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채만한 물살이 자그마한 몸을 집어 삼켰다. 잇세이는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지만, 얼마 전 어선을 제 집 드나들 듯 수십 년 운항해왔다는 중년의 남성도 꼴깍 삼킨 파도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잇세이는 몇 번이고 수면 위아래를 오갔다. 몸이 붕 뜨다가도 숨 한 번 제대로 들이쉬기 이전에 물 밑으로 푹 꺼지곤 했다. 마침내 고래등처럼 거대한 파도가 제 위를 덮치고, 허우적거리던 팔까지 수심 깊은 곳으로 내리눌렀을 때 잇세이는 후회했다. 잃어버리질 말걸. 신발 얘기였다.

 

그의 종자는 새 신 한 켤레를 가지고 오기 위해 부리나케 저택으로 돌아갔을 터였다. 말릴 것을. 맨발로도 돌아갈 수 있다고. 부쩍 길어진 몸으로 업혀가는 것이 창피해서 신 한 짝을 신은 채 바윗돌 위에 앉아있었던 것이 이렇게 큰 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숨을 황급히 참았던 것이 한계가 오자 도로 역류하며 바닷물이 코로 들이닥쳤다. 기관지가 틀어 막히는 기분에 잇세이는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내 두 팔과 다리에 힘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구를 조이던 바닷물이 걷어지고 부연 김이 번졌다. 그럴 리는 없으니, 이는 필시 환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마저도 흐려졌을 때, 잇세이는 저 스스로도 곱씹을 수 없는 의미불명한 의식의 타래를 늘어놓고 있었다. 점점 머리가 시꺼매졌다.

 

그때, 무언가가 잇세이의 허리를 감았다. 그렇게 다정하지 않은 감촉이었기 때문에 멀어져 가던 의식이 되돌아오기에는 충분했다. 잇세이는 그 존재를 확인하기도 전에 엄청난 힘에 의해 제 몸이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허릴 단단히 휘감은 무언가는 점점 온몸을 움켜쥐는 수압을 뚫어내고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머리가 퍼득 차가워졌을 때, 잇세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불현듯 자신이 공중에 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다리가 버둥댔고 위액이 뒤집혀 나올 듯이 배가 울렁거렸다. 하지만 분명히 신선한 공기가 코와 입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에 잇세이의 몸은 파도와 빗방울로 부드러워진 모래사장에 곤두박질쳐졌다. 그 후엔 암전이었다.

 

사람의 몸은 참 따뜻한 것 같아.

……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그래서 유약한 것일지도 몰라. 잇세이는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뒤집힌 시야엔 물먹은 모래와 얇게 저민 크레페 같은 파도가 있었다. 바다를 순식간에 불어낸 폭풍우는 가시고 없었다. 온몸이 축 늘어져 힘이 빠진 탓에, 잇세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선 끝에는 자잘한 파도를 밟고 선 소년이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바닷바람이 뺨을 비볐다. 소년은 뒷짐을 지고 비구름이 가신 붉은 수평선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곧 무릎을 굽혀 소라 껍데기를 고르며 잠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불을 두려워하는 물은 없어도 물을 두려워하는 불은 있는 것처럼…… 따뜻한 피를 가진 생명들이란. 잇세이는 그의 말끝에 복부가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물에 함뿍 늘어진 옷단을 걷어 올리자 배와 허리를 둘러싼 시뻘건 자국이 드러났다.

 

어떻게 된 거야? 잇세이가 운을 뗐다. 그러자 소년이 등을 돌렸다. 역광으로 시꺼매진 인영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 잇세이는 제 이름을 부르짖는 소릴 들었다. 고개를 돌릴 힘은 없었지만 종자가 분명했다. 그는 새 신을 가지러 갔다가 창 밖으로 급격히 몰아치는 폭풍우에 기겁하여 바람을 뚫고 온 모양이었다. 한탄을 금치 못하며 잇세이의 젖은 몸을 비단으로 감싸는 그의 머리카락도 축축히 젖어있었다. 잇세이는 하는 수 없이 종자의 등에 바투 업혔다. 종자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대고 돌아본 해안가에는 소년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밤, 그는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 때문에 시종들 다섯에게 물수건과 해열제로 시중을 받으며 제 몸을 낚아채듯 움켜쥐었던 존재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막 졸음이 쏟아지기 직전, 잇세이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바다뱀과도 같았다고. 깊은 밤의 꿈 속에서는 바다뱀의 비늘이 나왔다. 바다는 서슬 퍼렇게 파도 쳤고, 푸르스름한 보름달이 선뜩하게 떠있었다. 소년은 뒷짐을 지고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소년의 벗은 팔뚝으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뱀비늘이 보였다. 그것을 귀히 여긴 잇세이가 팔을 뻗었다. 손끝이 피부에 닿았을 때, 잇세이는 소스라치게 차갑다고 느꼈다. 그렇지, 차가울 수밖에. 뱀은 말이지…… 뱀은.

 

머리카락, 만져볼래?

……이상한데.

뭐가?

머리카락. 비늘 같아서.

있지, 넌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야.

 

잇세이는 소년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담갔다. 바람이 묻어나는 올에 올마다 매끄러운 어류 혹은 파충류의 성질을 닮은 은빛이 묻어 나왔다. 잇세이는 소년을 뱀이라고 불렀다. 뱀은 늘 해안가에 있었다. 폭풍우가 바다를 휩쓴 이후로 잇세이는 그 근처에서 서성거릴 수가 없었다. 대신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에 슬그머니 바다로 나왔다. 심지에 가까운 불꽃처럼 푸르스름한 밤에 뱀의 상아색 피부가, 너울거리는 은빛 머리칼이 번쩍였다. 잇세이는 뱀의 몸이 아주 차갑고 부드러운 것을 깨달았다. 여름밤에 맘을 놓은 잇세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폭풍우는 바다뱀이 일으키는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셨던 게 기억나. 바다뱀이 노해서, 달래주려 아이들을 갖다 바친다고.

 

그래? 뱀은 눈썹을 치켜 떴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지그시 잇세이의 어깨를 쥐었다. 바다뱀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아? 문득 뱀이 묻는다. 잇세이가 알 길이 없다. 뱀의 상아색 껍질이 달빛을 받아 멍울처럼 얼룩졌다. 제물로 바다에 던져진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뱀이 다시 물었다. 잇세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네모나게 뜬 눈을 한동안 끔벅였다. 뱀이 매끄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수많은 바다뱀들을 만났어. 뭍에서 함께 지내다가도 늘 바다로 던져졌어.

……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했던 적이 있어.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바다로 던져질 때, 이름도 함께 던져지거든.

 

넌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야…… 뱀이 중얼거리며 잇세이의 목에 입을 맞췄다. 오늘 내가 한 얘기들은 다 잊어줄 수 있지? 잇세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뱀의 가느다란 손이 잇세이의 이마에서 멎었다. 지문 없는 반들반들한 손끝이 그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불현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멍해졌다. 잇세이는 눈꺼풀을 닫고 제 앞에 무릎을 꿇어 앉은 뱀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희미하고 멀다. 뱀의 목소리가 겹겹이 귓전을 울린다.

 

, 바다뱀을 기다리고 있어.

 

내 이름은…… 뱀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잇세이는 눈을 번뜩 떴다. 수년에 걸쳐 자란 뼈마디가 그물처럼 침상을 덮고 있다. 곧 정박합니다! 창 밖으로 선원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잇세이는 멍하니 누워 판자로 덮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기묘한 나라에 계신 친애하는 여왕님께.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머잖아 통신원이 진상품을 싣고 당도할 예정입니다. 항해를 위협하는 폭풍우가 물러가기를 기도해주십시오. 그때까지 대지에 달의 기운이 만연하기를 빌며, 왕국과 고귀한 피의 안녕을 빕니다.

 

불침번을 서는 경호병들과 야간 항해를 맡은 선장 세 명만이 눈을 뜨고 깨어있는 야심한 새벽, 디아나 4호의 짐칸에서 모두를 들썩이게 한 소동이 벌어졌다. 진상품이 죄 실려있는 칸이었다. 경호병들은 상황을 파악한 후, 닻을 잠시 내려 정차했다. 책임자 마츠카와 잇세이는 침상에 들이닥친 경호병의 보고를 받고 실크로 된 내의 위에 급히 옷걸이에 걸려있던 남색 코트만 잡아채어 걸쳤다. 서두르는 걸음으로 짐칸에 도착했을 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원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을 의사가 가운만 두른 채 먼저 와있었다. 그도 헐레벌떡 내달려왔는지 코끝에 걸쳐진 금테안경이 비뚤어져있었는데, 적잖은 당혹감에 손을 떠는지라 누군가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잇세이는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문제의 진상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갑판이 구불구불하게 젖어있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 뜨고 제 발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혀를 깨문 것이다.

 

자결을 시도한 이 진상품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열다섯, 열일곱 배기의 남아들 틈바구니에서는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웠지만 그들만큼이나 훌륭한 살결과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교류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잇세이가 성인식을 치르고 열여덟에 입궐하기 오 년 전부터 물 흐르듯 시작된 것이다. 대개 서역에서는 향수나 보석을 비롯한 사치품과 함께 기술을 전했고, 본국에서는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어린 소년들을 답례로 보냈다. 바다로 갈라진 그곳에서는 밀빛 피부를 가진 동양 소년들을 길조로 여겼다.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낯선 땅에 팔려가는 소년들은 종종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탈출을 감행하려 한 경우도 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그 조그만 몸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종종 이런 행위에 대한 처벌은 내구적으로 이루어졌다. 진상품에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채찍질 대신 토사제를 먹여 구토를 하게 만들거나,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 목을 따 겁을 주곤 했다. 그러면 며칠 내에 잠잠해졌다. 그러니 이처럼 자결을 감행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었다.

 

진상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일단 찬 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벤지다민을 발랐소. 누가 포도주 한 잔만 더 따라주면 안 되겠소?

특별감시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땅한 독방은 없지만.

 

제가 하겠습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서역 통신원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눈을 내리깔아 입에 붉게 젖은 손수건을 물고 온몸으로 떠는 청년을 응시했다. 물 밖으로 나와 갑판에 내던져진 생선이 팔딱거리듯이 부릅뜬 청년의 눈깔이 생생했다. 죽긴 글렀군, 생각하던 차에 통신원이 손짓을 했다. 경호병 몇 명이 밧줄을 끌어와 청년의 사지를 묶었다. 잇세이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등 뒤에서 수건으로 틀어 막힌 호흡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제정신을 차린 의원은 경호병을 통해 그의 방에 따뜻한 물 한 대야와 수건, 독한 버번위스키 한 병을 밀어 넣었다. 선체 상부가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짐칸에서 갑판 일층 쪽으로 올라온 청년이 끊임없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잇새로 거품 끓는 것이 보였지만 잇세이는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수틀리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혈이 우선이니까 가만히 있어.

……

 

몇 번 묶인 몸을 뒤틀던 청년은 이내 힘이 빠졌는지 잠잠해졌다. 잇세이는 위스키 한 잔을 몇 모금 끝에 비우고 창을 열었다. 밤바다의 무거운 냄새가 났다. 서슬 퍼런 달이 수면 위에 흐늘흐늘 흐려졌다. 그는 창을 뚫은 벽에 등허리를 붙이고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해초처럼 해먹에 널려 몇 번을 씨근덕댔다. 꼼꼼히 응시하고 있으니 어둠에 잠긴 뒷머리가 희미하게 은회색이었다. 머리칼이 각각 다른 하늘의 빛으로 넘실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잇세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청년도 줄곧 바다에 있었다. 바다는 수평선으로 천계와 맞닿아있어 하늘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몇 번이고 들어왔다. 청년의 정수리는 햇살 부서지는 아침이면 회백색으로 창백해졌고, 저녁 뱃고동이 울릴 즈음엔 분 바른 뺨처럼 붉어졌다. 잇세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청년의 머리카락엔 월광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집을 낸 듯 반으로 갈라진 달이 바닷물에 몸을 담가 그 음영이 흐드러지게 푸르렀던 밤이었다. 그날 청년이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느 정도 피가 멎었을 때, 잇세이는 청년의 입에 쑤셔 박힌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그것으로 위스키가 담겼던 잔을 닦았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 잇세이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힘껏 집어 넣어 일으켰다. 그의 늘어진 몸뚱일 받치고 있었던 해먹이 발끝에 얽혀 출렁거렸다. 잇세이는 그를 침상에 모로 눕히고 둥그런 두를 제 넓적다리로 받았다. 그리고선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야맹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조그만 창 안으로 빛이 젖었다. 죽은 사람의 호흡 같은 바람소리에서, 잇세이는 며칠 뒤 몰려올 태풍의 조짐을 발견했다. 사흘간은 폭우가 쏟아질 수도 있겠군. 일주일은 머무르다 가야겠어. 그 순간, 잇세이는 바람의 반이 청년의 허파에 실려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위스키 한 잔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코우시. 그러자 코우시라고 불린 남자가 찢어진 혀로 작게 웃었다.

 

진상품은 육체에 흠집이 나면 가치가 없어져. 알아. 그래서 혹한 처벌도 가하지 않지만, 대신 한 번 상흔을 입으면 바다로 던져지지. 그것도 알아.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잇세이는 청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저처럼 곧잘 해변과 부두에 있었다는 기억만을 할 뿐이었다. 당시 잇세이는 종자를 한 명 데리고 다녔고, 인접국에서 유행하던 장식의 술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코우시는 몇 번의 눈길로 그가 상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법 영리하던 잇세이는 먼저 입을 열어 물꼬를 트지 않았지만, 그 덕에 코우시와 헤어지며 겨우 이름만을 알게 되었다. 헤어지던 날은 잇세이에게 있어 크게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시퍼런 달, 바다뱀, 이름. 제 이름을 가르쳐준 코우시는 바다뱀을 기다린다는 말을 뒤로 해안가에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여왕은 동양 소년들을 귀히 여겨. 악질은 없을 거야.

퍽이나.

매일 비단을 걸치고 호사를 누릴 텐데.

비단을 입혀놓고 벗겨 희롱하겠지.

 

잇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곧 폭풍우가 올 것 같아, 바람소리를 듣자 하니. 말을 돌리자 코우시가 무릎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바다뱀 소리야. 그는 폭풍우가 사나흘 내로 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심해를 성대 삼아 끌어올린 파도소리가 스산했다. 마츠카와, 물을 좀 줘. 코우시가 타는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잇세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번위스키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위스키를 따랐다. 코우시의 뒷머리를 받치고 찰랑거리는 알코올을 넘겼다. 그는 찢어진 혀를 쥐어뜯는 독한 자극에 손끝을 퍼들퍼들 떨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제물이었지. 코우시가 살아있는 심장처럼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어.

 

시작은 무명의 소년이었다. 도호쿠에 석 달이 넘게 지속되던 폭풍우는 집채만한 파도를 일으켜 소년 한 명을 꿀꺽 삼킨 뒤로 감쪽같이 멎었다. 그 후로 풍향의 충돌로 폭풍우가 일어 어선이 바다에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하고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의장은 장마와 풍향변화로 바다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유월에 출생한 남아들 중에서 재물이 될 아이를 골랐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바다 근처의 신제에서 지내며, 제물이 될 때까지 사제로부터 수련을 받으며 살다 바쳐진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잇세이의 손에 제 손을 맞추었다. 갑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야. 모든 걸 바로잡자. 잇세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코우시의 몸은 미끈하다 못해 미끌미끌했다. 뱀의 비늘과도 같았다. 잇세이는 지문에 냉기를 남기는 그의 몸을 더듬으며 제 체온이 생각보다도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으레 타인을 보며 스스로를 알게 되는 법이다. 코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야윈 다리로 잇세이의 넓적다릴 휘감았다. 잇세이의 더운 몸뚱이에 밀착할수록 제 혈관이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을 느꼈다. 뚫린 창으로 절절한 앓음이 새어나갈까 걱정이 되었지만, 더 가열차게 울부짖는 파도 덕분에 부르르 떨리는 한숨까지 완연히 묻혔다. 잇세이가 목덜미를 핥는 동안 코우시는 반쯤 남은 버번위스키에 손가락을 담가 휘저었다. 마츠카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잊지마. 코우시가 그렇게 말한 순간, 잇세이는 짐칸에 갇힌 수십 명의 어린 소년들이 떠올랐다. 그는 동조해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이었다. 잠시 선잠에 들었던 잇세이가 눈을 떴을 땐 조그만 선실 내부를 푸르른 달빛이 빈틈 없이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에 누워있던 코우시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창 밖으로 괴성과도 같은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잇세이는 고개를 꺾어 창틀을 붙잡았다. 바닷물에 젖은 듯 시퍼런 달 주변으로 둥그스름한 구름이 모여있었다. 광이 끓듯 부글거리던 수면 위에서 이윽고 거대한 몸을 자랑하는 뱀 두 마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들은 달을 에둘러 허리를 휘었다. 막 심해 밑에서 솟아나온 두 짐승의 비늘 위에 눈을 흐리게 하는 월광이 섬뜩였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부서진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었다. 더 이상 울음과도 같은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면은 잠잠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

폐하껜 어떻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다음날, 잇세이는 통신원에게 자결미수의 진상품을 바다에 던져버렸노라고 설명했다. 머리를 탁상에 박아 다시 한 번 자결을 시도했고, 이마가 찢어져 흠집이 났으므로 더 손볼 수 없어 바다에 버렸노라. 그러자 통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새에 일어난 일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잇세이는 파이프에 토바코를 넣고 입에 물었다. 그는 선상으로 나와 난간을 쥐었다. 요 며칠 전과는 달리 하늘이 맑고 파도가 자잘했다. 그는 한참 사방이 텅 빈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쉬이 입에 담았던 것. 청년 말이다. 청년은……

 

청년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fin.







쿠로오.

 

이제 여긴 형편 없이 작아졌어. 모두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며칠 전에 먼지 쌓인 창고 선반을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얘길 들었거든. 선체에 사람을 최대한 많이 태워야 하기 때문이겠지. 우드 씨가 그랬는걸. 우드 씨 기억하지? 부선장 말이야, 이젠 선장이 되었는데…… 여하튼 그 사람은 모두가 되도록이면 미련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 그래야 선체에 실을 물건이 적어질 테니까. 나는 고민하다가 앨범 하나랑 게임기를 챙기기로 했어. 그거 좀 가지고 간다고 엔진이 딸리진 않을 거 아냐. 청소는 치우는 재미가 아니라 뭔갈 발견하는 재미로 하는 거지. 앨범도 챙기다가 뒤지게 되었어. 중간중간에, 네가 써준 편지가 끼워져 있어. 너 열일곱 되고 나선 별로 써주진 않았지만…… 그 전의 것들 말야. 이것저것 헤집어 보다 보니 네가 사진을 찍을 때 자주 취하던 포즈, 혹은 구태여 사용하는 단어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그때마다 네가 어릴 적부터 내게 겁을 줬던 게 생각나. 우주를 떠돌다 보면, 소행성과 만날지도 몰라.

 

인류가 비슷한 걱정을 했었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어떡하나, 하는 거. 그런데 그 문제가 피부로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우린 여길 떠날 준비를 하게 되어버렸어. 내가 합류한 게 칠 년 전, 너는 그 전부터 있었으니 우리가 통틀어 아는 이별의 역사는 십 년이 훨씬 넘어. 보금자리로부터의 안녕. 조금 슬퍼도,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면 말이야……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 별에도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우리가 떠나면 숨쉬기가 한층 더 수월해지겠지. 좋아지면 더 좋아졌지 결코 악화는 없어. 결국 이 모든 건 예정되어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떠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건가 싶어. 그렇지 않았으면 변할 것도 없었겠지. 이 별의 탄생에도 종말에도 인간은 없으니까.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단 건 우리 사정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적이 있지. 흙과 흙 사이에 낀 어중간한 존재들. 우리 근본은 유목민이고 유한이기에 그 어디에도 영속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너는 나보다 좀 더 근성 있는 인간이었지. 나는 눈앞의 것들이 중요했고. 모두 더 큰 목표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할 줄 한다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작은 게 더 소중할 수도 있잖아. 네 의견에 반대하는 건 아니야. 말했잖아, 악화는 없다고. 네가 보내준 데이터와 위성 사진 덕에 우린 어느 정도 탄탄한 인포를 완성했어. 이제 네가 전해준 그 새로운 별로 가려고 해. 거기 네가 있을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우드 씨가 네 흔적은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런 말 솔직히 위로 안 되는 거 너도 알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와 우주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비슷한 것 같아. 차라리 그 둘은 존재보다는 속성에 가깝지. 지금까지만 해도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잖아. 이를 테면 사후세계와 명왕성 같은 거. 요즘은 분주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 무언가 알아내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건 인간으로서 다른 존재들보다 월등하게 가지는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되려 일차원적인 생존과 연관되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무지와 암흑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발버둥이려나. 그런 걸 좀 더 근사하게 포장하면 사람들이 주장하고 나서는 지적 호기심이니 뭐니 하는 게 되겠지. 죽음도 결국 잘 알지 못해 두려운 거라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걸 두려워하며 사는 거야. 쿠로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너 없이 홀로 남겨지는 걸 많이 무서워했어. 역시,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러니까, 알지 못해서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그런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지. 나는 너 없이 네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챙기고 있으니까. 네 부재 속에서 나는 서툴지만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고, 예전에 상상하던 것만큼 어렵고 비참한 일이 아니라고도 느껴. 그런데도 여전히 선뜩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맨등보다는 복부로, 뒷목보다는 가슴으로, 얼음 위에 몸을 뒤집어 누운 듯 둥그런 한기가 모이는 때가 종종 있어. 칠 년. 네가 떠나고 내가 네 자릴 대신했지. 칠 년이면 적응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가끔은……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쿠로오.

 

네가 보내준 데이터에 의하면 신성新星은 하루가 약 18시간. 바이오리듬을 제대로 바꿔야겠지. 삼시세끼란 말도 사라질 거야. 아침과 점심을 먹으면 당일의 활동량은 모두 충족할 수 있을 테니까. 블랙홀 너머에 있기 때문에 활주로를 사선으로 잡고 연료를 상당 보류해두어야 할 거야. 그러니까 하루가 약 18시간이라고 해도 그것은 태엽에 태엽을 이어 조작된 기계에 의거한 시간에 불과하지. 엄청난 왜곡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시간을 잡아먹는 별이라고 해도 무관할 거야. 그곳에서의 한 시간은 아마도, 지구에서의 몇 십 년. 지구를 몇 십 년 후로 당겨 놓는다고. 더 이상 우린 이 별에 머물지 않을 테니 상관없는 것일까. 쿠로오, 이것 봐. 우린 여길 떠나기 직전까지도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살았어.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왜소해지고, 작아진 만큼 시간에 끌려 다녔지. 그게 일상이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어. 시간이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대단한 시간도 어마무시한 중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야. 18시간이 24시간의 몇 천 배라는 게 말이 돼? 그런데 정말로, 말이 된단 말이야. 시간이 마구 휘어지기도 하고 캐러멜처럼 쭉 늘어나기도 하고 반대로 짓눌린 스프링처럼 짤막해지기도 하고. 시간이 사람을 마구 끌고 간다고 우린 여태까지 믿어왔는데, 알고 보니 시간도 더 엄청난 물질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끌려가는 이의 뒷다리에 매달려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그렇게 생각해보면,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끌려가기만 하고 있어. 앞을 보고 무작정 질주하고 돌진하는 것들 중 하나야. 시간이 들쑥날쑥 앞당겨져서 엉망이 되어버린 건 여러 번 봤지, 꼭 네가 전해준 별이 아니더라도. 그런 별에 몇 시간 머물다 지구로 돌아오면 이 별에서는 이미 몇 십 년이 흐른 후일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시간이든 중력이든 뭐든…… 늘 상승구조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지만 하향을 그리는 건 본 적이 없거든. 넌 본 적 있어? 시간을 과거로 끄는 별을. 지구를 몇 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별을 본 적이 있느냔 말이야.

 

우리는 왜 이미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까. 이미 과거가 된 사람들을 우리는 대체 왜. 시간도 거스를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중력을, 사랑은 어떻게 해서 거스르는 걸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을 허물면서 말이야.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도 사랑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없을 거야. 여태 많은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것만큼은…… 그것이 우리 안에 내재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네 부재에 적응했지만, 부재를 인정했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네가 그리워. 엔진 가동되는 냄새가 나. 미끌미끌한 점성질의 기름, 숨구멍을 죄 조일 것 같은 그런 냄새. , 그 시간도 중력도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이 여전히 흔적으로서 남은 과거에 현존하지.

 

내가 나로부터 팽팽해지고 있어. 줄다리기를 하듯이 양끝으로…… 내 몸과 마음이 점점 멀어져. 이제 차차 여길 벗어날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

 

쿠로오.

 

우주를 떠돌다 보면, 소행성과 만날지도 몰라. 브레이크를 해제하고 엔진을 가동했을 때 선체가 와르르 무너지듯 떨렸어. 소행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더라고.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떠는 걸까, 아니면 떨리고 있는 것인가, 구분할 수도 없었지. 나는 안전벨트를 삼단으로 차고 그 속에 앨범과 게임기까지 구겨 넣었기 때문에 몸집의 두 배가 부풀어있었어. 벨트가 끊어지지 않는 게 다행이구나, 하고 우드 씨가 출발하기 전에 투덜거렸던 거 같아. 여하튼 궤도를 벗어날 때 엄청난 가속력이 붙어 선체가 180도로 뒤집혔어. 재빨리 소진된 엔진을 해제했지. 우드 씨는 조종석에 앉기 전에 웬 시꺼먼 초음파 사진 한 장에 입을 맞추면서 사랑한다하고 속삭였어. 우드 씨의 딸이야. 난산이라 태어나고 세 시간 뒤에 죽었다더라. 그러니까, 딸을 지구에 묻어두고 온 거지. 나는 앨범을 열어 네 사진에 입맞출까 하다가 징그러워서 그냥 관뒀어.

 

너는 소행성을 만났을까. 너는 어디일까. 죽은 걸까. 이 드넓은 우주에 있다 보면 말이지, 결국 죽음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돼. 그래서 너는 틀림없이 있다, 여기 어딘가에. 그런 믿음도 갖게 되지. 우드 씨는 망상이고 착각이라고 언질 줬지만 설득력 없어. 그 사람, 떠나기 전에 죽은 딸의 사진에 입을 맞췄잖아. 죽은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냉랭한 척해봤자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아. 그래서 너는 어디야. 엇갈릴 수도 있겠다. 여긴 벽도 바닥도 천장도 없이 사방으로 뻗은 곳이니까. 혹시 몰라? 새로운 별에 내가 도착했을 때, 넌 되려 예전으로 돌아간 지구에 느닷없이 발을 딛게 될지. 그럼 너는 아마 내게 편지를 쓰겠지.

 

안녕, 여긴 잊혀진 별 지구야. 여기 바다엔 네가 떠날 때 떨군 연료통이 침몰해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내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먹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네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그럼 나는 거기에 답장을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진 몰라도, 나는 거기에 있는 너를 그리워할 거야. 인류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별을 나는 추억하겠지. 추억이 기억과 다른 점은 바로 그런 것일 거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 언제든 현존할 수 있을 때…… 우린 잊고 싶은 기억들을 추억이라고 부르지 않아.

 

방금 머얼리서, 별 하나가 폭발하는 것을 보았어. 아주 먼 곳이었나 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창이 눈부시게 번쩍였을 뿐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드 씨는 수명을 다한 별일 거라고 그랬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저건 소행성을 만난 별이야. 그렇다면 그건 무슨 별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을 못 잡겠어. 우린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레이더의 사각지대에 있는 별들은 눈으로 절대 식별할 수가 없어. 그건 거대한 빛덩이였을 뿐이야. 지구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설마.

 

레이더의 센서가 점점 더 예민한 소릴 내고 있어. 가까워지고 있나 봐. 대신 커다란 관문 하날 거쳐야 하지. 우린 웜홀을 통해 선체를 무사히 빼돌릴 거야. 네가 전해준 별에 안전하게 도착하겠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살아왔으니까. 개화를 꿈꿀 거야, 사람들은. 과거의 보금자릴 잊고 그곳에서 터전을 가꾸겠다고 다짐할 거야. 나 역시 그렇게 할 것 같아. 네가 전해준 별이잖아. 다른 별도 아니고 네 흔적이 다다른 별. 그래도 가끔은 잊혀진 별이 그리울 것 같아. 우리들의 추억이 거기에 죄 묻혀있어. 이미, 혹은 언젠가 소행성을 만날 그 별. 부딪쳐 폭발하고 그 잔재만 조각조각 남아도 이제 상관없는 그 별. 거기에 너와 내가 있어. 이 순간에 멀찍이 소행성 하나가 몸을 굴리며 맹렬하게 달려가. 누군가의 추억이 묻혀있을 또 다른 별이 곧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창틀 대신 품 속의 앨범을 꽉 붙들고서, 우릴 지나는 소행성의 꼬리에다 대고 인사했어.

 

안녕, 잘 가. 잘 가.






선배가 맘에 든 건 이학년이 되어서였다. 좋아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똑 부러지게 확언할 수 없지만 그거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선배와 제대로 대화란 걸 하게 된 것도 이학년부터다. 새내기 OT는 필수가 아니라는 주변 말을 주워듣고 부러 가지 않았고, 일학년을 보낼 동안은 뾰족한 목표 없이 괜찮다는 강의는 이것저것 찔러보았다. 그나마 불참 시 페널티가 있다는 경고장을 받고 발 뒤축을 질질 끌어 참석한 것이 이학년 학과 진입생 파티였다. 거기서 그가 나눠주는 스케줄러와 학교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펜을 받았다. 재수를 했다는 그는 졸업반 스물네 살이었다.

 

조용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수다스럽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든 통하지 않나. 특별한 구석은 없는데 그런 이유로 튀지도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사람. 그래서 처음엔 맘에 들었다. 꽤 나랑 닮은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로서는 늘 적당히가 최선이었고, 그도 나름대로 적당한 사람 같았다…… 꼭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수강신청에 실패하고 삼사학년 권장용 전공선택강의를 무리하게 들으며 그와 시선이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몇 번 얽히면서였다. 어느 때부터다, 라기 보다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듯 천천히 경과하면서…… 그러니까, 시답잖게 느껴졌던 과정이라는 것이 그에게 꼭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시꺼먼 흑발도 아니요, 또 허옇게 질린 백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채도를 차지하고 있을 법한 잿빛 머리카락이 이미 그에 대한 설명을 절반 해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 어중간한 사람이었다.

 

츠키시마, 동아리 지원한 거 있어?

아뇨.

새내기 땐 해봤어?

그다지……

레저 클럽 들어오는 건 어때? 동아리 하나쯤은 해야지.

거기선 뭐 하는데요.

당구 좀 치다가…… 소모임으로 술 마시고?

 

선배는 당구를 못 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고백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꽤 별볼일 없는 투로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놨다. 그냥 술동이야, 술동. 그가 능숙하게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어깨를 후려쳤다. 알고 보니 그는 레저 클럽 말고도 배구 동아리에도 들어있었다. 병행하기 힘들지 않나요? 걱정은 둘째치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가 어느 쪽으로 해석했든 괜찮아라는 대답이 일관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상답안을 내놨다. 진짜 괜찮다든가, 혹은 괜찮은 척이라든가, 모 아니면 도라기보다는 그 말을 기계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안 괜찮다는 말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많은 것들이 나를 상당히 귀찮게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떨까.

 

나는 적당한 사람이다. 적당함과 어중간함은 다르다고…… 이전에는 몰랐지만 선배를 보며 조금씩 알아간다. 둘 모두 100%는 아니라는 성향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는 상당한 차이를 띤다. 적당하다 보면 안주하게 되고, 또 잔가지도 많이 쳐내게 되는 법이지 않은가. 아직까지 불만족스럽진 않다. 적당한 것으로는 안 된다는 계기를 만들어줄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 식이다. 어중간함이라 하면, 적당함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상태가 아닐까. 쉽게 말하면 발전된 적당함말이다. 적당함을 인지한 이후에,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때 바로 어중간함이 되는 것이다. 선배는 레저 클럽에서 당구는 못 쳤지만 참견은 잘한다고 했다. 배구에선 포지션 뭐예요? 세터. 그런데 주전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믿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차차 깨달아가며 나는 선배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일 그의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그를 가까이하지도 않을 정도로 꼴사납게 보고 있지 않았을까. 어중간함이라는 것은 참으로 그렇다. 본래 의욕이 앞서지 않는 이들은 적당한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나. 지금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사람을 더 완벽하게 완성시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건 아무래도, 없는 것이다. 어중간한 사람은 그 자체로 이물감이다. 특유의 원근 없는 거리로,

 

츠키시마는 연애 안 해?

……관심 없는데요.

에헤이, 지금 안 하면 너 나중에 후회한다.

 

알아가고 싶다는 듯 굴지만 사실은 알지 못해도 상관 없는 거지. 그는 쓸데없는 것엔 부러 고개를 더 들이밀고, 진정 중요한 것은 조용히 물러서 응시하며……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으로 사고를 맺는다. 이게 최선을 다하는 그만의 방법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그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난 구석 없이 그렇게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팔을 벌릴 때마다 내가 피부를 거친 뼛조각으로 사뭇 느끼는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군집 속에 내가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그가 최선을 다하는 방법으로써 중요한군집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

 

있지, 츠키시마.

.

 

또한 내가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고 만다는 것 말이다. 있지, 있지, 얘기 하나 들어줄래. . 꼭 비밀로 해야 한다. 왜 저한테 비밀 얘길 해요? 츠키시마는 뭐랄까, 한 귀로 듣고 흘려줄 것 같달까…… 거기서 그는 암묵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래서 그가 무슨 비밀을 들려주든 내가 들을지언정 그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와 비밀을 나누기보다, 비밀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시점에서 엿들은 것마냥 밀려드는 죄책감. 선배는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일주일 전 스포츠관에서 폐장시간에 일어난 낙하사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요약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는 핵심만 골라 말해주었다. 얼마 전에 체육관 조명이 떨어져서 주전세터가 중상을 입었다. 물론 사고였다. 하지만 내심 기분 좋았다. 당분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되었는데…… 당분간이 아니면 좋겠다. 미친놈같이 보일진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미친놈이 맞고…… 요즘 주말마다 신사에 가서 빌고 있다. 걔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츠키시마, 츠키시마. 듣고 있어? , 듣고 있어요.

 

그가 나를 제 자취방에 초대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마실래? 맥주를 땄지만 내가 고개를 저어서 그가 두 캔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오늘 병문안 갔다 왔어. 그는 냉장고를 뒤져 세 번째 맥주를 따며 말문을 텄다. 나는 그가 거실 바닥 위에 깔아준 요에 어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몸을 엉거주춤하게 일으켰다. 시야에 수직으로 뒤집힌 소파다리만 멀뚱히 보다가 갑자기 쨍한 부엌 조명을 바로 보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올리자, 그가 조명 밝기를 줄여주고 탁자 앞에 다릴 꼬고 앉았다. 캔을 입가에 가져갈 때마다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베갯잇을 쥐었다 펴며 따분한 손장난을 하다가, 눈을 내리깔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병문안은 왜 가요?

친했으니까. 안 가면 이상하잖아.

친했어요?

.

 

선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세 번째 맥주를 모조리 비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안중 밖이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맘에 드는 사람도 뭣도 아니었다면……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뭘 하고 있었으려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냉국에 빠지는 그런 비밀을 전해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집에 고치를 친 누에처럼 움츠려 누워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문득 그가 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텅 빈 맥주캔이 탁자 유리와 시원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성긴 걸음으로 이불을 헤집다 말고 조그맣게 웃었다. 뭐야, 내가 츠키시마 군 잡아먹기라도 해? 그 말에 내가 미간을 찌푸릴 때 즈음 그가 부엌 스위치를 내렸다. 좁은 방이 완연한 어둠에 잠겼다. 안경을 벗어 더듬더듬 베개 옆에 얹어놓으니 더욱 사방이 침침했다. 그만큼 우물쭈물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제 와 그를 미워해볼걸, 미워하려는 시도라도 해볼걸,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더 삐뚤었다면…… 바특 비틀어진 그를 똑같이 비틀어 보았다면 되려 정직하게 바로 선 그의 모습을 단번에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착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아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는 선배의 수더분한 구석보다도 묘하게 추잡스러운 이면들이 예각으로 날아와 머리에 박히지만, 그게 전부다.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맘에 들지 않지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 평소라면 쉽게 묻힐 한숨이 숨죽인 고요 속에서 두각을 보였다. 문득 선배가 내 팔뚝 위로 손을 얹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힘있게 주무른다. 그가 뭘 하는지 안다. 나를 협박하는 것이다. 내 편이 되어줄 거지? 하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저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면서. 그는 그런 것을 세련되게 요구하지만, 나에겐 재간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면 요구보단 구걸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건 싫다. 나는 다시 기력이 다하고, 입을 열어서 뭐든 그르칠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공범자가 된 기분. 아니, 애초에 선배의 범행이 아니지만 그는 꼭 제가 모든 일을 꾸민 것처럼 군다. 눈을 감으니 어둠 속에서 푸른빛으로 울렁거리는 벌레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눈꺼풀을 닫은 채로 열심히 눈을 굴리는 와중, 내 팔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뒷덜미를 눌렀다. 낮지는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얘기 하나 해줄까.

……

까마득한 옛날에, 신이 에덴동산을 만들었는데,

 

아담을 만들고, 그 다음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지.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선물로 주면서 그런 거야. 여기 있는 거 너네 맘대로 해도 상관없는데, 선악과는 건들지 말아라. 츠키시마, 이거 무슨 얘긴지 알지? 이브는 꽤 똑똑한 인간이었던 거야. 시키는 대로 구부정하게 말 잘 듣는 녀석들 중엔 똑똑한 애들 별로 없잖아. 선악과란 게 대체 뭐길래, 싶다가 눈치를 좀 챘겠지. 저걸 먹으면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리고 웃기잖아. 에덴동산을 선물로 덜컥 줘놓고서 정작 거기서 자라는 걸 먹지 말라니까, 누군들 의심을 못하겠어. 이브가 한참 궁금해하던 와중에 뱀이 나타난 거지. 따 먹어보라고 유혹을 하지 않든? 이 뱀이라는 생물도 신이 만든 건데 말이야, 이브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모든 게 너무 모순적인 거야. 신이란 작자가 인간도 선악과도 만들고 뱀도 만들었는데, 정작 그것들의 양상은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으니까…… 그때 즈음 깨달은 거지. 인간이 평생 말이나 잘 듣고 살다 죽으라고 있는 존잰 아니구나. 그래서 과감하게 그걸 베어 먹었어. 그래서 이브는 이성과 지혜를 얻고 그 대가로 괴리와 낙담도 얻게 된다. 츠키시마, 적당히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가 허를 찔러왔다. 내내 그의 검지 지문이 진하게 묻었을 뒷목이 절절하게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에 선명한 잇자국이 났을 것이다. 선배가 검지로 곧추 세워 내 뒷덜미에 원을 그렸다. 앞과 뒤로 이야기의 흔적들이 지그시 남는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자는 쾌차 후 복귀할 것이고, 그는 다시 주전에서 내려올 것이며, 또 괜찮단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를 누빌 것이다. 그리고 제일 괜찮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은 바로 내가 되지 않겠는가. 적당히 살아가는 내게 그와의 관계에서 남는 것은 이런 종류의 불편함. 붙잡고 놓지 못할 어중간한 마음들.

 

결국 이것이다.



fin.

 




3


스가와라는 통학 버스 맨 뒷좌석에 몸을 구겨 앉아 차멀미를 하고 있었다. 방학 중에 야심차게 짠 시간표엔 개강일인 화요일에 맞춰 강의를 오후로 모두 밀어두었는데, 하필 그 시간대에 미어 터지는 24번 버스의 처지를 간과하고 있던 게 함정이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아 빈 속에 토기가 쏠렸다. 평소보다 삼십 분은 더 늦게 일어난 날이었다. 핸드폰에 설정해둔 알람만 세 개, 탁상시계 알람까지 도합 네 개가 사방에서 약 오 분의 간격을 두고 소리를 빽빽 질러대는데 듣지 못할 리가 없다고 자신만만했던 것이 불과 어제 아닌가. 대학 진학 이후 새내기로서 일 년간은 이십 년 동안 익숙하게 들어온 잔소리나 물 끓는 소리, 덜그럭덜그럭 식기 부딪치는 소란 등으로 아침잠을 깼던 스가와라 코우시는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패턴의 알람이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 학교 갈 때 내가 깨워준다니까.

이럴 줄 몰랐지…… 거의 도착했다. 너 어디야.

「오이카와 씨는 이제 공강이라 밥 먹으러 가요.

, 네에. 전 인문관 갑니다.

 

동거를 시작한 지는 겨우 한 달이다. 스가와라가 너저분한 제 방에서 추리고 추려 5호 박스 세 개에 나눠 담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을 정리해서 올라온 게 이월 초였다. 본래 어머니와 따로 외곽까지 올라와 지내다가 고심 끝에 동거를 결정한 것이 작년 십이월. 쿠로오와 오이카와가 하숙집에서 저들만 굴러 나와 방을 하나 얻어 월세를 나누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그보다 반년이 일렀다. 딱히 끈끈한 뭔가 있었다기보다는 두 사람 모두 교내 배구부에서 주전으로 활동 중이었고, 그래서 통학 시간이 얼추 맞은 덕이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배구했어? 대략 이 정도로 특별하지 않은 과거사를 삽질하는 것은 미뤄두고 두 사람은 학교 후문 쪽에서 도보로는 십오 분 가량 걸리는 적당한 가격의 월셋방을 구했다. 욕실을 제외하고도 방이 두 개였다. 부엌 딸린 널찍한 거실과 침대와 옷장 한 채가 들어갈만한 넉넉한 안방. 둘이 살면 넓고 셋이 살면 적당한 곳에 스가와라가 짐을 카트에 싣고 와서는 그곳을 적당하게 만들어주었다.

 

쿠로오는 이를 두고 별난 인연이라고 했다. 오이카와는 경영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스가와라는 쿠로오와 함께 인문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굳이 필요가 있겠냐며 OT를 쏙 빼먹은 스가와라에게 그와의 재회를 터뜨려준 것이 인문관에서였다. 처음에는 이랬다. , 너 카라스노네. 너 네코마네. 그러다가 기억을 더듬어 제대로 된 통성명을 하고 나서야 빈 자리를 채운답시고 슬금슬금 옆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쿠로오와는 간간히 교양을 함께 듣고 밥을 먹으며 말을 섞었고, 통학시간이 꽤 되는 것이 걱정이라는 고민도 털어놓았고, 쿠로오는 마찬가지라는 의사를 표했다. 당시 그는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와 맞닥뜨릴 일은 없었다. 경영관과 인문관이 사선 구도로 교정의 끝과 끝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스가와라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 배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날 쿠로오가 자취를 결정했다며 예비 룸메를 소개해준답시고 오이카와를 끌어 왔는데 그가 또 단번에 아는 체를 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것이 별난 인연이라는 것은,

 

순전히 스가와라 때문이었다. 고교 시절엔 서로 턱 끝도 본 적이 없었던 쿠로오와 오이카와의 사이에 어떤 긴밀한 이음쇠가 된 것이 스가와라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리 해놓고서 저만 그 연결고리에서 쏙 빠져나갔다. 정말 배구 안 해? 어느 날 오이카와가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있는 힘껏 빨며 물었다. , 하는 대답이 지나치게 간결해서 창 밖으로 지그시 보기에는 이 대화가 오이카와의 독백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쿠로오는 그런 것을 좀처럼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든 걸 궁금해하고 언짢아하는 것은 자연스레 오이카와의 몫이 되었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한결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고교 부활동은 좋은 추억이었으나 나쁜 기억을 남겼다. 집약적인 언어로써. 오이카와 본인도 이런 류의 언어를 곧잘 쓰곤 했지만 굳이 스가와라 코우시에게서까지 비슷한 냄새를 맡긴 싫었다. 쓰는 것과 듣는 건 확연히 다르지 않은가.

 

아슬아슬했네.

너무 적응 안 돼.

뭐가?

그냥, 집이.

한 달이면 충분한 거 같은데. 점심 안 먹고 나왔지?

 

대답을 듣기 전에 쿠로오는 조교의 부름에 짧게 대답했다. 이럴 거면 지정좌석을 따로 만드는 게 낫지. 스가와라는 훅 지나간 제 이름에 손을 펄럭이며 책상에 턱을 꽂았다. 코우시 군은 생각보다 맥이 없네. 스가와라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정수리를 누르는 손바닥을 버텨냈다. 정원 이백 명의 대형강의, 다섯 번째 줄의 어중간한 앞자리. 마음에 들지 않는 조합이다. 교탁 밑에 부착된 거치대에 기다란 전선이 연결된 마이크가 매달려있었다. 성능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교수가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고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스가와라의 잠을 깨우는 데에 티끌만큼도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정말 꼴딱 조는 게 아닐까. 꿀강의라고 그래서 신청했는데, 영 맘에 안 차네. 스가와라가 고개를 모로 뉘인 채 중얼거리자 쿠로오가 그의 뒷목을 쥔 채 노트북을 켰다. 교수가 헛기침을 하기 전까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인생 편하게 사시네요, 스가와라 씨. 네가 인생 운운할 나이냐. 뒷방 늙은이처럼 말하지 마. 지는……

 

강의가 끝나고서는 십오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그 시간을 인문관 지하 일층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한 조각씩을 사는 대신 오이카와에게 열렬히 문자 공세를 날리는 데 다 써먹었다. 오이카와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귀가하면 얼굴도 보고 속옷도 섞어 접고 밥상머리에서 쌀밥 식혀가며 얘기할 사람들인데 굳이 학교에서 비경제적으로 문자를 보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성질 급한 스가와라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도 매주 월, , 금에는 체육관 C동에서 온몸을 땀으로 적시는 쿠로오나 오이카와보다 스가와라의 처지가 좀 더 고달팠기 때문이다. 빨래를 제 것만 먼저 해놓으면 전기세가 어쨌다고 오이카와가 툴툴. 신발주머니에 젖은 운동복을 꺼내면 안에 땀냄새가 다 배겨서 주머니까지 세탁기에 통으로 빨아야 했고, 그러다 보면 빨래건조대 철심이 모자라기 마련이다. 그러면 먼저 빨았다는 이유로, 막 빤 것보다는 더 말랐지 않겠느냐는 설득력 있는 강요에 떠밀려 옷가지 몇 겹을 창문 난간에 널어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빨래 안 하고 기다려?

「오늘 나 술 마셔」

「그럼 너 그 꼬린내 나는 거 종일 들고 다니려고?

「뭐래요 오이카와상은 꼬린내 같은 거 절대로 안 나」

 

스가와라는 답장을 않기로 했다. 뭐래? 쿠로오가 검지로 팔뚝을 꾹꾹 눌러왔다. 술 마신대. ? . 벌써 개강파티인 거야? 모르지. 그는 귀갓길에 맥주를 좀 사다 냉장고를 채워놔야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무슨 첫날부터 풀 강의야, 하고 스가와라는 볼멘소릴 하며 영 질린 낯을 했다. 조수석에서 배낭과 카트를 껴안고 투룸텔에 올라왔을 때만큼 진이 빠진다. 쿠로오는 삼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으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수업 잘 들어. 스가와라는 난간 밖으로 고갤 뺐다.

 

너도 늦게 들어와?

내가 왜.

배구.

아아, 배구.

……

하지 말고 그냥 집 갈까?

 

쿠로오가 느물느물 입꼬리를 찢었다. 테츠로 군, 그 웃음 너무 싫다…… 스가와라는 길게 뽑았던 고개를 도로 거두었다. 몸이 막 널은 빨래 같았다. 난간 아래로 두툼한 손바닥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이윽고 웃음기 섞인 건조한 인사가 이어졌다. 쿠로오는 인문대 독서실로 향했고, 스가와라는 그대로 불문 교양을 들으러 한 층을 성큼 내려갔다. 그날, 스가와라가 붙여놓은 연강에서 짧은 오리엔테이션으로 끝난 강의는 불과 하나뿐이었고 쓸데없이 비싼 교양교재를 구입한 후에서야 익명장터에서 헌 교재들을 중고로 싸게 내놓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났을 때는 오후 네 시 사십오 분이었다. 그 즈음이면 하늘이 청록색이다. 스가와라는 백팩 끈을 조여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내 머리에서 휘발되었다. 정류장에 벤치가 구비되어있었지만 앉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금 위가 땅땅하게 부었는데도 스가와라는 고집스럽게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섰다.

 

버스를 타는 동안 선홍색 건물들을 지나왔다. 굳이 창틀에 턱을 괴고 있었더니 팔꿈치 밑으로 가느다란 사선 자국이 남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안을 하고 바로 매트리스 위로 엎어졌다. 엎어지고 나서야 빨래부터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가와라는 이미 드러누운 것을 핑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거실에 있는 일인용 매트리스는 손바닥 뒤집기에서 이긴 오이카와가 혼자 쓰는 것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맘대로 몸을 비볐다 하면 제 까탈스런 성격에 잔소릴 하지 않곤 못 배기겠지만 뭐 어떠랴. 눈을 감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셈해보았다. 쿠로오가 부활동을 끝내고 온다면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 오이카와가 술까지 마시고 들어오면 아마 시계바늘이 자정 인근. 촉박하지도 않지만 여유부릴 시간도 아니다. 내일도 오후 강의가 세 개. 그 전에는 은행에 들러 월세를 이체하고 인증서를 갱신해야 하니까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의식을 따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특별한 무언가에 다다르면 눈이 번쩍 뜨이게 된다. 안타깝게도 딱히 획기적인 것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계속 눈을 감고 있기로 했다.

 

쿠로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스가와라가 입을 벌린 지 한 시간하고 십오 분이 지나서였다. 춘곤증이라기보다는 천성적 바이오리듬에 가까운 낮잠을 주식 삼는 스가와라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습관대로 요란하지 않게 현관문을 열었고, 신발 뒤축에서 뒤꿈치를 빼내자마자 거실 매트리스에 천장을 바로 보고 자는 스가와라를 발견했다. 쿠로오는 잠시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아, 슬쩍 벌려진 스가와라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어 맞문 것이 전부였다. 그 후에는 한 바탕 샤워를 하고, 내의를 갈아입고, 빨래바구니에 그득 쌓인 옷가지들을 한아름 안아다가 세탁기에 쑤셔 넣어 세제를 붓고 돌렸다. 세탁이 오십 분, 탈수는 십오 분. 쿠로오는 뒷목에 수건을 두른 채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먹다가 탈수가 시작되었을 때 스가와라를 흔들었다.

 

코우시 군.

……

코우시.

으응.

술 마실래?

 

고꾸라져 누운 채 눈만 선뜩 뜬 스가와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게 방금 막 깬 사람한테 할 소리야? 쿠로오는 냉장고를 벌컥 열고 맥주 두 캔을 꺼내 흔들었다. 안주도 사왔어. 덧붙인 말에 그제야 스가와라가 허리를 말고 일어났다. 개강파티, 하고 쿠로오가 맥주 캔을 따주었다. 앉은뱅이 탁자를 두고 인접면에 앉아 와사비 가루에 땅콩을 섞어 흔들고, 치킨을 시키느니 마니 하는 얘기를 했다. 왜 봄비가 안 내릴까, 하고 중얼거리는 스가와라의 턱이 좀처럼 열리지를 않았다.

 

오이카와 들어오면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줄까? 단지 하루가 너무 고달팠기에, 여러모로 새롭지도 않지만 익숙지도 않았기에, 널브러져 있었을 뿐인데 저보다도 더 섬세한 듯 구는 쿠로오가 영 껄끄러웠다. 캔 끄트머릴 입술에 물고 답이 없자 쿠로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울 거 같은 얼굴을 해. 스가와라는 눈썹을 치켜 뜨고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랬나. 눈자위에 힘을 부릅 주고 맥주캔 한 쪽이 움푹 꺼질 정도로 쥐었다. 그런 거 아닌데, 하고 스가와라는 있는 힘을 다해 혼자 있고 싶어했다.

 



12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를 두고 의외의 사람이라고 했다. 상쾌군은 대학 와서 변한 거야,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종자야? 스가와라가 거기에다 대고 네가 고교 때 날 얼마나 봤다고 그러느냐, 한껏 꾸짖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새삼 그와의 인연이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이죠가 한창 치고 올라갈 때 카라스노는 주춤했고, 그 덕에 삼학년이 될 때까지는 연습경기에서조차 맞닥뜨릴 여건이 없었으므로 스가와라의 존재조차 몰랐지 않았나. 어쨌든 주전이었는데 말이다. 삼학년이 되고는 스가와라가 벤치로 가면서 예선에서도 삼 세트 중 겨우 하나 정도에 얼굴을 비췄다. 당시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꽤 성가셔했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한 세트를 코트 위에서 눈짓하며 예선 후에는 어렴풋이, 속도 참 좋은 인간이지, 하는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오이카와에게는 고교 졸업 후에야 제대로 안면을 알아갈 수 있게 된 스가와라가 귀찮다니, 힘들다니, 하는 불평을 하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이 기묘함이라는 것은 뼈가 간지러운 것처럼 시원히 긁을 수도 없는 깊은 근원에서 생겨나고 또한 머물러서, 오이카와는 내내 익숙한 척을 했다. 허둥대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을 못했다. 하지만 으레 모든 일이 그렇듯 잘 아는 척을 하다 보면 그것을 제대로 알 적정시기를 놓치는 법인데, 오이카와가 딱 그러했다. 그 적기가 언제였냐 하면…… 작년 크리스마스였다. 당시에 그는 OT에서 만나 교제한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밤거리를 춥지 않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그리 아득하지 않은 곳에서 머플러에 파묻힌 스가와라의 창백한 낯을 발견했다.

 

상쾌군은 매운 걸 엄청 먹는데 어쩜 이렇게 하얗지?

매운 거랑 피부랑 무슨 상관이야. 양념에 멜라닌이라도 있디?

매운 음식이 혈액순환을 도우니까…… 상쾌군 의외로 상식에 구멍.

됐고, 테츠로 좀 잡아와 봐. 생선 코너에 있지 않을까.

 

사월에서 오월 사이에는 봄비가 자주 내렸다. 덕분에 바람만 스쳐도 몸을 떠는 벚꽃이 빗길에 휩쓸려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처럼 장을 보자고 마음을 먹고 나온 날에도 비가 내려 신발 밑창이 자박하게 잠겼다. 오이카와는 그가 꽁지 젖은 신발끈을 다시 매듭지을 때까지 장바구니를 쿠로오와 죄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계단이 젖은 꽃잎으로 즐비한 것을 발견했고, 작년 십이월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떠올랐다. 아마 구 도쿄역 근처였을 것이다. 마주앉은 이는 그 주장임이 분명했다. 별말 없이 시선 한 올 얽어놓지 않고 함께 앉은 그들을 찰나에 지나쳤으나, 이십오 일이 바늘 한 칸으로 지났을 무렵 여자친구를 바래다주고 다시 돌아온 도쿄역에는 여전히 스가와라 코우시가 앉아있었다. 몇 시간 전과 다른 게 있었다면 그가 혼자였다는 점이었다. 단정히 앉아있었기 때문에 놀랄 일도 없이 허투루 보았다. 외로웠구나. 작년 겨울의 일을 올해 봄꽃이 만개할 때야 돌이켜본 오이카와는 요즘 따라 스가와라에게서 간극을 느꼈다. 세 명 중 키도 보폭도 제일 작은 스가와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걸음이 제일 빨랐다. 조금 밍기적거리다 보면 그의 뒤통수를 보고 있기 십상이었다.

 

중간고사로 각기 바쁜 세 명이 장을 보자고 모인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오이카와로 말하자면 이미 전공에 교양 두 개를 끝낸 상황이었고, 스가와라는 중간기간에 맞춰 배정된 교양시험 하나를 끝내고 금요일날 죄 몰려있는 전공시험 세 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쿠로오는 아직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음에도 여유를 떵떵 부리는 중이었다. 그들 중 뭘 믿고 가장 여유로운 쿠로오가 나머지 둘을 잘 구슬려 시내버스로 십 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에 간 것이었다. 미끄러운 도로에 조금 지연된 버스로 투덜거린 것은 스가와라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아 입구멍을 틀어막았다. 아침부터 맨홀에 동그랗게 고이던 비는 이른 오후까지 그치지 않고 추적추적 다리에 묻어났다.

 

필요한 것만 카트에 쓸어 담은 건 쿠로오였다. 그런데 카트를 지키고 있던 게 쿠로오가 아니라서, 그가 생선이며 유제품이며 두루마리 휴지며 리스트에 신중히 적어온 것들을 한아름 안고 카트로 돌아오면 그 안에 과자와 인스턴트 카레와 구운 땅콩, 시식만 해보고 꽂혀서 낚아챘을 냉동만두 등이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 베이커리 코너에서 쓸어온 것이 몇 개. 그것들은 죄다 오이카와가 손 뻗친 것들이다. 그는 저 먹고 싶은 것만 담아오기라도 하지, 쓸데없는 과소비로 최고봉을 달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스가와라였다. 언젠가는 정어리 통조림을 다섯 개나 사다 놓고 손도 대지 않은 적이 있다. 네가 샀잖아, 왜 안 먹어. 뒤통수에 지그시 꿀밤을 먹이는 쿠로오를 피해서 스가와라는 화장실로 도망쳤다. 이번에도 보나마나 냄새 한 번 맡아보지 않을 낫토 네 묶음이 들어있었다. 스가와라가 휴지 줍듯 그걸 들고 왔을 때, 오이카와는 혀를 내두르며 질색했지만 아무 말도 않았다. 그래서 낫토 네 묶음도 고스란히 카운터에서 계산되었다.

 

피곤해 죽을 거 같아.

집 돌아가면 좀 자.

안 돼…… 내일이 전공이라니까. , 담배 피우고 싶다.

저번에 담배 한 번만 더 피우면 사람 아니고 개라며.

내가 언제, 누구한테.

한 달 전에, 오이카와 씨한테!

 

스가와라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이카와가 그 모습을 처음 본 게 십이월이었다. 그때 도쿄역에서 말이다. 필라멘트가 낡아서 그런지 가로등 하나가 소등되었을 때, 홀로 넋 놓고 앉아있던 스가와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쿄역을 빠져 나왔다. 그는 벽에 기대어 놀랍게도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뒤적였고, 그러다가 눈을 큼지막하게 뜬 오이카와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참 침묵 속에 서롤 응시하다가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에 오이카와가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스가와라가 덩달아 웃어 정적을 깨고 말았다. 상쾌군, 하기도 전에 스가와라가 손짓하며 그랬다. 오이카와, 라이터 있니? 그는 비흡연자였기 때문에 라이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빈 손바닥을 내보이자 스가와라는 피울 수도 없는 담배 끄트머릴 잘근잘근 씹으며 그럼 술이라도 사달라고 졸라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케를 나눠 마시며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나 사실 남자 좋아한다. 스가와라가 그렇게 실토한 건 동거를 시작하기 한 달 전.

 

물론 너네한텐 관심 코빼기도 없지만, 내 타입도 아니고, 내가 남자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남자들한테 눈 돌리는 것도 아니고, 하는 흔한 주석을 단 한 마디도 붙이지 않은 채로 스가와라는 딱 본론만 말했다. 너네가 싫으면 나도 같이 안 살아. 이때 먼저 동거를 제안해왔던 그들은 싫다기보다는, 그들 인생에 한 번도 있어본 적 없는 일이었기에 당혹스러웠으나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암묵적으로 서로는 느끼고 있었겠지만 괜찮다는 말이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경계의 이상을 더 생각할 수는 없는 뉘앙스였으므로 스가와라는 딱 저대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방이 좀 더 적당해지고…… 불안정해졌다. 각자 시간표나 대외활동의 차이로 집에 있는 시간이 제각각이었는데, 어쩌다 세 명의 신발이 현관에 모이는 날에는 소파가 물에 띄워놓은 조각배 같았다. 스가와라는 모로 눕고, 오이카와는 그의 넓적다릴 베고, 쿠로오는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걸친 채로.

 

집으로 돌아오고, 쿠로오가 냉장고를 열어 장본 것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스가와라는 조금 돕는 듯싶더니 금세 랩에 싸인 고기를 꺼내 이리저리 살피며 농땡이를 부렸다. 이건 냉동실인가? 저녁으로 먹을 거니까 그냥 냉장실에 넣어놔. 스가와라는 쿠로오의 말대로 고기를 냉장실 깊숙한 곳에 쑤셔 넣고 두유를 꺼내 빨대를 꽂았다. 쿠로오의 닦달로 오이카와는 욕실에서 세안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기름 두른 프라이팬을 달궈야 했다. 스가와라는 일 분도 되지 않아 두유를 밑바닥까지 빨아 마시고 야채를 꺼내 간장을 좀 붓고 볶았다. 이른 저녁식사였다. 버스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내일 전공이 어쩌구, 볼멘소릴 하던 스가와라는 잠시 쉬고 싶다며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소파 위에 몸을 구겨 누웠다. 오이카와가 겁도 없이 그의 종아리 위에 엉덩일 붙이고 앉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빨리 중간도 끝나고 그냥 기말까지 하이패스로 갔으면 좋겠다.

미쳤냐.

나 개강부터 종강만 바라봤잖아……

종강하면 뭐하게. 알바?

알바…… 그것도 좀 하고, 연애도 하고.

 

그러냐, 대꾸하고 스가와라는 눈을 붙였다. 쿠로오가 감자칩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무리한 농담을 던지는 개그맨의 호흡 사이로 아삭거리는 소리가 우스꽝스럽게 섞였다. 오이카와는 검지로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을 꼬았다. 한동안 피부가 붓는 전자파가 느껴졌다. 이번에 개그맨은 좀 더 무리한, 또한 무례한 농담을 던졌다. 기분이 영 언짢아진 쿠로오가 리모컨을 잡았다. 그가 든 감자칩 봉지로 오이카와가 손을 뻗치며 무심히 물었다. 상쾌군은 연애 생각 없어? 스가와라는 눈꺼풀을 내린 채로 동문서답을 했다. 어디서 소금 냄새 안 나? 쿠로오는 입술을 삐죽여 웃으며 과자 봉지 모가지를 돌돌 돌려 묶었다.

 

그러게, 코우시 군은 연애 안 하나.

본인들도 솔로면서 내 연애까지 생각해주고, 고마워 죽겠네.

외로워도 괜찮나 봐?

 

스가와라는 불현듯 입을 다물고 눈을 번뜩 떴다. 천장을 바로 보고 눕자 구레나룻을 만지작거리던 오이카와 손가락이 관자놀이 밑 오른뺨에 닿았다. 쿠로오가 과자 봉지를 선반에 갖다 놓고 세면대에서 짭짤해진 손을 씻는 동안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이마를 덮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천장을 가린 그의 다갈색 동공을 끔벅거리며 응시했다. 오이카와가 입을 뗐을 때 즈음에 어깨 너머에서 세면대를 후려치던 수압 강한 수도가 멎었다.

 

외로운 건 싫잖아.

그렇지.

그런데……

그런데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있잖아.

……, 그렇지.

너무 복잡한데……

 

난 그냥 그걸 게으를 때라고 부르기로 했어. 외로움도, 외롭지 않아서 생기는 모든 일들도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을 때. 스가와라는 대답을 마치고 몸을 둥글게 말아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카펫 위에서 엉금엉금 몸을 일으켜 팔뚝을 위로 곧추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진짜 공부해야 해. 그 전엔 씻어야 하고…… 스가와라는 티셔츠를 말아 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쿠로오는 욕실에서 발을 내딛다 오이카와의 반쯤 잠긴 눈을 발견했다. 이윽고 욕실 문이 닫히고, 오이카와는 소파 위에 나동그라져 눈을 감았다. 쿠로오는 뒷목을 긁으며 그의 앞에 양반다릴 하고 앉았다.

 

그런 얘길 속 시꺼먼 사람이 하면 쓰나. 그는 그런 소릴 하고 다시 tv를 켰다. 세상 돌아가는 꼴 좀 보자! 다소 경쾌한 외침이 욕실 너머의 물소리에 자박하게 잠겼다. 쿠로오가 뉴스채널을 맞춰 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을 때, 오이카와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구기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안 돌아가는 꼴도 모르는데 세상은 무슨……

 



7


오이카와가 바라던 대로 시간은 거의 급행열차처럼 지나갔다. 그런데 그게 그가 바라던 방향으로 갔는지는 의문이었다. 한 달하고 반 정도를 공부하면 또 금세 기말, 과제까지 겹치면 그때부터는 집에 눌러앉아있지를 못한다.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가 조바심을 내며 담요와 세면도구를 주섬주섬 싸서 중앙도서관으로 올라간 것이 삼 주 전의 일이었다. 눈코 뜰 새 없는 일주일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사가 빠진 스가와라는 술을 퍼 마시러 돌아다녔고, 쿠로오는 세 번 정도 만취한 그를 데리러 나가기 위해 집에서도 양말을 신고 있었으며, 오이카와는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숙면했다.

 

사람마다 각기 역량이란 게 있고 운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의 성적도 들쑥날쑥이었다. 쿠로오는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나왔다. 이번에도 뼈를 갈아 넣은 전공들은 죄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오이카와는 희한하게도 반쯤 포기한 과목들에서 기대 이상의 점수를 얻었으며, 반대로 세 차례 정도 닥쳤던 과제로 닷새의 밤을 끙끙 앓아 붙잡고 있었던 수업에서는 실망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오이카와는 학교 포털사이트 창을 닫고 휴대폰을 집어 던지며 불만족스럽게 혀를 찼다. 난 진짜 뭐든 대충해야 하나 봐. 그러면서 또 다음 학기에 전력을 다하는 게 오이카와였기 때문에 쿠로오는 이전처럼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여러 강의에서 두루두루 모두들 그만하면 좋다, 하는 점수를 받긴 했지만 최고점은 단 하나도 받지 못했다. 옆에서 교수 욕을 한바탕 해주려고 자릴 잡고 앉은 오이카와의 곁을 뜨며, 스가와라는 제가 너무 농땡이를 피운 탓이라고 넘기고 말았다. 종강을 하고는 쿠로오가 오이카와의 옆구리를 찌르는 일이 잦아졌다.

 

, 술 마실까.

집에서?

밖에서. 쟤 데리고.

상쾌군은 그저께도 퍼 마시다 들어왔는데.

거기서 마시는 거랑 우리랑 마시는 거랑 같냐. 애가 너무 죽을상이잖아.

짐까지 싸서 도서관에서 날밤 깐 사람이 농땡이 피운 거라는데 그럼 죽을상이 아니겠어?

 

도쿄는 유월이 장마였다. 그러니 종강할 때 즈음에 비가 건물과 아스팔트 위로 퍼부어댔고 스가와라가 두 번째로 술을 진탕 마시고 쿠로오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추적추적 그쳤다. 칠월이 닥치자마자 가랑비는 하룻밤 새에 멀찍이 달아났다. 바닥은 아직 증발하지 못한 웅덩이들로 축축했다. 스가와라는 양옆에 쿠로오와 오이카와를 대동하고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걸었다. 포차에 도착했을 땐 허여멀건 종아리 뒤축이 죄 얼룩져 엉망이 된 탓에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팔목을 잡아 끌고 물티슈를 찾을 동안 오이카와는 스스로 메뉴를 골랐다. 맥주를 시킬까 하다가 그냥 청주 두 병을 먼저 시켜놓고 차례대로 오뎅탕, 계란찜, 마파두부 한 대접. 기본 안주로 나온 땅콩을 오독오독 씹으며 오이카와가 계산서를 흔들었다. 이거는 너 혼자 다 먹는 거야, 알지? 스가와라는 버젓이 프린트된 메뉴명 사이를 비집고 앉은 마파두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뎅탕이 먼저 나오고, 스가와라가 잔 세 개를 뒤집어 청주를 따르는데 문득 쿠로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네 어디 가냐?

뭔 소리래?

나는 다음 주에 부모님이랑 잠시 삿포로 여행 갔다 오거든.

 

스가와라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의 낯을 멀뚱히 응시하다 조금 넘치게 따른 청주가 엄지에 묻은 것을 핥았다. 그으래, 하고 오이카와가 대꾸했다. 너넨 미야기 안 내려가? 쿠로오는 턱짓으로 물으며 오뎅탕을 국자로 떠 앞접시에 담아주었다. 스가와라는 제 몫의 오뎅탕이 가슴께로 밀리자마자 수저를 쥐었지만 잠시 동안은 맑은 국물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희뿌연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얼굴을 적셨다. 오이카와는 성대 깊이 앓는 소리만 내더니 이윽고 턱을 괴고서 스가와라에게 답을 떠넘겼다. 그러게, 상쾌군은 갈 거야?

 

몰라.

몰라?

아직 안 정했어.

부모님 올라오신대? 우리집 꼬라지 완전 엉망인데.

글쎄, 그냥 올라오시라고 할까. 난 여기서 알바나 하고.

상쾌군 안 가면 나도 안 가지, .

 

오이카와가 오뎅탕 한 수저를 뜨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어서 나온 계란찜 때문에 탁자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물컵들을 손등으로 밀던 쿠로오가 고개를 힐끔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마파두부가 그렇게 오래 걸리나? 스가와라는 입술을 오므려 중얼거리곤 오이카와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넌 왜. 나까지 가면 상쾌군 혼자 외로우니까. 쿠로오는 미간을 구기며 탁자 밑으로 오이카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너 말을 꼭, 내가 쟤 내버려두고 가는 것처럼 한다? 그렇다고 다리를 차! 오이카와는 장딴지를 손바닥으로 비비다가 결국 샐쭉 웃었지만 스가와라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생각에 곰곰 잠겨있었다. 쿠로오가 스가와라의 얼굴 앞에 손가락을 쭉 펼쳐 흔들어 보일 때 즈음에 그가 기다리던 마파두부 한 접시도 마저 나왔다.

 

폭이 조금 좁은 탁자에 윤기가 줄줄 흐르는 마파두부 접시까지 애써 구겨 놓고부터는 스가와라가 유독 말없이 수저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작 안 돼, 하고 오이카와가 드문드문 꿀밤까지 먹였지만 스가와라는 고집스럽게 제 잔에 스스로 청주를 부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이 오뎅탕 든 냄비 바닥을 싹싹 긁을 즈음에 스가와라 앞에 놓인 마파두부는 절반이 사라져있었고, 청주도 반이 줄어있었다. , 쟤한테서 저거 뺏어. 쿠로오의 말에 오이카와는 잽싸게 청주병을 낚아채서는 탁자 가장자리에 치워두었다. 눈빛이 흐물흐물해질 때 적당히 관두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발끝까지 거나하게 취해서 제 등과 가슴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귀가했던 것이 한두 번인가.

 

스가와라는 저 혼자 뭔가 중얼거리다 말고 탁자 위에 상체를 모로 뉘였다. 그래서 저들끼리 잔을 홀짝이며 낮은 수다를 떨던 쿠로오와 오이카와는 다시 한번 허둥지둥, 그 주변의 접시와 물컵, 빈 쟁반 등을 치워주었다. 직원을 불러서 빈 그릇들은 내가고 스가와라가 조금 남긴 마파두부와 저들끼리 먹던 계란찜을 한 구석에 정렬해두니 그가 웅크리고 누울 만한 공간이 생겼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렸다. 쿠로오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맥주를 한 병 추가 주문하고 눈 밑에 반원의 그림자를 드리운 기다란 속눈썹을 구경했다. 그가 끊임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불쑥불쑥 웅얼거릴 동안 오이카와는 쿠로오와 함께 조심스레 건배를 했고, 맥락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몇십 분이 지나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쿠로오가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을 때, 한동안 또 조용했던 스가와라의 입에서 지난 몇 시간의 어딘가에 끊겼던 맥락이 아주 잠시, 되살아났다.

 

같이 있는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냐……

 

스가와라는 이번엔 몸을 휘청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일어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입을 조금 벌린 채 잠에 빠진 그를 오이카와와 쿠로오가 번갈아 업기로 했다. 집까지는 택시를 부르기에 민망한 거리였고, 또 막차가 끊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버스나 메트로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먼저 취기가 살짝 가라앉은 오이카와가 스가와라를 등에 업었다. , 겉보기엔 말랐는데 무슨 포대자루 같다. 그가 인상을 쓰자 쿠로오가 팔뚝을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난 저걸 일주일에 최소 두 번씩은 옮겨다 놓는 거 같은데.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 전구가 타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 미끄러지는 스가와라의 허벅다리를 끌어당겨 고쳐 업기만 세 번, 다행히 경사는 없는 좁다란 골목 샛길을 반쯤 걸었을 때 문득 오이카와가 말문을 열었다.

 

상쾌군 의중을 모르겠단 말야.

뭐가.

같이 있어주고 싶게 굴다가도…… 또 그게 아니라고 본인 입으로 그러면.

 

그러게. 나도 가끔 그런 거 느끼니까. 쿠로오가 빙글빙글 웃었다. 가로등과 가로등의 간극이 넓었다. 시야가 쨍한 다홍빛으로 밝아올 때 오이카와가 눈살을 찌푸렸다. 쿠로오는 콘크리트 위에서 선명해지다 희미해지기를 반복하는 제 그림자를 정성스레 밟아 걸었다. 암묵적인 고요가 좁은 샛길을 기었다. 근데 나는 알 것 같아. 이번엔 쿠로오가 먼저 운을 떼며 손을 뻗었다. 오이카와는 한사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어쨌거나 몇 분을 더 걷고서는 저도 팔뚝이 저리다고 해서 스가와라의 둥근 몸은 쿠로오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많이 업어본 솜씨로 오이카와보다 수월하게 그의 하반신을 받쳤고, 두 사람은 느린 속도로 다시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알아? 이번엔 오이카와가 그림자를 밟으며 물었다. 곁눈질로 본 쿠로오의 그림자 위에 작은 짐짝처럼 얹힌 스가와라의 음영이 우산처럼 있었다.

 

얘는 외롭고, 나는 안 외로워서 그래. 오이카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사뭇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고 웃었다. 상쾌군 대단하네, 하고 그는 쓸쓸히 감탄했다. 외로운 사람은 그렇게 외로운 만큼 멀리 있나. 외로움이라는 건 어떤가. 상태라 해야 할지 감정이라 해야 할지부터가 상당히 까다롭지 않나. 또한 그 속성도 다분히 배타적이라,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더 외로워지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 것일까. 오이카와는 한 걸음 느리게 다리를 움직여, 앞서가는 쿠로오 테츠로의 등 위에 젖은 빨래처럼 널린 잿빛 뒤통수를 멀리에 보았다.

 

……상쾌군?

 

오이카와는 선잠에서 깨어 욕실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다. 잠이 든 스가와라를 번갈아 업으며 집에 도착한 게 새벽 두 시였다. 쿠로오는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바로 거실 매트리스에 누워버렸고, 네 방으로 들어가라며 한 소리 하려던 오이카와도 바득바득 신경질을 낼 기운이 쪽 빨려 바닥 위에 대자로 드러누운 스가와라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저도 그 옆에 벌렁 누워버렸다. 불을 끄고 눈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인기척에 예민한 귀가 잠을 깨웠다. 오이카와는 눈 밑을 꾹꾹 누르고 제 침대를 한 번 돌아보았다. 쿠로오가 벽을 본 채 등을 모로 뉘고 있었다. 그는 쿠로오의 맨등을 힘껏 노려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함께 산 지가 일 년이 넘었으니 이제 잠버릇 정도 모를 리가 없다. 부풀지 않는 날개뼈를 쏘아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 머리를 들이밀었더니 스가와라가 물기 없는 욕조 안에서 몸을 비비며 뒤척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 침대로 가자. 오이카와는 그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끼우고 흔들었다. 밀어내려는 듯 허우적거리던 손이 어깨에 걸쳐지긴 하였으나 힘주어 밀쳐내진 못하고 스르르 풀렸다. 오이카와는 밑으로 늘어지는 스가와라를 일으켜 세우다 말고 그의 반듯한 이마를 보았다. 숱 많은 눈썹과 단정한 콧대 같은 것이 시야를 메웠다. 새끼손가락이 꽂힐 정도의 자그마한 틈을 내고 숨쉬는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등 뒤에 자지 않고 있던 쿠로오가 다가와 서있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눈을 느릿느릿 끔벅이며 욕조 난간을 쥐고, 한동안 태아처럼 관절을 웅크린 스가와라 코우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아보자고 하면 어떻게 굴까. 흔쾌히 안아라, 하겠지. 키스하자고 하면. 머뭇거리다가도 허락하겠지. 한 번만 자자고 하면, 질색하다가도 어영부영 넘어가주겠지. 그런데 사귀자고 하면, 그건 안 되겠지. 그것만큼은 모든 단호한 속성을 가진 말들로 내치겠지. 특별히 댈 핑계도 이유도 없겠지. 싫다고 하면 그만인 고백들. 함께 있어도 나눌 수 없는 영역들이 있고 몸은 섞어도 마음까진 죽어도 섞지 않겠다는 그런 게,

 

그게 외로움인가.



 

8월


결국 스가와라는 팔월 중순에 미야기행을 결정했다. 도전장이라도 내밀 듯이 개강 전까진 돌아오지 않겠다고 확인 사살까지 했다. 그래서 오이카와도 가족들에게 선뜻 미야기로 내려가겠다고 통보를 했고, 쿠로오는 그들보다 조금 이른 날짜에 삿포로로 몸을 날랐다. 연락해, 하는 쿠로오의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인 것인지는 몰라도 스가와라는 미야기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제 셀카며, 오이카와의 사진이며, 창 밖의 풍경을 잔뜩 찍어 그에게 보냈다. 오이카와는 순행 방향으로 앉는 것을 선호했지만 스가와라가 바득바득 우겨 역행 좌석에 앉아 삶은 계란, 구운 오징어, 캐러멜 다섯 개를 시켜놓고 열심히 뜯었다. 그리고 배가 불러 노곤해질 때 즈음엔 오이카와의 어깨에 머릴 대고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으면서 미야기의 간이역에 도착하자마자 새침하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선 당분간 만나지 말자. 어차피 도쿄 가면 실컷 볼 거잖아.

 

오이카와는 미야기에 내려간 일주일 동안은 조금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과 함께 친척집을 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고, 간만에 아오바죠사이에 들러 초면인 입부생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눴으며, 때마침 방학을 맞아 미야기에 들른 이와이즈미와 재회했다. 끈덕진 인사를 나누고 동네 경기장에서 그와 배구공을 만지며 서로 안부를 물었다. 이와이즈미는 몇 년 새에 더 가속이 붙은 스파이크를 때렸다. 그는 놀랍게도 카라스노의 전 주장과 같은 대학을 다녔다. 이와이즈미는 제 입으로 그 얘길 꺼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전 주장이면 누구야. 사와무라 다이치?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작년 십이월의 도쿄역을 상기했다.

 

너 예전에 그 네코마 미들브로커랑…… 카라스노 세터랑 동거한다며?

으응.

어때? 지낼 만해?

나름 잘 맞아.

카라스노 세터는 뭐하고 지낸대냐?

이와짱이 언제부터 상쾌군 안부를 다 챙기고 그랬어?

미친놈아, 내가 챙기겠냐. 사와무라가 궁금해하니까 그런 거지.

 

그으래? 오이카와는 말꼬릴 길게 늘였다. 검지 끝으로 입술을 툭툭 치며, 적당한 말을 생각해냈다. 미간이 좁혀지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배구공의 부틸고무 표피를 슬슬 쓰다듬으며 오이카와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무슨 생각에선가 외로워한단 얘긴 죽어도 전하기 싫었다. 결국은 바쁘게 지내지 뭐, 하는 말로 타협을 봤다. 이와이즈미는 김이 쭈욱 샌 낯을 하고 오이카와의 품에 배구공을 집어 던졌다. 그러더니 잠깐의 침묵을 혀에 감고서, 또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카라스노 세터는 사와무라 안부 궁금해하지 않디?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아아…… 멍하니 그물 진 네트를 쳐다보며 새삼 머릴 얻어맞았다. 그러고 보니 스가와라의 입에서 한 번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 그으냥…… 오이카와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카라스노 주장은 미야기 안 내려와?

내려왔다는데.

상쾌군도 왔는데……

, 그래? 그럼 만났겠네, 둘이.

 

글쎄, 오이카와는 혀끝까지 엎어진 말을 도로 밀어 넣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만났으면, 그러면 뭐 어쩌려고. 불쑥 외로워하더라는 말이 튀어나갈 뻔했지만 그 대신 재채기가 나왔다. , 넌 여전하네. 이와이즈미는 등짝을 후려치며 통쾌하게 말했다. 본인이 스파이커인 거 자각 좀 해줄래, 이와짱! 오이카와는 얼얼한 등허리를 싹싹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치고 올라온 생각이, 만났을 수도 있겠구나. 오이카와의 눈이 흐려졌다. 여기서 당분간 만나지 말자. 뭔가 작정한 듯 청유하던 스가와라의 희멀건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와이즈미와 헤어진 후, 오이카와는 본가로 돌아가 핸드폰을 잡고 안방을 굴렀다. 연락한 사람은 쿠로오였다.

 

쿠로오는 나흘 동안은 삿포로를 여행하다가 잠시 도쿄로 돌아왔다. 그 다음은 교토에 있는 신사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어깨에 핸드폰을 얹어놓고 뺨을 붙여 통화를 하던 도중 찬장을 열어보고는 뜬금없이 물었다. 찬장에 있는 참치캔 내가 먹어도 돼? 실상 스가와라가 별 생각 없이 산 것이었지만 오이카와가 좋다고 허락을 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 쿠로오는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캔을 땄다. 그리고 그는 숟가락 하날 가져와서 다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혼자 있으니까 엄청 편해. 오이카와는 쿠로오에게 기념품이든 뭐든 사오라고 닦달을 했다. 두 사람은 낄낄대며 두서없이 이어진 통화 끝에 팔월 말에 도쿄에서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쿠로오는 깔끔하게 딴 캔 속에 숟가락 끄트머릴 들이밀고 눈 깜짝할 새에 참치를 해치웠다.

 

그는 설거지를 대충 해놓고 거실에 허리를 세워 앉았다. 삿포로에서 입은 옷들이 세탁기에서 잘 탈수되는 동안 tv를 켜고 예능 재방송을 봤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나서, 잠시 떠나간 곳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그는 부엌에 오고 가며 세탁기를 몇 번 확인했고, 탈수를 오 분 정도 남기고서 이번에 막 대학생으로서 처음 종강을 맞았을 코즈메와도 간단한 통화를 했다. 교토로 여행을 가기 전에 한 번 놀자는. 코즈메는 저답게 귀찮아했지만 두 시간 후에 고교 정문으로 나오겠다는 답을 주었다. 쿠로오는 통화를 마치고 작동이 멈춘 세탁기 문을 열고 차가운 옷가지들을 우르르 쓸어 꺼냈다. 그는 그것들을 널기 전에 빨래건조대에 나흘 전에 널려서 아무도 정리하지 않았던 마른 빨래들을 먼저 접었다. 오이카와의 옷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스가와라의 속옷과 이전에 알코올을 쏟았던 가을용 니트 한 벌. 쿠로오는 수납장을 열고 개킨 속옷을 차곡차곡 쌓은 뒤, 제 턱까지 쌓인 옷을 한아름 껴안고 옷장을 열어 젖혔다. 수납칸에 오이카와의 옷을 먼저 채워 넣고, 측칸 옷걸이에 스가와라의 니트를 걸다가 그는 문득

 

가쿠란 한 벌을 발견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가쿠란은 스가와라 코우시가 짐을 챙겨 입주했을 때부터 줄곧 있었다. 실로 꿰맨 천 소재의 이름표가 왼쪽 가슴께에 붙어있는 검정 가쿠란. 다만 그 중앙부가 휑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쿠로오는 눈을 치켜 뜨고 퀴퀴한 가쿠란 소매를 매만지다가, 손가락 사이를 벌려 단추와 단추의 간격을 얼추 어림잡아 보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분명, 위에서부터 두 번째 단추가 있어야 할 곳에 듬성듬성 뽑혀 나온 실밥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단추가 뜯겨 휑한 곳을 쓰다듬다 말고 다시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지만.

 

노는 중이야?

「오늘은 쉬는 중.

먼저 연락하랬으면서 왜 연락이 없냐.

「미안.

 

그는 코즈메와 만나기 한 시간 전에 스가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조금 긴 연결음 뒤로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선뜩 튀어나왔다. 쿠로오는 단추 얘기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누구누구 만났어? 심드렁하게 물으니 꼭 마주 접은 색지처럼 역시 심드렁한 답이 돌아왔다. 그냥 여러 사람…… 쿠로오는 입꼬리를 힘껏 밀어 웃었다. 코우시 군은 좋겠다. 나 지금 잠깐 도쿄 왔는데 집에 혼자라 엄청 외로워. 그러자 반대편에서 숨을 멎게 하는 침묵이 찾아왔다. 쿠로오의 입가에서 애써 만들어놓았던 웃음기가 가셨다. 단추 얘길 꺼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흘 전, 삿포로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달려있었던 단추. 하지만 스가와라가 선수를 쳤다.

 

「외롭냐?」

 

묻기보다는 꼭, 조소의 투가 어려있어서 쿠로오는 그마저도 웃어 넘기질 못하고 대답을 않았다. 꺼놓지 않은 tv에서 꼭 보고 싶지 않을 때 등장하는 개그맨이 다시 한 번 무리한 농담을 시도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크게 기사가 한 번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쿠로오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꺾어 리모컨을 주웠다. tv의 잡음이 소음되자 제가 얼마나 오래도록 침묵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외롭냐? 스가와라는 반복해서 질문하지 않았지만, 어째 쿠로오는 대답을 재촉 받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라는 말은 쉬웠지만 그렇게 대답하기는 싫었다. 화제를 돌리기도 어려웠다. 어영부영 고요가 가느다란 호흡처럼 이어지는 와중, 스가와라가 누구에게선가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맥박을 싹둑 끊었다.

 

「나도.」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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