영역이라는 걸 한번도 포기해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또 그게 오래도록 미지로 남으면 열불이 났다. 방금 나는 먼저 의외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그 애의 미지를 너무 쉽게 인정해버린 셈이 아닌가. 지식의 그릇 운운하며 모르면 아는 척을 않는 거라던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것이 없다. , 너도 의외던데. 코우시는 열심히 안개 속을 걸으며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똑같은 의외인데 나는 항복에 가깝고 걔는 봐준다는 투에 가까웠다. 생각과 생각의 마디 사이에 질퍽질퍽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별로다.

 

토비오짱이 날래는 판에서 용케 잘 버텨? 내가 말해놓고도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코우시가 그래 너 유치하다, 하고 사살도장을 박았다. 그 애 얘긴 그다지 뒤에서 하고 싶진 않아. 나는 코우시 뒷목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러냐 하고 말았다. 길고 긴 다리를 지나는 동안 나는 잠시 어젯밤의,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걔는 처음이냐고 묻는 것이 민망하게 능숙해 보였다. 나도 아주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 어떤 게 능숙하고 어떤 게 서툰 건지 알았다.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서툴면 더 당당하고 괴팍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턱을 쓰다듬으며 말꼬리를 끌었다. 걔는 어깨를 바싹 움츠린 채로 걷다 말고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코우시는 어제 많이 흐느꼈다.

 

, 역시 상쾌군은 싫어. 코우시는 그걸 잘 안 맞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언제 뭘 맞춰봤다고 그러셔? 나는 음전하지 못하게 무어라 하려다가 관두었다. 우리는 어제 꽤 섬세하고 꼼꼼하게 서로를 안았다. 그래서 그 긴 행위가 마치 한 세트의 경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찬찬히 탐색하고 분석하고, 그러다가…… 탐색만 하고 끝난 것 같은 뒤끝을 남기기는 하였어도. 나는 고개를 비틀어 그 앨 마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내가 해야 할 말을 걔가 먼저 꺼냈다. 맨살까지 부대낀 사이에 별로 알아낸 바가 없는 것 같다. 아니, 맨살만 부대낀 사이구나.

 

바로 학교 가?

. 외박해서 가방도 여기 있잖아.

일찍 가면 할 게 있나.

체육관 열쇠는 아직까진 내 담당이거든.

 

다리를 다 건넜을 즈음에 안개가 더욱 풍성해졌다. 나는 젖은 공기가 자욱한 틈에서 손을 휘젓는 코우시의 인영을 발견했다. 아직 햇빛이 쏟아지지 않아서 시야가 좁다. 나는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 . 학교에서 졸지 말고. 안 졸아. 우리는 습기가 그득한 강주변을 중화라도 시키려는 듯 건조한 대화를 마치고서 각자 등을 돌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너왔던 다리를 도로 건너며 아쉬운 생각을 했다.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 것 그랬어. 걸리적거리고 멋없지만. 코우시가 등 뒤로 낚싯줄 같은 자전거 바퀴소리 멀어져 가는 걸 들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霧雨


요즘 봄비가 많이 내린다. 매일 오는 건 아닌데, 한 번 내리면 제대로 내렸다. 콸콸 쏟아지는 폭우는 아니었지만 정말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또 비가 오는 날엔 해가 그렇게 안 나서 하늘이 얼룩져있었고 가장 낮은 곳에는 김 서린 주전자처럼 안개가 휘날렸다. 그것도 전부 개울 주변이나 늪지대가 되어버린 풀숲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므로 시내 사거리에 위치한 세이죠로 통학하는 나로서는 볼 일이 별로 없었지만 최근엔 예외였다. 굳이 거기에 가지 않아도 안개는 어디에서든 도사리고 있었다. 그저께는 잡화점에서 코우시를 봤다.

 

나는 집에 화분 하날 들여서 따로 물을 줄 생각으로 분무기를 사러 들렀는데 걔는 엄청 커다란 밀대걸레를 사고 있었다. 그건 뭐에 쓰냐고 물어봤더니 체육관 청소함에 부러져있던 걸 몇 번이고 고쳐 썼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 사러 왔다고 했다. 나는 먼저 분무기를 계산한 후에 어째 가게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코우시는 지갑을 열어 반으로 접힌 지폐를 꺼내 밀대걸레를 계산한 후에 교내청소부 같은 폼으로 그걸 들고 엉금엉금 나왔다. 나는 유리문을 열어주면서 걜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쪽팔리게 저 멀대를 들고 학교까지 가냐. 코우시는 나이가 있는 여자들처럼 억척스러운 데가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연습은 어떻게 되어가?

내가 그걸 말해줄까 봐!

아아, 상쾌군이 토비오짱보다 머리가 훨씬 비상하다는 걸 까먹고 있었어.

카게야마가 왜. 경기할 땐 머리 쓰더만.

 

일주일 후에 카라스노와 친선경기가 있었다. 친선이 말이 좋아 친선이고 다 탐색전이었지만 어쨌든 그 듣기 좋은 명분 아래 오랜만에 코우시를 코트에서 볼 것 같았다. 더 성가시겠다. 걔는 손 대신 굵게 땋은 머리카락 같은 밀대걸레를 휘휘 흔들면서 인사했다. 나는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바닥을 꺼내기가 귀찮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롭게 재구성된 카라스노는 그나마 있던 부원들 중에 대부분이 떠나가서 예전 경기 자료를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경기를 유예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조바심만 잔뜩 내다 올 경기가 기다려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우리 학교 체육본관에서 몸을 풀다가 코우시와 재회할 수 있었다. 걔에 이어 참 뜯어보기가 성가신 토비오도 와있었다. 키가 백오십 얼마였을 땐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개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애가 눈매가 가시 돋쳐서 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웃기고 짜증났다. 그때 서브라도 좀 가르쳐줄 걸 그랬나. 주인 몰라보는 개새끼처럼 그 녀석이 나를 흘금거리며 코트 위에 섰다. 나는 눈썹을 치켜 떴다. 코우시는 벤치에 서서 토비오의 등을 밀다가 나와 시선이 얽혔다. 네트를 두고서였다. 걔는 다리 위에서 날 물끄러미 보던 표정을 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혀를 찼다.

 

묵사발 낸다, 진짜.

 

내 중얼거림에 무릎을 스트레칭하고 있던 하지메가 나를 흘긋 올려다봤다. 걔가 입을 다문 대신에 뒤에서 목을 축이던 킨다이치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가 주전이야? 나는 뻐근한 뒷목을 꺾어 풀며 대꾸했다. 그런 건 입 밖으로 안 내도 돼, 킨다이치. 적당히 웃고 농을 치며 네트 건너편을 뚫어 보았다. 코우시는 맨손으로 물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걔는 죽어도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除霧


친선경기 이후로 코우시를 못 본 지는 보름이 넘었다. 막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그게 내 일상에 구멍을 내지는 않았다. 토비오는, 괜찮아지긴 했는데, 더 괜찮아져야겠더라. 부실 탁자 아래에 누워서 중얼거리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사복을 사물함에 넣은 하지메가 내 머리맡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늘도 오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센다이시만한 가습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어린애 같은 말에 손톱깎이를 꺼내던 하지메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이 녀석 손에 매일같이 들려있던 채집 그물로 구름 한 송이를 따내듯 안개를 거둬가고 싶다.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시야는 물론 피부까지 조이는 습기가 반갑지 않았다.

 

토비오는 앞으로도 주전이겠지? 짐짓 물은 말에 하지메가 대충 대답했다. 그렇겠지, .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모두가 침묵하며 잠시 동안 부실은 걔 손톱 부서지는 소리로 찼다. 하지메가 오른손 약지 손톱까지 깎았을 때 나는 테이블을 치우고 천장을 봤다. 둥그런 조명등은 모아놓은 입김 같았다. 있잖아, 이와짱. 걔를 나지막이 불렀더니 새끼손톱까지 알뜰하게 깎아내면서도 대답은 해주었다. 어어. 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가끔 쓸데없는 것도 알고 싶고 그런 거잖아.

.

되게 별거 아닌데 알 수 없는 것도 있잖아.

.

 

내 체취가 그득 묻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흐느끼던 코우시는 솔직했다. 그래, 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가증스럽다. 거짓말하지 않는데 다 말해주지 않는 놈들은 처절하고 비밀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코우시는 나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메가 손톱을 깎아 놓은 신문지를 둥그렇게 말고 일어났다. 나는 손바닥에 꼭 맞게 잡히는 배구공을 천장으로 올렸다. 입김에 닿을락, 하더니 다시 내 가슴으로 꺼졌다. 나는 노래 가사의 2절을 부르듯 다음 말을 이었다.

 

나 상쾌군이랑 잤어.

 

쓰레기통에 손톱을 쓸어 넣던 하지메가 멈칫했다. 손톱은 걔 의지대로 멈춰주지 않아서 봉투 안으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방 한 구석으로 공을 굴려 넣었다. 하지메는 한참 쓰레기통 앞에 서있더니 이내 주춤주춤 걸어와서 다시 내 머리맡에 다릴 굽히고 앉았다. 그래서? 그 녀석은 가다듬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내 친구인 게 너무 좋았다. 걔가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꽂았어도 난 그렇게 생각할 거다. 어설픈 웃음이 나자 하지메가 딴 말을 했다. 요 일주일 동안은 비안개가 내리겠다. 나는 그 말마저 듣기 싫어서 맥락을 끌었다.

 

걔랑 했는데……

……

또 하자고 하면 해줄까?

 

하지메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빛이 넘칠 듯 말 듯 구름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게 다 비가 내려서 그렇다. 구름이 쏟아지니 개울이며 풀숲에 구름투성이인 거지. 빛이 같이 쏟아지면 차라리 땅은 빛투성이일 텐데. 나는 당당히 보고 당당히 눈이 멀 수 없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갑자기 가슴이 퍽퍽해지도록 화가 났다. 왜 내가 창피해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 이후에 전국에 갈 때까지 한 번 더 아껴두려고 했던 눈물을 짰다. 안개를 다 녹이고 싶다.

 

안개를 거두고 싶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반대편 창문의 커튼까지 젖힌 하지메가 중얼거렸다. 네 앞가림이나 해, 쿠소카와. 하늘이 허옇기만 하고 쏟아지질 못한다. 저게 날 닮고 걜 닮았다니. 나는 입술을 들썩거렸다. 거둬내고 싶다. 구멍을 내고 싶다. 눈이 멀어버릴 빛이 땅으로 챙강챙강 쏟아지는 게 보고 싶다. 나는 눈꺼풀이 아파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배구공을 다시 주섬주섬 끌고 와 가슴 위에서 굴렸다. 걔가 나 만나줄까. 중얼거림 끝에 나는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와짱, 대답 좀 해봐.

 

자전거를 끌고 가면 걔가 날 만나줄까……

 

하지메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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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부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너고 다른 하나는 너에 대한 나다.

 

나는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부하는 것들과 이 세상은 그런 점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너는 글을 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너와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것들, 내 안팎의 것들은 내 뇌보다 더 조잡하고 푸둥푸둥한 점질로 연결된 회로를 통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다시 말해 내 몸에는 내장된 망원경이 있었다. 너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넌 내 말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이 문장은 필시 너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제 사이즈의 옷을 입은 것처럼 꼭 맞는다. 나는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오래 전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는데.

 

너는 나와 미야기에서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 대략적으로 도합 칠 년 정도 너를 지켜본 결과 너는 매사에 열심이고 영리했고 또한 예민했다. 너는 순간에 임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고등학생 땐 배구부활동에 미쳐있었고 대학생 땐 드럼 동아리를 밥 먹듯 나갔으며 졸업 후에는 글을 줄창 썼다. 나는 너의 변천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너의 처음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 같다. 아니, 정정하겠다. 네 온전한 처음이 아니라 너에 대한 나의 처음이다.

 

우리가 입부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너는 사교성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무실에서 입부서를 받아 작성하고 내러 가던 길에 2층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때가 초봄이어서 대부분 환절기로 감기를 앓고 있었는데 너는 가쿠란 단추만 채웠을 뿐 그 위에 베스트나 카디건도 입고 있지 않았다. 체육관으로 이어진 야외복도를 지나며 네가 그랬다. 안 더워? 너야 말로 안 추워? 아아, 나는 더위를 더 많이 타서. 거기서 수천, 수만 가지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리고 너와의 첫만남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치 않았고, 그래서 나중엔 실망도 없었다. 너는 초여름 유월에 태어났으면서 정말로, 더위를 많이 탔다. 슬그머니 손을 뻗치는 고온의 바람처럼 네가 왔다.

 

카라스노의 가장 불행한 시기에 우리들이 있었다는 얘길 가끔 듣는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아사히가 체육관에 나오지 않았을 때 찾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꼭 카라스노가 6월 인터하이 3회전에서 패배한 그 다음 해에 입부를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입부생들은 둘 중 하나였다. 제가 카라스노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든, 가볍게 부활동을 하기 위해 들었든. 나는 당돌한 전자였는데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으니 너 역시 전자였을 것이라 믿는다. 너는 끈질긴 체육관 신세로 2학년부터 주전세터가 되었고 나는 가끔이지만 네 토스를 받는 게 즐거웠다. 2학년 끝물에는 네 토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었다. 대부분의 부원들이 탈퇴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3학년이 되던 봄에 기묘한 입부생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야기에 있는 센다이 대학에 붙었다. 나는 체육학과에 지원서를 넣었고 너는 건강복지학과에 지원했다. 너를 잘 구슬려서 함께 현대무술학을 복수전공하기는 하였으나 너는 꼭 동아리는 드럼에 넣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악기를 다룰 줄 몰라서 세 달에 한 번 꼴로 네 동아리에서 여는 미니콘서트를 기웃거리거나 오월 학교 축제에서 솔로 퍼포먼스를 하는 네 사진을 몇 장 찍어주는 게 전부였다.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네가 메인 드러머라는 걸 건너건너 알게 되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배구동아리에 들었다,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에게만 당연한 절차였다. 졸업을 앞둔 해가 되었을 즈음에 너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다니던 드럼동아리를 그만두었다. 취업 때문에 그렇느냐고 물으니 너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졸업시험을 준비하며 네가 떠난 자리에 야스오라는 신입생이 앉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입생이 메인 드러머로? 조금 의아했지만 그 해의 학교축제에서 납득하게 되었다.

 

꼭 무언가의 말단 즈음에 네게 취약한 여름이 찾아왔다. 피부를 좀먹는 어마어마한 습기와 머리를 태우는 찌는 듯한 열기로 갑작스레 몰아 닥쳤다. 그래서 네가 지쳐 보일 때마다 나는 아주 조용히 자리잡았던 너를 생각했다. 고요히 다가와 고요히 잦아들었던 너를. 그리고 네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인터하이 예선에서 꺾였을 때도 울지 않았던 울음을 울고 싶어졌다. 종말終言이 두렵다.

 

 



 The End of the Word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만난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같은 센다이시에 살면서도 각자의 일로 바빠서 얼굴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 키는 얼만큼 컸는지, 무슨 대학 져지를 입고 있는지, 뒷머리를 짧게 다듬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우리는 반가움을 삼켜야 했다. 오랜만의 만남을 가지기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 애들은 여전히 나를 주장이라고 불렀다. 잠깐의 짧은 담소 후에 우리는 간호사의 안내로 5층 안정실에 도착했다. 센다이시에 위치한 중앙병원이었다.

 

너는 링거를 통해 영양제를 정기적으로 공급 받고 있었다. 꼭 그러고 있던 게 오늘로 나흘째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떻게 된 거예요? 히나타가 물었지만 나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일단 일련의 사실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했다. 너는 호코 연립주택 4층에 살았다. 3층에서 번진 불이 4층까지 번지지는 않았으나 출입문과 창이 모두 닫혀 있던 방으로 연기가 배기관을 타고 올라왔다. 너는 그때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따라서 아래층에서 불이 난 걸 몰랐다. 너는 부리나케 달려온 소방관 덕에 목숨을 구했다. 불이 번져 가구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외상도 없었다. 하지만 너는 나흘째 깨지 못하고 있다. 내 부족한 설명을 듣고 카게야마가 곧잘 의견을 내놓았다.

 

연기를 마셨다는 거죠?

……

마셨을 수도 있다는?

아마도.

 

마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 하지만 더 설명하기가 복잡하여 나는 그렇다고 긍정해버렸다. 큰일날 뻔했네요. 질식사했으면…… 목소리가 제법 굵직해진 히나타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는 맞장구 치며 링거 바늘이 꽂힌 네 손을 감쌌다. 창백하고 엷은 피부의 손등 위로 3mm 정도의 주삿바늘이 점막을 관통한 것이 희미하게 비쳤다. 역시 언어는 복잡해. 좀 더 잘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네 손가락 하나하나를 쥐어 보았다. 너는 호흡기를 단 채로 몸을 늘어뜨리고 고요히 잠들어있다. 조용히 와서, 조용히 잦아들고, 조용히 잠들고. 나는 의사들이 너에게 달라붙어있는 동안 수술실 수동문 앞에 달라붙어서 결과를 기다렸다. 네가 연기를 마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술은 아주 일찍 끝나고, 아니, 시작하지도 않았고, 병원에서는 너를 나와 함께 구급차에 태워 중앙병원으로 옮기며 말했다. 네 폐는 깨끗하고 무사했다고. 하지만 엉뚱하게 위궤양을 발견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중앙병원에서는 네 위 검사에 앞서 식도부터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해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의 식도고 위였다고. 나는 소독실에서 나오던 이 병원 의사에게 그 말을 듣자마자 너를 안정실에 둔 채 네 집으로 향했다. 3층은 불이 난 곳을 보수 중이었다. 하지만 4층 복도는 정말이지 말끔했다. 네가 병원을 두 곳이나 옮긴 게 사치스러워 보였을 정도로 그랬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이 가지런한 신발장이었다. 네 좁은 집에는 거실과 부엌의 구분이 없고 네가 창고라고 부르던 작디 작은 방이 미닫이문을 끼고 화장실 옆에 붙어있었다. 너는 비교적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이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두 권과 노트북이 있었다. 부엌 찬장엔 그릇들이 쌓여있었고 개수대 쪽 컵걸이에 머그컵 세 잔이 거꾸로 꽂혀있었다. 너는 설거지를 다 하면 우선 거기에 컵을 걸어 물기를 빼고, 다음 끼 설거지를 할 때 걸어두었던 걸 찬장 안에 넣는 식이었다.

 

단조로운 몇 구획의 공간이 지나치게 정돈되어있었고 또한 지나치게 더러웠다.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기는 하였으나 나는 싱크대를 한 번 훔쳐낸 검지 위에 먼지가 꾸덕꾸덕 낀 것을 보고 이맛살을 구겼다. 그리고서 가늠하기에…… 적어도 일주일에서 이 주 동안은 네가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3층에서 불이 났다. 4층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연기가 올라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맡았지만 너는 연기를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이전에 있었을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나는 청소를 하지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온종일 누워 잠을 잤다. 너는 먼지 속에 누워 숙면했다. 문득 척추에 뱀의 비늘이 곤두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죽으려고 했다. 네가 스물셋에 썼던 글의 한 구절이 또렷이 떠올랐다. 너의 언어는 복잡하고 성가시다.

 

이 녀석도 정신을 차리는 날이 오겠지.

……

나는 가끔 얘가 너무 익어서 썩어버린 과일 같다는 생각을 했어.

……아사히상한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나는 잠시 병원을 나와 녀석들에게 이른 저녁을 사주었다. 문패에 오픈키친이라고 써있었다. 조리사들이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내고 채소를 다듬는 것까지 고래등만한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주문을 해놓고 턱을 괴고서 힘이 좋은 남자조리사가 냉장고를 열고 싱싱한 호박과 양배추를 팔에 이고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일주일 전에 열어보았던 네 집 냉장고가 생각났다. 채소, 잼이며 두부며 계란이며 그득히 채워진 네 냉장고에서 시퍼런 썩은내가 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커리가 나오고 나는 한 술을 떠서 묵묵히 씹었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잘 지내고 있었다. 저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인 학점을 가지고 누가 낫네 누가 꿀리네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으며 그 애들 빈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래, 잘 지내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는 있어야지.

 

저녁을 먹고 그네들을 보낸 후에는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안정실에는 늘 환자 침대 옆에 간이침대가 한 대씩 있었는데 매트리스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등이 아팠다. 거기서 이틀 정도 자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리 늦게 자도 다음 날의 해가 지기 전에는 눈이 뜨이더만, 너는 어떻게 그리 오랜 잠을 잘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길어지는 잠만큼이나 오랜 시간 네가 지켜온 침묵들을 생각해보면……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네게서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너에게 적정선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언제부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네게서 언어라는 게 과잉이었고 동시에 소멸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배구를 졸업하고 대학에 오자마자 드럼 스틱을 쥔 네게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네가 주먹을 그러쥐고 내 정수리에 아주 따끔한 꿀밤을 한 대 먹였던 것도 기억나고. 바람은 무슨 바람! 원래 좋아했어. 네 말에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뭇 의아해지기도 했다. 네가 그것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하지만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제야 나도 드럼인지 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네 언어의 많이 얽매여있었다. 아직도 그렇다. 너는 언어를 소중히 여겨 잘 내놓지 않았다. 내가 너를 칠 년 동안 보면서도 너를 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스가, 네 시간 후면 닷새다.

 

해가 다 진 병실이 어두컴컴했다. 깨어있는 사람이 없으니 불을 켤 필요도 없다. 나는 스위치를 누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발을 내리지 않은 창에 밤빛과 섞여 푸르스름해진 조명등이 부딪혔다. 덕분에 나는 더듬거리지 않고 간이침대를 찾아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내일은 정말로 집에 한 번 가야 한다. 주말이기는 하지만 와이셔츠를 다리고 금붕어 밥도 주고 바닥도 좀 쓸고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여러모로 바쁘다. 네 시간 후면 닷새다. 네가 깨어나지 않은 지 닷새가 흐르게 된다.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테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네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짓을 했는지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옅은 짐작만 한다. 그것이 한계다.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언어란 게 너무 어렵다. 어려운데 곁에 두고 싶고…… 그 끝을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렵다.

 

스물다섯이면 아직 애야.

……

아직 애라니까.

 

나는 간이침대에 몸을 구기고 누워 네가 누운 침대로 손을 뻗었다. 아까 잠시 나갔을 때 간호사가 링거를 갈아준 모양이었다. 손등 위에 부착된 밴드가 새것이다. 온기가 있는 네 손에 깍지를 꼈다. 내 손바닥의 습기가 건조한 네게로 옮기를 바랐다. 네가 조용히 잠들었으니 조용히 깨어나기를 바란다. 잠에서 깨고 나면 잠들었던 시간의 토막을 아예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꿔버리자. 언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마음대로 없앨 수는 없지만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있는. 나는 다 견뎌도 네 침묵을 못 견디겠다.

 

물어볼 게 많으니까 얼른 일어나.

 

참 고요한 녀석이다. 일어나 무슨 말부터 뱉을지도 모르겠다. 온몸이 가장 시끄러운 순간일 때마저 조용했었다. 내게는 그다지 고요한 기억이 아니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과대로 참여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애초에 다른 과였기 때문에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그 다음날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며 만났다. 그래서 집에 들러서 씻고 만나기로 하고 자주 가던 대학로의 선술집에서 봤다. 나는 주로 이번 신입생 중에 키가 몇 센치인 놈이 있었고, 군기가 어땠고, 포부는 또 어떻고, 그런 얘기를 했고 너는 신입생 장기자랑 중에 어떤 게 제일 황당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때 어쩌다 얘기가 이렇고 저런 쪽으로 흘러가서 내가 복수전공을 하자고 꼬셨을 것이다. 복수전공이 어쨌고 저쨌다는 건 아무래도 이것과 상관 없는 얘기였지만, 알다시피, 내가 무언가를 맥락으로만 기억하는 일은 좀처럼 없어서 그렇다. 우리는 그날 잤다.

 

그 과정까지는 이상한 게 없었던 것 같았는데, 행위가 끝나고 돌아 누운 너를 보고서 실감했고 또한 두려웠다. 우리가 잤구나. 어쩌다 그렇게 되었지? 반문해보아도 그 맹점을 찾아낼 수 있을 만한 획기적인 계기나 사건 같은 것이 없었다. 집에서 씻고 나와 오후 한 시 정도에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낮술을 하다가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조금 벌였고, 그러다가 보니 자게 되었다. 그때도 네 피부가 조금 투명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밑에서 해초 같은 핏줄들이 헤엄치는 걸 보았다. 그때 나는 눈도 귀도 전부 네게 쏟아질 듯 어지러웠는데 너는 의외로 머리를 차갑게 두고 있었다. 네가 삼 년간 배구를 하며 단련된 팔뚝을 내 목덜미를 겨우 붙드는 데에 쓰고 있었다는 것이나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하고 나서 돌이키니 많이 아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는 흐름을 깨기 싫었던 것인지 당시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미 잃은 짐승 새끼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게 전부였다.

 

네게는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언어였다.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너는 말 대신 글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말보다 글이 너에게는 더…… 시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너무 정교하고 침착해서 글보다 말을 쓰는 나는 너의 언어를 이해하기까지 한참 걸렸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정말로 너를 몰랐던 때였다. 이제 너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내가 어쩌면 너의 일부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너의 시기들을, 연대기를 거닐어오며…… 배구, 드럼, 이제 너에게서 누가 글을, 언어를 뺏어가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너는 깨어나야 한다. 네 언어의 죽음을 너는 몰라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네 손을 들어 내 뺨에 비볐다. 깨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자. 깨어나고, 다시 글을 쓰고, 말해줘. 뭐든 말해줘. 거짓말도 좋으니 해줘. 나랑 다시 마주보고 술을 마셔주고, 입을 맞춰주고, 안겨주고, 아프면 울어줘. 아팠다, 무서웠다, 힘들었다, 죽고 싶었다! 너는 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이든 너의 언어로써. , 나를 위해 목놓아 울어줘.

 

언어로 병드는 것 같아.

 

어느 날이었다. 팩스를 받는데 구내 안내방송용 스피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왜 들렸나보다도 네 목소리가 너무 생소하여 그것이 온종일 머릿속을 떠다녔다. 네 목소리를 듣지 않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세보았더니 까마득했다. 그날 나는 네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교 도서관에 들렀다. 학교 도서관은 구식이라 컴퓨터로 도서 검색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 칸이 넘는 국내도서란을 빙빙 돌며 네 책을 찾아 헤맸다. 『코트』라는 책을 뽑아서 빌렸다. 언젠가 네가 가장 할 말이 많았던 글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봄비가 하루 종일 척척하게 내려서, 나는 어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소파 위에 엎드려 네 책을 읽었다. 너는 참 너처럼 썼다. 그제야 네 목소리가 조금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책의 마지막 목차에 다다르기 전에 본 구절은 이러했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죽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목차를 읽기 전에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연락을 받았다. 오늘 하루 종일 나갔다 올 데가 있다는 옆집 남자에게 우산을 빌려주었다. 연락을 받았다. 나는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다 젖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단 눈에 띄는 신발이 운동화였다. 달리기 딱, 좋다. 지하철을 타면 오 분이고 걸어서 가면 이십 분이다. 그런데 시간을 고철덩어리에 맡기기 싫었다. 나는 따뜻한 빗속을 내달렸다. 종아리에 묽은 비명이 터졌다. 나는 정말로 비명을 지르며 이 동네를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너를 데려다가 코트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홀로 깨어 낯선 그이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있을,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마음으로 이미 몇 가지의 언어를 다시 끄집어내야 했을 너를 생각하니 발바닥이 아파왔다. 젖은 운동화 밑창이 무쇠 같은 소릴 냈다.

 

중앙병원 5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막상 걸음이 느려졌다. 네 언어의 속도대로 달려온 모양이다. 나는 복도에 길게 떨어진 빗물자국을 돌아보았다. 두 겹으로 난 바퀴였다. 그들이 이미 다녀간 모양이었다. 문고리를 내리자 고정핀이 풀리며 문이 헐거워졌다. 문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이기 전까지 너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가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이 세상이 참 낯설다는 낯을 하고 웃었다. 타지를 여행하다 일본인을 만난 것처럼. 나는 황급히 네 앞에 무릎을 꿇고 뺨을 쥐었다. 영양분은 링거로 공급받았지만 실질적으로 먹은 것이 없어 볼이 패였다. 못 살아. 못난아, 못난아, 못 산다. 내 곡소릴 멀뚱멀뚱 듣고 있던 네가 뜬구름처럼 입을 열었다.

 

배고파.

 

나는 잔소리 같은 푸념을 늘어놓다 말을 멈추고 너를 올려다보았다. 언어로 병드는 것 같아. 어느 날 들은 너의 환청과 비슷한 투였다. 뒤늦게 오는 길에 뭐라도 사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요 근처에 있는 만두라도 사다 줄까 물었더니 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네가 자고 있을 때 3층에서 불이 났단다. 불은 안 번졌는데 연기가 4층으로 올라와서 까딱하면 너 폐 수술까지 할 뻔했다. 아니, 그 전에 죽을 뻔했다. 아느냐? 너는 아주 먼 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지친 웃음을 터뜨리며 안다고 대답했다. 죽으려고 했어? 나는 그것까진 묻지 않았다.

 

그건 뭐야.

뭐가.

네 손에.

 

네가 직접 가리키고서야 나는 『코트』를 들고 뛰어왔음을 깨달았다. 빗물에 책이 구불구불해져 있었다. 세상에, 빌린 건데. 어디에서? 학교 도서관에 있더라. 그게 뭐 대단한 말이라고 네가 배가 부풀도록 웃었다. 나는 『코트』가 잘 마르도록 가습기가 놓인 병실 탁자 위에 책을 펼쳐 놓았다. 너는 가습기 위에 덩그러니 놓인 책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결국, 돌아오는구나. 너는 알다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너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여전하다. 괜히 반가웠다. 나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려 너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네 손등을 쥐고 있던 링거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너는 갈퀴처럼 네 등을 벅차게 그러쥐는 날더러 힘들다고, 힘든데 좋다고 했다. 우리 너무 오랜만이라고. 그리고 참기도 전에 잊고 있었던 보랏빛의 감정이 오랜만이라는, 너무 간단하고도 어려운 말마디에 눈꺼풀을 두드렸다. 네가 울기를 바라며 나는 네 뺨과 목을 적시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퇴원을 하면 코트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운 얼굴들은 더 이상 없지만 그리운 흔적들이 있는 그곳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너를 괴롭게 하고, 너를 살게 하고, 네게 도망치라고, 싸우라고, 별의 별 요구와 유혹을 했던 언어의 시작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언어와 마주하자고. 네가 언어라는 것을 알고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로…… 네 언어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그 때로 가서 네가 하고자 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둘러보자는 말을.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말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말로써 이 삶을 이어가자는 그런 말을. 너는 너무 쉽고도 어렵게 했다. 우리의 언어로 마저 네 집에 쌓인 먼지를 치우자고. 끝내 종말終言을 보지 않도록. 여전히,

 

내가 자부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너의 언어고 다른 하나는 네 언어를 읽고 듣는 나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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