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는 하굣길 내내 꺼풀을 벗었다. 교문 앞에서는 가쿠란 윗단추를 풀었고, 정류장에서는 아예 벗었다. 하차 후 도보를 걸을 땐 팔뚝에 벗은 가쿠란을 건 채로 셔츠 단추도 끌러냈다. 입추가 다가오는데도 저녁 해가 중천이었다. 핸드폰을 시계로 사용한다던 스가와라는 그걸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남들과는 반대로 손목시계를 더 애용했다. 요즘은 대개 학교가 끝날 즈음이면 해가 오뉴월 정오처럼 쨍쨍했는데 스가와라는 그게 중천 너머를 슬금슬금 넘어가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았다. 나는 걔를 기다렸다 같이 하교하는 중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혼자 걷기도 뭐해서, 얼버무렸더니 스가와라가 등을 후려치며 웃었다. 찜통에 혼자 걷는 게 둘이 걷는 것보다 더 불쾌하다는 과학적 근거 따윈 없어, 다이치. 여하튼 걔는 초봄이나 가을 중턱으로 따지면 늘 어스름 질 즈음에 교정을 천천히 나왔다. 해시계냐고 빈정거렸더니, 어스름처럼 웃었다.

 

땅거미 깔리고 해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질 즈음에는 우리 둘 다 침묵하며 걸었다. 찢어진 해 귀퉁이로 자줏빛이 희롱희롱 흘렀다. 그러면 그냥 푸르기만 했던 하늘이 묘하게도 아득해졌다. 이제 정말로 가을이 될 건가 봐. 몇 시간 전보다 더 멀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 말에 스가와라가 데퉁스레 대꾸했다. 넌 기상청을 믿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스가. 또 우리는 기나긴 침묵을 다 견디지 못해서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더 멀리 있는 색이야? 붉은색이? 그렇게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붉음과 푸름의 경계를 허무는 보랏빛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그런 미묘한 변화 몇 가닥이 우리에게서 영양가 없는 잡담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열아홉들이라서.

 

그래도 날 좀 풀린 것 같지.

일주일 전보단?

이대로 쭉쭉 가을 갔으면.

 

스가와라는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소릴 자주 했고, 나는 한 발자국 앞선 그 애 등을 빤히 바라보며 보조 맞춰 걸었다. 걔는 가끔 곁눈질로 슬쩍 뒤돌아보았을 뿐 나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뒤숭숭한 맘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몇 개월 전의 일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색한 건지 걔가 어색한 건지 우리 사이로 무겁고 습한 공기가 뚝뚝 끊어졌다. 걔의 조잘거림은, 혼잣말 같기도 했고…… 나는 몇 달 전 유독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드물던 하굣길을 떠올렸다.

 

, 같이 좀 걸어.

뭐가?

뭐 그렇게 걸음이 빨라.

내가, 그랬어?

.

몰랐어.

 

몰랐어, 하고는 다시 고갤 돌린 걔의 머리 위로 노을이 내렸다. 노을은, 그러니까 일몰의 전조가 아닌가. 그건 가라앉는 것이다. 하늘이 지상에 더 가까워지는 것. 아주 뚜렷하게,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더 가까워지며 하늘은 더욱 아득해진다. 이상하다. 더 가까이 있다는데도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있나. 알 수 없다. 스가와라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엇비슷하게 걸었다. 걔 등을 오래 보다 보면 그 속성들이 낱낱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스가와라는 멀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멀고, 멀리 있음이 분명한데 가까이 느껴지며, 또한 가까이 있음이 분명함에도 손을 뻗쳐야 할 만큼 멀리에…… 그 즈음이면 스가와라는 보랏빛에 둘러싸여 걷는다.

 

이상하게도 빤히 보이는데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보랏빛 하늘인지, 보랏빛 구름인지. 아니면 보랏빛 걔. 우린 그것도 알 수 없다.

 

 

***

 

유이가 너 일학년 때부터 좋아했어. 스가와라는 가방 끈을 그러쥐고 말했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시큰둥하게 나왔더니 입술을 삐죽이면서 인정머리가 없다고 했다. 스가와라는 여전히 나와 엇비슷한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학년 여자애들 중에서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애한테서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고 제대로 답하지 않은 채 교정을 나와버린 게 화근이었다. 스가와라는 유이, 유이, 하면서 굳이 꺼내기 싫은 얘기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았다.

 

그만해, 진짜. 너 나 좋아하냐?

……

 

한창 조잘거리던 스가와라는 거기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웃질 않으니 무안해졌다. 뭔 개소리야, 짜증이라도 내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않았다. 걔는 여느 때처럼 나보다 조금 더 앞선 보조로 걷고 있어서, 그 홀쭉한 얼굴에서 뭐라도 읽어낼 수가 없다는 게 나를 초조하게 했다.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빼서 바지춤에 닦아내는데 불현듯 스가와라가 우뚝 멈춰 서서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아주 분명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사뭇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곤, 좋아하면? 했다.

 

좋아하면? 나는 입을 열었지만 거기서 무슨 말을 꺼내진 못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뒷모습을 보는 것이 덜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일시적인 각성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걔가 불편해졌고, 그래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원체 서두르는 성격이 아닌데 서두를 상황이 닥치면 신중해지질 못한다. 나는 진지한 스가와라를 농담으로 만들 궁리를 했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야, 그건.

아 존나 미안.

 

존나 미안, 하는 스가와라가 뒷목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난 너 안 좋아하는데, 하고 걔 등을 한 번 쿡 때렸다. 호리호리해도 딴딴한 놈이 좀 때렸다고 앞으로 휘청 밀려났다. 우리의 물리적 간극이 팽창했다. 그 후로 걔는 유독 별말 하지 않으며 두 보 앞서 걸었다. 나는 그 뒤에서, 오늘 날씨 좋네, 처럼 걔가 꾸준히 해오던 말들을 대신 하며 뒤따라 걸었다. 걔의 미안이 무엇에 대한 미안인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위기는 대충 넘겼는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딱히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음에도 이상하게 빈속 한 켠이 구린.

 

몇 개월 전부터다. 알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해버렸더니 정말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가와라는 이후 나를 평소처럼 대했고, 나도 걜 똑같이 대했다. 우리 걸음 사이에는 여전히 한 두 발자국의 공간이 넉넉히 남아있었다. 무언가 아주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에 미치미야를 덜컥 찾아가서는 애매하게 회피했던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보다 더 분명하게 하려는 것처럼 스가와라에게 돌아와서 말했다. 나 유이 받아줬어…… 펜을 쥐고 공책 위에 낙서하던 그 애가 아주 잠시 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오오, 하고는 어설픈 감탄사만 뱉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치미야하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서로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는 다른 단추들마저 흐지부지해졌다.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는 말만 아주 많이 남긴 채로 엉성한 관계를 띄워 보냈다. 미치미야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우리 이제 다시 친구지? 그랬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스가와라와 나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지 궁금해졌다. 사귀게 되었다는 얘긴 아주 자신 있게 털어놓았으면서 헤어졌다는 얘긴 걔한테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걔는 신경이 늘 곤두서있으니까 조잡한 변화들에 둔할 리가 없다. 그래도 걘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저만의 무언가를 분명하게 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나는 흐지부지 망쳐버렸지만. 걔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집에 안 가?

너는 왜 그러고 있는데.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

너 먼저 가봐.

 

그게 누군지 묻는 게 창피하고 구차스러워서 나는 알았다고 하고 책가방을 싸서 나왔다. 혼자서 교정을 나오고, 교문을 벗어나고, 붉은 보도블록을 밟으면서, 걔 호리호리한 뒷모습 없이 탁 트인 시야를 널찍이 내다보면서, 그런 걸 묻는 게 왜 구차스러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스가와라에게 불필요하게 감정소모를 하고 있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신하기 위해 아주 짧고 소용 없는 연애를 했는데, 그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마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스가와라는 복잡해져 갔다. 공책에 낙서를 하고 맛없는 급식을 군소리 없이 먹고 내 앞에 등을 구부정히 엎드린 채 짧은 선잠을 잤다. 걔가 복잡해져 가는 과정은 내가 한창 복잡했을 때와 같았다. 별일 없어 보였는데 목을 졸린 사람처럼 벅차 보였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시시때때로 전화를 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래도 전화를 계속 했다. 슬쩍 꺼냈던 감정을 내가 서투른 회피로 쳐냈을 때보다도 더 힘겹게 어떠한 관계를, 이미 거의 끊어져가는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려는 듯 걔는 온 정신을 거기에 쏟아냈다. 나는 기묘하게도 속고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가.

또 기다릴 사람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이따 같이 가. 지금 밖에 또 푹푹 찐다.

 

나는 책가방을 팔뚝 아래 벴다. 스가와라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책가방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당겨 꺼냈다. 그러더니 교실을 나갔다. 나는 걸상에 덩그러니 매달린 걔의 책가방을 보다가 슬쩍 손을 넣어 필기공책을 꺼냈다. 번득한 글씨로 색까지 바꿔가며 필기한 흔적 밑 여백에는 낙서로 가득했다. 글자보다는 그림이 더 많은. 나는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왔다. 옆 반 훌쩍 열린 교실문으로 창가에 팔뚝을 괸 채 통화를 하는 걔가 있었다. 조용한 교실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걔 목소리와 뒤섞였다.

 

「내 나이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머지 않았는데요.

「뭘 머지 않았어. 어릴 때가 다 좋고 예쁘지, 누구든.

아저씬 내가 어리고 예뻐서 만나요?

……

어리고 예뻐요?

 

나는 등을 돌려 벽에 기대고 섰다. 걔한테 형도 아니고 아저씨면 얼마 즈음일까. 서른 초중반 정도 되려나. 걔는 부옇고 호리호리하지만, 딴딴하고, 투박하고, 얄밉기도 하고…… 그런 애가 예뻐 보일 나이면 그 즈음일 게다. 문득 털이 수렁수렁 달린 나이 든 남자의 넓적다리가 걔의 것과 맞물리는 상상을 했다. 아냐, 나는 고개를 털었다. 더러웠다. 문 너머에서 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걔 말들이 점점 수그러들어서 나중에는 목소리만 두런두런 남았다. 정체불명의 언어들을 뒤로하고, 나는 문득 맘 한 구석에 구린내가 나서 다시 교실로 돌아가버렸다.

 

몇 분 뒤에 스가와라는 교실로 돌아왔다. 걔는 곧장 책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지퍼를 잠그고, 가방을 메고서 내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이제 가자. 나는 책가방 위에 파묻고 있던 고갤 일으키고 주춤거리며 책가방을 따라 메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교실이 노르스름하고 건조했다. 나는 슬그머니 걔 뒤에 붙어 걸었다. 오늘은 침묵이 이전보다도 더 길었다. 멋쩍은 고갤 쳐들었다가 하늘이 엉망진창인 걸 보고 오늘도 걔가 보랏빛 속을 거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문득 비합리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치밀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스가와라가 내 앞에서 걷는 게 아니라 내가 걔 뒤에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스가.

.

연애할 땐 또래보다 늙은 사람이 좀 좋을까?

……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거기서 멈춰 섰다. 스가와라는 몇 걸음을 더 가다가 돌아보았다. 무표정이었다. 걔가 상처를 받았는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스가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걔 붉은 입술에 핏기가 잠시 가시곤 다시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더욱 시뻘개진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예쁘다고 해주고…… 사랑한다고도 해주니까, 빈말이라도.

……

우리 같은 애들은 그런 거 낯간지러워서 잘 안 해.

 

걔는 자길 서럽게 만드는 소리에 매달렸다. 다시 등을 돌린다.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무슨 맘에선가, 걔 어깨를 잡고는 이상한 소릴 했다. 아냐, 우리 같은 애들도…… 맘만 먹음 해. 스가와라가 다시 고갤 돌려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답잖게 말을 더듬었다. 나도, 나도 그런 말쯤은 해. 무슨 맘에선가 그런 얘기들이 노랫말처럼 흘러나왔다. 걔는 아무 말 않고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조소도 미소도 아니고, 그냥 웃음이었다.

 

 

***

 

걔의 핸드폰에서 그 남자의 사진을 보았다. 그냥 뒤적이다 발견했다. 남자는 젊지만 어리지 않게 생겼다. 저번에 얼핏 들은 통화로 짐작했듯이, 걔가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졌다. 스가와라는 내 목소릴 좋아한다. 남자는 엇비슷하지만 나보다도 낮고 다정할 것이다. 괜하지 않은 농담들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아저씨치곤 괜찮잖아. 그래서 좋을까. 스가와라는 좋을까. 과연, 과연. 시시때때로 웃기만 하는 걔 맘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리나.

 

그리고 스가와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웃고 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나를 비웃듯 그랬다. 빤한 거짓말에 속아주는 사람처럼 굴었다. 걔 무릎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졌다. 뭐가 미안하냐는 말이 되돌아올까 봐 그러지 못했다. 걔가 쉬워 보인 건 아니었는데 그저 미워 보였다. 많이 웃어서, 그만큼 많이 울 것 같았다. 남자는 걔한테 예쁘단 말도 해주고 사랑한단 말도 해줬을 거다. 그런 소리를 하루에 몇 번이고 들을 스가와라는 날이 갈수록 미워졌다. 꾸준한 운동으로 아플 일 없는 걔는 요즘 자주 다리가 풀렸다. 아랫배를 맞췄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더러워졌다. 더러운 게 걔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더럽다. 우리는 열아홉이다. 겨우 열아홉인데, 열아홉을 연기하면서, 같은 열아홉을 속이면서, 또한 열아홉의 날고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요즘도 그 사람 만나?

아니, 바빠. ?

요즘 먼저 가라고 안 하길래.

 

스가와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더니 걔는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다. ? 물으니 혼자 자는 게 싫다고 했다. 그 말이 그리 유치하지는 않아서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나는 스가와라가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다, 짐작이다. 아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틀림없이 틀렸다. 망상덩어리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뻔한 거짓말을 하는 어린애처럼 목이 탔다. 나는 공책에 낙서하는 스가와라의 등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네가 집 주인인데 침대에서 자야지.

 

걔는 내가 빌려준 옷을 입고서 바닥에 깐 이불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침대 곁을 서성거리다가 불 끌게, 하고서 스위치를 내리고는 자리로 꾸물꾸물 돌아와 베개에 뺨을 묻었다. 스가와라는 새우잠을 잤다. 몸을 웅크리고서 뒤척였다. 바닥이 딱딱한가 싶어서 자릴 바꾸자고 슬그머니 말을 꺼냈지만 걔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뒤척이느라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푸르스름한 등이 훤히 드러났다. 며칠 새 버석 말라서 등뼈가 도드라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남자는 근래에 저 등을 꽤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저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는 채 입버릇처럼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후략한다면 나와 다를 건 없다. 나도 걔의 등을 질리도록 봐오지 않았는가. 나는 불쾌한 공통점을 찾아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 등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손끝이 어깨에 닿으면 막 눈을 감으려던 스가와라가 등을 돌릴 것이다. 내가 그 위로 쏟아지고, 우리는 어쩌면, 아주 적나라하게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걔는 요즘 몸이 헐겁고 나는 꽉 짜여있으니까…… 우리는 아마 서로의 다리가 아주 잘 맞을 것이다. 예쁘다는 말을 꺼내기도 어색한 그 서툶으로 아마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손을 거두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직.

있잖아.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어깨를 움켜쥐지도 않았는데 스가와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피로함에 유약하게 충혈된 눈이 내 얼굴을 멍청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시 호흡을 떼었다.

 

그 남자랑 만나지 마.

…….

걱정 돼.

 

저번처럼 더듬거리는 투로 바보처럼 물었음에도 이번엔 스가와라가 웃지 않았다. 대신 그때 내 것과 비슷한 투로 이랬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다, 진짜. 걔가 도로 등을 돌렸다.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문득 코끝이 뻐근해지고 뱃속에 불이 났다. 말하고 싶다, 말해버리고 싶다. 믿어줄까. 끝내 믿어줄까. 너무 많은 거짓말들을 해왔는데, 나에게. 내 자신에게. 어쩌면 이건 진심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가 지나치게 근사해서, 혹은 걔가 너무 지쳐 보여서, 우린 꽤 알아왔으니까 어떻게든 더 알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충동적으로 든 생각일 수도 있는데. 빼곡한 거짓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알지. 어디부터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무슨 수로 잘라낼 것이며 네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며……

 

숙고의 열차가 머리 한 바퀴를 빙 두르는 와중, 걔가 불현듯 도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줄곧 눈을 부릅뜬 채 네 등을 응시하던 터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시선이 얽혔다. 아무 말도 않았으나 시야가 붉어지고 있음을 짐작했다. 스가와라의 호흡이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나는 아주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말해야 한다고, 말해버려야 한다고. 좋아한다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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