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빛이나 어둠보다 안개가 더 두렵다. 늘 애매한 것들에 둘러싸여는 있었지만 그것에 진절머리라도 난 것인지 정확히 하는 게 없으면 분통이 터졌다. 안개는 극단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다고도 할 수 없고 저렇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예컨대 오다가다사이에 있는 멈추다같은 속성에 더 가까웠다. 늘 내 입으로 토비오가 재수없다고 말해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기에서 더 진보된 가증스러움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있었다. 토비오는 단순했고, 그래서 차라리 빛이나 어둠이었다. 빛에 눈이 멀면 멀었고 어둠에 시야가 차단되면 차단되는, 그런 식이었다. 그에 비하면 코우시는 안개였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안개의 속성을 혐오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장 눈앞에 펼쳐진 일차적인 풍경은 보여주어도 막상 보고 싶은 것은 보지 못하게 해서, 빛과 어둠 속에 놓여있을 때처럼 판단이 곧추 서질 못했다. 희부연 하늘을 보며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먹구름이라고 영 시꺼멓지는 않았다. 비가 오기 직전의 구름은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는 애처럼 멍해 보이기도 했고 제 뒤로 꾸역꾸역 먹어가는 햇살까지 등지고 있어서 쓸데없이 허옇기까지 했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쉬이 하늘의 얼룩처럼 보였다. 나는 빛이 될락말락 하얀 멍울자국을 남겨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름의 욕설을 읊조렸다. 차라리 멀어버려라, 멀어버려라……

 

내가 코우시를 더 싫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안개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줄곧 안개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서 동어를 들으니 여태 내가 부정해왔던 속성들이 죄 나의 것인 마냥 되돌아왔다. 매 다르다고 확신했던 사람으로부터 의외의, 썩 달갑지만은 않은 동일성을 발견하고 나는 뇌수로 토악질을 했다. 코우시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를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나 요즘은 토비오보다 상쾌군이 더 짜증나더라고. 하지메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몇 마디를 던지니 걔가 참 별거 아니라는 투로 받아 쳤다. 난 네가 더 짜증나더라. 나는 하지메다운 대답을 받아내고 헤벌쭉 웃었다.

 

상쾌군 엄청 의외다.

뭐가?

되게, 까졌어.

 

나는 동이 다 트지 않은 새벽에 코우시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애냐, 혼자 간다, 하고 걔는 먼저 뛰쳐나왔는데 나는 내 집에 내가 홀로 남겨진 기분이 싫어서 바득바득 데려다 준다고 우기고 뒤따라 나왔다. 밤낮으로 일교차가 심한데다가 간밤에는 비까지 쏟아져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치교 난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걔는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히죽히죽 잘도 웃었다. 자전거를 질질 끄는 건 멋없어서 빈손을 저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왔으나 나는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며 마당에 주차된, 중학생 때까지만 타고 말았던 자전거를 끌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곧 시야가 얼룩졌다.

 

의외…… 맞아, 진짜 의외지?

 

잿빛 얼룩 속에서 코우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습관처럼 미간을 오므렸다. 말이나 하지 말걸. 안전빵을 싫어해서 미지의 영역이라는 걸 한번도 포기해볼 생각은 한 적이 없었는데, 또 그게 오래도록 미지로 남으면 열불이 났다. 방금 나는 먼저 의외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그 애의 미지를 너무 쉽게 인정해버린 셈이 아닌가. 지식의 그릇 운운하며 모르면 아는 척을 않는 거라던 어른들 말씀에 틀린 것이 없다. , 너도 의외던데. 코우시는 열심히 안개 속을 걸으며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똑같은 의외인데 나는 항복에 가깝고 걔는 봐준다는 투에 가까웠다. 생각과 생각의 마디 사이에 질퍽질퍽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별로다.

 

토비오짱이 날래는 판에서 용케 잘 버텨? 내가 말해놓고도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코우시가 그래 너 유치하다, 하고 사살도장을 박았다. 그 애 얘긴 그다지 뒤에서 하고 싶진 않아. 나는 코우시 뒷목이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러냐 하고 말았다. 길고 긴 다리를 지나는 동안 나는 잠시 어젯밤의, 그렇게 선명하지 않은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걔는 처음이냐고 묻는 것이 민망하게 능숙해 보였다. 나도 아주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라 어떤 게 능숙하고 어떤 게 서툰 건지 알았다.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서툴면 더 당당하고 괴팍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 턱을 쓰다듬으며 말꼬리를 끌었다. 걔는 어깨를 바싹 움츠린 채로 걷다 말고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코우시는 어제 많이 흐느꼈다.

 

, 역시 상쾌군은 싫어. 코우시는 그걸 잘 안 맞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언제 뭘 맞춰봤다고 그러셔? 나는 음전하지 못하게 무어라 하려다가 관두었다. 우리는 어제 꽤 섬세하고 꼼꼼하게 서로를 안았다. 그래서 그 긴 행위가 마치 한 세트의 경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찬찬히 탐색하고 분석하고, 그러다가…… 탐색만 하고 끝난 것 같은 뒤끝을 남기기는 하였어도. 나는 고개를 비틀어 그 앨 마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내가 해야 할 말을 걔가 먼저 꺼냈다. 맨살까지 부대낀 사이에 별로 알아낸 바가 없는 것 같다. 아니, 맨살만 부대낀 사이구나.

 

바로 학교 가?

. 외박해서 가방도 여기 있잖아.

일찍 가면 할 게 있나.

체육관 열쇠는 아직까진 내 담당이거든.

 

다리를 다 건넜을 즈음에 안개가 더욱 풍성해졌다. 나는 젖은 공기가 자욱한 틈에서 손을 휘젓는 코우시의 인영을 발견했다. 아직 햇빛이 쏟아지지 않아서 시야가 좁다. 나는 어물어물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 . 학교에서 졸지 말고. 안 졸아. 우리는 습기가 그득한 강주변을 중화라도 시키려는 듯 건조한 대화를 마치고서 각자 등을 돌렸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너왔던 다리를 도로 건너며 아쉬운 생각을 했다. 역시 자전거를 끌고 올 것 그랬어. 걸리적거리고 멋없지만. 코우시가 등 뒤로 낚싯줄 같은 자전거 바퀴소리 멀어져 가는 걸 들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霧雨


요즘 봄비가 많이 내린다. 매일 오는 건 아닌데, 한 번 내리면 제대로 내렸다. 콸콸 쏟아지는 폭우는 아니었지만 정말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또 비가 오는 날엔 해가 그렇게 안 나서 하늘이 얼룩져있었고 가장 낮은 곳에는 김 서린 주전자처럼 안개가 휘날렸다. 그것도 전부 개울 주변이나 늪지대가 되어버린 풀숲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으므로 시내 사거리에 위치한 세이죠로 통학하는 나로서는 볼 일이 별로 없었지만 최근엔 예외였다. 굳이 거기에 가지 않아도 안개는 어디에서든 도사리고 있었다. 그저께는 잡화점에서 코우시를 봤다.

 

나는 집에 화분 하날 들여서 따로 물을 줄 생각으로 분무기를 사러 들렀는데 걔는 엄청 커다란 밀대걸레를 사고 있었다. 그건 뭐에 쓰냐고 물어봤더니 체육관 청소함에 부러져있던 걸 몇 번이고 고쳐 썼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 사러 왔다고 했다. 나는 먼저 분무기를 계산한 후에 어째 가게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코우시는 지갑을 열어 반으로 접힌 지폐를 꺼내 밀대걸레를 계산한 후에 교내청소부 같은 폼으로 그걸 들고 엉금엉금 나왔다. 나는 유리문을 열어주면서 걜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쪽팔리게 저 멀대를 들고 학교까지 가냐. 코우시는 나이가 있는 여자들처럼 억척스러운 데가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연습은 어떻게 되어가?

내가 그걸 말해줄까 봐!

아아, 상쾌군이 토비오짱보다 머리가 훨씬 비상하다는 걸 까먹고 있었어.

카게야마가 왜. 경기할 땐 머리 쓰더만.

 

일주일 후에 카라스노와 친선경기가 있었다. 친선이 말이 좋아 친선이고 다 탐색전이었지만 어쨌든 그 듣기 좋은 명분 아래 오랜만에 코우시를 코트에서 볼 것 같았다. 더 성가시겠다. 걔는 손 대신 굵게 땋은 머리카락 같은 밀대걸레를 휘휘 흔들면서 인사했다. 나는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바닥을 꺼내기가 귀찮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롭게 재구성된 카라스노는 그나마 있던 부원들 중에 대부분이 떠나가서 예전 경기 자료를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경기를 유예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조바심만 잔뜩 내다 올 경기가 기다려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우리 학교 체육본관에서 몸을 풀다가 코우시와 재회할 수 있었다. 걔에 이어 참 뜯어보기가 성가신 토비오도 와있었다. 키가 백오십 얼마였을 땐 서브를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개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니던 애가 눈매가 가시 돋쳐서 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웃기고 짜증났다. 그때 서브라도 좀 가르쳐줄 걸 그랬나. 주인 몰라보는 개새끼처럼 그 녀석이 나를 흘금거리며 코트 위에 섰다. 나는 눈썹을 치켜 떴다. 코우시는 벤치에 서서 토비오의 등을 밀다가 나와 시선이 얽혔다. 네트를 두고서였다. 걔는 다리 위에서 날 물끄러미 보던 표정을 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는 혀를 찼다.

 

묵사발 낸다, 진짜.

 

내 중얼거림에 무릎을 스트레칭하고 있던 하지메가 나를 흘긋 올려다봤다. 걔가 입을 다문 대신에 뒤에서 목을 축이던 킨다이치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가 주전이야? 나는 뻐근한 뒷목을 꺾어 풀며 대꾸했다. 그런 건 입 밖으로 안 내도 돼, 킨다이치. 적당히 웃고 농을 치며 네트 건너편을 뚫어 보았다. 코우시는 맨손으로 물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걔는 죽어도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除霧


친선경기 이후로 코우시를 못 본 지는 보름이 넘었다. 막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그게 내 일상에 구멍을 내지는 않았다. 토비오는, 괜찮아지긴 했는데, 더 괜찮아져야겠더라. 부실 탁자 아래에 누워서 중얼거리자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사복을 사물함에 넣은 하지메가 내 머리맡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오늘도 오후까지 안개가 자욱했다. 센다이시만한 가습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어린애 같은 말에 손톱깎이를 꺼내던 하지메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이 녀석 손에 매일같이 들려있던 채집 그물로 구름 한 송이를 따내듯 안개를 거둬가고 싶다.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시야는 물론 피부까지 조이는 습기가 반갑지 않았다.

 

토비오는 앞으로도 주전이겠지? 짐짓 물은 말에 하지메가 대충 대답했다. 그렇겠지, .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모두가 침묵하며 잠시 동안 부실은 걔 손톱 부서지는 소리로 찼다. 하지메가 오른손 약지 손톱까지 깎았을 때 나는 테이블을 치우고 천장을 봤다. 둥그런 조명등은 모아놓은 입김 같았다. 있잖아, 이와짱. 걔를 나지막이 불렀더니 새끼손톱까지 알뜰하게 깎아내면서도 대답은 해주었다. 어어. 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가끔 쓸데없는 것도 알고 싶고 그런 거잖아.

.

되게 별거 아닌데 알 수 없는 것도 있잖아.

.

 

내 체취가 그득 묻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흐느끼던 코우시는 솔직했다. 그래, 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가증스럽다. 거짓말하지 않는데 다 말해주지 않는 놈들은 처절하고 비밀스러워 보인다. 어쩌면 코우시는 나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메가 손톱을 깎아 놓은 신문지를 둥그렇게 말고 일어났다. 나는 손바닥에 꼭 맞게 잡히는 배구공을 천장으로 올렸다. 입김에 닿을락, 하더니 다시 내 가슴으로 꺼졌다. 나는 노래 가사의 2절을 부르듯 다음 말을 이었다.

 

나 상쾌군이랑 잤어.

 

쓰레기통에 손톱을 쓸어 넣던 하지메가 멈칫했다. 손톱은 걔 의지대로 멈춰주지 않아서 봉투 안으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방 한 구석으로 공을 굴려 넣었다. 하지메는 한참 쓰레기통 앞에 서있더니 이내 주춤주춤 걸어와서 다시 내 머리맡에 다릴 굽히고 앉았다. 그래서? 그 녀석은 가다듬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내 친구인 게 너무 좋았다. 걔가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꽂았어도 난 그렇게 생각할 거다. 어설픈 웃음이 나자 하지메가 딴 말을 했다. 요 일주일 동안은 비안개가 내리겠다. 나는 그 말마저 듣기 싫어서 맥락을 끌었다.

 

걔랑 했는데……

……

또 하자고 하면 해줄까?

 

하지메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빛이 넘칠 듯 말 듯 구름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게 다 비가 내려서 그렇다. 구름이 쏟아지니 개울이며 풀숲에 구름투성이인 거지. 빛이 같이 쏟아지면 차라리 땅은 빛투성이일 텐데. 나는 당당히 보고 당당히 눈이 멀 수 없다는 게 너무 창피했다. 갑자기 가슴이 퍽퍽해지도록 화가 났다. 왜 내가 창피해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 이후에 전국에 갈 때까지 한 번 더 아껴두려고 했던 눈물을 짰다. 안개를 다 녹이고 싶다.

 

안개를 거두고 싶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반대편 창문의 커튼까지 젖힌 하지메가 중얼거렸다. 네 앞가림이나 해, 쿠소카와. 하늘이 허옇기만 하고 쏟아지질 못한다. 저게 날 닮고 걜 닮았다니. 나는 입술을 들썩거렸다. 거둬내고 싶다. 구멍을 내고 싶다. 눈이 멀어버릴 빛이 땅으로 챙강챙강 쏟아지는 게 보고 싶다. 나는 눈꺼풀이 아파 슬며시 눈을 감았다.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배구공을 다시 주섬주섬 끌고 와 가슴 위에서 굴렸다. 걔가 나 만나줄까. 중얼거림 끝에 나는 좀 더 분명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와짱, 대답 좀 해봐.

 

자전거를 끌고 가면 걔가 날 만나줄까……

 

하지메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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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부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너고 다른 하나는 너에 대한 나다.

 

나는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자부하는 것들과 이 세상은 그런 점에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너는 글을 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너와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것들, 내 안팎의 것들은 내 뇌보다 더 조잡하고 푸둥푸둥한 점질로 연결된 회로를 통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다시 말해 내 몸에는 내장된 망원경이 있었다. 너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넌 내 말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이 문장은 필시 너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제 사이즈의 옷을 입은 것처럼 꼭 맞는다. 나는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오래 전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는데.

 

너는 나와 미야기에서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왔다. 대략적으로 도합 칠 년 정도 너를 지켜본 결과 너는 매사에 열심이고 영리했고 또한 예민했다. 너는 순간에 임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고등학생 땐 배구부활동에 미쳐있었고 대학생 땐 드럼 동아리를 밥 먹듯 나갔으며 졸업 후에는 글을 줄창 썼다. 나는 너의 변천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지만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너의 처음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것 같다. 아니, 정정하겠다. 네 온전한 처음이 아니라 너에 대한 나의 처음이다.

 

우리가 입부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너는 사교성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무실에서 입부서를 받아 작성하고 내러 가던 길에 2층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때가 초봄이어서 대부분 환절기로 감기를 앓고 있었는데 너는 가쿠란 단추만 채웠을 뿐 그 위에 베스트나 카디건도 입고 있지 않았다. 체육관으로 이어진 야외복도를 지나며 네가 그랬다. 안 더워? 너야 말로 안 추워? 아아, 나는 더위를 더 많이 타서. 거기서 수천, 수만 가지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리고 너와의 첫만남이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치 않았고, 그래서 나중엔 실망도 없었다. 너는 초여름 유월에 태어났으면서 정말로, 더위를 많이 탔다. 슬그머니 손을 뻗치는 고온의 바람처럼 네가 왔다.

 

카라스노의 가장 불행한 시기에 우리들이 있었다는 얘길 가끔 듣는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아사히가 체육관에 나오지 않았을 때 찾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꼭 카라스노가 6월 인터하이 3회전에서 패배한 그 다음 해에 입부를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입부생들은 둘 중 하나였다. 제가 카라스노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든, 가볍게 부활동을 하기 위해 들었든. 나는 당돌한 전자였는데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으니 너 역시 전자였을 것이라 믿는다. 너는 끈질긴 체육관 신세로 2학년부터 주전세터가 되었고 나는 가끔이지만 네 토스를 받는 게 즐거웠다. 2학년 끝물에는 네 토스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늘었다. 대부분의 부원들이 탈퇴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3학년이 되던 봄에 기묘한 입부생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야기에 있는 센다이 대학에 붙었다. 나는 체육학과에 지원서를 넣었고 너는 건강복지학과에 지원했다. 너를 잘 구슬려서 함께 현대무술학을 복수전공하기는 하였으나 너는 꼭 동아리는 드럼에 넣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악기를 다룰 줄 몰라서 세 달에 한 번 꼴로 네 동아리에서 여는 미니콘서트를 기웃거리거나 오월 학교 축제에서 솔로 퍼포먼스를 하는 네 사진을 몇 장 찍어주는 게 전부였다. 제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네가 메인 드러머라는 걸 건너건너 알게 되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배구동아리에 들었다,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에게만 당연한 절차였다. 졸업을 앞둔 해가 되었을 즈음에 너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다니던 드럼동아리를 그만두었다. 취업 때문에 그렇느냐고 물으니 너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졸업시험을 준비하며 네가 떠난 자리에 야스오라는 신입생이 앉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입생이 메인 드러머로? 조금 의아했지만 그 해의 학교축제에서 납득하게 되었다.

 

꼭 무언가의 말단 즈음에 네게 취약한 여름이 찾아왔다. 피부를 좀먹는 어마어마한 습기와 머리를 태우는 찌는 듯한 열기로 갑작스레 몰아 닥쳤다. 그래서 네가 지쳐 보일 때마다 나는 아주 조용히 자리잡았던 너를 생각했다. 고요히 다가와 고요히 잦아들었던 너를. 그리고 네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인터하이 예선에서 꺾였을 때도 울지 않았던 울음을 울고 싶어졌다. 종말終言이 두렵다.

 

 



 The End of the Word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만난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같은 센다이시에 살면서도 각자의 일로 바빠서 얼굴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 키는 얼만큼 컸는지, 무슨 대학 져지를 입고 있는지, 뒷머리를 짧게 다듬었는지 살펴보기도 전에 우리는 반가움을 삼켜야 했다. 오랜만의 만남을 가지기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 애들은 여전히 나를 주장이라고 불렀다. 잠깐의 짧은 담소 후에 우리는 간호사의 안내로 5층 안정실에 도착했다. 센다이시에 위치한 중앙병원이었다.

 

너는 링거를 통해 영양제를 정기적으로 공급 받고 있었다. 꼭 그러고 있던 게 오늘로 나흘째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떻게 된 거예요? 히나타가 물었지만 나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일단 일련의 사실들을 순차적으로 나열했다. 너는 호코 연립주택 4층에 살았다. 3층에서 번진 불이 4층까지 번지지는 않았으나 출입문과 창이 모두 닫혀 있던 방으로 연기가 배기관을 타고 올라왔다. 너는 그때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고, 따라서 아래층에서 불이 난 걸 몰랐다. 너는 부리나케 달려온 소방관 덕에 목숨을 구했다. 불이 번져 가구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외상도 없었다. 하지만 너는 나흘째 깨지 못하고 있다. 내 부족한 설명을 듣고 카게야마가 곧잘 의견을 내놓았다.

 

연기를 마셨다는 거죠?

……

마셨을 수도 있다는?

아마도.

 

마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 하지만 더 설명하기가 복잡하여 나는 그렇다고 긍정해버렸다. 큰일날 뻔했네요. 질식사했으면…… 목소리가 제법 굵직해진 히나타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는 맞장구 치며 링거 바늘이 꽂힌 네 손을 감쌌다. 창백하고 엷은 피부의 손등 위로 3mm 정도의 주삿바늘이 점막을 관통한 것이 희미하게 비쳤다. 역시 언어는 복잡해. 좀 더 잘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네 손가락 하나하나를 쥐어 보았다. 너는 호흡기를 단 채로 몸을 늘어뜨리고 고요히 잠들어있다. 조용히 와서, 조용히 잦아들고, 조용히 잠들고. 나는 의사들이 너에게 달라붙어있는 동안 수술실 수동문 앞에 달라붙어서 결과를 기다렸다. 네가 연기를 마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술은 아주 일찍 끝나고, 아니, 시작하지도 않았고, 병원에서는 너를 나와 함께 구급차에 태워 중앙병원으로 옮기며 말했다. 네 폐는 깨끗하고 무사했다고. 하지만 엉뚱하게 위궤양을 발견했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중앙병원에서는 네 위 검사에 앞서 식도부터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해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의 식도고 위였다고. 나는 소독실에서 나오던 이 병원 의사에게 그 말을 듣자마자 너를 안정실에 둔 채 네 집으로 향했다. 3층은 불이 난 곳을 보수 중이었다. 하지만 4층 복도는 정말이지 말끔했다. 네가 병원을 두 곳이나 옮긴 게 사치스러워 보였을 정도로 그랬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이 가지런한 신발장이었다. 네 좁은 집에는 거실과 부엌의 구분이 없고 네가 창고라고 부르던 작디 작은 방이 미닫이문을 끼고 화장실 옆에 붙어있었다. 너는 비교적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이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두 권과 노트북이 있었다. 부엌 찬장엔 그릇들이 쌓여있었고 개수대 쪽 컵걸이에 머그컵 세 잔이 거꾸로 꽂혀있었다. 너는 설거지를 다 하면 우선 거기에 컵을 걸어 물기를 빼고, 다음 끼 설거지를 할 때 걸어두었던 걸 찬장 안에 넣는 식이었다.

 

단조로운 몇 구획의 공간이 지나치게 정돈되어있었고 또한 지나치게 더러웠다.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기는 하였으나 나는 싱크대를 한 번 훔쳐낸 검지 위에 먼지가 꾸덕꾸덕 낀 것을 보고 이맛살을 구겼다. 그리고서 가늠하기에…… 적어도 일주일에서 이 주 동안은 네가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3층에서 불이 났다. 4층까지 번지지는 않았지만 연기가 올라왔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맡았지만 너는 연기를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이전에 있었을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나는 청소를 하지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온종일 누워 잠을 잤다. 너는 먼지 속에 누워 숙면했다. 문득 척추에 뱀의 비늘이 곤두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죽으려고 했다. 네가 스물셋에 썼던 글의 한 구절이 또렷이 떠올랐다. 너의 언어는 복잡하고 성가시다.

 

이 녀석도 정신을 차리는 날이 오겠지.

……

나는 가끔 얘가 너무 익어서 썩어버린 과일 같다는 생각을 했어.

……아사히상한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나는 잠시 병원을 나와 녀석들에게 이른 저녁을 사주었다. 문패에 오픈키친이라고 써있었다. 조리사들이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내고 채소를 다듬는 것까지 고래등만한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주문을 해놓고 턱을 괴고서 힘이 좋은 남자조리사가 냉장고를 열고 싱싱한 호박과 양배추를 팔에 이고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일주일 전에 열어보았던 네 집 냉장고가 생각났다. 채소, 잼이며 두부며 계란이며 그득히 채워진 네 냉장고에서 시퍼런 썩은내가 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커리가 나오고 나는 한 술을 떠서 묵묵히 씹었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잘 지내고 있었다. 저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인 학점을 가지고 누가 낫네 누가 꿀리네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으며 그 애들 빈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그래, 잘 지내는 사람이 한두 명 정도는 있어야지.

 

저녁을 먹고 그네들을 보낸 후에는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안정실에는 늘 환자 침대 옆에 간이침대가 한 대씩 있었는데 매트리스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등이 아팠다. 거기서 이틀 정도 자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리 늦게 자도 다음 날의 해가 지기 전에는 눈이 뜨이더만, 너는 어떻게 그리 오랜 잠을 잘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길어지는 잠만큼이나 오랜 시간 네가 지켜온 침묵들을 생각해보면……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네게서 이렇다 할 연락이 없었다. 너에게 적정선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언제부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네게서 언어라는 게 과잉이었고 동시에 소멸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배구를 졸업하고 대학에 오자마자 드럼 스틱을 쥔 네게 무슨 바람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네가 주먹을 그러쥐고 내 정수리에 아주 따끔한 꿀밤을 한 대 먹였던 것도 기억나고. 바람은 무슨 바람! 원래 좋아했어. 네 말에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뭇 의아해지기도 했다. 네가 그것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하지만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제야 나도 드럼인지 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네 언어의 많이 얽매여있었다. 아직도 그렇다. 너는 언어를 소중히 여겨 잘 내놓지 않았다. 내가 너를 칠 년 동안 보면서도 너를 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스가, 네 시간 후면 닷새다.

 

해가 다 진 병실이 어두컴컴했다. 깨어있는 사람이 없으니 불을 켤 필요도 없다. 나는 스위치를 누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발을 내리지 않은 창에 밤빛과 섞여 푸르스름해진 조명등이 부딪혔다. 덕분에 나는 더듬거리지 않고 간이침대를 찾아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내일은 정말로 집에 한 번 가야 한다. 주말이기는 하지만 와이셔츠를 다리고 금붕어 밥도 주고 바닥도 좀 쓸고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여러모로 바쁘다. 네 시간 후면 닷새다. 네가 깨어나지 않은 지 닷새가 흐르게 된다.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테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네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짓을 했는지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옅은 짐작만 한다. 그것이 한계다.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언어란 게 너무 어렵다. 어려운데 곁에 두고 싶고…… 그 끝을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렵다.

 

스물다섯이면 아직 애야.

……

아직 애라니까.

 

나는 간이침대에 몸을 구기고 누워 네가 누운 침대로 손을 뻗었다. 아까 잠시 나갔을 때 간호사가 링거를 갈아준 모양이었다. 손등 위에 부착된 밴드가 새것이다. 온기가 있는 네 손에 깍지를 꼈다. 내 손바닥의 습기가 건조한 네게로 옮기를 바랐다. 네가 조용히 잠들었으니 조용히 깨어나기를 바란다. 잠에서 깨고 나면 잠들었던 시간의 토막을 아예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꿔버리자. 언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마음대로 없앨 수는 없지만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있는. 나는 다 견뎌도 네 침묵을 못 견디겠다.

 

물어볼 게 많으니까 얼른 일어나.

 

참 고요한 녀석이다. 일어나 무슨 말부터 뱉을지도 모르겠다. 온몸이 가장 시끄러운 순간일 때마저 조용했었다. 내게는 그다지 고요한 기억이 아니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과대로 참여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애초에 다른 과였기 때문에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그 다음날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리며 만났다. 그래서 집에 들러서 씻고 만나기로 하고 자주 가던 대학로의 선술집에서 봤다. 나는 주로 이번 신입생 중에 키가 몇 센치인 놈이 있었고, 군기가 어땠고, 포부는 또 어떻고, 그런 얘기를 했고 너는 신입생 장기자랑 중에 어떤 게 제일 황당했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때 어쩌다 얘기가 이렇고 저런 쪽으로 흘러가서 내가 복수전공을 하자고 꼬셨을 것이다. 복수전공이 어쨌고 저쨌다는 건 아무래도 이것과 상관 없는 얘기였지만, 알다시피, 내가 무언가를 맥락으로만 기억하는 일은 좀처럼 없어서 그렇다. 우리는 그날 잤다.

 

그 과정까지는 이상한 게 없었던 것 같았는데, 행위가 끝나고 돌아 누운 너를 보고서 실감했고 또한 두려웠다. 우리가 잤구나. 어쩌다 그렇게 되었지? 반문해보아도 그 맹점을 찾아낼 수 있을 만한 획기적인 계기나 사건 같은 것이 없었다. 집에서 씻고 나와 오후 한 시 정도에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낮술을 하다가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조금 벌였고, 그러다가 보니 자게 되었다. 그때도 네 피부가 조금 투명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밑에서 해초 같은 핏줄들이 헤엄치는 걸 보았다. 그때 나는 눈도 귀도 전부 네게 쏟아질 듯 어지러웠는데 너는 의외로 머리를 차갑게 두고 있었다. 네가 삼 년간 배구를 하며 단련된 팔뚝을 내 목덜미를 겨우 붙드는 데에 쓰고 있었다는 것이나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하고 나서 돌이키니 많이 아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는 흐름을 깨기 싫었던 것인지 당시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미 잃은 짐승 새끼처럼 입을 벙긋거리던 게 전부였다.

 

네게는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언어였다. 그것이 어떻게 표출되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너는 말 대신 글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말보다 글이 너에게는 더…… 시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이 너무 정교하고 침착해서 글보다 말을 쓰는 나는 너의 언어를 이해하기까지 한참 걸렸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정말로 너를 몰랐던 때였다. 이제 너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내가 어쩌면 너의 일부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너의 시기들을, 연대기를 거닐어오며…… 배구, 드럼, 이제 너에게서 누가 글을, 언어를 뺏어가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너는 깨어나야 한다. 네 언어의 죽음을 너는 몰라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네 손을 들어 내 뺨에 비볐다. 깨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자. 깨어나고, 다시 글을 쓰고, 말해줘. 뭐든 말해줘. 거짓말도 좋으니 해줘. 나랑 다시 마주보고 술을 마셔주고, 입을 맞춰주고, 안겨주고, 아프면 울어줘. 아팠다, 무서웠다, 힘들었다, 죽고 싶었다! 너는 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이든 너의 언어로써. , 나를 위해 목놓아 울어줘.

 

언어로 병드는 것 같아.

 

어느 날이었다. 팩스를 받는데 구내 안내방송용 스피커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왜 들렸나보다도 네 목소리가 너무 생소하여 그것이 온종일 머릿속을 떠다녔다. 네 목소리를 듣지 않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세보았더니 까마득했다. 그날 나는 네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교 도서관에 들렀다. 학교 도서관은 구식이라 컴퓨터로 도서 검색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 칸이 넘는 국내도서란을 빙빙 돌며 네 책을 찾아 헤맸다. 『코트』라는 책을 뽑아서 빌렸다. 언젠가 네가 가장 할 말이 많았던 글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봄비가 하루 종일 척척하게 내려서, 나는 어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소파 위에 엎드려 네 책을 읽었다. 너는 참 너처럼 썼다. 그제야 네 목소리가 조금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책의 마지막 목차에 다다르기 전에 본 구절은 이러했다. 자살은 아니었지만 죽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목차를 읽기 전에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연락을 받았다. 오늘 하루 종일 나갔다 올 데가 있다는 옆집 남자에게 우산을 빌려주었다. 연락을 받았다. 나는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다 젖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단 눈에 띄는 신발이 운동화였다. 달리기 딱, 좋다. 지하철을 타면 오 분이고 걸어서 가면 이십 분이다. 그런데 시간을 고철덩어리에 맡기기 싫었다. 나는 따뜻한 빗속을 내달렸다. 종아리에 묽은 비명이 터졌다. 나는 정말로 비명을 지르며 이 동네를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너를 데려다가 코트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문득 홀로 깨어 낯선 그이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있을,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마음으로 이미 몇 가지의 언어를 다시 끄집어내야 했을 너를 생각하니 발바닥이 아파왔다. 젖은 운동화 밑창이 무쇠 같은 소릴 냈다.

 

중앙병원 5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막상 걸음이 느려졌다. 네 언어의 속도대로 달려온 모양이다. 나는 복도에 길게 떨어진 빗물자국을 돌아보았다. 두 겹으로 난 바퀴였다. 그들이 이미 다녀간 모양이었다. 문고리를 내리자 고정핀이 풀리며 문이 헐거워졌다. 문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이기 전까지 너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가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이 세상이 참 낯설다는 낯을 하고 웃었다. 타지를 여행하다 일본인을 만난 것처럼. 나는 황급히 네 앞에 무릎을 꿇고 뺨을 쥐었다. 영양분은 링거로 공급받았지만 실질적으로 먹은 것이 없어 볼이 패였다. 못 살아. 못난아, 못난아, 못 산다. 내 곡소릴 멀뚱멀뚱 듣고 있던 네가 뜬구름처럼 입을 열었다.

 

배고파.

 

나는 잔소리 같은 푸념을 늘어놓다 말을 멈추고 너를 올려다보았다. 언어로 병드는 것 같아. 어느 날 들은 너의 환청과 비슷한 투였다. 뒤늦게 오는 길에 뭐라도 사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요 근처에 있는 만두라도 사다 줄까 물었더니 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병원에서 주는 식사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네가 자고 있을 때 3층에서 불이 났단다. 불은 안 번졌는데 연기가 4층으로 올라와서 까딱하면 너 폐 수술까지 할 뻔했다. 아니, 그 전에 죽을 뻔했다. 아느냐? 너는 아주 먼 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처럼 지친 웃음을 터뜨리며 안다고 대답했다. 죽으려고 했어? 나는 그것까진 묻지 않았다.

 

그건 뭐야.

뭐가.

네 손에.

 

네가 직접 가리키고서야 나는 『코트』를 들고 뛰어왔음을 깨달았다. 빗물에 책이 구불구불해져 있었다. 세상에, 빌린 건데. 어디에서? 학교 도서관에 있더라. 그게 뭐 대단한 말이라고 네가 배가 부풀도록 웃었다. 나는 『코트』가 잘 마르도록 가습기가 놓인 병실 탁자 위에 책을 펼쳐 놓았다. 너는 가습기 위에 덩그러니 놓인 책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결국, 돌아오는구나. 너는 알다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너의 언어가 어려운 것은 여전하다. 괜히 반가웠다. 나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려 너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네 손등을 쥐고 있던 링거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너는 갈퀴처럼 네 등을 벅차게 그러쥐는 날더러 힘들다고, 힘든데 좋다고 했다. 우리 너무 오랜만이라고. 그리고 참기도 전에 잊고 있었던 보랏빛의 감정이 오랜만이라는, 너무 간단하고도 어려운 말마디에 눈꺼풀을 두드렸다. 네가 울기를 바라며 나는 네 뺨과 목을 적시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퇴원을 하면 코트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운 얼굴들은 더 이상 없지만 그리운 흔적들이 있는 그곳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너를 괴롭게 하고, 너를 살게 하고, 네게 도망치라고, 싸우라고, 별의 별 요구와 유혹을 했던 언어의 시작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언어와 마주하자고. 네가 언어라는 것을 알고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로…… 네 언어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그 때로 가서 네가 하고자 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 둘러보자는 말을. 이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말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말로써 이 삶을 이어가자는 그런 말을. 너는 너무 쉽고도 어렵게 했다. 우리의 언어로 마저 네 집에 쌓인 먼지를 치우자고. 끝내 종말終言을 보지 않도록. 여전히,

 

내가 자부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너의 언어고 다른 하나는 네 언어를 읽고 듣는 나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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