霧
나는 빛이나 어둠보다 안개가 더 두렵다. 늘 애매한 것들에 둘러싸여는 있었지만 그것에 진절머리라도 난 것인지 정확히 하는 게 없으면 분통이 터졌다. 안개는 극단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다고도 할 수 없고 저렇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예컨대 ‘오다’와 ‘가다’ 사이에 있는 ‘멈추다’ 같은 속성에 더 가까웠다. 늘 내 입으로 토비오가 재수없다고 말해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에서 더 진보된 가증스러움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있었다. 토비오는 단순했고, 그래서 차라리 빛이나 어둠이었다. 빛에 눈이 멀면 멀었고 어둠에 시야가 차단되면 차단되는, 그런 식이었다. 그에 비하면 코우시는 안개였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안개의 속성을 혐오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일차적인 풍경은 보여주어도 막상 보고 싶은 것은 보지 못하게 해서, 빛과 어둠 속에 놓여있을 때처럼 판단이 곧추 서질 못했다. 희부연 하늘을 보며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먹구름이라고 영 시꺼멓지는 않았다. 비가 오기 직전의 구름은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애처럼 멍해 보이기도 했고 제 뒤로 꾸역꾸역 먹어가는 햇살까지 등지고 있어서 쓸데없이 허옇기까지 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쉬이 하늘의 얼룩처럼 보였다. 나는 빛이 될락말락 하얀 멍울자국을 남겨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름의 욕설을 읊조렸다. 차라리 멀어버려라, 멀어버려라……
내가 코우시를 더 싫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안개’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줄곧 안개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서 동어를 들으니 여태 내가 부정해왔던 속성들이 죄 나의 것인 마냥 되돌아왔다. 매 다르다고 확신했던 사람으로부터 의외의, 썩 달갑지만은 않은 동일성을 발견하고 나는 뇌수로 토악질을 했다. 코우시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를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나 요즘은 토비오보다 상쾌군이 더 짜증나더라고. 하지메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몇 마디를 던지니 걔가 참 별거 아니라는 투로 받아 쳤다. 난 네가 더 짜증나더라. 나는 하지메다운 대답을 받아내고 헤벌쭉 웃었다.
상쾌군 엄청 의외다.
뭐가?
되게, 까졌어.
나는 동이 다 트지 않은 새벽에 코우시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애냐, 혼자 간다, 하고 걔는 먼저 뛰쳐나왔는데 나는 내 집에 내가 홀로 남겨진 기분이 싫어서 바득바득 데려다 준다고 우기고 뒤따라 나왔다.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한데다가 간밤에는 비까지 쏟아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치교 난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걔는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히죽히죽 잘도 웃었다. 자전거를 질질 끄는 건 멋없어서 빈손을 저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왔으나 나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며 마당에 주차된, 중학생 때까지만 타고 말았던 자전거를 끌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곧 시야가 얼룩졌다.
의외…… 맞아, 진짜 의외지?
잿빛 얼룩 속에서 코우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습관처럼 미간을 오므렸다. 말이나 하지 말걸. 안전빵을 싫어해서 미지의 영역이라는 걸 한번도 포기해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또 그게 오래도록 미지로 남으면 열불이 났다. 방금 나는 먼저 ‘의외’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그 애의 미지를 너무 쉽게 인정해버린 셈이 아닌가. 지식의 그릇 운운하며 모르면 아는 척을 않는 거라던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것이 없다. 뭐, 너도 의외던데. 코우시는 열심히 안개 속을 걸으며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똑같은 의외인데 나는 항복에 가깝고 걔는 봐준다는 투에 가까웠다. 생각과 생각의 마디 사이에 질퍽질퍽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별로다.
토비오짱이 날래는 판에서 용케 잘 버텨? 내가 말해놓고도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코우시가 그래 너 유치하다, 하고 사살도장을 박았다. 그 애 얘긴 그다지 뒤에서 하고 싶진 않아. 나는 코우시 뒷목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러냐 하고 말았다. 길고 긴 다리를 지나는 동안 나는 잠시 어젯밤의,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걔는 처음이냐고 묻는 것이 민망하게 능숙해 보였다. 나도 아주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 어떤 게 능숙하고 어떤 게 서툰 건지 알았다.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서툴면 더 당당하고 괴팍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턱을 쓰다듬으며 말꼬리를 끌었다. 걔는 어깨를 바싹 움츠린 채로 걷다 말고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코우시는 어제 많이 흐느꼈다.
아, 역시 상쾌군은 싫어. 코우시는 그걸 잘 안 맞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언제 뭘 맞춰봤다고 그러셔? 나는 음전하지 못하게 무어라 하려다가 관두었다. 우리는 어제 꽤 섬세하고 꼼꼼하게 서로를 안았다. 그래서 그 긴 행위가 마치 한 세트의 경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찬찬히 탐색하고 분석하고, 그러다가…… 탐색만 하고 끝난 것 같은 뒤끝을 남기기는 하였어도. 나는 고개를 비틀어 그 앨 마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내가 해야 할 말을 걔가 먼저 꺼냈다. 맨살까지 부대낀 사이에 별로 알아낸 바가 없는 것 같다. 아니, 맨살만 부대낀 사이구나.
바로 학교 가?
응. 외박해서 가방도 여기 있잖아.
일찍 가면 할 게 있나.
체육관 열쇠는 아직까진 내 담당이거든.
다리를 다 건넜을 즈음에 안개가 더욱 풍성해졌다. 나는 젖은 공기가 자욱한 틈에서 손을 휘젓는 코우시의 인영을 발견했다. 아직 햇빛이 쏟아지지 않아서 시야가 좁다. 나는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 응. 학교에서 졸지 말고. 안 졸아. 우리는 습기가 그득한 강주변을 중화라도 시키려는 듯 건조한 대화를 마치고서 각자 등을 돌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너왔던 다리를 도로 건너며 아쉬운 생각을 했다.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 것 그랬어. 걸리적거리고 멋없지만. 코우시가 등 뒤로 낚싯줄 같은 자전거 바퀴소리 멀어져 가는 걸 들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霧雨
요즘 봄비가 많이 내린다. 매일 오는 건 아닌데, 한 번 내리면 제대로 내렸다. 콸콸 쏟아지는 폭우는 아니었지만 정말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또 비가 오는 날엔 해가 그렇게 안 나서 하늘이 얼룩져있었고 가장 낮은 곳에는 김 서린 주전자처럼 안개가 휘날렸다. 그것도 전부 개울 주변이나 늪지대가 되어버린 풀숲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므로 시내 사거리에 위치한 세이죠로 통학하는 나로서는 볼 일이 별로 없었지만 최근엔 예외였다. 굳이 거기에 가지 않아도 안개는 어디에서든 도사리고 있었다. 그저께는 잡화점에서 코우시를 봤다.
나는 집에 화분 하날 들여서 따로 물을 줄 생각으로 분무기를 사러 들렀는데 걔는 엄청 커다란 밀대걸레를 사고 있었다. 그건 뭐에 쓰냐고 물어봤더니 체육관 청소함에 부러져있던 걸 몇 번이고 고쳐 썼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 사러 왔다고 했다. 나는 먼저 분무기를 계산한 후에 어째 가게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코우시는 지갑을 열어 반으로 접힌 지폐를 꺼내 밀대걸레를 계산한 후에 교내청소부 같은 폼으로 그걸 들고 엉금엉금 나왔다. 나는 유리문을 열어주면서 걜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쪽팔리게 저 멀대를 들고 학교까지 가냐. 코우시는 나이가 있는 여자들처럼 억척스러운 데가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연습은 어떻게 되어가?
내가 그걸 말해줄까 봐!
아아, 상쾌군이 토비오짱보다 머리가 훨씬 비상하다는 걸 까먹고 있었어.
카게야마가 왜. 경기할 땐 머리 쓰더만.
일주일 후에 카라스노와 친선경기가 있었다. 친선이 말이 좋아 친선이고 다 탐색전이었지만 어쨌든 그 듣기 좋은 명분 아래 오랜만에 코우시를 코트에서 볼 것 같았다. 더 성가시겠다. 걔는 손 대신 굵게 땋은 머리카락 같은 밀대걸레를 휘휘 흔들면서 인사했다. 나는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바닥을 꺼내기가 귀찮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롭게 재구성된 카라스노는 그나마 있던 부원들 중에 대부분이 떠나가서 예전 경기 자료를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경기를 유예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조바심만 잔뜩 내다 올 경기가 기다려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우리 학교 체육본관에서 몸을 풀다가 코우시와 재회할 수 있었다. 걔에 이어 참 뜯어보기가 성가신 토비오도 와있었다. 키가 백오십 얼마였을 땐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개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애가 눈매가 가시 돋쳐서 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웃기고 짜증났다. 그때 서브라도 좀 가르쳐줄 걸 그랬나. 주인 몰라보는 개새끼처럼 그 녀석이 나를 흘금거리며 코트 위에 섰다. 나는 눈썹을 치켜 떴다. 코우시는 벤치에 서서 토비오의 등을 밀다가 나와 시선이 얽혔다. 네트를 두고서였다. 걔는 다리 위에서 날 물끄러미 보던 표정을 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혀를 찼다.
묵사발 낸다, 진짜.
내 중얼거림에 무릎을 스트레칭하고 있던 하지메가 나를 흘긋 올려다봤다. 걔가 입을 다문 대신에 뒤에서 목을 축이던 킨다이치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가 주전이야? 나는 뻐근한 뒷목을 꺾어 풀며 대꾸했다. 그런 건 입 밖으로 안 내도 돼, 킨다이치. 적당히 웃고 농을 치며 네트 건너편을 뚫어 보았다. 코우시는 맨손으로 물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걔는 죽어도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除霧
친선경기 이후로 코우시를 못 본 지는 보름이 넘었다. 막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그게 내 일상에 구멍을 내지는 않았다. 토비오는, 괜찮아지긴 했는데, 더 괜찮아져야겠더라. 부실 탁자 아래에 누워서 중얼거리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사복을 사물함에 넣은 하지메가 내 머리맡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늘도 오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센다이시만한 가습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어린애 같은 말에 손톱깎이를 꺼내던 하지메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이 녀석 손에 매일같이 들려있던 채집 그물로 구름 한 송이를 따내듯 안개를 거둬가고 싶다.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시야는 물론 피부까지 조이는 습기가 반갑지 않았다.
토비오는 앞으로도 주전이겠지? 짐짓 물은 말에 하지메가 대충 대답했다. 그렇겠지, 뭐.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모두가 침묵하며 잠시 동안 부실은 걔 손톱 부서지는 소리로 찼다. 하지메가 오른손 약지 손톱까지 깎았을 때 나는 테이블을 치우고 천장을 봤다. 둥그런 조명등은 모아놓은 입김 같았다. 있잖아, 이와짱. 걔를 나지막이 불렀더니 새끼손톱까지 알뜰하게 깎아내면서도 대답은 해주었다. 어어. 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가끔 쓸데없는 것도 알고 싶고 그런 거잖아.
응.
되게 별거 아닌데 알 수 없는 것도 있잖아.
응.
내 체취가 그득 묻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흐느끼던 코우시는 솔직했다. 그래, 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가증스럽다. 거짓말하지 않는데 다 말해주지 않는 놈들은 처절하고 비밀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코우시는 나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메가 손톱을 깎아 놓은 신문지를 둥그렇게 말고 일어났다. 나는 손바닥에 꼭 맞게 잡히는 배구공을 천장으로 올렸다. 입김에 닿을락, 하더니 다시 내 가슴으로 꺼졌다. 나는 노래 가사의 2절을 부르듯 다음 말을 이었다.
나 상쾌군이랑 잤어.
쓰레기통에 손톱을 쓸어 넣던 하지메가 멈칫했다. 손톱은 걔 의지대로 멈춰주지 않아서 봉투 안으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방 한 구석으로 공을 굴려 넣었다. 하지메는 한참 쓰레기통 앞에 서있더니 이내 주춤주춤 걸어와서 다시 내 머리맡에 다릴 굽히고 앉았다. 그래서? 그 녀석은 가다듬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내 친구인 게 너무 좋았다. 걔가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꽂았어도 난 그렇게 생각할 거다. 어설픈 웃음이 나자 하지메가 딴 말을 했다. 요 일주일 동안은 비안개가 내리겠다. 나는 그 말마저 듣기 싫어서 맥락을 끌었다.
걔랑 했는데……
……
또 하자고 하면 해줄까?
하지메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빛이 넘칠 듯 말 듯 구름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게 다 비가 내려서 그렇다. 구름이 쏟아지니 개울이며 풀숲에 구름투성이인 거지. 빛이 같이 쏟아지면 차라리 땅은 빛투성이일 텐데. 나는 당당히 보고 당당히 눈이 멀 수 없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갑자기 가슴이 퍽퍽해지도록 화가 났다. 왜 내가 창피해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 이후에 전국에 갈 때까지 한 번 더 아껴두려고 했던 눈물을 짰다. 안개를 다 녹이고 싶다.
안개를 거두고 싶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반대편 창문의 커튼까지 젖힌 하지메가 중얼거렸다. 네 앞가림이나 해, 쿠소카와. 하늘이 허옇기만 하고 쏟아지질 못한다. 저게 날 닮고 걜 닮았다니. 나는 입술을 들썩거렸다. 거둬내고 싶다. 구멍을 내고 싶다. 눈이 멀어버릴 빛이 땅으로 챙강챙강 쏟아지는 게 보고 싶다. 나는 눈꺼풀이 아파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배구공을 다시 주섬주섬 끌고 와 가슴 위에서 굴렸다. 걔가 나 만나줄까. 중얼거림 끝에 나는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와짱, 대답 좀 해봐.
자전거를 끌고 가면 걔가 날 만나줄까……
하지메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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