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나라에 계신 친애하는 여왕님께.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머잖아 통신원이 진상품을 싣고 당도할 예정입니다. 항해를 위협하는 폭풍우가 물러가기를 기도해주십시오. 그때까지 대지에 달의 기운이 만연하기를 빌며, 왕국과 고귀한 피의 안녕을 빕니다.

 

불침번을 서는 경호병들과 야간 항해를 맡은 선장 세 명만이 눈을 뜨고 깨어있는 야심한 새벽, 디아나 4호의 짐칸에서 모두를 들썩이게 한 소동이 벌어졌다. 진상품이 죄 실려있는 칸이었다. 경호병들은 상황을 파악한 후, 닻을 잠시 내려 정차했다. 책임자 마츠카와 잇세이는 침상에 들이닥친 경호병의 보고를 받고 실크로 된 내의 위에 급히 옷걸이에 걸려있던 남색 코트만 잡아채어 걸쳤다. 서두르는 걸음으로 짐칸에 도착했을 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원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을 의사가 가운만 두른 채 먼저 와있었다. 그도 헐레벌떡 내달려왔는지 코끝에 걸쳐진 금테안경이 비뚤어져있었는데, 적잖은 당혹감에 손을 떠는지라 누군가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잇세이는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문제의 진상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갑판이 구불구불하게 젖어있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 뜨고 제 발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혀를 깨문 것이다.

 

자결을 시도한 이 진상품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열다섯, 열일곱 배기의 남아들 틈바구니에서는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웠지만 그들만큼이나 훌륭한 살결과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교류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잇세이가 성인식을 치르고 열여덟에 입궐하기 오 년 전부터 물 흐르듯 시작된 것이다. 대개 서역에서는 향수나 보석을 비롯한 사치품과 함께 기술을 전했고, 본국에서는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어린 소년들을 답례로 보냈다. 바다로 갈라진 그곳에서는 밀빛 피부를 가진 동양 소년들을 길조로 여겼다.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낯선 땅에 팔려가는 소년들은 종종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탈출을 감행하려 한 경우도 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그 조그만 몸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종종 이런 행위에 대한 처벌은 내구적으로 이루어졌다. 진상품에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채찍질 대신 토사제를 먹여 구토를 하게 만들거나,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 목을 따 겁을 주곤 했다. 그러면 며칠 내에 잠잠해졌다. 그러니 이처럼 자결을 감행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었다.

 

진상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일단 찬 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벤지다민을 발랐소. 누가 포도주 한 잔만 더 따라주면 안 되겠소?

특별감시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땅한 독방은 없지만.

 

제가 하겠습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서역 통신원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눈을 내리깔아 입에 붉게 젖은 손수건을 물고 온몸으로 떠는 청년을 응시했다. 물 밖으로 나와 갑판에 내던져진 생선이 팔딱거리듯이 부릅뜬 청년의 눈깔이 생생했다. 죽긴 글렀군, 생각하던 차에 통신원이 손짓을 했다. 경호병 몇 명이 밧줄을 끌어와 청년의 사지를 묶었다. 잇세이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등 뒤에서 수건으로 틀어 막힌 호흡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제정신을 차린 의원은 경호병을 통해 그의 방에 따뜻한 물 한 대야와 수건, 독한 버번위스키 한 병을 밀어 넣었다. 선체 상부가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짐칸에서 갑판 일층 쪽으로 올라온 청년이 끊임없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잇새로 거품 끓는 것이 보였지만 잇세이는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수틀리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혈이 우선이니까 가만히 있어.

……

 

몇 번 묶인 몸을 뒤틀던 청년은 이내 힘이 빠졌는지 잠잠해졌다. 잇세이는 위스키 한 잔을 몇 모금 끝에 비우고 창을 열었다. 밤바다의 무거운 냄새가 났다. 서슬 퍼런 달이 수면 위에 흐늘흐늘 흐려졌다. 그는 창을 뚫은 벽에 등허리를 붙이고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해초처럼 해먹에 널려 몇 번을 씨근덕댔다. 꼼꼼히 응시하고 있으니 어둠에 잠긴 뒷머리가 희미하게 은회색이었다. 머리칼이 각각 다른 하늘의 빛으로 넘실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잇세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청년도 줄곧 바다에 있었다. 바다는 수평선으로 천계와 맞닿아있어 하늘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몇 번이고 들어왔다. 청년의 정수리는 햇살 부서지는 아침이면 회백색으로 창백해졌고, 저녁 뱃고동이 울릴 즈음엔 분 바른 뺨처럼 붉어졌다. 잇세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청년의 머리카락엔 월광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집을 낸 듯 반으로 갈라진 달이 바닷물에 몸을 담가 그 음영이 흐드러지게 푸르렀던 밤이었다. 그날 청년이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느 정도 피가 멎었을 때, 잇세이는 청년의 입에 쑤셔 박힌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그것으로 위스키가 담겼던 잔을 닦았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 잇세이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힘껏 집어 넣어 일으켰다. 그의 늘어진 몸뚱일 받치고 있었던 해먹이 발끝에 얽혀 출렁거렸다. 잇세이는 그를 침상에 모로 눕히고 둥그런 두를 제 넓적다리로 받았다. 그리고선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야맹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조그만 창 안으로 빛이 젖었다. 죽은 사람의 호흡 같은 바람소리에서, 잇세이는 며칠 뒤 몰려올 태풍의 조짐을 발견했다. 사흘간은 폭우가 쏟아질 수도 있겠군. 일주일은 머무르다 가야겠어. 그 순간, 잇세이는 바람의 반이 청년의 허파에 실려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위스키 한 잔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코우시. 그러자 코우시라고 불린 남자가 찢어진 혀로 작게 웃었다.

 

진상품은 육체에 흠집이 나면 가치가 없어져. 알아. 그래서 혹한 처벌도 가하지 않지만, 대신 한 번 상흔을 입으면 바다로 던져지지. 그것도 알아.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잇세이는 청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저처럼 곧잘 해변과 부두에 있었다는 기억만을 할 뿐이었다. 당시 잇세이는 종자를 한 명 데리고 다녔고, 인접국에서 유행하던 장식의 술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코우시는 몇 번의 눈길로 그가 상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법 영리하던 잇세이는 먼저 입을 열어 물꼬를 트지 않았지만, 그 덕에 코우시와 헤어지며 겨우 이름만을 알게 되었다. 헤어지던 날은 잇세이에게 있어 크게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시퍼런 달, 바다뱀, 이름. 제 이름을 가르쳐준 코우시는 바다뱀을 기다린다는 말을 뒤로 해안가에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여왕은 동양 소년들을 귀히 여겨. 악질은 없을 거야.

퍽이나.

매일 비단을 걸치고 호사를 누릴 텐데.

비단을 입혀놓고 벗겨 희롱하겠지.

 

잇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곧 폭풍우가 올 것 같아, 바람소리를 듣자 하니. 말을 돌리자 코우시가 무릎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바다뱀 소리야. 그는 폭풍우가 사나흘 내로 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심해를 성대 삼아 끌어올린 파도소리가 스산했다. 마츠카와, 물을 좀 줘. 코우시가 타는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잇세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번위스키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위스키를 따랐다. 코우시의 뒷머리를 받치고 찰랑거리는 알코올을 넘겼다. 그는 찢어진 혀를 쥐어뜯는 독한 자극에 손끝을 퍼들퍼들 떨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제물이었지. 코우시가 살아있는 심장처럼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어.

 

시작은 무명의 소년이었다. 도호쿠에 석 달이 넘게 지속되던 폭풍우는 집채만한 파도를 일으켜 소년 한 명을 꿀꺽 삼킨 뒤로 감쪽같이 멎었다. 그 후로 풍향의 충돌로 폭풍우가 일어 어선이 바다에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하고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의장은 장마와 풍향변화로 바다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유월에 출생한 남아들 중에서 재물이 될 아이를 골랐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바다 근처의 신제에서 지내며, 제물이 될 때까지 사제로부터 수련을 받으며 살다 바쳐진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잇세이의 손에 제 손을 맞추었다. 갑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야. 모든 걸 바로잡자. 잇세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코우시의 몸은 미끈하다 못해 미끌미끌했다. 뱀의 비늘과도 같았다. 잇세이는 지문에 냉기를 남기는 그의 몸을 더듬으며 제 체온이 생각보다도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으레 타인을 보며 스스로를 알게 되는 법이다. 코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야윈 다리로 잇세이의 넓적다릴 휘감았다. 잇세이의 더운 몸뚱이에 밀착할수록 제 혈관이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을 느꼈다. 뚫린 창으로 절절한 앓음이 새어나갈까 걱정이 되었지만, 더 가열차게 울부짖는 파도 덕분에 부르르 떨리는 한숨까지 완연히 묻혔다. 잇세이가 목덜미를 핥는 동안 코우시는 반쯤 남은 버번위스키에 손가락을 담가 휘저었다. 마츠카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잊지마. 코우시가 그렇게 말한 순간, 잇세이는 짐칸에 갇힌 수십 명의 어린 소년들이 떠올랐다. 그는 동조해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이었다. 잠시 선잠에 들었던 잇세이가 눈을 떴을 땐 조그만 선실 내부를 푸르른 달빛이 빈틈 없이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에 누워있던 코우시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창 밖으로 괴성과도 같은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잇세이는 고개를 꺾어 창틀을 붙잡았다. 바닷물에 젖은 듯 시퍼런 달 주변으로 둥그스름한 구름이 모여있었다. 광이 끓듯 부글거리던 수면 위에서 이윽고 거대한 몸을 자랑하는 뱀 두 마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들은 달을 에둘러 허리를 휘었다. 막 심해 밑에서 솟아나온 두 짐승의 비늘 위에 눈을 흐리게 하는 월광이 섬뜩였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부서진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었다. 더 이상 울음과도 같은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면은 잠잠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

폐하껜 어떻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다음날, 잇세이는 통신원에게 자결미수의 진상품을 바다에 던져버렸노라고 설명했다. 머리를 탁상에 박아 다시 한 번 자결을 시도했고, 이마가 찢어져 흠집이 났으므로 더 손볼 수 없어 바다에 버렸노라. 그러자 통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새에 일어난 일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잇세이는 파이프에 토바코를 넣고 입에 물었다. 그는 선상으로 나와 난간을 쥐었다. 요 며칠 전과는 달리 하늘이 맑고 파도가 자잘했다. 그는 한참 사방이 텅 빈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쉬이 입에 담았던 것. 청년 말이다. 청년은……

 

청년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fin.







쿠로오.

 

이제 여긴 형편 없이 작아졌어. 모두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며칠 전에 먼지 쌓인 창고 선반을 치우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얘길 들었거든. 선체에 사람을 최대한 많이 태워야 하기 때문이겠지. 우드 씨가 그랬는걸. 우드 씨 기억하지? 부선장 말이야, 이젠 선장이 되었는데…… 여하튼 그 사람은 모두가 되도록이면 미련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 그래야 선체에 실을 물건이 적어질 테니까. 나는 고민하다가 앨범 하나랑 게임기를 챙기기로 했어. 그거 좀 가지고 간다고 엔진이 딸리진 않을 거 아냐. 청소는 치우는 재미가 아니라 뭔갈 발견하는 재미로 하는 거지. 앨범도 챙기다가 뒤지게 되었어. 중간중간에, 네가 써준 편지가 끼워져 있어. 너 열일곱 되고 나선 별로 써주진 않았지만…… 그 전의 것들 말야. 이것저것 헤집어 보다 보니 네가 사진을 찍을 때 자주 취하던 포즈, 혹은 구태여 사용하는 단어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그때마다 네가 어릴 적부터 내게 겁을 줬던 게 생각나. 우주를 떠돌다 보면, 소행성과 만날지도 몰라.

 

인류가 비슷한 걱정을 했었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어떡하나, 하는 거. 그런데 그 문제가 피부로 다가오기도 전에 이미 우린 여길 떠날 준비를 하게 되어버렸어. 내가 합류한 게 칠 년 전, 너는 그 전부터 있었으니 우리가 통틀어 아는 이별의 역사는 십 년이 훨씬 넘어. 보금자리로부터의 안녕. 조금 슬퍼도,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면 말이야……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 별에도 좋은 기회가 될 거야. 우리가 떠나면 숨쉬기가 한층 더 수월해지겠지. 좋아지면 더 좋아졌지 결코 악화는 없어. 결국 이 모든 건 예정되어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네가 떠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건가 싶어. 그렇지 않았으면 변할 것도 없었겠지. 이 별의 탄생에도 종말에도 인간은 없으니까.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단 건 우리 사정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적이 있지. 흙과 흙 사이에 낀 어중간한 존재들. 우리 근본은 유목민이고 유한이기에 그 어디에도 영속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너는 나보다 좀 더 근성 있는 인간이었지. 나는 눈앞의 것들이 중요했고. 모두 더 큰 목표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할 줄 한다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작은 게 더 소중할 수도 있잖아. 네 의견에 반대하는 건 아니야. 말했잖아, 악화는 없다고. 네가 보내준 데이터와 위성 사진 덕에 우린 어느 정도 탄탄한 인포를 완성했어. 이제 네가 전해준 그 새로운 별로 가려고 해. 거기 네가 있을지 모르겠어. 그렇게 말했더니 우드 씨가 네 흔적은 있을 거라고 했어.

 

그런 말 솔직히 위로 안 되는 거 너도 알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와 우주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비슷한 것 같아. 차라리 그 둘은 존재보다는 속성에 가깝지. 지금까지만 해도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잖아. 이를 테면 사후세계와 명왕성 같은 거. 요즘은 분주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 무언가 알아내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건 인간으로서 다른 존재들보다 월등하게 가지는 지적 호기심이라기보다는 되려 일차원적인 생존과 연관되어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무지와 암흑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발버둥이려나. 그런 걸 좀 더 근사하게 포장하면 사람들이 주장하고 나서는 지적 호기심이니 뭐니 하는 게 되겠지. 죽음도 결국 잘 알지 못해 두려운 거라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걸 두려워하며 사는 거야. 쿠로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너 없이 홀로 남겨지는 걸 많이 무서워했어. 역시,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러니까, 알지 못해서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지금은 그런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지. 나는 너 없이 네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챙기고 있으니까. 네 부재 속에서 나는 서툴지만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고, 예전에 상상하던 것만큼 어렵고 비참한 일이 아니라고도 느껴. 그런데도 여전히 선뜩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맨등보다는 복부로, 뒷목보다는 가슴으로, 얼음 위에 몸을 뒤집어 누운 듯 둥그런 한기가 모이는 때가 종종 있어. 칠 년. 네가 떠나고 내가 네 자릴 대신했지. 칠 년이면 적응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런데도 가끔은……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쿠로오.

 

네가 보내준 데이터에 의하면 신성新星은 하루가 약 18시간. 바이오리듬을 제대로 바꿔야겠지. 삼시세끼란 말도 사라질 거야. 아침과 점심을 먹으면 당일의 활동량은 모두 충족할 수 있을 테니까. 블랙홀 너머에 있기 때문에 활주로를 사선으로 잡고 연료를 상당 보류해두어야 할 거야. 그러니까 하루가 약 18시간이라고 해도 그것은 태엽에 태엽을 이어 조작된 기계에 의거한 시간에 불과하지. 엄청난 왜곡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시간을 잡아먹는 별이라고 해도 무관할 거야. 그곳에서의 한 시간은 아마도, 지구에서의 몇 십 년. 지구를 몇 십 년 후로 당겨 놓는다고. 더 이상 우린 이 별에 머물지 않을 테니 상관없는 것일까. 쿠로오, 이것 봐. 우린 여길 떠나기 직전까지도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살았어.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왜소해지고, 작아진 만큼 시간에 끌려 다녔지. 그게 일상이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어. 시간이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대단한 시간도 어마무시한 중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야. 18시간이 24시간의 몇 천 배라는 게 말이 돼? 그런데 정말로, 말이 된단 말이야. 시간이 마구 휘어지기도 하고 캐러멜처럼 쭉 늘어나기도 하고 반대로 짓눌린 스프링처럼 짤막해지기도 하고. 시간이 사람을 마구 끌고 간다고 우린 여태까지 믿어왔는데, 알고 보니 시간도 더 엄청난 물질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끌려가는 이의 뒷다리에 매달려 함께 끌려가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그렇게 생각해보면,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끌려가기만 하고 있어. 앞을 보고 무작정 질주하고 돌진하는 것들 중 하나야. 시간이 들쑥날쑥 앞당겨져서 엉망이 되어버린 건 여러 번 봤지, 꼭 네가 전해준 별이 아니더라도. 그런 별에 몇 시간 머물다 지구로 돌아오면 이 별에서는 이미 몇 십 년이 흐른 후일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시간이든 중력이든 뭐든…… 늘 상승구조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지만 하향을 그리는 건 본 적이 없거든. 넌 본 적 있어? 시간을 과거로 끄는 별을. 지구를 몇 십 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별을 본 적이 있느냔 말이야.

 

우리는 왜 이미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까. 이미 과거가 된 사람들을 우리는 대체 왜. 시간도 거스를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한 중력을, 사랑은 어떻게 해서 거스르는 걸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을 허물면서 말이야.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도 사랑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없을 거야. 여태 많은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것만큼은…… 그것이 우리 안에 내재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네 부재에 적응했지만, 부재를 인정했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네가 그리워. 엔진 가동되는 냄새가 나. 미끌미끌한 점성질의 기름, 숨구멍을 죄 조일 것 같은 그런 냄새. , 그 시간도 중력도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이 여전히 흔적으로서 남은 과거에 현존하지.

 

내가 나로부터 팽팽해지고 있어. 줄다리기를 하듯이 양끝으로…… 내 몸과 마음이 점점 멀어져. 이제 차차 여길 벗어날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해.

 

쿠로오.

 

우주를 떠돌다 보면, 소행성과 만날지도 몰라. 브레이크를 해제하고 엔진을 가동했을 때 선체가 와르르 무너지듯 떨렸어. 소행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더라고. 그래서 한동안은 내가 떠는 걸까, 아니면 떨리고 있는 것인가, 구분할 수도 없었지. 나는 안전벨트를 삼단으로 차고 그 속에 앨범과 게임기까지 구겨 넣었기 때문에 몸집의 두 배가 부풀어있었어. 벨트가 끊어지지 않는 게 다행이구나, 하고 우드 씨가 출발하기 전에 투덜거렸던 거 같아. 여하튼 궤도를 벗어날 때 엄청난 가속력이 붙어 선체가 180도로 뒤집혔어. 재빨리 소진된 엔진을 해제했지. 우드 씨는 조종석에 앉기 전에 웬 시꺼먼 초음파 사진 한 장에 입을 맞추면서 사랑한다하고 속삭였어. 우드 씨의 딸이야. 난산이라 태어나고 세 시간 뒤에 죽었다더라. 그러니까, 딸을 지구에 묻어두고 온 거지. 나는 앨범을 열어 네 사진에 입맞출까 하다가 징그러워서 그냥 관뒀어.

 

너는 소행성을 만났을까. 너는 어디일까. 죽은 걸까. 이 드넓은 우주에 있다 보면 말이지, 결국 죽음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돼. 그래서 너는 틀림없이 있다, 여기 어딘가에. 그런 믿음도 갖게 되지. 우드 씨는 망상이고 착각이라고 언질 줬지만 설득력 없어. 그 사람, 떠나기 전에 죽은 딸의 사진에 입을 맞췄잖아. 죽은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냉랭한 척해봤자 그 무엇으로도 보이지 않아. 그래서 너는 어디야. 엇갈릴 수도 있겠다. 여긴 벽도 바닥도 천장도 없이 사방으로 뻗은 곳이니까. 혹시 몰라? 새로운 별에 내가 도착했을 때, 넌 되려 예전으로 돌아간 지구에 느닷없이 발을 딛게 될지. 그럼 너는 아마 내게 편지를 쓰겠지.

 

안녕, 여긴 잊혀진 별 지구야. 여기 바다엔 네가 떠날 때 떨군 연료통이 침몰해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내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먹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네 목소리가 날마다 찾아와 안부를 물어. 그럼 나는 거기에 답장을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진 몰라도, 나는 거기에 있는 너를 그리워할 거야. 인류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별을 나는 추억하겠지. 추억이 기억과 다른 점은 바로 그런 것일 거야.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 언제든 현존할 수 있을 때…… 우린 잊고 싶은 기억들을 추억이라고 부르지 않아.

 

방금 머얼리서, 별 하나가 폭발하는 것을 보았어. 아주 먼 곳이었나 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창이 눈부시게 번쩍였을 뿐이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우드 씨는 수명을 다한 별일 거라고 그랬어. 나는 이렇게 생각해. 저건 소행성을 만난 별이야. 그렇다면 그건 무슨 별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을 못 잡겠어. 우린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레이더의 사각지대에 있는 별들은 눈으로 절대 식별할 수가 없어. 그건 거대한 빛덩이였을 뿐이야. 지구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설마.

 

레이더의 센서가 점점 더 예민한 소릴 내고 있어. 가까워지고 있나 봐. 대신 커다란 관문 하날 거쳐야 하지. 우린 웜홀을 통해 선체를 무사히 빼돌릴 거야. 네가 전해준 별에 안전하게 도착하겠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살아왔으니까. 개화를 꿈꿀 거야, 사람들은. 과거의 보금자릴 잊고 그곳에서 터전을 가꾸겠다고 다짐할 거야. 나 역시 그렇게 할 것 같아. 네가 전해준 별이잖아. 다른 별도 아니고 네 흔적이 다다른 별. 그래도 가끔은 잊혀진 별이 그리울 것 같아. 우리들의 추억이 거기에 죄 묻혀있어. 이미, 혹은 언젠가 소행성을 만날 그 별. 부딪쳐 폭발하고 그 잔재만 조각조각 남아도 이제 상관없는 그 별. 거기에 너와 내가 있어. 이 순간에 멀찍이 소행성 하나가 몸을 굴리며 맹렬하게 달려가. 누군가의 추억이 묻혀있을 또 다른 별이 곧 사라질 것 같아. 나는 창틀 대신 품 속의 앨범을 꽉 붙들고서, 우릴 지나는 소행성의 꼬리에다 대고 인사했어.

 

안녕, 잘 가. 잘 가.






선배가 맘에 든 건 이학년이 되어서였다. 좋아진 것은 언제부터라고 똑 부러지게 확언할 수 없지만 그거 하나는 단언할 수 있다. 선배와 제대로 대화란 걸 하게 된 것도 이학년부터다. 새내기 OT는 필수가 아니라는 주변 말을 주워듣고 부러 가지 않았고, 일학년을 보낼 동안은 뾰족한 목표 없이 괜찮다는 강의는 이것저것 찔러보았다. 그나마 불참 시 페널티가 있다는 경고장을 받고 발 뒤축을 질질 끌어 참석한 것이 이학년 학과 진입생 파티였다. 거기서 그가 나눠주는 스케줄러와 학교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펜을 받았다. 재수를 했다는 그는 졸업반 스물네 살이었다.

 

조용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수다스럽지도 않았다.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든 통하지 않나. 특별한 구석은 없는데 그런 이유로 튀지도 걸리적거리지도 않는 사람. 그래서 처음엔 맘에 들었다. 꽤 나랑 닮은 구석이 있구나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로서는 늘 적당히가 최선이었고, 그도 나름대로 적당한 사람 같았다…… 꼭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수강신청에 실패하고 삼사학년 권장용 전공선택강의를 무리하게 들으며 그와 시선이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몇 번 얽히면서였다. 어느 때부터다, 라기 보다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듯 천천히 경과하면서…… 그러니까, 시답잖게 느껴졌던 과정이라는 것이 그에게 꼭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주 시꺼먼 흑발도 아니요, 또 허옇게 질린 백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채도를 차지하고 있을 법한 잿빛 머리카락이 이미 그에 대한 설명을 절반 해주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 어중간한 사람이었다.

 

츠키시마, 동아리 지원한 거 있어?

아뇨.

새내기 땐 해봤어?

그다지……

레저 클럽 들어오는 건 어때? 동아리 하나쯤은 해야지.

거기선 뭐 하는데요.

당구 좀 치다가…… 소모임으로 술 마시고?

 

선배는 당구를 못 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고백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꽤 별볼일 없는 투로 지나가는 말처럼 던져놨다. 그냥 술동이야, 술동. 그가 능숙하게 왼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어깨를 후려쳤다. 알고 보니 그는 레저 클럽 말고도 배구 동아리에도 들어있었다. 병행하기 힘들지 않나요? 걱정은 둘째치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가 어느 쪽으로 해석했든 괜찮아라는 대답이 일관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예상답안을 내놨다. 진짜 괜찮다든가, 혹은 괜찮은 척이라든가, 모 아니면 도라기보다는 그 말을 기계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하다. 안 괜찮다는 말을 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많은 것들이 나를 상당히 귀찮게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떨까.

 

나는 적당한 사람이다. 적당함과 어중간함은 다르다고…… 이전에는 몰랐지만 선배를 보며 조금씩 알아간다. 둘 모두 100%는 아니라는 성향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뉘앙스는 상당한 차이를 띤다. 적당하다 보면 안주하게 되고, 또 잔가지도 많이 쳐내게 되는 법이지 않은가. 아직까지 불만족스럽진 않다. 적당한 것으로는 안 된다는 계기를 만들어줄 뭔가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는다. 그런 식이다. 어중간함이라 하면, 적당함보다 한 계단 위에 있는 상태가 아닐까. 쉽게 말하면 발전된 적당함말이다. 적당함을 인지한 이후에, 더 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때 바로 어중간함이 되는 것이다. 선배는 레저 클럽에서 당구는 못 쳤지만 참견은 잘한다고 했다. 배구에선 포지션 뭐예요? 세터. 그런데 주전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그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믿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차차 깨달아가며 나는 선배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일 그의 첫인상이 비호감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그를 가까이하지도 않을 정도로 꼴사납게 보고 있지 않았을까. 어중간함이라는 것은 참으로 그렇다. 본래 의욕이 앞서지 않는 이들은 적당한 사람 앞에서 그렇지 않나. 지금만으로도 충분해 보이는 사람을 더 완벽하게 완성시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건 아무래도, 없는 것이다. 어중간한 사람은 그 자체로 이물감이다. 특유의 원근 없는 거리로,

 

츠키시마는 연애 안 해?

……관심 없는데요.

에헤이, 지금 안 하면 너 나중에 후회한다.

 

알아가고 싶다는 듯 굴지만 사실은 알지 못해도 상관 없는 거지. 그는 쓸데없는 것엔 부러 고개를 더 들이밀고, 진정 중요한 것은 조용히 물러서 응시하며……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믿는 것으로 사고를 맺는다. 이게 최선을 다하는 그만의 방법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그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난 구석 없이 그렇게 어떤 종류의 인간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팔을 벌릴 때마다 내가 피부를 거친 뼛조각으로 사뭇 느끼는 것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군집 속에 내가 있고, 어쩌면 나 역시 그가 최선을 다하는 방법으로써 중요한군집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

 

있지, 츠키시마.

.

 

또한 내가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납득해버리고 만다는 것 말이다. 있지, 있지, 얘기 하나 들어줄래. . 꼭 비밀로 해야 한다. 왜 저한테 비밀 얘길 해요? 츠키시마는 뭐랄까, 한 귀로 듣고 흘려줄 것 같달까…… 거기서 그는 암묵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래서 그가 무슨 비밀을 들려주든 내가 들을지언정 그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와 비밀을 나누기보다, 비밀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지 않은 시점에서 엿들은 것마냥 밀려드는 죄책감. 선배는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일주일 전 스포츠관에서 폐장시간에 일어난 낙하사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따로 요약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는 핵심만 골라 말해주었다. 얼마 전에 체육관 조명이 떨어져서 주전세터가 중상을 입었다. 물론 사고였다. 하지만 내심 기분 좋았다. 당분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되었는데…… 당분간이 아니면 좋겠다. 미친놈같이 보일진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미친놈이 맞고…… 요즘 주말마다 신사에 가서 빌고 있다. 걔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츠키시마, 츠키시마. 듣고 있어? , 듣고 있어요.

 

그가 나를 제 자취방에 초대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마실래? 맥주를 땄지만 내가 고개를 저어서 그가 두 캔을 모조리 마셔버렸다. 오늘 병문안 갔다 왔어. 그는 냉장고를 뒤져 세 번째 맥주를 따며 말문을 텄다. 나는 그가 거실 바닥 위에 깔아준 요에 어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몸을 엉거주춤하게 일으켰다. 시야에 수직으로 뒤집힌 소파다리만 멀뚱히 보다가 갑자기 쨍한 부엌 조명을 바로 보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올리자, 그가 조명 밝기를 줄여주고 탁자 앞에 다릴 꼬고 앉았다. 캔을 입가에 가져갈 때마다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베갯잇을 쥐었다 펴며 따분한 손장난을 하다가, 눈을 내리깔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병문안은 왜 가요?

친했으니까. 안 가면 이상하잖아.

친했어요?

.

 

선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세 번째 맥주를 모조리 비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가 안중 밖이었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맘에 드는 사람도 뭣도 아니었다면……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뭘 하고 있었으려나.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냉국에 빠지는 그런 비밀을 전해 듣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집에 고치를 친 누에처럼 움츠려 누워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문득 그가 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텅 빈 맥주캔이 탁자 유리와 시원하게 부딪치는 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성긴 걸음으로 이불을 헤집다 말고 조그맣게 웃었다. 뭐야, 내가 츠키시마 군 잡아먹기라도 해? 그 말에 내가 미간을 찌푸릴 때 즈음 그가 부엌 스위치를 내렸다. 좁은 방이 완연한 어둠에 잠겼다. 안경을 벗어 더듬더듬 베개 옆에 얹어놓으니 더욱 사방이 침침했다. 그만큼 우물쭈물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제 와 그를 미워해볼걸, 미워하려는 시도라도 해볼걸,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더 삐뚤었다면…… 바특 비틀어진 그를 똑같이 비틀어 보았다면 되려 정직하게 바로 선 그의 모습을 단번에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착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아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는 선배의 수더분한 구석보다도 묘하게 추잡스러운 이면들이 예각으로 날아와 머리에 박히지만, 그게 전부다.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맘에 들지 않지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 평소라면 쉽게 묻힐 한숨이 숨죽인 고요 속에서 두각을 보였다. 문득 선배가 내 팔뚝 위로 손을 얹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힘있게 주무른다. 그가 뭘 하는지 안다. 나를 협박하는 것이다. 내 편이 되어줄 거지? 하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저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면서. 그는 그런 것을 세련되게 요구하지만, 나에겐 재간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면 요구보단 구걸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건 싫다. 나는 다시 기력이 다하고, 입을 열어서 뭐든 그르칠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기로 결정한다. 공범자가 된 기분. 아니, 애초에 선배의 범행이 아니지만 그는 꼭 제가 모든 일을 꾸민 것처럼 군다. 눈을 감으니 어둠 속에서 푸른빛으로 울렁거리는 벌레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눈꺼풀을 닫은 채로 열심히 눈을 굴리는 와중, 내 팔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뒷덜미를 눌렀다. 낮지는 않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얘기 하나 해줄까.

……

까마득한 옛날에, 신이 에덴동산을 만들었는데,

 

아담을 만들고, 그 다음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지.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선물로 주면서 그런 거야. 여기 있는 거 너네 맘대로 해도 상관없는데, 선악과는 건들지 말아라. 츠키시마, 이거 무슨 얘긴지 알지? 이브는 꽤 똑똑한 인간이었던 거야. 시키는 대로 구부정하게 말 잘 듣는 녀석들 중엔 똑똑한 애들 별로 없잖아. 선악과란 게 대체 뭐길래, 싶다가 눈치를 좀 챘겠지. 저걸 먹으면 뭔가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겠구나. 그리고 웃기잖아. 에덴동산을 선물로 덜컥 줘놓고서 정작 거기서 자라는 걸 먹지 말라니까, 누군들 의심을 못하겠어. 이브가 한참 궁금해하던 와중에 뱀이 나타난 거지. 따 먹어보라고 유혹을 하지 않든? 이 뱀이라는 생물도 신이 만든 건데 말이야, 이브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모든 게 너무 모순적인 거야. 신이란 작자가 인간도 선악과도 만들고 뱀도 만들었는데, 정작 그것들의 양상은 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있으니까…… 그때 즈음 깨달은 거지. 인간이 평생 말이나 잘 듣고 살다 죽으라고 있는 존잰 아니구나. 그래서 과감하게 그걸 베어 먹었어. 그래서 이브는 이성과 지혜를 얻고 그 대가로 괴리와 낙담도 얻게 된다. 츠키시마, 적당히 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가 허를 찔러왔다. 내내 그의 검지 지문이 진하게 묻었을 뒷목이 절절하게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에 선명한 잇자국이 났을 것이다. 선배가 검지로 곧추 세워 내 뒷덜미에 원을 그렸다. 앞과 뒤로 이야기의 흔적들이 지그시 남는다.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자는 쾌차 후 복귀할 것이고, 그는 다시 주전에서 내려올 것이며, 또 괜찮단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를 누빌 것이다. 그리고 제일 괜찮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은 바로 내가 되지 않겠는가. 적당히 살아가는 내게 그와의 관계에서 남는 것은 이런 종류의 불편함. 붙잡고 놓지 못할 어중간한 마음들.

 

결국 이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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