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토 코타로는 이전부터 일관적으로 귀찮은 축에 속했다. 기운이 넘치면 넘치는 대로, 풀이 죽으면 죽는 대로 줄기차게 사람을 성가시게 했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빌려 말하자면 주변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손이 많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맴도는 이들이 많았으니 그러한 성가심이 오히려 코타로에게 끈끈하게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더 깊은 것은 모르지. 이것은 코노하의 감상에 불과했다.

 

일학년 때 이미 주전으로 발탁되었던 코타로를 기억한다. 코노하 아키노리 역시 몇 번의 연습경기 이후 일찍이 주전이 되었다. 당시 부원들 중에는 삼학년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그저 일 년 정도의 경험이 좀 더 풍부한 게 전부였던 선배들은 떼로 들어온 일학년들에 애를 먹었다. 특히 코타로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때 그의 목줄을 잡았던 건 다름아닌 코노하였다. 코타로와 같은 포지션이기도 했지만 워낙 처세에 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꼭 그런 것만이 그가 코타로를 떠맡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두 해라는 시간보다도 훨씬 까마득하게 의문으로 남았다. 그만큼 당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코타로와 코노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나니 겨울 이후에 찾아온 봄만큼이나 낯설어졌다.

 

예정보다 늦게 끝났지, 오늘?

힘들어 죽겠어요, 엉엉.

덜 한다고 덜 힘든 것도 아니잖냐.

…… 보쿠토 얘는 그새 어디 갔지.

그냥 집에 가서 씻는다고 아까 아카아시랑 먼저 하교하더라.

 

사루쿠이는 대답을 마치고 등에 메었던 가방을 가슴으로 끌어 야키소바빵을 꺼냈다. 포장지를 뜯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걸 다 해치울 때까지는 쪽지시험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고, 그날 유키에가 점심시간에 오므라이스를 두 그릇이나 해치웠던 것을 이야기하며 낄낄댔다. 코노하는 어깨를 으쓱대며 간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수평선이 뺨처럼 붉어질 즈음에 그들은 건너편 도보에서 익숙한 주택을 지나쳤다. 일찍이 하교를 했다던 코타로가 떠올라 코노하는 문득 발걸음이 멎었다. 두어 걸음이 앞선 사루쿠이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거긴 왜 보냐? 그의 외침에 코노하는 얼버무렸다. 보쿠토 샤워하는 거 구경. 그게 거기서도 보여……? 보일 리가 있냐? 히죽 웃는 코노하의 민둥한 낯을 보며 사루쿠이는 이맛살을 접었다. 그는 빵을 다 먹고 빈 봉지를 버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침묵으로 빈 짧은 간극 이후에 그가 골똘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보쿠토 걔는 너랑 하교를 같이 했었지? 코노하는 보도블록에 밑창을 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이 같으니까.

 

코노하는 좀 더 먼 곳에 살았다. 하굣길에 코타로는 제 집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들은 그림자가 좀 더 길어질 때까지 걸으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멈춰 서면 그제야 코타로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걸음을 멈출 즈음이 되면 코노하는 제가 매일 여닫는 대문 앞에 서서 코타로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얕은 과거의 일이 된 것에 두 사람 어느 한 쪽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의심이란 걸 품을 만큼 관계의 간극이 넓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혹 이질감을 느꼈다고 해도 드러내놓을 정도의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나빠진 건 없어. 코노하는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나빠질 것도 없었지…… 코타로도 그렇게 여길 터였다. 사소한 건 따져 묻지 말자. 째째해지니까.

 

이전부터 손이 많이 가던 코타로는 코노하의 손을 탔다. 코타로에겐 좀처럼 적당함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의 극적인 면들이 적당함으로 중화될 수 있는 곳에 살뜰하게 분산시키는 일을 코노하가 주로 자청하곤 했다. 떠맡은 일도 아니거니와 나서서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 해가 흐르고 후배가 들어왔다. 세터일 거야, 짐짓 생각했는데 정말로 세터였다. 그에게는 손마디를 꺾고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코노하는 어째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한숨 놓겠구나. 코타로는 한창 부활동에 재미를 보며 푹 빠져있었고, 후배는 그런 그에게 꽤 만족스러운 스파이크를 칠 수 있는 길을 터줄 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삼학년이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되었을 때, 후배는 코타로에게 토스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코노하는 더 말할 게 없다고 말한다.

 

손기술이 좋은 후배의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케이지는 처세에도 능했지만 그보다도 꼼꼼한 구석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나이답지 않게 예의가 바르고 생각이 깊었으나 고리타분하거나 원칙주의자 같은 면은 없었다. 펄펄 끓어 냄비 밖으로 넘치기 시작하려는 하얀 거품 같은 코타로에게는 한 컵의 미지근한 정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전부터 코노하가 입이 아프도록 말한 중화에는 꼭 알맞았다. 이제는 케이지의 손을 타게 된 코타로를 보며 부원들이 장난 삼아 계승, 이라고 하는 것에 코노하는 반은 동의했으나 반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자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했고 거창한 제목을 달만한 벼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리어 이것이다. 여태 그래왔듯이 중화를 찾았을 뿐인데 그게 하필 사람이더라. 잠깐 머물다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물연이라는 말은 없어도 인연이라는 말은 있듯이.

 

.

……

주장님이 너무 잘생겼어?

, 존나 키스하고 싶어.

우웩.

 

그렇지, 인연이라는 말은 있듯이. 코노하는 입을 찢어 웃었다. 코타로가 으레 지어 전염이 된 표정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중화인가. 빤한 시선을 포장시키는 너른 웃음이나, 그득 찌푸린 얼굴이나. 이전부터 코타로는 그런 농담을 자주 해왔고, 코노하는 그에 응하는 더욱 찐득한 농담을 몇 배는 더 해왔다. 얼핏 스스럼없음을 호소하기 위해 과격하게 뚫어놓았던 경계가 이제 와 묽어져 돌아보니 손 쓸 수도 없이 너저분하더라는 이야기. 마음껏 후비고 찢어놓아 실밥이 가닥가닥 늘어진 이것을 이제 어찌 할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듯 마주보고 넋을 잃었다. 우웩, 토악질을 하는 시늉을 하던 코타로는 가슴을 문지르며 코노하의 뒷목을 흘깃거렸다. 키스하고 싶어, 가느다란 눈을 하고 능청스레 대꾸하던 코노하 때문에 하마터면 설득 당할 뻔했다. 웃으며 입술을 부딪칠 뻔했다. 우리의 등 뒤에 어느 새 남은, 더럽게 짓이겨진 경계. 코타로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것은 언제까지 인연일 것인가.

 

코노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 문을 닫고 속옷을 내렸다. 수압이 강한 샤워기를 들고 정수리에 그득 쌓인 생각들을 씻어낼 작정이었는데, 고작해야 머리칼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그는 대충 샤워를 마친 뒤 수건을 목에 두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코타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부하냐?」 잠시 후에 예상과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공부를 왜 해! 미쳤어?」 그는 오기로 책장에 꽂아둔 문제집을 몇 권 꺼냈다. 펼치고 나니 금방 풀 마음이 사라졌지만. 방이 인큐베이터처럼 좁다랗게 느껴져 창문을 젖혔다. 샤프가 깔짝대는 소리를 가르고 아득히 차도를 긋는 공기의 움직임이 들려왔다. 문득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코타로였다.

 

.

「심심해.

그럼 공부하세요.

「코노하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지……?

됐고, 목소리가 왜 그래.

「누워있어서.

누워서 뭐 하는데.

「생각.

……쓸데 있는 생각이냐?

「네 생각?

완전 쓸데 있어.

 

코노하는 유쾌하게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왠지 모르게 눈이 뻑뻑해져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노하는 문제집을 덮고 침대에 꾸역꾸역 올랐다. 함께 막힌 목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했다. 이전부터 갈피 없는 통화를 오래도록 붙들고 있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점점 말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그 즈음에 코노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근데 너 안 졸리냐? 코타로도 부정 없이 하품을 하며 통화를 갈무리 지었다. 핸드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몸을 완전히 젖혔으나 말과는 달리 졸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코노하는 무늬 없는 밍밍한 천장을 오롯이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말이 바닥나기도 하는구나.

 

*

 

코타로는 다정하면 바닥까지 다정해지는 사람이었다. 우악스러운 유쾌함 밑에는 제 편을 받쳐주는 다정함이 초석처럼 깔려있었다. 아키노, 아키노. 지금은 유별나다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부원들 사이에 약속처럼 굳어진 코노하의 별칭은 다름아닌 코타로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는 스스로 애정을 담아 개조한 이름을 줄기차게 불러댔지만 해가 거듭되며 점차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묘한 일이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야금야금 갉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코노하라는 성씨가 되려 어색했으므로 어깨를 붙잡거나 등을 치는 것으로 부름을 대신했다.

 

코노하 씨! 케이지가 이름을 부르며 공을 보내주었을 때 그는 문득 코타로가 불러주곤 했던 별칭이 그리워졌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틸고무의 표피를 후려치는 손바닥에 평소보다 몇 배의 힘이 들어갔다. 제법 위력 좋은 스파이크를 날린 후에는 케이지로부터 멀리 에두른 칭찬이 이어졌다. 앞으로 코노하 씨한테 공을 좀 자주 보내야겠어요. 그러자 코타로가 머리털을 바짝 세우며 발을 굴렀다. 그럼 나는, 나는! 그러니까 보쿠토 씨도 선전해야지요. 연습하세요. 케이지는 딱 잘라 그를 끊어먹었다. 코노하는 스스로도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코타로의 입을 틀어막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학년이 되고 어느 순간까지 이 수평한 관계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일 터. 너 없을 땐 코노하가 고생을 많이 했지. 사루쿠이는 케이지가 이학년이 되어서야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케이지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고정된 시선으로 코노하의 뒤통수를 확대했다. 특수렌즈를 쓰지 않으면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도 않을 자그마한 물체를 관찰하듯이 아주 천천하게 조심스럽게. 그런 눈길이었다고, 적어도 사루쿠이는 주장한다.

 

자자, 아카아시! 스파이커가 연습을 하려면 세터가 필요하지 않겠어? 코타로는 케이지의 등을 떠밀다 말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잠시 주어진 쉬는 시간에 그새 소란스러워졌다. 코미와 사루쿠이가 팔을 얽어 가마를 만드는 것을, 와시오는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넓적다리 하나가 쑥 들어가도록 넓혀놓은 공간에 코노하를 강제로 태웠다. 엉거주춤 다리가 붙들린 채로 코미의 어깻죽지를 후려갈기다, 급기야는 와시오에게 손짓을 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코타로의 심연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버스 뒷좌석에서 멀미를 할 때처럼. 뭔가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짐짓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아직 고교생이고, 저런 장난들은 삼 년 전부터 줄곧 해온 것들, 익숙한 풍경인데 가슴이 뻐근했다. 토스 올려달라고 해놓고 뭐 하십니까? 케이지는 손마디를 풀며 코타로를 재촉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코노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짚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보쿠토 코타로와, 혹은 아카아시 케이지와. 찰나에 마주쳤으나 코노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코타로도 어영부영 허리를 숙여 네트 밑으로 넘어갔다.

 

진짜 봄고 예선이 얼마 안 남았네.

한 달? 한 달 맞나?

나 네 옷에 토해도 돼?

미쳤냐 진짜. 근데 전국은 우리 이학년 때도 가봤잖아?

 

코노하는 간만에 코타로와 함께 하교를 했다. 자율연습을 마치고 탈의실에 기어들어갔을 때는 그가 마침 세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턱 밑으로 수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닦아내지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너도 이제 집 가냐? 코타로가 그랬다.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체육관을 나왔을 때는 비로소 이런 일들이 지금은 아득히 떠나온 고향처럼 낯설다는 걸 알아챘다. 그런 감정들을 증명하듯이 엉뚱하게도 신호등을 앞에 두고 길을 잘못 들었다. 좁다란 골목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며 코노하는 얼마 남지 않은 예선 얘길 꺼냈다. 코타로는 그렇게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눈썹을 치켜 뜬 채로 입꼬리를 찢었다. 저건 일학년이었을 때부터 줄곧 지어오던 표정이다. 한때 코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긁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태연함이냐, 뻔뻔함이냐, 멍청함이냐, 도대체 무엇이냐. 어렴풋이 답에 근접하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감이었다. 물론 그것도 맞았다.

 

우리 부원들이 좀 강하잖냐? 어디 가서도 안 꿀려. 코타로는 말을 마치고 골목 끄트머리에 위치한 편의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드 먹자. 그는 지갑을 꺼내 흔들며 계단을 밟았다. 코노하는 코를 훌쩍이곤 문 앞에 그 뒤를 따르다 유리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일 년 전 예선을 앞두고 코타로는 사뭇 다른 말을 했던 것 같다. 날 믿어, 에이스잖아! 아주 미미한 변화들을 미리미리 주워담지 못하고 수북이 쌓인 고지서처럼 한꺼번에 훑으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쭈그려 앉아있으니 머잖아 계산을 마친 코타로가 하드 두 개를 덜렁덜렁 들고 나왔다. 그는 하드봉지로 코노하의 뺨을 찔렀다. , 차가워. 그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그걸 받아 들고는 포장지를 벗겼다. 두 사람은 혓바닥에서 하드를 녹이며 마저 도보를 걸었다.

 

시시콜콜한 화제로 돌려볼까 하는 노력들은 간단히 무산되었다. 배구로 만났기 때문일까, 이야기는 강화훈련과 봄고에서 맴돌았다. 어느새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코노하는 눈을 끔벅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대문 앞에서 코노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있잖아, 네 집 지나쳐온 거 같아. 어째 미안한 투였지만 코타로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몇 년 전에는 밥 먹듯이 있던 일. 석양을 우산 삼은 코타로의 뒷목이 붉어졌다. 하드를 다 먹고 남은 막대를 입에 문 채였다. , 그리고 난 너 믿으니까. 그는 코노하의 어깨를 밀며 걸음을 물렸다. 그런 말은 아무래도 너무해. 그는 대문에 선명한 지문을 남기며 고개를 숙였다. 코타로는 뒷걸음질로 그에게서 멀어지며, 그의 연한 머리칼 밑으로 귓불이 해 지는 하늘빛에 젖는 것을 보았다. 과연 하늘빛이었다.

 

차라리 확 비틀어졌다면 어땠을까. 코타로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부스 안에 우두커니 서서 골똘해졌다. 강한 수압이 그의 두피를 강타한 탓에 종일 고된 연습으로 기운이 쑥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속눈썹에 묵직하게 맺힌 물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수도를 잠그었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떨어내며 되뇐다. 차라리 아주 비틀어졌다면, 모두가 움찔할 만큼 뒤집어졌다면. 이런 건 뭐랄까, 아주 자그마한 블록 한 조각이 사라진 레고를 보는 기분이랄까. 못내 성가시지만 그 한 조각이 없어도 별다른 흠 없이 잘만 서있는 조형물을.

 

아아…… 싫다.

뭐가, 공부? 설마 배구가 싫진 않을 테고?

엄마 아들은 공부랑 배구 말고도 신경 쓸 게 많답니다!

여자친구?

아니……

그럼 그냥 친구?

 

어어 친구……, 코타로는 말끝을 잘근 씹었다. 머리가 다 마르자 주저 없이 베개에 뒤통수를 뉘였다. 국어 시간에 좀 더 집중할 걸 그랬어. 개운치 못한 맛, 달콤쌉싸하게 혓바닥을 도는 맛, 잘못 삼킨 생선가시처럼 위장을 날카롭게 긋는 무언가. 각각 다른 곳에서, 코타로와 코노하는 한숨지었다. 나는 내가…… 너에게 좀 더, 아주 조금 더 특별하길 바랐어. 결국은 이것이었다. 유치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짧게 웃었다.

 

코노하 씨한테 올릴게요. 며칠 후, 케이지는 부활이 끝나고서도 코트를 서성거리더니 공을 가지고 다가왔다. 코노하는 짙은 눈꺼풀을 느릿느릿 끔벅였다. ? , 코노하 씨요. 그들이 마주하고 선 거리만큼의 침묵이 마룻바닥을 기었다. 늘 쉴 새 없이 뼈마디를 정리하는 손이 공을 감싸 쥔 채로 가만히 복부 앞에 놓여있었다. 코노하는 이런 것에 그러마, 하고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제 자신이 잠시 싫었다. 그러나 이윽고 뒷목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보쿠토는?

……

……

코노하 씨도 스파이커잖아요.

?

예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스파이크 연습 안 하십니까?

 

아까 시뮬레이션도 했고, 본연습이라면 이미 두 시간 정도, 갖은 핑계가 떠올랐지만 코노하는 머쓱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코타로는 보이지 않아.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코트로 들어왔다. 올립니다. 케이지는 그가 왼편 끄트머리에 선 것을 확인하고 유키에에게 부탁을 했다. 유키에가 공을 던지자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케이지의 손끝에 닿았다. 코노하 씨! 케이지의 목소리로 제 이름이 불리는 건 아무래도 어설펐다. 마침 좋은 위치로 날아온 공을 후려쳤다. 내가 후려친다면 코타로는 찍어 누른다는 느낌이지. 아마 케이지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코노하는 그런 생각의 일련을 뽑아놓고 돌아보았으나 케이지의 낯은 읽어내지 못할 만큼 단정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토스를 더 칠 때마다 팔에 힘이 붙었다. 연달아 스파이크의 기회가 떨어진다는 건 상당한 체력소모를 유도하는 일이면서도 반비례적으로 온몸의 열을 돋구는 일이기도 했다. 에이스는 코타로니까, 코노하에게 좀처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맞았다. 이런 것도 계승일까요. 턱 밑에 고인 땀방울을 닦아내던 케이지가 무심코 중얼댔다. 묻는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투라서, 코노하는 그가 흘려놓은 말을 한 모금 정도 혀끝으로 맛보았을 뿐이었다. 대개는 코타로의 공을 올려오던 케이지가 자신의 타점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칭찬을 해주었더니 저는 세터고 코노하 씨는 우리 팀의 스파이컨데,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묵묵하게 되받아 쳤다. 문득 네트를 쳐둔 체육관 쇠문 너머로 코타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담 다 받았어, 아카아시! 그는 다리를 힘껏 휘저어 들어오다 땀에 젖은 코노하를 발견하고 문턱에서 멈춰 섰다. 그 역시 턱을 닦다 말고 코타로와 마주했다. 케이지는 네트 너머로 떨어진 공을 주워오며 대꾸했다. 오셨으면 몸 풀고 토스 칠 준비하세요. , , 그래, 코타로는 더듬대며 허둥지둥 가방을 내던지고 탈의실 문을 어깨로 밀었다. 코노하는 손을 털고 허리를 구부려 운동화 뒤축을 고쳐 신었다. 이제는 지켜보며 감탄할 시간이야. 아카아시 케이지만이 유도할 수 있는 보쿠토 코타로의 완벽한 스파이크를. 내가 세터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케이지가 코트 선을 밟아 나왔다. 그림자가 유하게 진 얼굴로 내려다보며 그랬다.

 

코노하 씨는 뭔가 계속 아쉬운 얼굴이네요.

?

……

반년만 있으면 졸업이니까? 하하하.

 

코타로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뭐야, 코노하도 연습하고 있었던 거냐구. 그가 얼띤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코노하는 입술을 내밀어 우스꽝스러운 낯을 만들었다. 그건 뭐냐, 뽀뽀? 코타로는 이맛살을 구기며 맞받아치고는 키트에서 새 공을 하나 꺼내왔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을 세며 코노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로 헐떡이던 호흡을 메웠다. 뒤축이 단정해진 운동화와 함께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이제 보쿠토 토스 올려줘. 케이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밀어내는 순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덤덤한 케이지의 목소리가 귓불을 잡아당겼다. 아쉬워요. 코노하는 눈썹을 치켜뜨고 돌아보았다. 알 듯 말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무어라 대답하지도, 반문하지도 못하고 입꼬리를 찢어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케이지는 혼잣말을 하는 투였다.

 

저도 아쉽습니다.

 

*

 

재미있는 사실 알려줄까. 우리 졸업하면 삼학년 주전은 아카아시뿐이야. 코노하가 느닷없이 꺼낸 말에 코타로는 제 옆에 늘어져있던 담벼락을 짚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 아카아시 어떡해! 그들은 다시 간만에 나란히 하교를 하던 중이었다. 코노하의 옅은 머리칼이 좀 더 짙게 얼룩져있었다. 걱정 마, 너 같은 후배만 안 들어오면 되거든요? 코노하는 코타로의 너른 등을 후려치며 볼멘소릴 했다. 너무하잖아! 팔을 꺾어 손바닥으로 등을 비비는 코타로의 왼손에는 샌드위치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코노하가 쏜 것이었다. 남은 빵 조각을 우물거리던 코타로가 잠깐의 침묵 끄트머리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키노.

……

……

.

너 진짜 대학 가?

그럼 안 가? 넌 뭐하게. 실업배구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니까…… 대학 가면, 더 이상 못 보나? 초석의 표면 같은 코타로의 목소리에 코노하는 잠시 발끝을 주춤거렸다. 걸음이 느려졌다. 평소엔 의심치도 않았던 것들이 스물스물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언젠가 깨끗이 씻은 머리에 도로 채워 넣었던 의문들과 비슷한 형상을 띤 언어들의 중추였다. 우리가 그만큼 특별한가. 이것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튀어 올랐다. 코노하는 붙어있던 입술을 겨우 떼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대학 좀 따로 간다고 못 보겠냐?

아니 그러니까,

너 맨날 강의 끝나면 학교 들러서 아카아시 찾아 삼만 리 하는 거 벌써 상상된다, .

나 지금 네 얘기 하고 있는데.

 

코타로는 오랜만에 맹물 같은 표정이었다. 활짝 웃는 게 아니면 마구 일그러뜨리는 애. 그런 애가 물 위를 부유하는 듯 가만한 낯을 하고 있었다. 파도가 친다. 두 사람은 그것을 느꼈다. 코노하의 귀 밑에 저무는 빛은 해 지는 하늘을 닮은 물빛. 아키노, 한 번 더 불러보자 그 색이 더욱 짙어졌다. 비추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서 체외로 고여내는 빛. 이 순간까지도 나름의 유치한 고민들을 실타래처럼 뭉쳐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내가 너에게 좀 더 특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좀 더. 비웃음 살 감정들이 두려워 그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관계는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 삼키듯 닥치는 대로 짙어져, 마침내 그것이 좀 더 정교한 무늬로 옅어지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진 것이라고. 두 사람은 마침내 골목의 허리에서 오도카니 멈췄다. 좀 더 분명하게 서로의 눈을 살폈다. 확실치 않은 것을 확인하는 시간은 괴로웠다.

 

밀물과 썰물은 몇 번이고 들이닥쳤다 빠져나가, 마침내 그들의 관계를 이만큼까지 깎아놓았다고. 코타로와 코노하가 기억하는 처음의 그것은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여서, 그 누구도 함부로 들기 어려운 것이라, 그것이 차라리 개운하고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침식의 시간을 거친 그것을 지금 들여다보니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조약돌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놓았다가 가끔 꺼내 보기에 좋은, 어루만지기에 좋은 것. 코타로가 문득 코노하의 팔목을 움켰다. 가느다란 뼈대를 그러잡은 손아귀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는 부드러이 빠졌다. 매끄러운 눈에 실과 실을 이은 듯 서로를 팽팽하게 마주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묻지 못할 유치한 의문들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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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100th Anniversary !  (0) 2016.08.03




스가와라는 하굣길 내내 꺼풀을 벗었다. 교문 앞에서는 가쿠란 윗단추를 풀었고, 정류장에서는 아예 벗었다. 하차 후 도보를 걸을 땐 팔뚝에 벗은 가쿠란을 건 채로 셔츠 단추도 끌러냈다. 입추가 다가오는데도 저녁 해가 중천이었다. 핸드폰을 시계로 사용한다던 스가와라는 그걸 그렇게 자주 들여다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남들과는 반대로 손목시계를 더 애용했다. 요즘은 대개 학교가 끝날 즈음이면 해가 오뉴월 정오처럼 쨍쨍했는데 스가와라는 그게 중천 너머를 슬금슬금 넘어가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았다. 나는 걔를 기다렸다 같이 하교하는 중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혼자 걷기도 뭐해서, 얼버무렸더니 스가와라가 등을 후려치며 웃었다. 찜통에 혼자 걷는 게 둘이 걷는 것보다 더 불쾌하다는 과학적 근거 따윈 없어, 다이치. 여하튼 걔는 초봄이나 가을 중턱으로 따지면 늘 어스름 질 즈음에 교정을 천천히 나왔다. 해시계냐고 빈정거렸더니, 어스름처럼 웃었다.

 

땅거미 깔리고 해와 하늘의 경계가 흐려질 즈음에는 우리 둘 다 침묵하며 걸었다. 찢어진 해 귀퉁이로 자줏빛이 희롱희롱 흘렀다. 그러면 그냥 푸르기만 했던 하늘이 묘하게도 아득해졌다. 이제 정말로 가을이 될 건가 봐. 몇 시간 전보다 더 멀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 말에 스가와라가 데퉁스레 대꾸했다. 넌 기상청을 믿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스가. 또 우리는 기나긴 침묵을 다 견디지 못해서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더 멀리 있는 색이야? 붉은색이? 그렇게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면 붉음과 푸름의 경계를 허무는 보랏빛이 머리 위를 뒤덮었다. 그런 미묘한 변화 몇 가닥이 우리에게서 영양가 없는 잡담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열아홉들이라서.

 

그래도 날 좀 풀린 것 같지.

일주일 전보단?

이대로 쭉쭉 가을 갔으면.

 

스가와라는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소릴 자주 했고, 나는 한 발자국 앞선 그 애 등을 빤히 바라보며 보조 맞춰 걸었다. 걔는 가끔 곁눈질로 슬쩍 뒤돌아보았을 뿐 나와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뒤숭숭한 맘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몇 개월 전의 일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어색한 건지 걔가 어색한 건지 우리 사이로 무겁고 습한 공기가 뚝뚝 끊어졌다. 걔의 조잘거림은, 혼잣말 같기도 했고…… 나는 몇 달 전 유독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드물던 하굣길을 떠올렸다.

 

, 같이 좀 걸어.

뭐가?

뭐 그렇게 걸음이 빨라.

내가, 그랬어?

.

몰랐어.

 

몰랐어, 하고는 다시 고갤 돌린 걔의 머리 위로 노을이 내렸다. 노을은, 그러니까 일몰의 전조가 아닌가. 그건 가라앉는 것이다. 하늘이 지상에 더 가까워지는 것. 아주 뚜렷하게, 붉은색이 푸른색보다 더 가까워지며 하늘은 더욱 아득해진다. 이상하다. 더 가까이 있다는데도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있나. 알 수 없다. 스가와라는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엇비슷하게 걸었다. 걔 등을 오래 보다 보면 그 속성들이 낱낱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스가와라는 멀고도 가깝고, 가깝고도 멀고, 멀리 있음이 분명한데 가까이 느껴지며, 또한 가까이 있음이 분명함에도 손을 뻗쳐야 할 만큼 멀리에…… 그 즈음이면 스가와라는 보랏빛에 둘러싸여 걷는다.

 

이상하게도 빤히 보이는데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보랏빛 하늘인지, 보랏빛 구름인지. 아니면 보랏빛 걔. 우린 그것도 알 수 없다.

 

 

***

 

유이가 너 일학년 때부터 좋아했어. 스가와라는 가방 끈을 그러쥐고 말했다. 그래서 뭐 어떡하라고, 시큰둥하게 나왔더니 입술을 삐죽이면서 인정머리가 없다고 했다. 스가와라는 여전히 나와 엇비슷한 거리를 두고 걸으면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학년 여자애들 중에서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애한테서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고 제대로 답하지 않은 채 교정을 나와버린 게 화근이었다. 스가와라는 유이, 유이, 하면서 굳이 꺼내기 싫은 얘기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았다.

 

그만해, 진짜. 너 나 좋아하냐?

……

 

한창 조잘거리던 스가와라는 거기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웃질 않으니 무안해졌다. 뭔 개소리야, 짜증이라도 내주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않았다. 걔는 여느 때처럼 나보다 조금 더 앞선 보조로 걷고 있어서, 그 홀쭉한 얼굴에서 뭐라도 읽어낼 수가 없다는 게 나를 초조하게 했다.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손을 빼서 바지춤에 닦아내는데 불현듯 스가와라가 우뚝 멈춰 서서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아주 분명하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사뭇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하곤, 좋아하면? 했다.

 

좋아하면? 나는 입을 열었지만 거기서 무슨 말을 꺼내진 못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뒷모습을 보는 것이 덜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일시적인 각성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걔가 불편해졌고, 그래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원체 서두르는 성격이 아닌데 서두를 상황이 닥치면 신중해지질 못한다. 나는 진지한 스가와라를 농담으로 만들 궁리를 했고,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뭔 개소리야, 그건.

아 존나 미안.

 

존나 미안, 하는 스가와라가 뒷목을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난 너 안 좋아하는데, 하고 걔 등을 한 번 쿡 때렸다. 호리호리해도 딴딴한 놈이 좀 때렸다고 앞으로 휘청 밀려났다. 우리의 물리적 간극이 팽창했다. 그 후로 걔는 유독 별말 하지 않으며 두 보 앞서 걸었다. 나는 그 뒤에서, 오늘 날씨 좋네, 처럼 걔가 꾸준히 해오던 말들을 대신 하며 뒤따라 걸었다. 걔의 미안이 무엇에 대한 미안인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위기는 대충 넘겼는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딱히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음에도 이상하게 빈속 한 켠이 구린.

 

몇 개월 전부터다. 알고 싶지 않아서 모르는 척해버렸더니 정말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스가와라는 이후 나를 평소처럼 대했고, 나도 걜 똑같이 대했다. 우리 걸음 사이에는 여전히 한 두 발자국의 공간이 넉넉히 남아있었다. 무언가 아주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에 미치미야를 덜컥 찾아가서는 애매하게 회피했던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보다 더 분명하게 하려는 것처럼 스가와라에게 돌아와서 말했다. 나 유이 받아줬어…… 펜을 쥐고 공책 위에 낙서하던 그 애가 아주 잠시 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오오, 하고는 어설픈 감탄사만 뱉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치미야하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서로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는 다른 단추들마저 흐지부지해졌다.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는 말만 아주 많이 남긴 채로 엉성한 관계를 띄워 보냈다. 미치미야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우리 이제 다시 친구지? 그랬다.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스가와라와 나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지 궁금해졌다. 사귀게 되었다는 얘긴 아주 자신 있게 털어놓았으면서 헤어졌다는 얘긴 걔한테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걔는 신경이 늘 곤두서있으니까 조잡한 변화들에 둔할 리가 없다. 그래도 걘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저만의 무언가를 분명하게 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나는 흐지부지 망쳐버렸지만. 걔는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집에 안 가?

너는 왜 그러고 있는데.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

너 먼저 가봐.

 

그게 누군지 묻는 게 창피하고 구차스러워서 나는 알았다고 하고 책가방을 싸서 나왔다. 혼자서 교정을 나오고, 교문을 벗어나고, 붉은 보도블록을 밟으면서, 걔 호리호리한 뒷모습 없이 탁 트인 시야를 널찍이 내다보면서, 그런 걸 묻는 게 왜 구차스러워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가 스가와라에게 불필요하게 감정소모를 하고 있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신하기 위해 아주 짧고 소용 없는 연애를 했는데, 그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마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스가와라는 복잡해져 갔다. 공책에 낙서를 하고 맛없는 급식을 군소리 없이 먹고 내 앞에 등을 구부정히 엎드린 채 짧은 선잠을 잤다. 걔가 복잡해져 가는 과정은 내가 한창 복잡했을 때와 같았다. 별일 없어 보였는데 목을 졸린 사람처럼 벅차 보였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시시때때로 전화를 했다.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래도 전화를 계속 했다. 슬쩍 꺼냈던 감정을 내가 서투른 회피로 쳐냈을 때보다도 더 힘겹게 어떠한 관계를, 이미 거의 끊어져가는 관계를 억지로 이어가려는 듯 걔는 온 정신을 거기에 쏟아냈다. 나는 기묘하게도 속고만 있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가.

또 기다릴 사람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이따 같이 가. 지금 밖에 또 푹푹 찐다.

 

나는 책가방을 팔뚝 아래 벴다. 스가와라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책가방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당겨 꺼냈다. 그러더니 교실을 나갔다. 나는 걸상에 덩그러니 매달린 걔의 책가방을 보다가 슬쩍 손을 넣어 필기공책을 꺼냈다. 번득한 글씨로 색까지 바꿔가며 필기한 흔적 밑 여백에는 낙서로 가득했다. 글자보다는 그림이 더 많은. 나는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왔다. 옆 반 훌쩍 열린 교실문으로 창가에 팔뚝을 괸 채 통화를 하는 걔가 있었다. 조용한 교실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걔 목소리와 뒤섞였다.

 

「내 나이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머지 않았는데요.

「뭘 머지 않았어. 어릴 때가 다 좋고 예쁘지, 누구든.

아저씬 내가 어리고 예뻐서 만나요?

……

어리고 예뻐요?

 

나는 등을 돌려 벽에 기대고 섰다. 걔한테 형도 아니고 아저씨면 얼마 즈음일까. 서른 초중반 정도 되려나. 걔는 부옇고 호리호리하지만, 딴딴하고, 투박하고, 얄밉기도 하고…… 그런 애가 예뻐 보일 나이면 그 즈음일 게다. 문득 털이 수렁수렁 달린 나이 든 남자의 넓적다리가 걔의 것과 맞물리는 상상을 했다. 아냐, 나는 고개를 털었다. 더러웠다. 문 너머에서 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걔 말들이 점점 수그러들어서 나중에는 목소리만 두런두런 남았다. 정체불명의 언어들을 뒤로하고, 나는 문득 맘 한 구석에 구린내가 나서 다시 교실로 돌아가버렸다.

 

몇 분 뒤에 스가와라는 교실로 돌아왔다. 걔는 곧장 책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지퍼를 잠그고, 가방을 메고서 내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이제 가자. 나는 책가방 위에 파묻고 있던 고갤 일으키고 주춤거리며 책가방을 따라 메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교실이 노르스름하고 건조했다. 나는 슬그머니 걔 뒤에 붙어 걸었다. 오늘은 침묵이 이전보다도 더 길었다. 멋쩍은 고갤 쳐들었다가 하늘이 엉망진창인 걸 보고 오늘도 걔가 보랏빛 속을 거닐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문득 비합리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치밀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스가와라가 내 앞에서 걷는 게 아니라 내가 걔 뒤에서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스가.

.

연애할 땐 또래보다 늙은 사람이 좀 좋을까?

……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거기서 멈춰 섰다. 스가와라는 몇 걸음을 더 가다가 돌아보았다. 무표정이었다. 걔가 상처를 받았는지 화가 났는지 알 수 없다. 스가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걔 붉은 입술에 핏기가 잠시 가시곤 다시 본연의 색을 되찾았다. 더욱 시뻘개진 입술이 어렵사리 열렸다.

 

예쁘다고 해주고…… 사랑한다고도 해주니까, 빈말이라도.

……

우리 같은 애들은 그런 거 낯간지러워서 잘 안 해.

 

걔는 자길 서럽게 만드는 소리에 매달렸다. 다시 등을 돌린다.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무슨 맘에선가, 걔 어깨를 잡고는 이상한 소릴 했다. 아냐, 우리 같은 애들도…… 맘만 먹음 해. 스가와라가 다시 고갤 돌려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답잖게 말을 더듬었다. 나도, 나도 그런 말쯤은 해. 무슨 맘에선가 그런 얘기들이 노랫말처럼 흘러나왔다. 걔는 아무 말 않고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조소도 미소도 아니고, 그냥 웃음이었다.

 

 

***

 

걔의 핸드폰에서 그 남자의 사진을 보았다. 그냥 뒤적이다 발견했다. 남자는 젊지만 어리지 않게 생겼다. 저번에 얼핏 들은 통화로 짐작했듯이, 걔가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졌다. 스가와라는 내 목소릴 좋아한다. 남자는 엇비슷하지만 나보다도 낮고 다정할 것이다. 괜하지 않은 농담들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아저씨치곤 괜찮잖아. 그래서 좋을까. 스가와라는 좋을까. 과연, 과연. 시시때때로 웃기만 하는 걔 맘을 내가 어찌 다 헤아리나.

 

그리고 스가와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웃고 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나를 비웃듯 그랬다. 빤한 거짓말에 속아주는 사람처럼 굴었다. 걔 무릎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졌다. 뭐가 미안하냐는 말이 되돌아올까 봐 그러지 못했다. 걔가 쉬워 보인 건 아니었는데 그저 미워 보였다. 많이 웃어서, 그만큼 많이 울 것 같았다. 남자는 걔한테 예쁘단 말도 해주고 사랑한단 말도 해줬을 거다. 그런 소리를 하루에 몇 번이고 들을 스가와라는 날이 갈수록 미워졌다. 꾸준한 운동으로 아플 일 없는 걔는 요즘 자주 다리가 풀렸다. 아랫배를 맞췄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더러워졌다. 더러운 게 걔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더럽다. 우리는 열아홉이다. 겨우 열아홉인데, 열아홉을 연기하면서, 같은 열아홉을 속이면서, 또한 열아홉의 날고기이기도 하고, 우리는……

 

요즘도 그 사람 만나?

아니, 바빠. ?

요즘 먼저 가라고 안 하길래.

 

스가와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더니 걔는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다. ? 물으니 혼자 자는 게 싫다고 했다. 그 말이 그리 유치하지는 않아서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나는 스가와라가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다, 짐작이다. 아는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틀림없이 틀렸다. 망상덩어리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뻔한 거짓말을 하는 어린애처럼 목이 탔다. 나는 공책에 낙서하는 스가와라의 등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내가 바닥에서 잘게.

네가 집 주인인데 침대에서 자야지.

 

걔는 내가 빌려준 옷을 입고서 바닥에 깐 이불 위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침대 곁을 서성거리다가 불 끌게, 하고서 스위치를 내리고는 자리로 꾸물꾸물 돌아와 베개에 뺨을 묻었다. 스가와라는 새우잠을 잤다. 몸을 웅크리고서 뒤척였다. 바닥이 딱딱한가 싶어서 자릴 바꾸자고 슬그머니 말을 꺼냈지만 걔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뒤척이느라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푸르스름한 등이 훤히 드러났다. 며칠 새 버석 말라서 등뼈가 도드라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남자는 근래에 저 등을 꽤 많이 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저 얼굴이 웃는지 우는지도 모르는 채 입버릇처럼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후략한다면 나와 다를 건 없다. 나도 걔의 등을 질리도록 봐오지 않았는가. 나는 불쾌한 공통점을 찾아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 등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손끝이 어깨에 닿으면 막 눈을 감으려던 스가와라가 등을 돌릴 것이다. 내가 그 위로 쏟아지고, 우리는 어쩌면, 아주 적나라하게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걔는 요즘 몸이 헐겁고 나는 꽉 짜여있으니까…… 우리는 아마 서로의 다리가 아주 잘 맞을 것이다. 예쁘다는 말을 꺼내기도 어색한 그 서툶으로 아마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손을 거두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아직.

있잖아.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어깨를 움켜쥐지도 않았는데 스가와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피로함에 유약하게 충혈된 눈이 내 얼굴을 멍청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시 호흡을 떼었다.

 

그 남자랑 만나지 마.

…….

걱정 돼.

 

저번처럼 더듬거리는 투로 바보처럼 물었음에도 이번엔 스가와라가 웃지 않았다. 대신 그때 내 것과 비슷한 투로 이랬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다, 진짜. 걔가 도로 등을 돌렸다.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문득 코끝이 뻐근해지고 뱃속에 불이 났다. 말하고 싶다, 말해버리고 싶다. 믿어줄까. 끝내 믿어줄까. 너무 많은 거짓말들을 해왔는데, 나에게. 내 자신에게. 어쩌면 이건 진심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남자가 지나치게 근사해서, 혹은 걔가 너무 지쳐 보여서, 우린 꽤 알아왔으니까 어떻게든 더 알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충동적으로 든 생각일 수도 있는데. 빼곡한 거짓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알지. 어디부터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무슨 수로 잘라낼 것이며 네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며……

 

숙고의 열차가 머리 한 바퀴를 빙 두르는 와중, 걔가 불현듯 도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줄곧 눈을 부릅뜬 채 네 등을 응시하던 터라, 우리는 어둠 속에서 시선이 얽혔다. 아무 말도 않았으나 시야가 붉어지고 있음을 짐작했다. 스가와라의 호흡이 지나치게 규칙적이었다. 나는 아주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말해야 한다고, 말해버려야 한다고. 좋아한다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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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한 물살이 자그마한 몸을 집어 삼켰다. 잇세이는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지만, 얼마 전 어선을 제 집 드나들 듯 수십 년 운항해왔다는 중년의 남성도 꼴깍 삼킨 파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잇세이는 몇 번이고 수면 위아래를 오갔다. 몸이 붕 뜨다가도 숨 한 번 제대로 들이쉬기 이전에 물 밑으로 푹 꺼지곤 했다. 마침내 고래등처럼 거대한 파도가 제 위를 덮치고, 허우적거리던 팔까지 수심 깊은 곳으로 내리눌렀을 때 잇세이는 후회했다. 잃어버리질 말걸. 신발 얘기였다.

 

그의 종자는 새 신 한 켤레를 가지고 오기 위해 부리나케 저택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말릴 것을. 맨발로도 돌아갈 수 있다고. 부쩍 길어진 몸으로 업혀가는 것이 창피해서 신 한 짝을 신은 채 바윗돌 위에 앉아있었던 것이 이렇게 큰 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숨을 황급히 참았던 것이 한계가 오자 도로 역류하며 바닷물이 코로 들이닥쳤다. 기관지가 틀어 막히는 기분에 잇세이는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내 두 팔과 다리에 힘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구를 조이던 바닷물이 걷어지고 부연 김이 번졌다. 그럴 리는 없으니, 이는 필시 환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마저도 흐려졌을 때, 잇세이는 저 스스로도 곱씹을 수 없는 의미불명한 의식의 타래를 늘어놓고 있었다. 점점 머리가 시꺼매졌다.

 

그때, 무언가가 잇세이의 허리를 감았다. 그렇게 다정하지 않은 감촉이었기 때문에 멀어져 가던 의식이 되돌아오기에는 충분했다. 잇세이는 그 존재를 확인하기도 전에 엄청난 힘에 의해 제 몸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허릴 단단히 휘감은 무언가는 점점 온몸을 움켜쥐는 수압을 뚫어내고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머리가 퍼득 차가워졌을 때, 잇세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불현듯 자신이 공중에 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다리가 버둥댔고 위액이 뒤집혀 나올 듯이 배가 울렁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신선한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잇세이의 몸은 파도와 빗방울로 부드러워진 모래사장에 곤두박질쳐졌다. 그 후엔 암전이었다.

 

사람의 몸은 참 따뜻한 것 같아.

……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그래서 유약한 것일지도 몰라. 잇세이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뒤집힌 시야엔 물먹은 모래와 얇게 저민 크레페 같은 파도가 있었다. 바다를 순식간에 불어낸 폭풍우는 가시고 없었다. 온몸이 축 늘어져 힘이 빠진 탓에, 잇세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선 끝에는 자잘한 파도를 밟고 선 소년이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바닷바람이 뺨을 비볐다. 소년은 뒷짐을 지고 비구름이 가신 붉은 수평선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 무릎을 굽혀 소라 껍데기를 고르며 잠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불을 두려워하는 물은 없어도 물을 두려워하는 불은 있는 것처럼…… 따뜻한 피를 가진 생명들이란. 잇세이는 그의 말끝에 복부가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물에 함뿍 늘어진 옷단을 걷어 올리자 배와 허리를 둘러싼 시뻘건 자국이 드러났다.

 

어떻게 된 거야? 잇세이가 운을 뗐다. 그러자 소년이 등을 돌렸다. 역광으로 시꺼매진 인영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 잇세이는 제 이름을 부르짖는 소릴 들었다. 고개를 돌릴 힘은 없었지만 종자가 분명했다. 그는 새 신을 가지러 갔다가 창 밖으로 급격히 몰아치는 폭풍우에 기겁하여 바람을 뚫고 온 모양이었다. 한탄을 금치 못하며 잇세이의 젖은 몸을 비단으로 감싸는 그의 머리카락도 축축히 젖어있었다. 잇세이는 하는 수 없이 종자의 등에 바투 업혔다. 종자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고 돌아본 해안가에는 소년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밤, 그는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 때문에 시종들 다섯에게 물수건과 해열제로 시중을 받으며 제 몸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던 존재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막 졸음이 쏟아지기 직전, 잇세이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바다뱀과도 같았다고. 깊은 밤의 꿈 속에서는 바다뱀의 비늘이 나왔다. 바다는 서슬 퍼렇게 파도 쳤고, 푸르스름한 보름달이 선뜩하게 떠있었다. 소년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소년의 벗은 팔뚝으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뱀비늘이 보였다. 그것을 귀히 여긴 잇세이가 팔을 뻗었다. 손끝이 피부에 닿았을 때, 잇세이는 소스라치게 차갑다고 느꼈다. 그렇지, 차가울 수밖에. 뱀은 말이지…… 뱀은.

 

머리카락, 만져볼래?

……이상한데.

뭐가?

머리카락. 비늘 같아서.

있지, 넌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야.

 

잇세이는 소년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담갔다. 바람이 묻어나는 올에 올마다 매끄러운 어류 혹은 파충류의 성질을 닮은 은빛이 묻어 나왔다. 잇세이는 소년을 뱀이라고 불렀다. 뱀은 늘 해안가에 있었다. 폭풍우가 바다를 휩쓴 이후로 잇세이는 그 근처에서 서성거릴 수가 없었다. 대신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에 슬그머니 바다로 나왔다. 심지에 가까운 불꽃처럼 푸르스름한 밤에 뱀의 상아색 피부가, 너울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번쩍였다. 잇세이는 뱀의 몸이 아주 차갑고 부드러운 것을 깨달았다. 여름밤에 맘을 놓은 잇세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폭풍우는 바다뱀이 일으키는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나. 바다뱀이 노해서, 달래주려 아이들을 갖다 바친다고.

 

그래? 뱀은 눈썹을 치켜 떴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지그시 잇세이의 어깨를 쥐었다. 바다뱀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아? 문득 뱀이 묻는다. 잇세이가 알 길이 없다. 뱀의 상아색 껍질이 달빛을 받아 멍울처럼 얼룩졌다. 제물로 바다에 던져진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뱀이 다시 물었다. 잇세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네모나게 뜬 눈을 한동안 끔벅였다. 뱀이 매끄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수많은 바다뱀들을 만났어. 뭍에서 함께 지내다가도 늘 바다로 던져졌어.

……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했던 적이 있어.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바다로 던져질 때, 이름도 함께 던져지거든.

 

넌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야…… 뱀이 중얼거리며 잇세이의 목에 입을 맞췄다. 오늘 내가 한 얘기들은 다 잊어줄 수 있지? 잇세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뱀의 가느다란 손이 잇세이의 이마에서 멎었다. 지문 없는 반들반들한 손끝이 그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불현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멍해졌다. 잇세이는 눈꺼풀을 닫고 제 앞에 무릎을 꿇어 앉은 뱀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희미하고 멀다. 뱀의 목소리가 겹겹이 귓전을 울린다.

 

, 바다뱀을 기다리고 있어.

 

내 이름은…… 뱀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잇세이는 눈을 번뜩 떴다. 수년에 걸쳐 자란 뼈마디가 그물처럼 침상을 덮고 있다. 곧 정박합니다! 창 밖으로 선원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잇세이는 멍하니 누워 판자로 덮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기묘한 나라에 계신 친애하는 여왕님께.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머잖아 통신원이 진상품을 싣고 당도할 예정입니다. 항해를 위협하는 폭풍우가 물러가기를 기도해주십시오. 그때까지 대지에 달의 기운이 만연하기를 빌며, 왕국과 고귀한 피의 안녕을 빕니다.

 

불침번을 서는 경호병들과 야간 항해를 맡은 선장 세 명만이 눈을 뜨고 깨어있는 야심한 새벽, 디아나 4호의 짐칸에서 모두를 들썩이게 한 소동이 벌어졌다. 진상품이 죄 실려있는 칸이었다. 경호병들은 상황을 파악한 후, 닻을 잠시 내려 정차했다. 책임자 마츠카와 잇세이는 침상에 들이닥친 경호병의 보고를 받고 실크로 된 내의 위에 급히 옷걸이에 걸려있던 남색 코트만 잡아채어 걸쳤다. 서두르는 걸음으로 짐칸에 도착했을 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원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을 의사가 가운만 두른 채 먼저 와있었다. 그도 헐레벌떡 내달려왔는지 코끝에 걸쳐진 금테안경이 비뚤어져있었는데, 적잖은 당혹감에 손을 떠는지라 누군가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잇세이는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문제의 진상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갑판이 구불구불하게 젖어있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 뜨고 제 발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혀를 깨문 것이다.

 

자결을 시도한 이 진상품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열다섯, 열일곱 배기의 남아들 틈바구니에서는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웠지만 그들만큼이나 훌륭한 살결과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교류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잇세이가 성인식을 치르고 열여덟에 입궐하기 오 년 전부터 물 흐르듯 시작된 것이다. 대개 서역에서는 향수나 보석을 비롯한 사치품과 함께 기술을 전했고, 본국에서는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어린 소년들을 답례로 보냈다. 바다로 갈라진 그곳에서는 밀빛 피부를 가진 동양 소년들을 길조로 여겼다.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낯선 땅에 팔려가는 소년들은 종종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탈출을 감행하려 한 경우도 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그 조그만 몸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종종 이런 행위에 대한 처벌은 내구적으로 이루어졌다. 진상품에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채찍질 대신 토사제를 먹여 구토를 하게 만들거나,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 목을 따 겁을 주곤 했다. 그러면 며칠 내에 잠잠해졌다. 그러니 이처럼 자결을 감행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었다.

 

진상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일단 찬 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벤지다민을 발랐소. 누가 포도주 한 잔만 더 따라주면 안 되겠소?

특별감시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땅한 독방은 없지만.

 

제가 하겠습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서역 통신원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눈을 내리깔아 입에 붉게 젖은 손수건을 물고 온몸으로 떠는 청년을 응시했다. 물 밖으로 나와 갑판에 내던져진 생선이 팔딱거리듯이 부릅뜬 청년의 눈깔이 생생했다. 죽긴 글렀군, 생각하던 차에 통신원이 손짓을 했다. 경호병 몇 명이 밧줄을 끌어와 청년의 사지를 묶었다. 잇세이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등 뒤에서 수건으로 틀어 막힌 호흡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제정신을 차린 의원은 경호병을 통해 그의 방에 따뜻한 물 한 대야와 수건, 독한 버번위스키 한 병을 밀어 넣었다. 선체 상부가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짐칸에서 갑판 일층 쪽으로 올라온 청년이 끊임없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잇새로 거품 끓는 것이 보였지만 잇세이는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수틀리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혈이 우선이니까 가만히 있어.

……

 

몇 번 묶인 몸을 뒤틀던 청년은 이내 힘이 빠졌는지 잠잠해졌다. 잇세이는 위스키 한 잔을 몇 모금 끝에 비우고 창을 열었다. 밤바다의 무거운 냄새가 났다. 서슬 퍼런 달이 수면 위에 흐늘흐늘 흐려졌다. 그는 창을 뚫은 벽에 등허리를 붙이고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해초처럼 해먹에 널려 몇 번을 씨근덕댔다. 꼼꼼히 응시하고 있으니 어둠에 잠긴 뒷머리가 희미하게 은회색이었다. 머리칼이 각각 다른 하늘의 빛으로 넘실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잇세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청년도 줄곧 바다에 있었다. 바다는 수평선으로 천계와 맞닿아있어 하늘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몇 번이고 들어왔다. 청년의 정수리는 햇살 부서지는 아침이면 회백색으로 창백해졌고, 저녁 뱃고동이 울릴 즈음엔 분 바른 뺨처럼 붉어졌다. 잇세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청년의 머리카락엔 월광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집을 낸 듯 반으로 갈라진 달이 바닷물에 몸을 담가 그 음영이 흐드러지게 푸르렀던 밤이었다. 그날 청년이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느 정도 피가 멎었을 때, 잇세이는 청년의 입에 쑤셔 박힌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그것으로 위스키가 담겼던 잔을 닦았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 잇세이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힘껏 집어 넣어 일으켰다. 그의 늘어진 몸뚱일 받치고 있었던 해먹이 발끝에 얽혀 출렁거렸다. 잇세이는 그를 침상에 모로 눕히고 둥그런 두를 제 넓적다리로 받았다. 그리고선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야맹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조그만 창 안으로 빛이 젖었다. 죽은 사람의 호흡 같은 바람소리에서, 잇세이는 며칠 뒤 몰려올 태풍의 조짐을 발견했다. 사흘간은 폭우가 쏟아질 수도 있겠군. 일주일은 머무르다 가야겠어. 그 순간, 잇세이는 바람의 반이 청년의 허파에 실려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위스키 한 잔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코우시. 그러자 코우시라고 불린 남자가 찢어진 혀로 작게 웃었다.

 

진상품은 육체에 흠집이 나면 가치가 없어져. 알아. 그래서 혹한 처벌도 가하지 않지만, 대신 한 번 상흔을 입으면 바다로 던져지지. 그것도 알아.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잇세이는 청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저처럼 곧잘 해변과 부두에 있었다는 기억만을 할 뿐이었다. 당시 잇세이는 종자를 한 명 데리고 다녔고, 인접국에서 유행하던 장식의 술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코우시는 몇 번의 눈길로 그가 상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법 영리하던 잇세이는 먼저 입을 열어 물꼬를 트지 않았지만, 그 덕에 코우시와 헤어지며 겨우 이름만을 알게 되었다. 헤어지던 날은 잇세이에게 있어 크게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시퍼런 달, 바다뱀, 이름. 제 이름을 가르쳐준 코우시는 바다뱀을 기다린다는 말을 뒤로 해안가에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여왕은 동양 소년들을 귀히 여겨. 악질은 없을 거야.

퍽이나.

매일 비단을 걸치고 호사를 누릴 텐데.

비단을 입혀놓고 벗겨 희롱하겠지.

 

잇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곧 폭풍우가 올 것 같아, 바람소리를 듣자 하니. 말을 돌리자 코우시가 무릎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바다뱀 소리야. 그는 폭풍우가 사나흘 내로 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심해를 성대 삼아 끌어올린 파도소리가 스산했다. 마츠카와, 물을 좀 줘. 코우시가 타는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잇세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번위스키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위스키를 따랐다. 코우시의 뒷머리를 받치고 찰랑거리는 알코올을 넘겼다. 그는 찢어진 혀를 쥐어뜯는 독한 자극에 손끝을 퍼들퍼들 떨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제물이었지. 코우시가 살아있는 심장처럼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어.

 

시작은 무명의 소년이었다. 도호쿠에 석 달이 넘게 지속되던 폭풍우는 집채만한 파도를 일으켜 소년 한 명을 꿀꺽 삼킨 뒤로 감쪽같이 멎었다. 그 후로 풍향의 충돌로 폭풍우가 일어 어선이 바다에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하고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의장은 장마와 풍향변화로 바다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유월에 출생한 남아들 중에서 재물이 될 아이를 골랐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바다 근처의 신제에서 지내며, 제물이 될 때까지 사제로부터 수련을 받으며 살다 바쳐진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잇세이의 손에 제 손을 맞추었다. 갑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야. 모든 걸 바로잡자. 잇세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코우시의 몸은 미끈하다 못해 미끌미끌했다. 뱀의 비늘과도 같았다. 잇세이는 지문에 냉기를 남기는 그의 몸을 더듬으며 제 체온이 생각보다도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으레 타인을 보며 스스로를 알게 되는 법이다. 코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야윈 다리로 잇세이의 넓적다릴 휘감았다. 잇세이의 더운 몸뚱이에 밀착할수록 제 혈관이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을 느꼈다. 뚫린 창으로 절절한 앓음이 새어나갈까 걱정이 되었지만, 더 가열차게 울부짖는 파도 덕분에 부르르 떨리는 한숨까지 완연히 묻혔다. 잇세이가 목덜미를 핥는 동안 코우시는 반쯤 남은 버번위스키에 손가락을 담가 휘저었다. 마츠카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잊지마. 코우시가 그렇게 말한 순간, 잇세이는 짐칸에 갇힌 수십 명의 어린 소년들이 떠올랐다. 그는 동조해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이었다. 잠시 선잠에 들었던 잇세이가 눈을 떴을 땐 조그만 선실 내부를 푸르른 달빛이 빈틈 없이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에 누워있던 코우시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창 밖으로 괴성과도 같은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잇세이는 고개를 꺾어 창틀을 붙잡았다. 바닷물에 젖은 듯 시퍼런 달 주변으로 둥그스름한 구름이 모여있었다. 광이 끓듯 부글거리던 수면 위에서 이윽고 거대한 몸을 자랑하는 뱀 두 마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들은 달을 에둘러 허리를 휘었다. 막 심해 밑에서 솟아나온 두 짐승의 비늘 위에 눈을 흐리게 하는 월광이 섬뜩였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부서진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었다. 더 이상 울음과도 같은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면은 잠잠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

폐하껜 어떻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다음날, 잇세이는 통신원에게 자결미수의 진상품을 바다에 던져버렸노라고 설명했다. 머리를 탁상에 박아 다시 한 번 자결을 시도했고, 이마가 찢어져 흠집이 났으므로 더 손볼 수 없어 바다에 버렸노라. 그러자 통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새에 일어난 일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잇세이는 파이프에 토바코를 넣고 입에 물었다. 그는 선상으로 나와 난간을 쥐었다. 요 며칠 전과는 달리 하늘이 맑고 파도가 자잘했다. 그는 한참 사방이 텅 빈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쉬이 입에 담았던 것. 청년 말이다. 청년은……

 

청년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fin.







쿠로오.

 

이제 여긴 형편 없이 작아졌어. 모두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며칠 전에 먼지 쌓인 창고 선반을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얘길 들었거든. 선체에 사람을 최대한 많이 태워야 하기 때문이겠지. 우드 씨가 그랬는걸. 우드 씨 기억하지? 부선장 말이야, 이젠 선장이 되었는데…… 여하튼 그 사람은 모두가 되도록이면 미련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 그래야 선체에 실을 물건이 적어질 테니까. 나는 고민하다가 앨범 하나랑 게임기를 챙기기로 했어. 그거 좀 가지고 간다고 엔진이 딸리진 않을 거 아냐. 청소는 치우는 재미가 아니라 뭔갈 발견하는 재미로 하는 거지. 앨범도 챙기다가 뒤지게 되었어. 중간중간에, 네가 써준 편지가 끼워져 있어. 너 열일곱 되고 나선 별로 써주진 않았지만…… 그 전의 것들 말야. 이것저것 헤집어 보다 보니 네가 사진을 찍을 때 자주 취하던 포즈, 혹은 구태여 사용하는 단어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그때마다 네가 어릴 적부터 내게 겁을 줬던 게 생각나. 우주를 떠돌다 보면, 소행성과 만날지도 몰라.

 

인류가 비슷한 걱정을 했었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어떡하나, 하는 거. 그런데 그 문제가 피부로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우린 여길 떠날 준비를 하게 되어버렸어. 내가 합류한 게 칠 년 전, 너는 그 전부터 있었으니 우리가 통틀어 아는 이별의 역사는 십 년이 훨씬 넘어. 보금자리로부터의 안녕. 조금 슬퍼도,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면 말이야……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 별에도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우리가 떠나면 숨쉬기가 한층 더 수월해지겠지. 좋아지면 더 좋아졌지 결코 악화는 없어. 결국 이 모든 건 예정되어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떠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건가 싶어. 그렇지 않았으면 변할 것도 없었겠지. 이 별의 탄생에도 종말에도 인간은 없으니까.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단 건 우리 사정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적이 있지. 흙과 흙 사이에 낀 어중간한 존재들. 우리 근본은 유목민이고 유한이기에 그 어디에도 영속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너는 나보다 좀 더 근성 있는 인간이었지. 나는 눈앞의 것들이 중요했고. 모두 더 큰 목표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할 줄 한다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작은 게 더 소중할 수도 있잖아. 네 의견에 반대하는 건 아니야. 말했잖아, 악화는 없다고. 네가 보내준 데이터와 위성 사진 덕에 우린 어느 정도 탄탄한 인포를 완성했어. 이제 네가 전해준 그 새로운 별로 가려고 해. 거기 네가 있을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우드 씨가 네 흔적은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런 말 솔직히 위로 안 되는 거 너도 알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와 우주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비슷한 것 같아. 차라리 그 둘은 존재보다는 속성에 가깝지. 지금까지만 해도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잖아. 이를 테면 사후세계와 명왕성 같은 거. 요즘은 분주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 무언가 알아내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건 인간으로서 다른 존재들보다 월등하게 가지는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되려 일차원적인 생존과 연관되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무지와 암흑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발버둥이려나. 그런 걸 좀 더 근사하게 포장하면 사람들이 주장하고 나서는 지적 호기심이니 뭐니 하는 게 되겠지. 죽음도 결국 잘 알지 못해 두려운 거라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걸 두려워하며 사는 거야. 쿠로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너 없이 홀로 남겨지는 걸 많이 무서워했어. 역시,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러니까, 알지 못해서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그런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지. 나는 너 없이 네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챙기고 있으니까. 네 부재 속에서 나는 서툴지만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고, 예전에 상상하던 것만큼 어렵고 비참한 일이 아니라고도 느껴. 그런데도 여전히 선뜩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맨등보다는 복부로, 뒷목보다는 가슴으로, 얼음 위에 몸을 뒤집어 누운 듯 둥그런 한기가 모이는 때가 종종 있어. 칠 년. 네가 떠나고 내가 네 자릴 대신했지. 칠 년이면 적응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가끔은……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쿠로오.

 

네가 보내준 데이터에 의하면 신성新星은 하루가 약 18시간. 바이오리듬을 제대로 바꿔야겠지. 삼시세끼란 말도 사라질 거야. 아침과 점심을 먹으면 당일의 활동량은 모두 충족할 수 있을 테니까. 블랙홀 너머에 있기 때문에 활주로를 사선으로 잡고 연료를 상당 보류해두어야 할 거야. 그러니까 하루가 약 18시간이라고 해도 그것은 태엽에 태엽을 이어 조작된 기계에 의거한 시간에 불과하지. 엄청난 왜곡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시간을 잡아먹는 별이라고 해도 무관할 거야. 그곳에서의 한 시간은 아마도, 지구에서의 몇 십 년. 지구를 몇 십 년 후로 당겨 놓는다고. 더 이상 우린 이 별에 머물지 않을 테니 상관없는 것일까. 쿠로오, 이것 봐. 우린 여길 떠나기 직전까지도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살았어.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왜소해지고, 작아진 만큼 시간에 끌려 다녔지. 그게 일상이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어. 시간이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대단한 시간도 어마무시한 중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야. 18시간이 24시간의 몇 천 배라는 게 말이 돼? 그런데 정말로, 말이 된단 말이야. 시간이 마구 휘어지기도 하고 캐러멜처럼 쭉 늘어나기도 하고 반대로 짓눌린 스프링처럼 짤막해지기도 하고. 시간이 사람을 마구 끌고 간다고 우린 여태까지 믿어왔는데, 알고 보니 시간도 더 엄청난 물질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끌려가는 이의 뒷다리에 매달려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그렇게 생각해보면,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끌려가기만 하고 있어. 앞을 보고 무작정 질주하고 돌진하는 것들 중 하나야. 시간이 들쑥날쑥 앞당겨져서 엉망이 되어버린 건 여러 번 봤지, 꼭 네가 전해준 별이 아니더라도. 그런 별에 몇 시간 머물다 지구로 돌아오면 이 별에서는 이미 몇 십 년이 흐른 후일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시간이든 중력이든 뭐든…… 늘 상승구조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지만 하향을 그리는 건 본 적이 없거든. 넌 본 적 있어? 시간을 과거로 끄는 별을. 지구를 몇 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별을 본 적이 있느냔 말이야.

 

우리는 왜 이미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까. 이미 과거가 된 사람들을 우리는 대체 왜. 시간도 거스를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중력을, 사랑은 어떻게 해서 거스르는 걸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을 허물면서 말이야.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도 사랑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없을 거야. 여태 많은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것만큼은…… 그것이 우리 안에 내재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네 부재에 적응했지만, 부재를 인정했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네가 그리워. 엔진 가동되는 냄새가 나. 미끌미끌한 점성질의 기름, 숨구멍을 죄 조일 것 같은 그런 냄새. , 그 시간도 중력도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이 여전히 흔적으로서 남은 과거에 현존하지.

 

내가 나로부터 팽팽해지고 있어. 줄다리기를 하듯이 양끝으로…… 내 몸과 마음이 점점 멀어져. 이제 차차 여길 벗어날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

 

쿠로오.

 

우주를 떠돌다 보면, 소행성과 만날지도 몰라. 브레이크를 해제하고 엔진을 가동했을 때 선체가 와르르 무너지듯 떨렸어. 소행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더라고.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떠는 걸까, 아니면 떨리고 있는 것인가, 구분할 수도 없었지. 나는 안전벨트를 삼단으로 차고 그 속에 앨범과 게임기까지 구겨 넣었기 때문에 몸집의 두 배가 부풀어있었어. 벨트가 끊어지지 않는 게 다행이구나, 하고 우드 씨가 출발하기 전에 투덜거렸던 거 같아. 여하튼 궤도를 벗어날 때 엄청난 가속력이 붙어 선체가 180도로 뒤집혔어. 재빨리 소진된 엔진을 해제했지. 우드 씨는 조종석에 앉기 전에 웬 시꺼먼 초음파 사진 한 장에 입을 맞추면서 사랑한다하고 속삭였어. 우드 씨의 딸이야. 난산이라 태어나고 세 시간 뒤에 죽었다더라. 그러니까, 딸을 지구에 묻어두고 온 거지. 나는 앨범을 열어 네 사진에 입맞출까 하다가 징그러워서 그냥 관뒀어.

 

너는 소행성을 만났을까. 너는 어디일까. 죽은 걸까. 이 드넓은 우주에 있다 보면 말이지, 결국 죽음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돼. 그래서 너는 틀림없이 있다, 여기 어딘가에. 그런 믿음도 갖게 되지. 우드 씨는 망상이고 착각이라고 언질 줬지만 설득력 없어. 그 사람, 떠나기 전에 죽은 딸의 사진에 입을 맞췄잖아. 죽은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냉랭한 척해봤자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아. 그래서 너는 어디야. 엇갈릴 수도 있겠다. 여긴 벽도 바닥도 천장도 없이 사방으로 뻗은 곳이니까. 혹시 몰라? 새로운 별에 내가 도착했을 때, 넌 되려 예전으로 돌아간 지구에 느닷없이 발을 딛게 될지. 그럼 너는 아마 내게 편지를 쓰겠지.

 

안녕, 여긴 잊혀진 별 지구야. 여기 바다엔 네가 떠날 때 떨군 연료통이 침몰해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내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먹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네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그럼 나는 거기에 답장을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진 몰라도, 나는 거기에 있는 너를 그리워할 거야. 인류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별을 나는 추억하겠지. 추억이 기억과 다른 점은 바로 그런 것일 거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 언제든 현존할 수 있을 때…… 우린 잊고 싶은 기억들을 추억이라고 부르지 않아.

 

방금 머얼리서, 별 하나가 폭발하는 것을 보았어. 아주 먼 곳이었나 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창이 눈부시게 번쩍였을 뿐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드 씨는 수명을 다한 별일 거라고 그랬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저건 소행성을 만난 별이야. 그렇다면 그건 무슨 별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을 못 잡겠어. 우린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레이더의 사각지대에 있는 별들은 눈으로 절대 식별할 수가 없어. 그건 거대한 빛덩이였을 뿐이야. 지구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설마.

 

레이더의 센서가 점점 더 예민한 소릴 내고 있어. 가까워지고 있나 봐. 대신 커다란 관문 하날 거쳐야 하지. 우린 웜홀을 통해 선체를 무사히 빼돌릴 거야. 네가 전해준 별에 안전하게 도착하겠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살아왔으니까. 개화를 꿈꿀 거야, 사람들은. 과거의 보금자릴 잊고 그곳에서 터전을 가꾸겠다고 다짐할 거야. 나 역시 그렇게 할 것 같아. 네가 전해준 별이잖아. 다른 별도 아니고 네 흔적이 다다른 별. 그래도 가끔은 잊혀진 별이 그리울 것 같아. 우리들의 추억이 거기에 죄 묻혀있어. 이미, 혹은 언젠가 소행성을 만날 그 별. 부딪쳐 폭발하고 그 잔재만 조각조각 남아도 이제 상관없는 그 별. 거기에 너와 내가 있어. 이 순간에 멀찍이 소행성 하나가 몸을 굴리며 맹렬하게 달려가. 누군가의 추억이 묻혀있을 또 다른 별이 곧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창틀 대신 품 속의 앨범을 꽉 붙들고서, 우릴 지나는 소행성의 꼬리에다 대고 인사했어.

 

안녕, 잘 가.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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