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은 어느 분야에서든 적당한 시간이라고, 보쿠토 코타로는 생각했다. 접때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휴직서를 냈던 야마모토 씨가 쾌차하고 회사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년. 할 줄 아는 영어라곤 간단한 인사말이 전부였던 사촌동생이 영국에 가더니 외국물 먹은 티를 내며 도쿄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도 일 년. 가려는 학교 허들 높지 않니? 주전 하려면 그거보단 키가 좀 더 커야 좋을 거야. 중교를 마칠 무렵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소릴 듣기가 무섭게 10cm 남짓 머리꼭지가 훌쩍 크는 데 걸렸던 시간도 일 년. 그러니 일 년이라는 것은 각양각색의 변화에 거의 공용적으로 적용되는 유통기한임이 틀림없다.
이를 테면 사랑에서도,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늘 불안하게 유동하는 마음을 정착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일 년. 정착했다 싶은 사랑이 변질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일 년 정도. 고민하고 갈등하고 숙고하며, 이별을 결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일 년. 마침내 이별을 선고 받았을 때 이별을 납득하기까지 대략 일 년. 여기서 납득은 종합적인 개념이다. 왜 헤어졌는지,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지, 상대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지, 그런 총체적인 의문들의 해답이 하나로 좁혀질 때 비로소 이별을 납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맞물린 톱니바퀴와도 같아 저 중 단 하나라도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납득은 유예된다. 이런 경우에는 가장 일반적인 유효기간인 일 년을 훌쩍 넘길 가능성이 있다. 이때부터 마음이 견디기 힘든 단내를 풍기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코타로는 다행히도 제게 연체는 없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쿠로오 테츠로는? 그걸 제가 어찌 아나. 테츠로의 마음이야 테츠로만 아는 것이다.
하지만 테츠로가 저를 까마득히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타로는 그것을 확신했다. 일 년이라는 유통기한은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 하루에도 몇 천 몇 만의 세포가 죽고 새로이 재생되며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지 않듯이, 그 기간 내에 벌어지는 것은 천천한 변화 그 자체였다. 아주 썩거나 아주 사라지지 않을 정도의 변화 말이다.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시간. 따라서 헤어진 지 일 년이 된 연인의 얼굴을 아주 또렷이 알아보거나, 혼잡한 인파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질척한 미련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적당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 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 동안 정리가 된 것이지 박살이 났다거나, 그래서 산산조각 흩어졌다거나 분해되었다거나 휘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암만 모른 척을 해도 여태 일 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쿠로오 테츠로를 좇는 데에 정성을 들여온 제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냔 말이다. 코타로는 목을 죈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렀다. 그의 이름을 간만에 들은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기에 자연스레 한 사람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귀에 익은, 정도가 아닌 귀에 살던 때는 일 년 전. 그러니 이제 귀에 희미한 것이 되려면 다른 일 년이 더 남은 셈이다.
보쿠토 씨는 어때요?
예?
쿠로오 씨 실물은 처음 보잖아요. 그렇죠? 국내공연은 팔 년만이니까.
뭐, 그렇죠……
코타로는 말끝을 흐지부지 늘어뜨리곤 잔에 반쯤 채워져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맞은편에 앉은 테츠로가 고개를 젖혀 웨이터를 불렀다. 머잖아 물병을 든 웨이터가 걸어와 텅 빈 코타로의 잔에 물을 다시 채워주었다. 저리 태연자약할 수도 있구나. 원래야 천연스러운 것은 테츠로의 특기였지마는. 그 깜냥이 아직 죽지 않아 일 년 전 헤어진 사람을 눈앞에 놓아두고 고기도 썰고 술도 마시고 팀장의 같잖은 농담까지 먹어 치우고, 보쿠토 씨는 한 잔 안 하세요? 제게 넉살 좋게 말문까지 터왔다. 코타로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결결이 손톱이 박혔다. 곧 축축해져 바지춤에 슬그머니 문질렀다. 손끝과 발끝에 힘이 바짝 들었으나, 이내 맥아리가 풀렸다. 일 년은 적당해도 너무 적당해서 문제야. 코타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이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팀장은 비어가는 테츠로의 잔을 습관적으로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지요.
쿠로오 테츠로는 스물둘에,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무용수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코타로와 함께 배구를 했었다. 테츠로가 무용단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뜻밖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전향이라고는 생각지를 않았다. 배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어디까지나 의욕을 태울 만한 취미에 불과했다. 테츠로는 진작 일 년 말미의 자율전공을 택했고, 처음 체교과에 들었던 코타로는 영 제 분야가 아니라며 고생을 해서 전과를 해야 했다. 몇 년 후에 무얼 하고 있을까. 막연했던 고민이 구체화되지는 못하고 불투명한 채로 앞당겨진 것이 전부였다. 무얼 할까. 무얼 해야 하지. 그 무렵에 테츠로는 학교 축제에 마련된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무용과 동기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가 해당과 교수에게 입단을 제의 받았다. 해외에서는 웬만해서 인지도가 높은 무용수들을 졸업시킨 교수라니, 그때부터 테츠로의 방향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타로가 그에게 고백을 했던 것은 수도권 갈라쇼에서 그의 데뷔무대이자 첫 국내무대가 있던 날의 어둔 밤. 유연한 몸이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라고. 배구를 하던 시절엔 잘 쓰지 않았던 근육의 움직임을 본 것,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몸짓을 본 것, 색다른 환희에 찬 얼굴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라고. 그 이전부터 너를 좋아해왔노라 털어놓았다. 테츠로는 커튼콜에서 받은 백장미 다발을 한아름 안은 채 눈을 찬찬히 끔벅였다. 머잖아 달을 가리운 구름이 걷히듯 희부옇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팔 년 전의 이야기.
보쿠토 씨는 택시 타고 들어가려고?
아뇨, 걸어서…… 집이 요 근처입니다.
잘됐네요. 쿠로오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내일모레 뵙시다.
노리오 씨도 살펴 들어가세요.
팔 년 전의 이야기. 다시 말하면, 유효기간이 지났어도 한참 지난 이야기. 더 이상 흐드러진 장미 다발이나, 우스꽝스럽게 버벅댄 고백이라든가, 희붓한 웃음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들은 죄 팔 년 전의 명의로 된 시간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테츠로의 말을 빌리자면 코타로는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을 제법 맵시 좋게 입고 있었고, 테츠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너 진짜 집이 이 근처야? 외투를 여미고 담배를 꺼내던 테츠로가 물었다. 코타로는 고개를 저었다. 헤어진 연인의 은퇴무대 기획 때문에 배급사 상부에서 독촉을 받아온 것이 벌써 몇 달째. 최근 일주일 동안은 밤잠을 설친 탓에 평소보다 축 늘어진 코타로는 편의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강장제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강장제는 계산대 옆에 붙은 소형 냉장고에 구비되어있었다. 테츠로가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것이 생각나 그 옆에 비스듬히 진열된 라이터에 먼저 눈이 갔다. 돌이켜보면 한창 연애를 했을 때도 테츠로가 담배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연애 끝에 조촐한 식을 올렸을 때도, 기분을 내자며 떠났던 프라하 여행에서도 그의 가방에서 담배 보루나 라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테츠로가 피우는 담배의 존재를, 그 상표와 브랜드와 디자인과 맛을 처음 알았던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외 공연이 있었던 당일 새벽에 (그러니까 일본 시간으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단독 보도된 기사를 통해서였다. 까만 코트에 잠기다시피 몸을 한껏 가리고 담배를 문 사진이 한 장, 그리고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낯선 남자와 얼굴이 닿아있는 사진이 한 장. 닿아있었던 것인지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보다 한참 거구였던 남자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중년의 신사였다. 테츠로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코타로는 있는 힘을 다해 오해의 여지들을 생각해보았다. 해외투어에서 생긴 인맥에 불과하고, 테츠로는 인상이 원체 어디서든 능수능란해 뵈는 구석이 있으니 아마도 남자가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담배를, 아마도 귓속말을 하려 고개를 구부리다 저런 야릇한 사진이, …… 연인의 귀국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코타로는 베개에 처박았던 고개를 번뜩 세웠다. 아니, 변명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지금 이 지랄을. 그는 테츠로가 집으로 돌아오면 스스로 해명해주기를 기대했으나, 테츠로는 아무 말도 않았다. 해외투어로 인한 출국이 잦아졌다. 도피일까. 집에 있는 시간이 한 달에 일주일은 될까 말까 한 와중 남자와 함께 찍히는 사진들은 점점 더 노골적인 태를 보였다.
코타로는 커다란 캐리어에 옷가지와 화장품과 잡동사니를 있는 대로 구겨 넣었다. 지퍼를 꾸역꾸역 닫고 현관 앞에 놓았다. 그리고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테츠로는,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 캐리어와 마주하게 되었다. 코타로는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 채로 중얼거렸다. 네가 나가. 그러자 한동안 마룻바닥에 정적이 끼었다. 쿠로오 테츠로는 제가 뺨을 올려 붙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취재진이 널린 해외에서 무방비하게 다닐 만큼 깡따구가 있는 놈이라면 눈곱만큼도 감사하지 않겠지만, 게다가 도쿄를 지키며 저를 기다리던 연인에게 일말의 면목도 배려도 의리도 없는 새끼라 어쩌면 되려 나더러 나가라고 역정을 낼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마음의 혓바닥이 거기까지 중얼댔을 때, 코타로는 둔탁한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테츠로가 캐리어를 집어 든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코타로는 한동안 넋을 놓고 굳게 닫혀버린 현관문을 응시했다. 이것이 일 년 전의 이야기. 코타로는 강장제를 계산대에 내밀며 지갑을 열었다. 점원이 바코드를 찍으려 강장제를 이리저리 돌리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다. 테츠로가 휘파람을 불며 진열대 가장 위쪽에 배치된 콘돔 상자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요즘은 러브모텔은 웬만한 호텔만하네.
……
그리고 코타로 군은 예전처럼 시끄럽지 않네요.
피곤해서 그런 거거든?
피곤한 놈이 두 번이나 싸?
두 번이나 쌀만한 몸이고 몸짓이고 목소리였는걸. 코타로는 눈을 껌벅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테츠로가 그 모습을 보고 붕어가 뻐끔거리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는 담배의 허리를 입에 물기 전에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두툼한 커튼을 젖히고 가부키초의 장난감처럼 오밀조밀한 야경을 내다보았다. 코타로는 베개 밑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꺼내어 보니 야마모토 씨의 문자였다. 막공 때 회식이 있으니 저녁 스케줄을 비워두라는 내용이었다. 코타로는 다시 핸드폰을 끄고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눈꺼풀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허릿짓을 하는 내내 테츠로의 이름 한 번 부르지 않았던 성대인데 마구 고함을 내지른 듯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너 막공이 언제냐.
언제였더라…… 돌아오는 주 목요일인가 그럴걸.
아, 그래.
그건 왜?
……
커튼콜 때 꽃다발이라도 주게?
스물두 송이, 당시 제 나이만큼 꽂힌 백장미 다발을 끌어안고,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다 마침내 누그러지게 웃던 남자애. 그 밤 까만 머리가 주홍빛 가로등에 붉디붉게 젖어가던 애. 코타로는 테츠로의 웃음기 어린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모로 돌아누웠다. 낯선 외제의 담배 향기를 맡았다. 수천 수만의 세포가 죽고 재생되는 날이 거듭되어 일 년 치가 축적되었다. 그 동안 테츠로는 하루에 두세 번의 공연을 소화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골초가 되어있었고, 보다 섹스에 능숙해졌으며, 영양가 없는 농담이 늘어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코타로의 시선이었다. 저는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이것은 테츠로가 말해줄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그가 세 손가락으로 뺨을 지그시 눌러오며 입을 열었다. 코타로 군은 말수가 줄어든 거 빼면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지. 그리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머잖아 불명하게 잦아들었으나.
코타로는 무언가 묻고 싶어졌다. 실은 일 년 전, 아니 훨씬 오래 전부터 테츠로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때는 합당하게 들렸을지 몰라도 지금은 뱉어놓기 부끄러운 질문들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들. 그리고 쓸데없는 체력소모는 제게만 불이익이라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착실하게 깨달아온 코타로는 어느 때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한 편인지 가려낼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입술을 닫았다. 침묵을 쌓았다. 그러자 테츠로가 인공적인 고요에 응해주었다. 코타로는 불현듯 등 뒤에 담배를 물고 앉은 이 남자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팔 년 전 가로등 밑의 그와 과연 같은 사람인가. 같다면 돌아갈 수 있는가…… 글쎄. 지금 이 순간에도 테츠로는 몇 초 이전의 테츠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걸. 그렇다면 제 앞에 새로이 나타난 쿠로오 테츠로를 어찌할 것인가. 코타로는 밤을 지새워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납득하자. 그 방법밖에는. 그리고 감히 짐작하건대, 이것은 다시 일 년이 걸릴 것이었다. 여태 그만하면 적당했으니까.
'commiss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니후타쿠니, 유유상종 (Kk2313님 커미션) (0) | 2017.03.18 |
---|---|
아카른, 아카류슈고赤龍しゅご 신사 (스카프님 커미션) (0) | 2017.02.26 |
오이스가, 앵콜요청금지 (Y님 커미션) (0) | 2017.01.18 |
카와세미, 평범한 후배와 특별한 선배 (리리아님 커미션) (0) | 2017.01.16 |
다이스가, 인간형人間形 (웰님 커미션) (0) | 2017.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