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는 하굣길 내내 꺼풀을 벗었다. 교문 앞에서는 가쿠란 윗단추를 풀었고, 정류장에서는 아예 벗었다. 하차 후 도보를 걸을 땐 팔뚝에 벗은 가쿠란을 건 채로 셔츠 단추도 끌러냈다. 입추가 다가오는데도 저녁 해가 중천이었다. 핸드폰을 시계로 사용한다던 스가와라는 그걸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남들과는 반대로 손목시계를 더 애용했다. 요즘은 대개 학교가 끝날 즈음이면 해가 오뉴월 정오처럼 쨍쨍했는데 스가와라는 그게 중천 너머를 슬금슬금 넘어가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았다. 나는 걔를 기다렸다 같이 하교하는 중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혼자 걷기도 뭐해서, 얼버무렸더니 스가와라가 등을 후려치며 웃었다. 찜통에 혼자 걷는 게 둘이 걷는 것보다 더 불쾌하다는 과학적 근거 따윈 없어, 다이치. 여하튼 걔는 초봄이나 가을 중턱으로 따지면 늘 어스름 질 즈음에 교정을 천천히 나왔다. 해시계냐고 빈정거렸더니, 어스름처럼 웃었다.

 

땅거미 깔리고 해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질 즈음에는 우리 둘 다 침묵하며 걸었다. 찢어진 해 귀퉁이로 자줏빛이 희롱희롱 흘렀다. 그러면 그냥 푸르기만 했던 하늘이 묘하게도 아득해졌다. 이제 정말로 가을이 될 건가 봐. 몇 시간 전보다 더 멀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 말에 스가와라가 데퉁스레 대꾸했다. 넌 기상청을 믿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스가. 또 우리는 기나긴 침묵을 다 견디지 못해서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더 멀리 있는 색이야? 붉은색이? 그렇게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붉음과 푸름의 경계를 허무는 보랏빛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그런 미묘한 변화 몇 가닥이 우리에게서 영양가 없는 잡담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열아홉들이라서.

 

그래도 날 좀 풀린 것 같지.

일주일 전보단?

이대로 쭉쭉 가을 갔으면.

 

스가와라는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소릴 자주 했고, 나는 한 발자국 앞선 그 애 등을 빤히 바라보며 보조 맞춰 걸었다. 걔는 가끔 곁눈질로 슬쩍 뒤돌아보았을 뿐 나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뒤숭숭한 맘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몇 개월 전의 일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색한 건지 걔가 어색한 건지 우리 사이로 무겁고 습한 공기가 뚝뚝 끊어졌다. 걔의 조잘거림은, 혼잣말 같기도 했고…… 나는 몇 달 전 유독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드물던 하굣길을 떠올렸다.

 

, 같이 좀 걸어.

뭐가?

뭐 그렇게 걸음이 빨라.

내가, 그랬어?

.

몰랐어.

 

몰랐어, 하고는 다시 고갤 돌린 걔의 머리 위로 노을이 내렸다. 노을은, 그러니까 일몰의 전조가 아닌가. 그건 가라앉는 것이다. 하늘이 지상에 더 가까워지는 것. 아주 뚜렷하게,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더 가까워지며 하늘은 더욱 아득해진다. 이상하다. 더 가까이 있다는데도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있나. 알 수 없다. 스가와라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엇비슷하게 걸었다. 걔 등을 오래 보다 보면 그 속성들이 낱낱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스가와라는 멀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멀고, 멀리 있음이 분명한데 가까이 느껴지며, 또한 가까이 있음이 분명함에도 손을 뻗쳐야 할 만큼 멀리에…… 그 즈음이면 스가와라는 보랏빛에 둘러싸여 걷는다.

 

이상하게도 빤히 보이는데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보랏빛 하늘인지, 보랏빛 구름인지. 아니면 보랏빛 걔. 우린 그것도 알 수 없다.

 

 

***

 

유이가 너 일학년 때부터 좋아했어. 스가와라는 가방 끈을 그러쥐고 말했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시큰둥하게 나왔더니 입술을 삐죽이면서 인정머리가 없다고 했다. 스가와라는 여전히 나와 엇비슷한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학년 여자애들 중에서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애한테서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고 제대로 답하지 않은 채 교정을 나와버린 게 화근이었다. 스가와라는 유이, 유이, 하면서 굳이 꺼내기 싫은 얘기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았다.

 

그만해, 진짜. 너 나 좋아하냐?

……

 

한창 조잘거리던 스가와라는 거기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웃질 않으니 무안해졌다. 뭔 개소리야, 짜증이라도 내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않았다. 걔는 여느 때처럼 나보다 조금 더 앞선 보조로 걷고 있어서, 그 홀쭉한 얼굴에서 뭐라도 읽어낼 수가 없다는 게 나를 초조하게 했다.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빼서 바지춤에 닦아내는데 불현듯 스가와라가 우뚝 멈춰 서서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아주 분명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사뭇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곤, 좋아하면? 했다.

 

좋아하면? 나는 입을 열었지만 거기서 무슨 말을 꺼내진 못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뒷모습을 보는 것이 덜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일시적인 각성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걔가 불편해졌고, 그래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원체 서두르는 성격이 아닌데 서두를 상황이 닥치면 신중해지질 못한다. 나는 진지한 스가와라를 농담으로 만들 궁리를 했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야, 그건.

아 존나 미안.

 

존나 미안, 하는 스가와라가 뒷목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난 너 안 좋아하는데, 하고 걔 등을 한 번 쿡 때렸다. 호리호리해도 딴딴한 놈이 좀 때렸다고 앞으로 휘청 밀려났다. 우리의 물리적 간극이 팽창했다. 그 후로 걔는 유독 별말 하지 않으며 두 보 앞서 걸었다. 나는 그 뒤에서, 오늘 날씨 좋네, 처럼 걔가 꾸준히 해오던 말들을 대신 하며 뒤따라 걸었다. 걔의 미안이 무엇에 대한 미안인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위기는 대충 넘겼는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딱히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음에도 이상하게 빈속 한 켠이 구린.

 

몇 개월 전부터다. 알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해버렸더니 정말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가와라는 이후 나를 평소처럼 대했고, 나도 걜 똑같이 대했다. 우리 걸음 사이에는 여전히 한 두 발자국의 공간이 넉넉히 남아있었다. 무언가 아주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에 미치미야를 덜컥 찾아가서는 애매하게 회피했던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보다 더 분명하게 하려는 것처럼 스가와라에게 돌아와서 말했다. 나 유이 받아줬어…… 펜을 쥐고 공책 위에 낙서하던 그 애가 아주 잠시 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오오, 하고는 어설픈 감탄사만 뱉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치미야하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서로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는 다른 단추들마저 흐지부지해졌다.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는 말만 아주 많이 남긴 채로 엉성한 관계를 띄워 보냈다. 미치미야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우리 이제 다시 친구지? 그랬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스가와라와 나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지 궁금해졌다. 사귀게 되었다는 얘긴 아주 자신 있게 털어놓았으면서 헤어졌다는 얘긴 걔한테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걔는 신경이 늘 곤두서있으니까 조잡한 변화들에 둔할 리가 없다. 그래도 걘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저만의 무언가를 분명하게 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나는 흐지부지 망쳐버렸지만. 걔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집에 안 가?

너는 왜 그러고 있는데.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

너 먼저 가봐.

 

그게 누군지 묻는 게 창피하고 구차스러워서 나는 알았다고 하고 책가방을 싸서 나왔다. 혼자서 교정을 나오고, 교문을 벗어나고, 붉은 보도블록을 밟으면서, 걔 호리호리한 뒷모습 없이 탁 트인 시야를 널찍이 내다보면서, 그런 걸 묻는 게 왜 구차스러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스가와라에게 불필요하게 감정소모를 하고 있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신하기 위해 아주 짧고 소용 없는 연애를 했는데, 그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마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스가와라는 복잡해져 갔다. 공책에 낙서를 하고 맛없는 급식을 군소리 없이 먹고 내 앞에 등을 구부정히 엎드린 채 짧은 선잠을 잤다. 걔가 복잡해져 가는 과정은 내가 한창 복잡했을 때와 같았다. 별일 없어 보였는데 목을 졸린 사람처럼 벅차 보였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시시때때로 전화를 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래도 전화를 계속 했다. 슬쩍 꺼냈던 감정을 내가 서투른 회피로 쳐냈을 때보다도 더 힘겹게 어떠한 관계를, 이미 거의 끊어져가는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려는 듯 걔는 온 정신을 거기에 쏟아냈다. 나는 기묘하게도 속고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가.

또 기다릴 사람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이따 같이 가. 지금 밖에 또 푹푹 찐다.

 

나는 책가방을 팔뚝 아래 벴다. 스가와라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책가방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당겨 꺼냈다. 그러더니 교실을 나갔다. 나는 걸상에 덩그러니 매달린 걔의 책가방을 보다가 슬쩍 손을 넣어 필기공책을 꺼냈다. 번득한 글씨로 색까지 바꿔가며 필기한 흔적 밑 여백에는 낙서로 가득했다. 글자보다는 그림이 더 많은. 나는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왔다. 옆 반 훌쩍 열린 교실문으로 창가에 팔뚝을 괸 채 통화를 하는 걔가 있었다. 조용한 교실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걔 목소리와 뒤섞였다.

 

「내 나이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머지 않았는데요.

「뭘 머지 않았어. 어릴 때가 다 좋고 예쁘지, 누구든.

아저씬 내가 어리고 예뻐서 만나요?

……

어리고 예뻐요?

 

나는 등을 돌려 벽에 기대고 섰다. 걔한테 형도 아니고 아저씨면 얼마 즈음일까. 서른 초중반 정도 되려나. 걔는 부옇고 호리호리하지만, 딴딴하고, 투박하고, 얄밉기도 하고…… 그런 애가 예뻐 보일 나이면 그 즈음일 게다. 문득 털이 수렁수렁 달린 나이 든 남자의 넓적다리가 걔의 것과 맞물리는 상상을 했다. 아냐, 나는 고개를 털었다. 더러웠다. 문 너머에서 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걔 말들이 점점 수그러들어서 나중에는 목소리만 두런두런 남았다. 정체불명의 언어들을 뒤로하고, 나는 문득 맘 한 구석에 구린내가 나서 다시 교실로 돌아가버렸다.

 

몇 분 뒤에 스가와라는 교실로 돌아왔다. 걔는 곧장 책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지퍼를 잠그고, 가방을 메고서 내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이제 가자. 나는 책가방 위에 파묻고 있던 고갤 일으키고 주춤거리며 책가방을 따라 메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교실이 노르스름하고 건조했다. 나는 슬그머니 걔 뒤에 붙어 걸었다. 오늘은 침묵이 이전보다도 더 길었다. 멋쩍은 고갤 쳐들었다가 하늘이 엉망진창인 걸 보고 오늘도 걔가 보랏빛 속을 거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문득 비합리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치밀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스가와라가 내 앞에서 걷는 게 아니라 내가 걔 뒤에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스가.

.

연애할 땐 또래보다 늙은 사람이 좀 좋을까?

……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거기서 멈춰 섰다. 스가와라는 몇 걸음을 더 가다가 돌아보았다. 무표정이었다. 걔가 상처를 받았는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스가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걔 붉은 입술에 핏기가 잠시 가시곤 다시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더욱 시뻘개진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예쁘다고 해주고…… 사랑한다고도 해주니까, 빈말이라도.

……

우리 같은 애들은 그런 거 낯간지러워서 잘 안 해.

 

걔는 자길 서럽게 만드는 소리에 매달렸다. 다시 등을 돌린다.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무슨 맘에선가, 걔 어깨를 잡고는 이상한 소릴 했다. 아냐, 우리 같은 애들도…… 맘만 먹음 해. 스가와라가 다시 고갤 돌려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답잖게 말을 더듬었다. 나도, 나도 그런 말쯤은 해. 무슨 맘에선가 그런 얘기들이 노랫말처럼 흘러나왔다. 걔는 아무 말 않고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조소도 미소도 아니고, 그냥 웃음이었다.

 

 

***

 

걔의 핸드폰에서 그 남자의 사진을 보았다. 그냥 뒤적이다 발견했다. 남자는 젊지만 어리지 않게 생겼다. 저번에 얼핏 들은 통화로 짐작했듯이, 걔가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졌다. 스가와라는 내 목소릴 좋아한다. 남자는 엇비슷하지만 나보다도 낮고 다정할 것이다. 괜하지 않은 농담들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아저씨치곤 괜찮잖아. 그래서 좋을까. 스가와라는 좋을까. 과연, 과연. 시시때때로 웃기만 하는 걔 맘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리나.

 

그리고 스가와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웃고 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나를 비웃듯 그랬다. 빤한 거짓말에 속아주는 사람처럼 굴었다. 걔 무릎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졌다. 뭐가 미안하냐는 말이 되돌아올까 봐 그러지 못했다. 걔가 쉬워 보인 건 아니었는데 그저 미워 보였다. 많이 웃어서, 그만큼 많이 울 것 같았다. 남자는 걔한테 예쁘단 말도 해주고 사랑한단 말도 해줬을 거다. 그런 소리를 하루에 몇 번이고 들을 스가와라는 날이 갈수록 미워졌다. 꾸준한 운동으로 아플 일 없는 걔는 요즘 자주 다리가 풀렸다. 아랫배를 맞췄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더러워졌다. 더러운 게 걔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더럽다. 우리는 열아홉이다. 겨우 열아홉인데, 열아홉을 연기하면서, 같은 열아홉을 속이면서, 또한 열아홉의 날고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요즘도 그 사람 만나?

아니, 바빠. ?

요즘 먼저 가라고 안 하길래.

 

스가와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더니 걔는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다. ? 물으니 혼자 자는 게 싫다고 했다. 그 말이 그리 유치하지는 않아서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나는 스가와라가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다, 짐작이다. 아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틀림없이 틀렸다. 망상덩어리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뻔한 거짓말을 하는 어린애처럼 목이 탔다. 나는 공책에 낙서하는 스가와라의 등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네가 집 주인인데 침대에서 자야지.

 

걔는 내가 빌려준 옷을 입고서 바닥에 깐 이불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침대 곁을 서성거리다가 불 끌게, 하고서 스위치를 내리고는 자리로 꾸물꾸물 돌아와 베개에 뺨을 묻었다. 스가와라는 새우잠을 잤다. 몸을 웅크리고서 뒤척였다. 바닥이 딱딱한가 싶어서 자릴 바꾸자고 슬그머니 말을 꺼냈지만 걔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뒤척이느라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푸르스름한 등이 훤히 드러났다. 며칠 새 버석 말라서 등뼈가 도드라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남자는 근래에 저 등을 꽤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저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는 채 입버릇처럼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후략한다면 나와 다를 건 없다. 나도 걔의 등을 질리도록 봐오지 않았는가. 나는 불쾌한 공통점을 찾아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 등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손끝이 어깨에 닿으면 막 눈을 감으려던 스가와라가 등을 돌릴 것이다. 내가 그 위로 쏟아지고, 우리는 어쩌면, 아주 적나라하게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걔는 요즘 몸이 헐겁고 나는 꽉 짜여있으니까…… 우리는 아마 서로의 다리가 아주 잘 맞을 것이다. 예쁘다는 말을 꺼내기도 어색한 그 서툶으로 아마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손을 거두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직.

있잖아.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어깨를 움켜쥐지도 않았는데 스가와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피로함에 유약하게 충혈된 눈이 내 얼굴을 멍청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시 호흡을 떼었다.

 

그 남자랑 만나지 마.

…….

걱정 돼.

 

저번처럼 더듬거리는 투로 바보처럼 물었음에도 이번엔 스가와라가 웃지 않았다. 대신 그때 내 것과 비슷한 투로 이랬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다, 진짜. 걔가 도로 등을 돌렸다.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문득 코끝이 뻐근해지고 뱃속에 불이 났다. 말하고 싶다, 말해버리고 싶다. 믿어줄까. 끝내 믿어줄까. 너무 많은 거짓말들을 해왔는데, 나에게. 내 자신에게. 어쩌면 이건 진심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가 지나치게 근사해서, 혹은 걔가 너무 지쳐 보여서, 우린 꽤 알아왔으니까 어떻게든 더 알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충동적으로 든 생각일 수도 있는데. 빼곡한 거짓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알지. 어디부터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무슨 수로 잘라낼 것이며 네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며……

 

숙고의 열차가 머리 한 바퀴를 빙 두르는 와중, 걔가 불현듯 도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줄곧 눈을 부릅뜬 채 네 등을 응시하던 터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시선이 얽혔다. 아무 말도 않았으나 시야가 붉어지고 있음을 짐작했다. 스가와라의 호흡이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나는 아주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말해야 한다고, 말해버려야 한다고. 좋아한다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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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ummer time


「열두 시야」

 

나는 메신저를 확인했지만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이따금 저런 식의 텍스트가 전송되었다. 우리는 시간에 관한 강박이 있었다. 정확히는 서로의 시간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었다. 왜인진 모르겠다. 서로 시간의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꼭 알 필요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 이만큼 멀구나, 하고 느낄 수는 있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시계는 누가 발명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마침내, 저런 시계를. 탁상 시계가 따로 있어도 늘 벽시계를 먼저 보게 된다. 눈높이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걸어둔 벽시계를 말이다. 그걸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경이감마저 든다. 열두 시야. 걔 메신저 텍스트를 떠올리고는 눈자위로 더듬더듬 가늠해보았다. 현재 오후 여덟 시 삼 분이다. 여덟 시간.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이것이 신비하게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시차가 열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걔가 점심 먹을 때면 나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짬이 날 때 즈음엔 걔가 자고 있었다. 내가 자고 있으면 걔가 방금 점심을 먹었다, 지금 오후 세 시다, 이런 메신저를 보내왔고 걔가 눈을 붙일 땐 반대로 내가 그런 류의 문자들을 보냈다. 그러니까 서로 답장할 일이 없다. 읽기만 하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여덟 시간으로 확 준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다만 서로의 시간을 알고 싶다. 어디까지 왔나.

 

이와짱.

.

도망갈 바에는 아예 외국으로 나는 게 좋겠지?

그게 뭔 소리냐.

 

어디 즈음에 있나.

 



2 a clock


시계는 어쩜 저렇게 생겼을까. 장장 세 시간의 연습을 마치고 잠깐 가진 휴식시간 동안 체육관 벽에 기대어 앉아 시계를 올려다봤다. 빤히 쳐다볼수록 저 둥그스름한 자태가 신비스럽다. 다리 사이에 수통을 하나 넣고 손 끄트머리로 꼭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초침과 분침, 시침을 부지런히 돌리는 시계를 따라가본다. 각각 맞물린 톱니바퀴의 규칙적인 회전으로 저들은 각자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저들도 프라이드라는 게 있으려나. 시계가 없으면 뭣도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꼭 지구처럼 생겼다. 코우시가 한 말이었다. 언제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재작년 여름방학 즈음이었나. 둘이 방 안에 누워있었다. 나는 침대에, 걔는 바닥에. 누워서 치킨너겟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편의점에서 사오자고, …… 뭐 그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부터 둘 다 함구했다. 누가 먼저 입을 다물었는지 역시 잘 떠오르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시계를 보고 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야 닿을 높이에 못 박아 걸어둔 시계를 보며 걔가 먼저 그런 말을 꺼냈다. 지구. 나는 동조했다. 그러게, 꼭 지구 같다. 지구가 굴러야 하루가 흐르는 것처럼,

 

시계도 굴러야 하루가 지나지. 사실 시계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편의상 만들어진 거니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편의상 만들어진 것들은 모조리 양날의 검이다. 그렇지 않은가? 시계 때문에 시간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에 대한 강박이 움을 텄다. 하지만 시계가 발명된 이상, 그리고 대중화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네 집에서 내 집이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지, 뭐 그런 쓸모 없는 것조차도 다 셈을 하고 앉아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게 십 분이 걸리든 열 시간이 걸리든 솔직히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우리는 상관한다. 중요하다.

 

언젠가부터 시간에 적당히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해질녘에 집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 하던 것이 오후 여섯 시 삼십 분이 되면 집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지는 노을을 보면서 지금이 여섯 시 반인지 일곱 시인지를 구분하고 셈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러는 것을 뼈가 자지러지도록 느끼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린다. 메신저. 거기는 지금 몇 시야.

 

시계는 왜 저렇게 높이 걸어두는 거지.

그러게.

 

꼭 시간이 우릴 내려다보는 것 같잖아. 일 년 전에 나와 공유하던 시간을 떠버린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렇게 말했다.

 



3 needles


시계에는 바늘이 있다. ‘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하튼 폭이 좁고 몸이 기다랗게 빠진, 날카로운 그런 것이다. 바늘은 원판 위에서 시간을 정확히 가리킨다. 네 시 삼십구 분 이십사 초면 정확히 네 시 삼십구 분 이십사 초를 가리킨다. 애초에 시간이라는 게 정확히 짚이는 것인가 싶었는데 시계라는 것은 놀랍게도 그런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누웠다. 절로 팔이 머리맡에 올라간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꼈다. 문득 그런 틈들을 파고들어오던 걔 손이 생각난다.

 

이 침대 위에 걔와 나란히 누웠던 적이 있다. 나란히 눕기만 했는가, 겹쳐 누웠던 적도 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맨살을 맞추고 끼우며 부대꼈다. 벌러덩 넘어가버린 걔 머리카락을 죄 쓸어다 이마에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얼굴을 가리면서 감긴 걔 눈도 봤고 제 볼을 누르던 손등도 봤다. 나긋나긋하게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 부활동 때문에 여섯 시 전에는 나가야 한다고 산통을 깼던 것도 기억난다. 이렇게 보면 시계는…… 시간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을 믿고 설치는 호랑이굴의 여우인가. 모르겠다.

 

「오후 네 시야」

 

메신저 알림이 떠서 봤더니 걔였다. 그렇구나, 하고 다시 엎어져 누웠는데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자?

 

누워서 핸드폰을 쥐고 있다간 껌뻑 잠이 들 것 같다. 나는 몸을 세워 바로 앉았다.

 

「아니」

「왜 아직도 안 자」

「네가 불러서」

 

미스터 윌링턴 오늘 무단 휴강. 어쩌다? 오는 길에 범퍼로 앞차량 들이 받혔나 봐. 대애박. 나는 등을 구부리고 걔랑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가끔 이런 식의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걔가 슬그머니 먼저 대화를 유도한 건 오랜만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것이 조마조마했다. 뒷목이 뻐근해질 즈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올려 꺾으니 시야에 시계바늘이 들어왔다. 벌써 새벽 한 시. 나는 슬슬 모로 누웠다. 불쑥 딴 얘길 꺼낸다.

 

「너 혹시 여름에 잠시 오니」

「갑자기 왜?

「그냥」

 

딱히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니…… 졸업할 때까진 계속 여기 붙들려있을 거 같아」

 

그래도 실망스럽다. 벌써 한 시 넘었어. 나 잘게. 시계의 도움을 받아 핑계를 댔다. 그래, 잘 자. 걔의 텍스트는 거기서 멎는다. 나는 핸드폰을 협탁에 치워두고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 시간을 짚는 소리가 난다. 사뿐한 발소리 같기도 하고, 지그시 묻어나는 지문 같기도 한. 그것은 꼭 하루 동안 내가 걸은 걸음들을 농축해 놓은 것처럼 분명한 소리를 낸다. 시계는 내 방에 걸린 이후로 수천 수만 번을 자전했다. 빙글빙글 돌았다. 걔도 함께 돌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제자리걸음. 나는 둥그런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음에도 여전히 걔 꽁무니를 바라보고 있다.

 



4 rotational


시계는 가끔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12개의 숫자 안에서만 돌고 도니까, 시간이 꼭 반복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미 지나온 시간도 언제든 다시 와줄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에 다리를 묶으면서도 그걸 너무 쉽게 본다. 시간에 발목이 잡혀 끌려가면서 시간이 우릴 끌어주고 있구나, 한다고. 그게 아냐, 멍청아. 시간이 끌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끌려가는 거라니까.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가 없어.

 

일요일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라서 나는 유독 분주하다. 엄마가 유리창에 락스를 뿌릴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청록색 걸레에 시꺼먼 이물질이 묻어났다. 나는 욕실로 달려가 다라이에 그걸 한 번 뒤집어 빨고 벅벅 문질렀다. 물기를 꽉 짜내고 거실로 돌아오니 유리창이 어제보다 맑아져 있었다. 바닥을 다시 한 번 싹 닦고 먼지를 홀랑 뒤집어 쓴 채로 욕실에 뛰어든다. 물과 공기가 같은 비례로 차오른 타일 큐브 안에서 좋은 향기를 찾는다. 씻고 나오니 엄마가 얼음통에 넣은 맥주를 꺼내놓고 병어포를 굽고 있었다.

 

낮술이야?

, 엄마 낮술하는 거 첨 봐?

아들내미한테도 한 잔 주시나요?

예에, 앉으시지요.

 

나는 맥주와 병어포가 든 접시를 거실 앉은뱅이 탁자로 옮겼다. 엄마가 먼저 소파 밑에 양반다릴 하고 앉았다. 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tv를 트니 어제 저녁에 했던 토크쇼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다시 봐도 보는 재미가 쏠쏠한 프로그램이라 엄마는 따로 채널을 돌리지 않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토크쇼에서는 며칠 전 런던에서 있던 노동조합 시위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엄마는 북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뜻밖의 얘길 꺼냈다.

 

스가가 런던 가지 않았던가.

……

?

갔지.

어떻게 지낸대?

…… 낸들 아나.

 

너무 빤한 거짓말을 했나. 엄마가 맥주캔에 입술을 붙이며 피실피실 웃었다. 나는 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무릎을 모아 가슴에 붙여 둥글게 앉았다. 취기가 오르는지 목이 화끈해진다. 손바닥은 평소보다 차갑다. 나는 손마디를 뚝뚝 꺾었다. 엄마는 tv에 시선을 붙박은 채로 말을 잇는다.

 

아직 맘 있니?

…… 몰라.

그땐 엄마가 미안.

……

정말로.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tv 소릴 작게 줄여놓은 탓인가, 어쨌든. 나는 다시 팔을 뻗어 맥주를 가져온다. 시원한 탄산이 혓바닥과 목구멍을 긴다. 정말 미안해. 엄마는 중얼거린다. 엄마만 미안해할 거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더 곱씹고 싶지 않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고 있다. 그리고 지났다.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어. 갑자기 영 적성에 안 맞아서 한 모금 빨고 말았던 담배를 찾고 싶다. 나는 발끝을 오므렸다. 무릎을 더욱 움츠렸다. tv에서는 영국 시민들을 인터뷰한 영상자료를 내보내고 있다. 구라파식 연립 주택과 곡선이 들어간 큐브형 철제 가로등이 군데군데 서있다. 하늘은 흐리고 비둘기보단 까마귀들이 더 많이 보인다. 쟤는 저런 곳에서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엄마 목소리가 귓불에 매달렸다.

 

영국 보내줄까?

……

이번에 너 종강하면……

……

만나러 가볼래?

 

과연, 시간이란 어떤 것일까. 한 번 떠나오면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그것. 그 당연한 진리를 비웃듯이 12개의 숫자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회전하는 시계는 그 어느 가구의 벽에나 걸려서……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게끔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것일까.

 



5 trace up


「짐은 다 쌌어?

 

어젯밤 걔는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몇 시다, 그런 것 없이. 낯설었지만 반가웠다. 다 싸고 한 번 더 체크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나리타에서 히드로까지 얼마나 걸릴까. 걔 말로는 열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고 그랬다. 예약한 비행기표를 받고 보니 정말 그 정도 걸리는 듯싶었다. 열두 시간. 열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 더 많다. 하절기가 아니면 걔와 나의 거리는 대략 그만큼이다. 시간을 거리로 셈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 우리는 몇 시간의 거리를 두고도 서로의 뒤를 좇기에 바쁘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결국 지구는 둥그니까. 시계도 둥글고 말이지. 나는 이코노미석에 등을 파묻었다. 열두 시간인데 이코노미석이라니. 나중에 착륙하고 나서 일어서면 온몸이 비명을 지르겠다. 그래도 복도 끝에 위치한 좌석이라 뒷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좌석을 길게 뒤로 뉘일 수 있어서 좋았다. 어젯밤 걔랑은 별 이상한 대화를 다 나눴다. 걔는 영국 음식이 아주 맛없다는 말도 했고, 그래서 매운 게 당긴다고도 했다. 올 때 좀 싸오면 안 되냐고.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타박을 줬다. 거기 빵은 있어? 엄청 많지. 우유빵. 뭔 빵이든 무튼 빵은 넘친다. 그럼 됐네, 하고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활주로를 따라 비행기가 머리를 들이박기 시작한다. 핸드폰은 당연히 전동이 꺼져 있다. 볼 게 없다. 뭘 볼까. 창문을 내다봤다. 나리타 공항이 그 형태도 잘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르게 스치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위가 거북해진다. 더 탄탄해진 중력에 온몸을 순환하던 피가 바싹 긴장한다.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다. 하늘 구경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장난감처럼 작아진 도시의 불빛들이 전부다. 그것도 이내 잿빛 구름에 휩쓸린다. 창문을 부연 구름이 뒤덮는다. 그 사이사이로 어둠의 덩어리가 보인다. 나는 붕 뜬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을 꾹 감았다 떠보았다. 눈도 얼얼하다. 손목에 찬 시계가 시야에 들어온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이다. 여덟 시간…… 나는 의식적으로 셈해본다. 거긴 오후 아홉 시 이십 분이겠다. 시계바늘을 아홉 시 이십 분으로 돌려놨다. 나는 오늘이고 걔는 어제. 아니면 걔가 오늘이고 내가 내일인가. 시간은 신비롭다. 같은 행성에 사는 누군가의 아침이 누군가의 밤이다.

 

열두 시간은 길다. 특히 그 동안 계속 앉아있으려면. 나는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화장실을 핑계로 복도를 서성거렸다. 엉덩이와 오금이 저리다. 그러는 동안 창문에는 빛이 번지고 이제야 붉은 하늘과 벽돌빛 구름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빈 틈 없이 장밋빛의 수증기 덩어리로 그득 채워진 하늘을 본다. 영원히 몸을 떠맡기고 싶은 대해의 파도 같다. 포근해 보인다, 좋다. 그래도 뒷목은 계속 뻐근하고 다리가 쑤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간을 건너가는 일은 참으로, 어렵구나. 간절한 만큼.

 

Passengers, our flight will land in twenty minutes. Please fasten your seatbelt and turn off your mobiles. Thank you.

 

어렵지만, 시간은 지난다.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을 부탁했다. 창문을 열어달라, 좌석을 바로 세워달라, 착석해달라. 나는 활짝 열린 창문으로 내다본다. 영국을. 아직 영국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영국 땅 위를 날고 있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인간은 참 많은 걸 발전시켰다. 나는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납덩이에 올라타 그런 생각에 잠긴다.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을 방법을 고안 중이다. 어떻게든…… 끌려가고 있지만은 않도록. 노력 중이다. 문득 신선한 기내에서 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납덩이는 온갖 소음을 일궈내며 착륙한다. 바퀴가 떨어지고 활주로에 무사히 안착한다. 부드럽지만 격렬하게 땅 위를 밟는다. 시간을 달리는 기분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격동적으로, 쭈뼛 서는 머리털부터 뒤집히는 내장까지 모든 걸 엎질러놓을 만큼의 위력을 가지며. 눈을 감는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고 속이 쓰려온다.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그만큼 여유를 되찾은 몸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눈물이 걔를 만나는 나보다도 먼저 시간을 앞지르려 한다. 아직은 안 돼.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히드로의 입국 절차가 복잡했다. 나는 여권을 쥔 채로 외국인 전용 줄에 서서 십오 분을 더 기다렸다. 나는 조금 부스스한 상태일 것이다. 머리를 매만졌다. 검사원이 내 얼굴을 흘끗 보고는 타자를 친다. 입국도장을 찍고 여권을 돌려준다. 나는 그걸 냉큼 받고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부스를 나왔다. 사람이 붐빈다. 택시 팻말을 든 기사들도 있고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팔짱을 낀 채 서서 목을 쭈욱 뽑는 사람들도 있다. 어지럽다. 나는 자동문 밖을 주춤주춤 나서며 고개를 휘젓는다.

 

토오루.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토오루, 한다. 성급하게 나오려고 했던 눈물이 다시 눈 위에 번진다. 손등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짜릿함이 눈자위에 퍼진다. 그리고 도로 손등을 내리기도 전에 어떤 무지막지한 힘이 나를 그러안는다. 활주로에 바퀴를 내리던 비행기처럼, 부드럽지만 격정적이다. 멀리서 날아와 나를 들이받는다. 나는 손등을 거둔다. 내 가슴팍에 닿은 둥그런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바래지 않은 색의 머리카락이다. 나는 거두었던 손을 다시 들어올려 걔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토오루.

……

토오루……

 

어제까지만 해도 짐은 다 쌌느니 일본 음식을 좀 싸오라니 말이 많던 애가 지금 그 말밖에 하질 못한다. 토오루. 지금 걔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온전히 내 이름이 전부다. 나는 목구멍이 꽉 막힌다. 코우시, 하고 조그맣게 발음해본다. 실로 간만에 중얼거리는 이름이다. 이젠 괜찮다. 시간이 멈춘다. 볼 위로 뜨거움이 무너진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걔 머리를 꼭 그러안는다. 그러자 눈 앞으로는 고개를 위로 꺾어야 볼 수 있는 철탑시계와, 내 손등을 묶은 손목시계가 보인다. 그들의 시간은 같다. 비로소, 걔와 나의 시간이,

 

만난다. 내가 앞질러 왔다. 너에게로 왔다. 가까워진, 너의 등도 아닌 얼굴을 보았다. 시간의 회전이 멈춘다. 우리의 시간이 꽉 맞물린다. 나는 갈퀴처럼 너를 뭉쳐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서로의 이름을 되짚는다. 바늘이 숫자를 한 점, 한 점, 고르게 짚었던 것처럼 우리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서로의 이름에 발자국과 지문을 남긴다. 그렇다. 시간에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인류의 노력이다. 아주 작은 반짝임이지만 분명히, 이 순간은, 결실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너무 뒤처지지도 앞지르지도 않은 그러한 상태로.

 

우리는 오래오래 운다. 피부에 서로가 닿는다. 우리의 모든 것, 거리도 몸도 마음도 시간으로 맞물린다. 머리가 하얘진다. 너무 어렵게 돌아왔다. 너무나도 어려운, 그만큼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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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이나 어둠보다 안개가 더 두렵다. 늘 애매한 것들에 둘러싸여는 있었지만 그것에 진절머리라도 난 것인지 정확히 하는 게 없으면 분통이 터졌다. 안개는 극단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다고도 할 수 없고 저렇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예컨대 오다가다사이에 있는 멈추다같은 속성에 더 가까웠다. 늘 내 입으로 토비오가 재수없다고 말해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에서 더 진보된 가증스러움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있었다. 토비오는 단순했고, 그래서 차라리 빛이나 어둠이었다. 빛에 눈이 멀면 멀었고 어둠에 시야가 차단되면 차단되는, 그런 식이었다. 그에 비하면 코우시는 안개였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안개의 속성을 혐오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일차적인 풍경은 보여주어도 막상 보고 싶은 것은 보지 못하게 해서, 빛과 어둠 속에 놓여있을 때처럼 판단이 곧추 서질 못했다. 희부연 하늘을 보며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먹구름이라고 영 시꺼멓지는 않았다. 비가 오기 직전의 구름은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애처럼 멍해 보이기도 했고 제 뒤로 꾸역꾸역 먹어가는 햇살까지 등지고 있어서 쓸데없이 허옇기까지 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쉬이 하늘의 얼룩처럼 보였다. 나는 빛이 될락말락 하얀 멍울자국을 남겨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름의 욕설을 읊조렸다. 차라리 멀어버려라, 멀어버려라……

 

내가 코우시를 더 싫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안개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줄곧 안개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서 동어를 들으니 여태 내가 부정해왔던 속성들이 죄 나의 것인 마냥 되돌아왔다. 매 다르다고 확신했던 사람으로부터 의외의, 썩 달갑지만은 않은 동일성을 발견하고 나는 뇌수로 토악질을 했다. 코우시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를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나 요즘은 토비오보다 상쾌군이 더 짜증나더라고. 하지메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몇 마디를 던지니 걔가 참 별거 아니라는 투로 받아 쳤다. 난 네가 더 짜증나더라. 나는 하지메다운 대답을 받아내고 헤벌쭉 웃었다.

 

상쾌군 엄청 의외다.

뭐가?

되게, 까졌어.

 

나는 동이 다 트지 않은 새벽에 코우시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애냐, 혼자 간다, 하고 걔는 먼저 뛰쳐나왔는데 나는 내 집에 내가 홀로 남겨진 기분이 싫어서 바득바득 데려다 준다고 우기고 뒤따라 나왔다.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한데다가 간밤에는 비까지 쏟아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치교 난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걔는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히죽히죽 잘도 웃었다. 자전거를 질질 끄는 건 멋없어서 빈손을 저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왔으나 나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며 마당에 주차된, 중학생 때까지만 타고 말았던 자전거를 끌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곧 시야가 얼룩졌다.

 

의외…… 맞아, 진짜 의외지?

 

잿빛 얼룩 속에서 코우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습관처럼 미간을 오므렸다. 말이나 하지 말걸. 안전빵을 싫어해서 미지의 영역이라는 걸 한번도 포기해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또 그게 오래도록 미지로 남으면 열불이 났다. 방금 나는 먼저 의외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그 애의 미지를 너무 쉽게 인정해버린 셈이 아닌가. 지식의 그릇 운운하며 모르면 아는 척을 않는 거라던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것이 없다. , 너도 의외던데. 코우시는 열심히 안개 속을 걸으며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똑같은 의외인데 나는 항복에 가깝고 걔는 봐준다는 투에 가까웠다. 생각과 생각의 마디 사이에 질퍽질퍽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별로다.

 

토비오짱이 날래는 판에서 용케 잘 버텨? 내가 말해놓고도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코우시가 그래 너 유치하다, 하고 사살도장을 박았다. 그 애 얘긴 그다지 뒤에서 하고 싶진 않아. 나는 코우시 뒷목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러냐 하고 말았다. 길고 긴 다리를 지나는 동안 나는 잠시 어젯밤의,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걔는 처음이냐고 묻는 것이 민망하게 능숙해 보였다. 나도 아주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 어떤 게 능숙하고 어떤 게 서툰 건지 알았다.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서툴면 더 당당하고 괴팍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턱을 쓰다듬으며 말꼬리를 끌었다. 걔는 어깨를 바싹 움츠린 채로 걷다 말고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코우시는 어제 많이 흐느꼈다.

 

, 역시 상쾌군은 싫어. 코우시는 그걸 잘 안 맞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언제 뭘 맞춰봤다고 그러셔? 나는 음전하지 못하게 무어라 하려다가 관두었다. 우리는 어제 꽤 섬세하고 꼼꼼하게 서로를 안았다. 그래서 그 긴 행위가 마치 한 세트의 경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찬찬히 탐색하고 분석하고, 그러다가…… 탐색만 하고 끝난 것 같은 뒤끝을 남기기는 하였어도. 나는 고개를 비틀어 그 앨 마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내가 해야 할 말을 걔가 먼저 꺼냈다. 맨살까지 부대낀 사이에 별로 알아낸 바가 없는 것 같다. 아니, 맨살만 부대낀 사이구나.

 

바로 학교 가?

. 외박해서 가방도 여기 있잖아.

일찍 가면 할 게 있나.

체육관 열쇠는 아직까진 내 담당이거든.

 

다리를 다 건넜을 즈음에 안개가 더욱 풍성해졌다. 나는 젖은 공기가 자욱한 틈에서 손을 휘젓는 코우시의 인영을 발견했다. 아직 햇빛이 쏟아지지 않아서 시야가 좁다. 나는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 . 학교에서 졸지 말고. 안 졸아. 우리는 습기가 그득한 강주변을 중화라도 시키려는 듯 건조한 대화를 마치고서 각자 등을 돌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너왔던 다리를 도로 건너며 아쉬운 생각을 했다.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 것 그랬어. 걸리적거리고 멋없지만. 코우시가 등 뒤로 낚싯줄 같은 자전거 바퀴소리 멀어져 가는 걸 들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霧雨


요즘 봄비가 많이 내린다. 매일 오는 건 아닌데, 한 번 내리면 제대로 내렸다. 콸콸 쏟아지는 폭우는 아니었지만 정말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또 비가 오는 날엔 해가 그렇게 안 나서 하늘이 얼룩져있었고 가장 낮은 곳에는 김 서린 주전자처럼 안개가 휘날렸다. 그것도 전부 개울 주변이나 늪지대가 되어버린 풀숲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므로 시내 사거리에 위치한 세이죠로 통학하는 나로서는 볼 일이 별로 없었지만 최근엔 예외였다. 굳이 거기에 가지 않아도 안개는 어디에서든 도사리고 있었다. 그저께는 잡화점에서 코우시를 봤다.

 

나는 집에 화분 하날 들여서 따로 물을 줄 생각으로 분무기를 사러 들렀는데 걔는 엄청 커다란 밀대걸레를 사고 있었다. 그건 뭐에 쓰냐고 물어봤더니 체육관 청소함에 부러져있던 걸 몇 번이고 고쳐 썼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 사러 왔다고 했다. 나는 먼저 분무기를 계산한 후에 어째 가게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코우시는 지갑을 열어 반으로 접힌 지폐를 꺼내 밀대걸레를 계산한 후에 교내청소부 같은 폼으로 그걸 들고 엉금엉금 나왔다. 나는 유리문을 열어주면서 걜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쪽팔리게 저 멀대를 들고 학교까지 가냐. 코우시는 나이가 있는 여자들처럼 억척스러운 데가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연습은 어떻게 되어가?

내가 그걸 말해줄까 봐!

아아, 상쾌군이 토비오짱보다 머리가 훨씬 비상하다는 걸 까먹고 있었어.

카게야마가 왜. 경기할 땐 머리 쓰더만.

 

일주일 후에 카라스노와 친선경기가 있었다. 친선이 말이 좋아 친선이고 다 탐색전이었지만 어쨌든 그 듣기 좋은 명분 아래 오랜만에 코우시를 코트에서 볼 것 같았다. 더 성가시겠다. 걔는 손 대신 굵게 땋은 머리카락 같은 밀대걸레를 휘휘 흔들면서 인사했다. 나는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바닥을 꺼내기가 귀찮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롭게 재구성된 카라스노는 그나마 있던 부원들 중에 대부분이 떠나가서 예전 경기 자료를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경기를 유예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조바심만 잔뜩 내다 올 경기가 기다려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우리 학교 체육본관에서 몸을 풀다가 코우시와 재회할 수 있었다. 걔에 이어 참 뜯어보기가 성가신 토비오도 와있었다. 키가 백오십 얼마였을 땐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개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애가 눈매가 가시 돋쳐서 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웃기고 짜증났다. 그때 서브라도 좀 가르쳐줄 걸 그랬나. 주인 몰라보는 개새끼처럼 그 녀석이 나를 흘금거리며 코트 위에 섰다. 나는 눈썹을 치켜 떴다. 코우시는 벤치에 서서 토비오의 등을 밀다가 나와 시선이 얽혔다. 네트를 두고서였다. 걔는 다리 위에서 날 물끄러미 보던 표정을 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혀를 찼다.

 

묵사발 낸다, 진짜.

 

내 중얼거림에 무릎을 스트레칭하고 있던 하지메가 나를 흘긋 올려다봤다. 걔가 입을 다문 대신에 뒤에서 목을 축이던 킨다이치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가 주전이야? 나는 뻐근한 뒷목을 꺾어 풀며 대꾸했다. 그런 건 입 밖으로 안 내도 돼, 킨다이치. 적당히 웃고 농을 치며 네트 건너편을 뚫어 보았다. 코우시는 맨손으로 물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걔는 죽어도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除霧


친선경기 이후로 코우시를 못 본 지는 보름이 넘었다. 막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그게 내 일상에 구멍을 내지는 않았다. 토비오는, 괜찮아지긴 했는데, 더 괜찮아져야겠더라. 부실 탁자 아래에 누워서 중얼거리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사복을 사물함에 넣은 하지메가 내 머리맡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늘도 오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센다이시만한 가습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어린애 같은 말에 손톱깎이를 꺼내던 하지메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이 녀석 손에 매일같이 들려있던 채집 그물로 구름 한 송이를 따내듯 안개를 거둬가고 싶다.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시야는 물론 피부까지 조이는 습기가 반갑지 않았다.

 

토비오는 앞으로도 주전이겠지? 짐짓 물은 말에 하지메가 대충 대답했다. 그렇겠지, .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모두가 침묵하며 잠시 동안 부실은 걔 손톱 부서지는 소리로 찼다. 하지메가 오른손 약지 손톱까지 깎았을 때 나는 테이블을 치우고 천장을 봤다. 둥그런 조명등은 모아놓은 입김 같았다. 있잖아, 이와짱. 걔를 나지막이 불렀더니 새끼손톱까지 알뜰하게 깎아내면서도 대답은 해주었다. 어어. 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가끔 쓸데없는 것도 알고 싶고 그런 거잖아.

.

되게 별거 아닌데 알 수 없는 것도 있잖아.

.

 

내 체취가 그득 묻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흐느끼던 코우시는 솔직했다. 그래, 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가증스럽다. 거짓말하지 않는데 다 말해주지 않는 놈들은 처절하고 비밀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코우시는 나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메가 손톱을 깎아 놓은 신문지를 둥그렇게 말고 일어났다. 나는 손바닥에 꼭 맞게 잡히는 배구공을 천장으로 올렸다. 입김에 닿을락, 하더니 다시 내 가슴으로 꺼졌다. 나는 노래 가사의 2절을 부르듯 다음 말을 이었다.

 

나 상쾌군이랑 잤어.

 

쓰레기통에 손톱을 쓸어 넣던 하지메가 멈칫했다. 손톱은 걔 의지대로 멈춰주지 않아서 봉투 안으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방 한 구석으로 공을 굴려 넣었다. 하지메는 한참 쓰레기통 앞에 서있더니 이내 주춤주춤 걸어와서 다시 내 머리맡에 다릴 굽히고 앉았다. 그래서? 그 녀석은 가다듬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내 친구인 게 너무 좋았다. 걔가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꽂았어도 난 그렇게 생각할 거다. 어설픈 웃음이 나자 하지메가 딴 말을 했다. 요 일주일 동안은 비안개가 내리겠다. 나는 그 말마저 듣기 싫어서 맥락을 끌었다.

 

걔랑 했는데……

……

또 하자고 하면 해줄까?

 

하지메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빛이 넘칠 듯 말 듯 구름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게 다 비가 내려서 그렇다. 구름이 쏟아지니 개울이며 풀숲에 구름투성이인 거지. 빛이 같이 쏟아지면 차라리 땅은 빛투성이일 텐데. 나는 당당히 보고 당당히 눈이 멀 수 없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갑자기 가슴이 퍽퍽해지도록 화가 났다. 왜 내가 창피해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 이후에 전국에 갈 때까지 한 번 더 아껴두려고 했던 눈물을 짰다. 안개를 다 녹이고 싶다.

 

안개를 거두고 싶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반대편 창문의 커튼까지 젖힌 하지메가 중얼거렸다. 네 앞가림이나 해, 쿠소카와. 하늘이 허옇기만 하고 쏟아지질 못한다. 저게 날 닮고 걜 닮았다니. 나는 입술을 들썩거렸다. 거둬내고 싶다. 구멍을 내고 싶다. 눈이 멀어버릴 빛이 땅으로 챙강챙강 쏟아지는 게 보고 싶다. 나는 눈꺼풀이 아파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배구공을 다시 주섬주섬 끌고 와 가슴 위에서 굴렸다. 걔가 나 만나줄까. 중얼거림 끝에 나는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와짱, 대답 좀 해봐.

 

자전거를 끌고 가면 걔가 날 만나줄까……

 

하지메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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