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ummer time
「열두 시야」
나는 메신저를 확인했지만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이따금 저런 식의 텍스트가 전송되었다. 우리는 시간에 관한 강박이 있었다. 정확히는 서로의 시간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었다. 왜인진 모르겠다. 서로 시간의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꼭 알 필요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 이만큼 멀구나, 하고 느낄 수는 있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시계는 누가 발명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마침내, 저런 시계를. 탁상 시계가 따로 있어도 늘 벽시계를 먼저 보게 된다. 눈높이보다 좀 더 높은 위치에 걸어둔 벽시계를 말이다. 그걸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경이감마저 든다. 열두 시야. 걔 메신저 텍스트를 떠올리고는 눈자위로 더듬더듬 가늠해보았다. 현재 오후 여덟 시 삼 분이다. 여덟 시간.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이것이 신비하게만 느껴진다.
얼마 전에는 시차가 열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걔가 점심 먹을 때면 나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가 짬이 날 때 즈음엔 걔가 자고 있었다. 내가 자고 있으면 걔가 방금 점심을 먹었다, 지금 오후 세 시다, 이런 메신저를 보내왔고 걔가 눈을 붙일 땐 반대로 내가 그런 류의 문자들을 보냈다. 그러니까 서로 답장할 일이 없다. 읽기만 하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여덟 시간으로 확 준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는 다만 서로의 시간을 알고 싶다. 어디까지 왔나.
이와짱.
응.
도망갈 바에는 아예 외국으로 나는 게 좋겠지?
그게 뭔 소리냐.
어디 즈음에 있나.
2 a clock
시계는 어쩜 저렇게 생겼을까. 장장 세 시간의 연습을 마치고 잠깐 가진 휴식시간 동안 체육관 벽에 기대어 앉아 시계를 올려다봤다. 빤히 쳐다볼수록 저 둥그스름한 자태가 신비스럽다. 다리 사이에 수통을 하나 넣고 손 끄트머리로 꼭지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초침과 분침, 시침을 부지런히 돌리는 시계를 따라가본다. 각각 맞물린 톱니바퀴의 규칙적인 회전으로 저들은 각자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저들도 프라이드라는 게 있으려나. 시계가 없으면 뭣도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꼭 지구처럼 생겼다. 코우시가 한 말이었다. 언제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재작년 여름방학 즈음이었나. 둘이 방 안에 누워있었다. 나는 침대에, 걔는 바닥에. 누워서 치킨너겟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편의점에서 사오자고, …… 뭐 그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부터 둘 다 함구했다. 누가 먼저 입을 다물었는지 역시 잘 떠오르지 않고,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시계를 보고 있었다. 손을 위로 뻗어야 닿을 높이에 못 박아 걸어둔 시계를 보며 걔가 먼저 그런 말을 꺼냈다. 지구. 나는 동조했다. 그러게, 꼭 지구 같다. 지구가 굴러야 하루가 흐르는 것처럼,
시계도 굴러야 하루가 지나지. 사실 시계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편의상 만들어진 거니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편의상 만들어진 것들은 모조리 양날의 검이다. 그렇지 않은가? 시계 때문에 시간은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시간에 대한 강박이 움을 텄다. 하지만 시계가 발명된 이상, 그리고 대중화된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네 집에서 내 집이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지, 뭐 그런 쓸모 없는 것조차도 다 셈을 하고 앉아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게 십 분이 걸리든 열 시간이 걸리든 솔직히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우리는 상관한다. 중요하다.
언젠가부터 시간에 ‘적당히’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해질녘에 집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 하던 것이 오후 여섯 시 삼십 분이 되면 집 들어가서 밥 먹으면 되겠다,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지는 노을을 보면서 지금이 여섯 시 반인지 일곱 시인지를 구분하고 셈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러는 것을 뼈가 자지러지도록 느끼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기다린다. 메신저. 거기는 지금 몇 시야.
시계는 왜 저렇게 높이 걸어두는 거지.
그러게.
꼭 시간이 우릴 내려다보는 것 같잖아. 일 년 전에 나와 공유하던 시간을 떠버린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렇게 말했다.
3 needles
시계에는 바늘이 있다. ‘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하튼 폭이 좁고 몸이 기다랗게 빠진, 날카로운 그런 것이다. 바늘은 원판 위에서 시간을 정확히 가리킨다. 네 시 삼십구 분 이십사 초면 정확히 네 시 삼십구 분 이십사 초를 가리킨다. 애초에 시간이라는 게 정확히 짚이는 것인가 싶었는데 시계라는 것은 놀랍게도 그런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누웠다. 절로 팔이 머리맡에 올라간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꼈다. 문득 그런 틈들을 파고들어오던 걔 손이 생각난다.
이 침대 위에 걔와 나란히 누웠던 적이 있다. 나란히 눕기만 했는가, 겹쳐 누웠던 적도 있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맨살을 맞추고 끼우며 부대꼈다. 벌러덩 넘어가버린 걔 머리카락을 죄 쓸어다 이마에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얼굴을 가리면서 감긴 걔 눈도 봤고 제 볼을 누르던 손등도 봤다. 나긋나긋하게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을 때 부활동 때문에 여섯 시 전에는 나가야 한다고 산통을 깼던 것도 기억난다. 이렇게 보면 시계는…… 시간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을 믿고 설치는 호랑이굴의 여우인가. 모르겠다.
「오후 네 시야」
메신저 알림이 떠서 봤더니 걔였다. 그렇구나, 하고 다시 엎어져 누웠는데 알림이 하나 더 떴다.
「자?」
누워서 핸드폰을 쥐고 있다간 껌뻑 잠이 들 것 같다. 나는 몸을 세워 바로 앉았다.
「아니」
「왜 아직도 안 자」
「네가 불러서」
미스터 윌링턴 오늘 무단 휴강. 어쩌다? 오는 길에 범퍼로 앞차량 들이 받혔나 봐. 대애박. 나는 등을 구부리고 걔랑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가끔 이런 식의 대화를 하기는 했지만 걔가 슬그머니 먼저 대화를 유도한 건 오랜만이었다. 아직도 우리는 이런 것이 조마조마했다. 뒷목이 뻐근해질 즈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올려 꺾으니 시야에 시계바늘이 들어왔다. 벌써 새벽 한 시. 나는 슬슬 모로 누웠다. 불쑥 딴 얘길 꺼낸다.
「너 혹시 여름에 잠시 오니」
「갑자기 왜?」
「그냥」
딱히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니…… 졸업할 때까진 계속 여기 붙들려있을 거 같아」
그래도 실망스럽다. 벌써 한 시 넘었어. 나 잘게. 시계의 도움을 받아 핑계를 댔다. 그래, 잘 자. 걔의 텍스트는 거기서 멎는다. 나는 핸드폰을 협탁에 치워두고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 시간을 짚는 소리가 난다. 사뿐한 발소리 같기도 하고, 지그시 묻어나는 지문 같기도 한. 그것은 꼭 하루 동안 내가 걸은 걸음들을 농축해 놓은 것처럼 분명한 소리를 낸다. 시계는 내 방에 걸린 이후로 수천 수만 번을 자전했다. 빙글빙글 돌았다. 걔도 함께 돌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제자리걸음. 나는 둥그런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음에도 여전히 걔 꽁무니를 바라보고 있다.
4 rotational
시계는 가끔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12개의 숫자 안에서만 돌고 도니까, 시간이 꼭 반복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미 지나온 시간도 언제든 다시 와줄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에 다리를 묶으면서도 그걸 너무 쉽게 본다. 시간에 발목이 잡혀 끌려가면서 시간이 우릴 끌어주고 있구나, 한다고. 그게 아냐, 멍청아. 시간이 끌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끌려가는 거라니까.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가 없어.
일요일은 대청소를 하는 날이라서 나는 유독 분주하다. 엄마가 유리창에 락스를 뿌릴 동안 나는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청록색 걸레에 시꺼먼 이물질이 묻어났다. 나는 욕실로 달려가 다라이에 그걸 한 번 뒤집어 빨고 벅벅 문질렀다. 물기를 꽉 짜내고 거실로 돌아오니 유리창이 어제보다 맑아져 있었다. 바닥을 다시 한 번 싹 닦고 먼지를 홀랑 뒤집어 쓴 채로 욕실에 뛰어든다. 물과 공기가 같은 비례로 차오른 타일 큐브 안에서 좋은 향기를 찾는다. 씻고 나오니 엄마가 얼음통에 넣은 맥주를 꺼내놓고 병어포를 굽고 있었다.
낮술이야?
왜, 엄마 낮술하는 거 첨 봐?
아들내미한테도 한 잔 주시나요?
예에, 앉으시지요.
나는 맥주와 병어포가 든 접시를 거실 앉은뱅이 탁자로 옮겼다. 엄마가 먼저 소파 밑에 양반다릴 하고 앉았다. 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tv를 트니 어제 저녁에 했던 토크쇼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다시 봐도 보는 재미가 쏠쏠한 프로그램이라 엄마는 따로 채널을 돌리지 않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토크쇼에서는 며칠 전 런던에서 있던 노동조합 시위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엄마는 북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뜻밖의 얘길 꺼냈다.
스가가 런던 가지 않았던가.
……
응?
갔지.
어떻게 지낸대?
…… 낸들 아나.
너무 빤한 거짓말을 했나. 엄마가 맥주캔에 입술을 붙이며 피실피실 웃었다. 나는 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무릎을 모아 가슴에 붙여 둥글게 앉았다. 취기가 오르는지 목이 화끈해진다. 손바닥은 평소보다 차갑다. 나는 손마디를 뚝뚝 꺾었다. 엄마는 tv에 시선을 붙박은 채로 말을 잇는다.
아직 맘 있니?
…… 몰라.
그땐 엄마가 미안.
……
정말로.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tv 소릴 작게 줄여놓은 탓인가, 어쨌든. 나는 다시 팔을 뻗어 맥주를 가져온다. 시원한 탄산이 혓바닥과 목구멍을 긴다. 정말 미안해. 엄마는 중얼거린다. 엄마만 미안해할 거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더 곱씹고 싶지 않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고 있다. 그리고 지났다. 우리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어. 갑자기 영 적성에 안 맞아서 한 모금 빨고 말았던 담배를 찾고 싶다. 나는 발끝을 오므렸다. 무릎을 더욱 움츠렸다. tv에서는 영국 시민들을 인터뷰한 영상자료를 내보내고 있다. 구라파식 연립 주택과 곡선이 들어간 큐브형 철제 가로등이 군데군데 서있다. 하늘은 흐리고 비둘기보단 까마귀들이 더 많이 보인다. 쟤는 저런 곳에서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엄마 목소리가 귓불에 매달렸다.
영국 보내줄까?
……
이번에 너 종강하면……
……
만나러 가볼래?
과연, 시간이란 어떤 것일까. 한 번 떠나오면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그것. 그 당연한 진리를 비웃듯이 12개의 숫자를 반복적으로 오가며 회전하는 시계는 그 어느 가구의 벽에나 걸려서……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게끔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것일까.
5 trace up
「짐은 다 쌌어?」
어젯밤 걔는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몇 시다, 그런 것 없이. 낯설었지만 반가웠다. 다 싸고 한 번 더 체크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나리타에서 히드로까지 얼마나 걸릴까. 걔 말로는 열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고 그랬다. 예약한 비행기표를 받고 보니 정말 그 정도 걸리는 듯싶었다. 열두 시간. 열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 더 많다. 하절기가 아니면 걔와 나의 거리는 대략 그만큼이다. 시간을 거리로 셈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 우리는 몇 시간의 거리를 두고도 서로의 뒤를 좇기에 바쁘고…… 각자의 삶을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결국 지구는 둥그니까. 시계도 둥글고 말이지. 나는 이코노미석에 등을 파묻었다. 열두 시간인데 이코노미석이라니. 나중에 착륙하고 나서 일어서면 온몸이 비명을 지르겠다. 그래도 복도 끝에 위치한 좌석이라 뒷사람 눈치 볼 필요 없이 좌석을 길게 뒤로 뉘일 수 있어서 좋았다. 어젯밤 걔랑은 별 이상한 대화를 다 나눴다. 걔는 영국 음식이 아주 맛없다는 말도 했고, 그래서 매운 게 당긴다고도 했다. 올 때 좀 싸오면 안 되냐고.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타박을 줬다. 거기 빵은 있어? 엄청 많지. 우유빵. 뭔 빵이든 무튼 빵은 넘친다. 그럼 됐네, 하고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활주로를 따라 비행기가 머리를 들이박기 시작한다. 핸드폰은 당연히 전동이 꺼져 있다. 볼 게 없다. 뭘 볼까. 창문을 내다봤다. 나리타 공항이 그 형태도 잘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르게 스치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위가 거북해진다. 더 탄탄해진 중력에 온몸을 순환하던 피가 바싹 긴장한다.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다. 하늘 구경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장난감처럼 작아진 도시의 불빛들이 전부다. 그것도 이내 잿빛 구름에 휩쓸린다. 창문을 부연 구름이 뒤덮는다. 그 사이사이로 어둠의 덩어리가 보인다. 나는 붕 뜬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눈을 꾹 감았다 떠보았다. 눈도 얼얼하다. 손목에 찬 시계가 시야에 들어온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이다. 여덟 시간…… 나는 의식적으로 셈해본다. 거긴 오후 아홉 시 이십 분이겠다. 시계바늘을 아홉 시 이십 분으로 돌려놨다. 나는 오늘이고 걔는 어제. 아니면 걔가 오늘이고 내가 내일인가. 시간은 신비롭다. 같은 행성에 사는 누군가의 아침이 누군가의 밤이다.
열두 시간은 길다. 특히 그 동안 계속 앉아있으려면. 나는 몇 번이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화장실을 핑계로 복도를 서성거렸다. 엉덩이와 오금이 저리다. 그러는 동안 창문에는 빛이 번지고 이제야 붉은 하늘과 벽돌빛 구름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빈 틈 없이 장밋빛의 수증기 덩어리로 그득 채워진 하늘을 본다. 영원히 몸을 떠맡기고 싶은 대해의 파도 같다. 포근해 보인다, 좋다. 그래도 뒷목은 계속 뻐근하고 다리가 쑤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간을 건너가는 일은 참으로, 어렵구나. 간절한 만큼.
「Passengers, our flight will land in twenty minutes. Please fasten your seatbelt and turn off your mobiles. Thank you.」
어렵지만, 시간은 지난다.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이것 저것을 부탁했다. 창문을 열어달라, 좌석을 바로 세워달라, 착석해달라. 나는 활짝 열린 창문으로 내다본다. 영국을. 아직 영국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영국 땅 위를 날고 있지 않나. 그러고 보니 인간은 참 많은 걸 발전시켰다. 나는 허공을 가르는 거대한 납덩이에 올라타 그런 생각에 잠긴다.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을 방법을 고안 중이다. 어떻게든…… 끌려가고 있지만은 않도록. 노력 중이다. 문득 신선한 기내에서 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납덩이는 온갖 소음을 일궈내며 착륙한다. 바퀴가 떨어지고 활주로에 무사히 안착한다. 부드럽지만 격렬하게 땅 위를 밟는다. 시간을 달리는 기분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격동적으로, 쭈뼛 서는 머리털부터 뒤집히는 내장까지 모든 걸 엎질러놓을 만큼의 위력을 가지며. 눈을 감는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고 속이 쓰려온다. 속도가 점점 줄어든다. 그만큼 여유를 되찾은 몸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눈물이 걔를 만나는 나보다도 먼저 시간을 앞지르려 한다. 아직은 안 돼.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히드로의 입국 절차가 복잡했다. 나는 여권을 쥔 채로 외국인 전용 줄에 서서 십오 분을 더 기다렸다. 나는 조금 부스스한 상태일 것이다. 머리를 매만졌다. 검사원이 내 얼굴을 흘끗 보고는 타자를 친다. 입국도장을 찍고 여권을 돌려준다. 나는 그걸 냉큼 받고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부스를 나왔다. 사람이 붐빈다. 택시 팻말을 든 기사들도 있고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있고 팔짱을 낀 채 서서 목을 쭈욱 뽑는 사람들도 있다. 어지럽다. 나는 자동문 밖을 주춤주춤 나서며 고개를 휘젓는다.
토오루.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토오루, 한다. 성급하게 나오려고 했던 눈물이 다시 눈 위에 번진다. 손등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짜릿함이 눈자위에 퍼진다. 그리고 도로 손등을 내리기도 전에 어떤 무지막지한 힘이 나를 그러안는다. 활주로에 바퀴를 내리던 비행기처럼, 부드럽지만 격정적이다. 멀리서 날아와 나를 들이받는다. 나는 손등을 거둔다. 내 가슴팍에 닿은 둥그런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바래지 않은 색의 머리카락이다. 나는 거두었던 손을 다시 들어올려 걔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토오루.
……
토오루……
어제까지만 해도 짐은 다 쌌느니 일본 음식을 좀 싸오라니 말이 많던 애가 지금 그 말밖에 하질 못한다. 토오루. 지금 걔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은 온전히 내 이름이 전부다. 나는 목구멍이 꽉 막힌다. 코우시, 하고 조그맣게 발음해본다. 실로 간만에 중얼거리는 이름이다. 이젠 괜찮다. 시간이 멈춘다. 볼 위로 뜨거움이 무너진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걔 머리를 꼭 그러안는다. 그러자 눈 앞으로는 고개를 위로 꺾어야 볼 수 있는 철탑시계와, 내 손등을 묶은 손목시계가 보인다. 그들의 시간은 같다. 비로소, 걔와 나의 시간이,
만난다. 내가 앞질러 왔다. 너에게로 왔다. 가까워진, 너의 등도 아닌 얼굴을 보았다. 시간의 회전이 멈춘다. 우리의 시간이 꽉 맞물린다. 나는 갈퀴처럼 너를 뭉쳐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서로의 이름을 되짚는다. 바늘이 숫자를 한 점, 한 점, 고르게 짚었던 것처럼 우리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서로의 이름에 발자국과 지문을 남긴다. 그렇다. 시간에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인류의 노력이다. 아주 작은 반짝임이지만 분명히, 이 순간은, 결실의 한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너무 뒤처지지도 앞지르지도 않은 그러한 상태로.
우리는 오래오래 운다. 피부에 서로가 닿는다. 우리의 모든 것, 거리도 몸도 마음도 시간으로 맞물린다. 머리가 하얘진다. 너무 어렵게 돌아왔다. 너무나도 어려운, 그만큼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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