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나라에 계신 친애하는 여왕님께.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머잖아 통신원이 진상품을 싣고 당도할 예정입니다. 항해를 위협하는 폭풍우가 물러가기를 기도해주십시오. 그때까지 대지에 달의 기운이 만연하기를 빌며, 왕국과 고귀한 피의 안녕을 빕니다.
불침번을 서는 경호병들과 야간 항해를 맡은 선장 세 명만이 눈을 뜨고 깨어있는 야심한 새벽, 디아나 4호의 짐칸에서 모두를 들썩이게 한 소동이 벌어졌다. 진상품이 죄 실려있는 칸이었다. 경호병들은 상황을 파악한 후, 닻을 잠시 내려 정차했다. 책임자 마츠카와 잇세이는 침상에 들이닥친 경호병의 보고를 받고 실크로 된 내의 위에 급히 옷걸이에 걸려있던 남색 코트만 잡아채어 걸쳤다. 서두르는 걸음으로 짐칸에 도착했을 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원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을 의사가 가운만 두른 채 먼저 와있었다. 그도 헐레벌떡 내달려왔는지 코끝에 걸쳐진 금테안경이 비뚤어져있었는데, 적잖은 당혹감에 손을 떠는지라 누군가 포도주 한 잔을 건네주었다. 잇세이는 웅성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문제의 진상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갑판이 구불구불하게 젖어있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 뜨고 제 발치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혀를 깨문 것이다.
자결을 시도한 이 진상품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열다섯, 열일곱 배기의 남아들 틈바구니에서는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웠지만 그들만큼이나 훌륭한 살결과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교류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잇세이가 성인식을 치르고 열여덟에 입궐하기 오 년 전부터 물 흐르듯 시작된 것이다. 대개 서역에서는 향수나 보석을 비롯한 사치품과 함께 기술을 전했고, 본국에서는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어린 소년들을 답례로 보냈다. 바다로 갈라진 그곳에서는 밀빛 피부를 가진 동양 소년들을 길조로 여겼다.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낯선 땅에 팔려가는 소년들은 종종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탈출을 감행하려 한 경우도 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그 조그만 몸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종종 이런 행위에 대한 처벌은 내구적으로 이루어졌다. 진상품에 물리적으로 손상을 입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채찍질 대신 토사제를 먹여 구토를 하게 만들거나, 소년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 목을 따 겁을 주곤 했다. 그러면 며칠 내에 잠잠해졌다. 그러니 이처럼 자결을 감행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었다.
진상품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일단 찬 수건으로 지혈을 하고 벤지다민을 발랐소. 누가 포도주 한 잔만 더 따라주면 안 되겠소?
특별감시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마땅한 독방은 없지만.
제가 하겠습니다. 마츠카와 잇세이는 서역 통신원의 말을 잘랐다. 그리곤 눈을 내리깔아 입에 붉게 젖은 손수건을 물고 온몸으로 떠는 청년을 응시했다. 물 밖으로 나와 갑판에 내던져진 생선이 팔딱거리듯이 부릅뜬 청년의 눈깔이 생생했다. 죽긴 글렀군, 생각하던 차에 통신원이 손짓을 했다. 경호병 몇 명이 밧줄을 끌어와 청년의 사지를 묶었다. 잇세이가 제 방으로 돌아가는 동안 등 뒤에서 수건으로 틀어 막힌 호흡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시고 제정신을 차린 의원은 경호병을 통해 그의 방에 따뜻한 물 한 대야와 수건, 독한 버번위스키 한 병을 밀어 넣었다. 선체 상부가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짐칸에서 갑판 일층 쪽으로 올라온 청년이 끊임없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잇새로 거품 끓는 것이 보였지만 잇세이는 코르크 마개를 따며 말했다.
수틀리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혈이 우선이니까 가만히 있어.
……
몇 번 묶인 몸을 뒤틀던 청년은 이내 힘이 빠졌는지 잠잠해졌다. 잇세이는 위스키 한 잔을 몇 모금 끝에 비우고 창을 열었다. 밤바다의 무거운 냄새가 났다. 서슬 퍼런 달이 수면 위에 흐늘흐늘 흐려졌다. 그는 창을 뚫은 벽에 등허리를 붙이고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해초처럼 해먹에 널려 몇 번을 씨근덕댔다. 꼼꼼히 응시하고 있으니 어둠에 잠긴 뒷머리가 희미하게 은회색이었다. 머리칼이 각각 다른 하늘의 빛으로 넘실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잇세이가 바다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청년도 줄곧 바다에 있었다. 바다는 수평선으로 천계와 맞닿아있어 하늘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몇 번이고 들어왔다. 청년의 정수리는 햇살 부서지는 아침이면 회백색으로 창백해졌고, 저녁 뱃고동이 울릴 즈음엔 분 바른 뺨처럼 붉어졌다. 잇세이가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청년의 머리카락엔 월광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칼집을 낸 듯 반으로 갈라진 달이 바닷물에 몸을 담가 그 음영이 흐드러지게 푸르렀던 밤이었다. 그날 청년이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느 정도 피가 멎었을 때, 잇세이는 청년의 입에 쑤셔 박힌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그것으로 위스키가 담겼던 잔을 닦았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 잇세이는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힘껏 집어 넣어 일으켰다. 그의 늘어진 몸뚱일 받치고 있었던 해먹이 발끝에 얽혀 출렁거렸다. 잇세이는 그를 침상에 모로 눕히고 둥그런 두를 제 넓적다리로 받았다. 그리고선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야맹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조그만 창 안으로 빛이 젖었다. 죽은 사람의 호흡 같은 바람소리에서, 잇세이는 며칠 뒤 몰려올 태풍의 조짐을 발견했다. 사흘간은 폭우가 쏟아질 수도 있겠군. 일주일은 머무르다 가야겠어. 그 순간, 잇세이는 바람의 반이 청년의 허파에 실려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위스키 한 잔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만이야, 코우시. 그러자 코우시라고 불린 남자가 찢어진 혀로 작게 웃었다.
진상품은 육체에 흠집이 나면 가치가 없어져. 알아. 그래서 혹한 처벌도 가하지 않지만, 대신 한 번 상흔을 입으면 바다로 던져지지. 그것도 알아.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잠시 멎었다. 잇세이는 청년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저처럼 곧잘 해변과 부두에 있었다는 기억만을 할 뿐이었다. 당시 잇세이는 종자를 한 명 데리고 다녔고, 인접국에서 유행하던 장식의 술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코우시는 몇 번의 눈길로 그가 상인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법 영리하던 잇세이는 먼저 입을 열어 물꼬를 트지 않았지만, 그 덕에 코우시와 헤어지며 겨우 이름만을 알게 되었다. 헤어지던 날은 잇세이에게 있어 크게 세 조각으로 나뉘었다. 시퍼런 달, 바다뱀, 이름. 제 이름을 가르쳐준 코우시는 바다뱀을 기다린다는 말을 뒤로 해안가에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여왕은 동양 소년들을 귀히 여겨. 악질은 없을 거야.
퍽이나.
매일 비단을 걸치고 호사를 누릴 텐데.
비단을 입혀놓고 벗겨 희롱하겠지.
잇세이는 고개를 들었다. 곧 폭풍우가 올 것 같아, 바람소리를 듣자 하니. 말을 돌리자 코우시가 무릎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저건 바다뱀 소리야. 그는 폭풍우가 사나흘 내로 멎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심해를 성대 삼아 끌어올린 파도소리가 스산했다. 마츠카와, 물을 좀 줘. 코우시가 타는 목소리로 부탁했지만 잇세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버번위스키가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위스키를 따랐다. 코우시의 뒷머리를 받치고 찰랑거리는 알코올을 넘겼다. 그는 찢어진 혀를 쥐어뜯는 독한 자극에 손끝을 퍼들퍼들 떨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제물이었지. 코우시가 살아있는 심장처럼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사제 이후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어.
시작은 무명의 소년이었다. 도호쿠에 석 달이 넘게 지속되던 폭풍우는 집채만한 파도를 일으켜 소년 한 명을 꿀꺽 삼킨 뒤로 감쪽같이 멎었다. 그 후로 풍향의 충돌로 폭풍우가 일어 어선이 바다에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하고 마을이 술렁이기 시작하자, 의장은 장마와 풍향변화로 바다가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유월에 출생한 남아들 중에서 재물이 될 아이를 골랐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바다 근처의 신제에서 지내며, 제물이 될 때까지 사제로부터 수련을 받으며 살다 바쳐진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잇세이의 손에 제 손을 맞추었다. 갑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야. 모든 걸 바로잡자. 잇세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코우시의 몸은 미끈하다 못해 미끌미끌했다. 뱀의 비늘과도 같았다. 잇세이는 지문에 냉기를 남기는 그의 몸을 더듬으며 제 체온이 생각보다도 따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으레 타인을 보며 스스로를 알게 되는 법이다. 코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야윈 다리로 잇세이의 넓적다릴 휘감았다. 잇세이의 더운 몸뚱이에 밀착할수록 제 혈관이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을 느꼈다. 뚫린 창으로 절절한 앓음이 새어나갈까 걱정이 되었지만, 더 가열차게 울부짖는 파도 덕분에 부르르 떨리는 한숨까지 완연히 묻혔다. 잇세이가 목덜미를 핥는 동안 코우시는 반쯤 남은 버번위스키에 손가락을 담가 휘저었다. 마츠카와, 살아있는 사람들의 본질은 죄 따뜻해. 잊지마. 코우시가 그렇게 말한 순간, 잇세이는 짐칸에 갇힌 수십 명의 어린 소년들이 떠올랐다. 그는 동조해주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이었다. 잠시 선잠에 들었던 잇세이가 눈을 떴을 땐 조그만 선실 내부를 푸르른 달빛이 빈틈 없이 메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에 누워있던 코우시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창 밖으로 괴성과도 같은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잇세이는 고개를 꺾어 창틀을 붙잡았다. 바닷물에 젖은 듯 시퍼런 달 주변으로 둥그스름한 구름이 모여있었다. 광이 끓듯 부글거리던 수면 위에서 이윽고 거대한 몸을 자랑하는 뱀 두 마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들은 달을 에둘러 허리를 휘었다. 막 심해 밑에서 솟아나온 두 짐승의 비늘 위에 눈을 흐리게 하는 월광이 섬뜩였다. 이윽고, 그들은 다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부서진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었다. 더 이상 울음과도 같은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면은 잠잠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폐하껜 어떻게 말씀을 드리죠.
제가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다음날, 잇세이는 통신원에게 자결미수의 진상품을 바다에 던져버렸노라고 설명했다. 머리를 탁상에 박아 다시 한 번 자결을 시도했고, 이마가 찢어져 흠집이 났으므로 더 손볼 수 없어 바다에 버렸노라. 그러자 통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새에 일어난 일은 거기서 일단락되었다. 잇세이는 파이프에 토바코를 넣고 입에 물었다. 그는 선상으로 나와 난간을 쥐었다. 요 며칠 전과는 달리 하늘이 맑고 파도가 자잘했다. 그는 한참 사방이 텅 빈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무언가 기억해내려 애썼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쉬이 입에 담았던 것. 청년 말이다. 청년은……
청년은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 수십 년 바윗돌을 갉아먹은 파도에 씻겨내려 없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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