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채만한 물살이 자그마한 몸을 집어 삼켰다. 잇세이는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지만, 얼마 전 어선을 제 집 드나들 듯 수십 년 운항해왔다는 중년의 남성도 꼴깍 삼킨 파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잇세이는 몇 번이고 수면 위아래를 오갔다. 몸이 붕 뜨다가도 숨 한 번 제대로 들이쉬기 이전에 물 밑으로 푹 꺼지곤 했다. 마침내 고래등처럼 거대한 파도가 제 위를 덮치고, 허우적거리던 팔까지 수심 깊은 곳으로 내리눌렀을 때 잇세이는 후회했다. 잃어버리질 말걸. 신발 얘기였다.
그의 종자는 새 신 한 켤레를 가지고 오기 위해 부리나케 저택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말릴 것을. 맨발로도 돌아갈 수 있다고. 부쩍 길어진 몸으로 업혀가는 것이 창피해서 신 한 짝을 신은 채 바윗돌 위에 앉아있었던 것이 이렇게 큰 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숨을 황급히 참았던 것이 한계가 오자 도로 역류하며 바닷물이 코로 들이닥쳤다. 기관지가 틀어 막히는 기분에 잇세이는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내 두 팔과 다리에 힘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구를 조이던 바닷물이 걷어지고 부연 김이 번졌다. 그럴 리는 없으니, 이는 필시 환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마저도 흐려졌을 때, 잇세이는 저 스스로도 곱씹을 수 없는 의미불명한 의식의 타래를 늘어놓고 있었다. 점점 머리가 시꺼매졌다.
그때, 무언가가 잇세이의 허리를 감았다. 그렇게 다정하지 않은 감촉이었기 때문에 멀어져 가던 의식이 되돌아오기에는 충분했다. 잇세이는 그 존재를 확인하기도 전에 엄청난 힘에 의해 제 몸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허릴 단단히 휘감은 무언가는 점점 온몸을 움켜쥐는 수압을 뚫어내고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머리가 퍼득 차가워졌을 때, 잇세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불현듯 자신이 공중에 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다리가 버둥댔고 위액이 뒤집혀 나올 듯이 배가 울렁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신선한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잇세이의 몸은 파도와 빗방울로 부드러워진 모래사장에 곤두박질쳐졌다. 그 후엔 암전이었다.
사람의 몸은 참 따뜻한 것 같아.
……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그래서 유약한 것일지도 몰라. 잇세이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뒤집힌 시야엔 물먹은 모래와 얇게 저민 크레페 같은 파도가 있었다. 바다를 순식간에 불어낸 폭풍우는 가시고 없었다. 온몸이 축 늘어져 힘이 빠진 탓에, 잇세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선 끝에는 자잘한 파도를 밟고 선 소년이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바닷바람이 뺨을 비볐다. 소년은 뒷짐을 지고 비구름이 가신 붉은 수평선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 무릎을 굽혀 소라 껍데기를 고르며 잠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불을 두려워하는 물은 없어도 물을 두려워하는 불은 있는 것처럼…… 따뜻한 피를 가진 생명들이란. 잇세이는 그의 말끝에 복부가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물에 함뿍 늘어진 옷단을 걷어 올리자 배와 허리를 둘러싼 시뻘건 자국이 드러났다.
어떻게 된 거야? 잇세이가 운을 뗐다. 그러자 소년이 등을 돌렸다. 역광으로 시꺼매진 인영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 잇세이는 제 이름을 부르짖는 소릴 들었다. 고개를 돌릴 힘은 없었지만 종자가 분명했다. 그는 새 신을 가지러 갔다가 창 밖으로 급격히 몰아치는 폭풍우에 기겁하여 바람을 뚫고 온 모양이었다. 한탄을 금치 못하며 잇세이의 젖은 몸을 비단으로 감싸는 그의 머리카락도 축축히 젖어있었다. 잇세이는 하는 수 없이 종자의 등에 바투 업혔다. 종자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고 돌아본 해안가에는 소년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밤, 그는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 때문에 시종들 다섯에게 물수건과 해열제로 시중을 받으며 제 몸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던 존재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막 졸음이 쏟아지기 직전, 잇세이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바다뱀과도 같았다고. 깊은 밤의 꿈 속에서는 바다뱀의 비늘이 나왔다. 바다는 서슬 퍼렇게 파도 쳤고, 푸르스름한 보름달이 선뜩하게 떠있었다. 소년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소년의 벗은 팔뚝으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뱀비늘이 보였다. 그것을 귀히 여긴 잇세이가 팔을 뻗었다. 손끝이 피부에 닿았을 때, 잇세이는 소스라치게 차갑다고 느꼈다. 그렇지, 차가울 수밖에. 뱀은 말이지…… 뱀은.
머리카락, 만져볼래?
……이상한데.
뭐가?
머리카락. 비늘 같아서.
있지, 넌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야.
잇세이는 소년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담갔다. 바람이 묻어나는 올에 올마다 매끄러운 어류 혹은 파충류의 성질을 닮은 은빛이 묻어 나왔다. 잇세이는 소년을 뱀이라고 불렀다. 뱀은 늘 해안가에 있었다. 폭풍우가 바다를 휩쓴 이후로 잇세이는 그 근처에서 서성거릴 수가 없었다. 대신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에 슬그머니 바다로 나왔다. 심지에 가까운 불꽃처럼 푸르스름한 밤에 뱀의 상아색 피부가, 너울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번쩍였다. 잇세이는 뱀의 몸이 아주 차갑고 부드러운 것을 깨달았다. 여름밤에 맘을 놓은 잇세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폭풍우는 바다뱀이 일으키는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나. 바다뱀이 노해서, 달래주려 아이들을 갖다 바친다고.
그래? 뱀은 눈썹을 치켜 떴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지그시 잇세이의 어깨를 쥐었다. 바다뱀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아? 문득 뱀이 묻는다. 잇세이가 알 길이 없다. 뱀의 상아색 껍질이 달빛을 받아 멍울처럼 얼룩졌다. 제물로 바다에 던져진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뱀이 다시 물었다. 잇세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네모나게 뜬 눈을 한동안 끔벅였다. 뱀이 매끄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수많은 바다뱀들을 만났어. 뭍에서 함께 지내다가도 늘 바다로 던져졌어.
……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했던 적이 있어.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바다로 던져질 때, 이름도 함께 던져지거든.
넌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야…… 뱀이 중얼거리며 잇세이의 목에 입을 맞췄다. 오늘 내가 한 얘기들은 다 잊어줄 수 있지? 잇세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뱀의 가느다란 손이 잇세이의 이마에서 멎었다. 지문 없는 반들반들한 손끝이 그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불현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멍해졌다. 잇세이는 눈꺼풀을 닫고 제 앞에 무릎을 꿇어 앉은 뱀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희미하고 멀다. 뱀의 목소리가 겹겹이 귓전을 울린다.
나, 바다뱀을 기다리고 있어.
내 이름은…… 뱀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잇세이는 눈을 번뜩 떴다. 수년에 걸쳐 자란 뼈마디가 그물처럼 침상을 덮고 있다. 곧 정박합니다! 창 밖으로 선원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잇세이는 멍하니 누워 판자로 덮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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