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곳 앞에 비스듬히 섰다핸드폰을 확인하니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팔 분 정도 남아있다그 정도면 무언가 관찰하고 사려하기에는 꽤 넉넉해두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밀착해본다유심히 보고 있으면 자그만 변화를 하나라도 더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같은 일이 몇 번 거듭되면 더 이상 우연으로 넘길 수가 없는 노릇이다어쩌면 그것은이 의심을 견고한 믿음으로 전복시키기 위한 중첩의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아직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말이야하지만 이건 확실해인형의 입술이 어제와 미묘하게 다르다.


주상복합건물 맞은편에 위치한 가게는 겉보기에 협소하고 자그만 크기와는 달리 두툼한 유리로 된 진열장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면 꽤 이것저것 자리잡을 만큼 넉넉했다. 체인점 따로 없이 이 동네에는 거의 유일한 인형가게이지만 질 좋은 마네킹을 만들어 팔기 때문에 목재와 플라스틱, 철심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공구가게로도 이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도보 측에 바짝 붙은 강화유리 진열장에는 크기가 거의 사람만한 구제관절인형들이 받침대에 의존하여 서있었다. 가장 질 좋은 것들이 앞세워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안쪽에는 플라스틱 마네킹이 대부분이었지만 도보 측에 전시되는 것은 철심과 파이프를 이어 만들고 위에 매끄러운 목재 피부를 덮은 인형들로, 관절 마디마디가 세세하게 조형되어 작은 이음쇠와 나사들로 연결되어있었다. 무광의 살구빛으로 페인트칠이 된 인형들은 사흘에서 나흘 간격으로 다른 갈아입는다. 개장이 평소보다 늦을 때에는 나신으로 오도카니 서있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은 이목구비도 오밀조밀 조각되었다. 두상을 덮은 머리털은 직접 어루만져보지 않아도 보드랍다. 윤기가 흐르는 것이 인모人毛를 쓴 게 틀림없다. 인조모를 사용한 좀 더 저렴한 인형들은 가게 안쪽에 비치되어있을 것이다. 나는 두 달 전에 가구회사의 마케팅부서에 취직을 하고 인근으로 이사를 한 이레 줄곧 맞은편 가게의 인형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 안목이 비켜나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고유의 밝은 잿빛 인모가 사용된, 진열장 한가운데에 지지대를 딛고 선 인형이었다. 다른 인형들에 비해 광대가 낮고 턱이 더 갸름했다. 눈가에는 조그만 눈물점이 찍혔다. 이목구비는 수작업으로 그리고 색을 채운다고 한다. 아직 가게를 직접 방문할 용기가 나질 않아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안켠에 있는 쪽방에서는 종일 이 채색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촉이 얇은 수성펜으로 꼼꼼하게 밑바탕을 그려놓고 물감으로 덮는다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코팅을 해서 칠이 벗겨지지 않도록 보존한다고 했다. 채도 낮은 연갈색으로 채운 인형의 두 눈에는 똑같은 크기의 동공이 또렷하게 찍혀있어 형형해 보이기까지 했다. 테두리는 혈색이 도는 살구색, 안쪽으로 기울수록 짙은 주색이 도는 생기 어린 입술은 어제 분명히,

 

타십니까?

, ! ! 죄송합니다.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허겁지겁 올라타 발권기에서 표를 뽑았다. 정말 선불교통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나.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출근으로 혼잡한 시간대인 만큼 남은 좌석이 없다. 천장에 붙박인 손잡이를 쥐었다. ,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러니까 인형, 그래, 그것의 입술은 어제 분명히 밋밋한 수평선을 그리고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 묘하기까지 한 표정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일자로 다문 입술이었을 것이다. 뺨엔 불그스름하게 홍조까지 비벼놓고 정작 입술을 굳게 다물려 놓아서 야릇한 인상이 되었다. 허나 방금 전에 본 것은 어땠더라. 어제완 또 다르게 기이한 인상. 무색의 손이 척추를 바짝 쥔 것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장담컨대 어제까지만 해도 수평이던 입꼬리는 가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입술의 양쪽 끝단을 귓불에 좀 더 가까이, 아주 조심스럽게 당겨놓은 듯이 빙긋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펜으로 그리고 붓으로 칠해서 벗겨지지 않도록 코팅까지 했다는 입술이.

 

에에, 사와무라 씨가 잘못 본 거 아닐까.

두 달 전부터 그랬다니까요.

회사가 많이 힘들지……

그게 아니라구요.

아니면 뭐, 얼굴을 갈아 끼운다든가 하는 게 아닐까? 구제관절인형이라며. 그러면 언제든 분해할 수 있잖아.

으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마다 씨는 웃음을 터뜨리며 빈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래도 버스 기다리면서 멍 때리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낫네! 그가 갈퀴 같은 손으로 내 등을 몇 번 뚜덕거렸다. 일리는 있지만 뭔가…… 속이 죄 개운해지도록 옳다구나 싶은 답은 아니다. 숙취에 절여진 것처럼 아직 두가 지끈거린다. 요즘은 일을 하다가도 간혹 그것에 대한 생각들로 골똘해져 상사에게 전에 없던 꾸중을 듣기 일쑤였으니, 인형에게 정기를 쪽쪽 빨아 먹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자 방석에 궁둥이를 붙이고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밀어 넣어도 아침에 보았던 방긋한 입술은 뇌리에서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의 미약한 변화를 위해 새 얼굴을 그려 끼워 넣는다고? 그것도 값비싼 전시용 목재인형에다가 말이지. 그렇다면 이 가게 주인은 아주 비효율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이다.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최근에는 일몰이 더 앞당겨졌다. 겨울이 깊어가는 탓에 이전에는 일곱 시 즈음 지상을 삼키던 어스름이 여섯 시를 웃도는 시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일지를 쓰고 퇴근카드를 찍은 후에 부서 건물을 나왔더니 벌써 하늘 한가운데가 은홍빛이었다.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서성거리며 버스를 기다릴 동안은 어둔 쪽빛이 하늘을 스멀스멀 잡아먹어, 어느 새 수평선만이 자색광으로 붉어있었다. 혈색 좋은 손바닥이 푸르딩딩한 그림자에 잠겼으니 머잖아 이대로 어두워질 것이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타 마침 운 좋게 눈앞에 자리한 빈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섯 정거장을 지나쳐 내리면 바로 가게 앞일 것이다. 거긴 내가 출근을 할 때 개장을 해서 오후 아홉 시에 폐장을 한다. 하차를 하고 진열장 앞에 서면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등지고 옅은 어둠에 잠긴 도보를 보는 인형의 그늘진 얼굴을 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땐 거리가 훨씬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군데군데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밝았다. 협소한 골목 귀퉁이를 차지한 쓰레기통이 덜컹거렸다. 길고양이들이 훌쩍 올라타고 발로 차는 소리다. 나는 서류가방을 고쳐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식점보다는 조그만 의류매장과 서점, 방물가게가 늘어진 거리다 보니 이 시간에 부쩍 한산했다. 나는 주춤거리며 인형가게의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가게 뒤켠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강한 역광을 쪼이는 인형의 얼굴이 시커맸다. 나는 좀 더 고개를 길게 빼어 인형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몇 보를 두고 떨어진 가로등 불빛에 어렴풋이 비친 입술선이 아주 유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침과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아. 햇빛으로 투명했던 피부가 잔잔한 어둠 속에서 창백한 빛을 띠었다는 것밖에는. 나는 다시 턱을 당기다 말고 우뚝 멈추었다. 광대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늘을 헤쳐보았다. 한참 눈을 끔벅이다, 이내 가느다랗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빛이 다 지고 난 탓인지 어딘가 또 기묘하게 달라 보이는 낯이다. 인형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머리를 싸매었다. 뭐랄까,

 

동공이 좀 더 커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화살처럼 머리를 스치자마자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단정한 자세로 서있는 인형의 전신을 훑었다. 잘못 본 것일까? 혀 밑 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좁은 보폭으로 다시금 다가갔다. 고개를 비스듬히 구부려 살펴보았다. 기억하기로는 오늘 아침, 연갈색의 홍채가 좀 더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부쩍 줄어든 빛의 양에 홍채가 이완하여 동공이 커지기라도 한 듯 더 뚜렷하고 큼지막한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뒷목이 선뜩해져 등을 홱 돌렸다. 부리나케 횡단보도 앞으로 뛰어가 양복재킷 앞섶을 움켜쥐었다. 주먹 안에서 단추가 매달린 옷접이 잔뜩 우그러졌다. 신호가 바뀌었을 때 도망치듯 횡단보도를 내달렸다. 뒤통수로 오롯한 시선이 바싹 따라오는 기분에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다리를 움직였다. 유리문을 온몸으로 밀고 쏟아지듯 들어가 로비 엘리베이터에 도착했을 때서야 겨우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데스크 쪽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시던 경비원이 나를 곁눈질로 흘금거렸다. 마침내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벽에 기대자 절로 얼굴에 오른 손바닥이 마른 세수를 했다.

 

「뭐야, 무섭다 그거.

아무도 안 믿으니까 진짜 내가 미친 건가 싶고.

「가게는 들어가봤어?

아직.

「나 같으면 쳐다볼 엄두도 못 낼 거야. 애초에 인형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고…… 귀신이 들린 거면 어떡해.

하긴 아사히 너 예전부터 귀신엔 질색을 했었지.

「팔다리가 달린 사람 형상의 인형은 영혼을 담기에 좋은 몸이래. 그래서 막 사람처럼 움직인다고…… 이건 괴담이 아니고, 진짜로! 예전에 센다이 살 때 하야토 병을 고쳤던 무당 기억나지? 그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람처럼. 혹은 진짜 사람. 거기까지 사고가 미치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사람을 인형처럼 꾸며 파는 가게라든가, 각각 다른 사람들의 신체부위를 조합해서 인형을 만들어놓고 내다 파는 가게에 관한 괴담은 어릴 때 종종 들어왔었다. 나는 아직도 센다이 무당에 대한 맹신으로 줄줄 늘어지는 아사히의 이야기를 끊어먹었다. , , 있잖아. 그거 혹시 진짜 사람 아닐까? 너무해, 하고 중얼거리던 아사히는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너무 멀리 갔나. 걔는 한참을 답이 없더니 내가 맘으로만 잘근잘근 씹던 말을 제가 대신 해주었다.

 

……그건 좀 멀리 간 거 같은데……

그런가.

「으응.

근데 귀신 들렸다는 네 얘기도 많이 멀리 갔어.

「다이치, 너무해!

 

나는 통화를 끝내고 천장에 매단 커튼을 젖혔다. 바로 맞은편의 가게라 창문으로 보면 도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비스듬한 시야로는 건물의 옥상 꼭지까지가 한계라, 처마 밑으로 오목하게 굽어있는 진열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뚫어 볼 수 없는 이 교묘한 사각지대를 있는 힘껏 응시하며 지그시 상상해본다. 지금쯤 저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깨끗이 닦은 창문에 부옇게 지문자국이 나는 것도 잊고 손을 짚었다. 차가운 유리에 코를 한참 붙여놓고 진열장 위로 드리워진 검은 처마를 묵묵히 구경했다.

 

문득 가게 전방의 보도를 밝히고 있던 빛이 껌뻑 사라졌다. 나는 창을 밀어낼 듯 이마를 댄 채 그 광경을 주시했다. 퇴근 후 바로 욕실에 뛰어들어 감은 머리가 체 마르지 않아 창가에 물기가 맺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의 정문을 열고 사람이 나왔다. 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 문고리를 잠그고, 자물쇠를 둘러 한 번 더 닫아건다.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찾았다. 아홉 시가 조금 넘었으니 폐장시간이구나. 가게에서 새어 나오던 노르스름한 불빛도 꺼지고 없다. 몇 시간이 더 지나면 간간히 저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길 것이고, 진열장에 선 인형들은 저들끼리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꼭 그맘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동안 저 좁다란 가게에서 복작복작, 저들끼리만의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는지.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티셔츠 끝단을 쥐었다.

 

참을 수 없이 궁금하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새벽녘이 밝기 전에 살그머니 내려가 전봇대 뒤에 쭈그려 우스꽝스러운 꼴로 정찰한다고 해도 결국 동이 틀 때까지, 주인이 돌아와 개장 준비를 할 때까지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회사동료들의 말마따나 내가 여태 헛것을 본 걸 가지고 두 달 동안 헛수고를 했다는 사실, 취업 스트레스의 후유증에선지 무슨 이유에선지 대단한 망상을 해왔다는 사실이나 깨닫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그래도 확인하지 않고 다시 몇 날 며칠을 덜 마른 빨래 개듯 찝찝한 마음으로 순환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찬찬한 걸음으로 소파로 가 앉는다. 양말을 신고 리모컨을 주워 티브이를 튼다. 채널을 돌려보니 잘 시청하지 않는 방송사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때울 만한 예능 프로그램의 심야 재방송 특선을 방송해주고 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올까 하다가 고개를 젓고 탄산음료로 마음을 바꾸었다. 고작 맥주 한 캔에 눈이 풀릴 정도로 알코올에 취약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맨정신에 가까우면 좋을 것이다.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고 사이다 한 캔을 땄다. 따가운 탄산이 목구멍을 씻었다.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예능 프로그램은 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다 여겨왔던 것에 대해 사뭇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예로부터 인체의 형상을 한 인형에는 영혼이 깃들 수 있다는 설화가 있었죠.

맞아요,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도 하니까.

그런데 그게 설화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죠. 우리가 왜, 귀신에 쓰인다고 하는 건 요즘 쉽게 납득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귀신이 쓰이는 거.

미령과 과학을 접목시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요…… 일단 우리는 그렇게 믿으니까요. 우리 몸을 움직이게끔 하는 건 영혼이 아닌 뇌와, 그 명령에 직결된 근섬유라든지……

그러니까 인형 같은 것에 영혼이 깃들 수는 있어도, 그래서 무언가를 사려하고 사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움직이거나 표정을 짓거나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에요. 무당들도 자주 그렇게 주장해왔지요.

결국 이것은 인체의 영역인 것이군요.

그렇죠. 인간人間의 영역이겠지요.

 

, 세상에.

 

눈을 막 떴을 때 반사적으로 깨달은 것은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등받이 위로 고개를 푹 젖혀놓고는 두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머리를 번쩍 일으켰다. 예능은 끝난 지 한참 된 것인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배경에 깔린 성우의 목소리가 귀에 편안하게 날아들었다. 잠이 쏟아질 만도 했어. 화면의 형형한 불빛에 얼핏 벽시계가 비쳤다. 새벽 한 시. 나는 쿠션에서 궁둥이를 벌떡 떼어 일어났다. 허둥지둥 커튼을 도로 젖히고 유리창에 이마를 붙였다. 채도 없는 어둠에 잠긴 거리에는 승용차 하나 지나다니질 않았다. 도보를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다. 나는 뒷걸음질로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패딩을 끌어내렸다.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는 부풀어진 몸집에 뒤뚱거리며 운동화를 내다 신었다. 현관문을 열고는 핸드폰을 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엇 하나라도 이상한 감이 있으면 사진을 찍을 요량이었다.

 

복도의 백열등은 밝다. 몇 층 되지 않는 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기에는 눈에 부담스럽게 띄어 비상구를 선택했다. 정문에 바짝 붙은 비상구 계단난간을 몇 번 돌아 내려오니, 로비의 경비원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가를 훔치며 슬쩍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나도 태연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유유히 로비를 빠져 나왔다. 햇빛이 더 없는 겨울밤의 공기가 피부를 후볐다. 두툼한 패딩을 입었음에도 미세한 틈을 한기가 껴안았다. 보도블록을 밟고 서니 차도를 가운데 두고 맞은편 도보 측에 컴컴한 어둠이 내리 앉은 인형가게가 시야를 메웠다. 횡단보도 앞에 쭈뼛대며 섰고, 보행자신호등은 아직 적신호를 비추고 있지만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횡단보도를 건너도 될 것 같았다. 쫓기는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차도를 가로질렀다. 높다란 가로등 불빛의 파장이 부연 젖빛으로 공중에 퍼졌다. 먹칠을 한 듯 시커먼 진열장에 희미한 빛이 뚝뚝 흘렀다. 인형이 멀뚱히 서있다.

 

잿빛머리의 인형은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가게주인이 퇴근 전에 옷을 갈아 입힌 모양인지, 아까는 프랑스식 외투와 실크자수가 놓인 복대를 착용하고 니삭스와 반질반질한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래로 떨어질수록 자줏빛이 선명해지는 전통 하카마를 입었다. 머리엔 생화 장식을 꽂았는데, 기다란 속눈썹이나 달떡 같은 얼굴에 잘 어울렸다. 침침한 빛 속에 배색으로 왜곡된 홍채가 살아있는 듯 형형했다. 엷은 피부 밑에 실핏줄이 잠들어있는 듯 불그스름한 입술이나 보얀 피부를 보면 엄청난 수작업을 요했을 것이 틀림없다. 목재인형임에도 어루만지면 내 손바닥과 같은 살성을 가진 살갗이 부드럽게 달라붙어올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눈썹을 치켜떴다. 배꼽에 정갈하게 모은 손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열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을 끔벅이지도 못하고 화한 기운이 안구 전면에 끼쳐올 때까지 부릅뜬 채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눈을 힘주어 감았다 도로 슬그머니 떠보았다. 머릿속이 진창으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구제관절인형이 아니라 마네킹이었던가?

 

……구제관절 아니었나……?

 

두 달 동안 봐온 게 헛것이 아니라면 분명 진열장에 배치된 인형들은 죄 구제관절인데. 그래서 팔뚝과, 어깨와, 무릎 같은 곳은 각자 다른 두 토막에 나사를 조여 이음쇠를 만들어놓았다. 팔꿈치가 완성되는 지점에서 팔목과 팔뚝이 본연 분리되어있는 것, 손가락도 마디마디 짧은 나무토막을 이음쇠에 연결하여 구부릴 수 있게 만든 것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확인해왔건만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배 위에 애매하게 깍지를 낀 두 손은 상아석고처럼 본래 그 모양으로 빚어진 듯 분리된 마디가 보이지 않았다. 갈래갈래 뻗은 손금과 함께, 저 스스로 맞잡은 곳에 옴폭 파인 살갗. 목재를 반질반질하게 갈아 그 위에 페인트칠을 하고 코팅을 했다고 하기에는 피부가 섬유질의 피막으로 덮인 실리콘으로 감싼 듯 보드라워 보이잖은가. 나는 미간을 당겨 한껏 구겼다. 아무래도 이상해. 하카마의 소매를 걷어보면 팔뚝조차 이음접이 사라지고 없을 것 같다. 만약 내일 아침, 개장을 하기 전에 다시 진열장 앞을 찾아왔을 때 구제관절인형으로 돌아가 있다면 인형의 기이한 정체를 밝힐 확실할 증거가 될 것이다. 나는 꽁꽁 언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카메라 어플을 누르는 엄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렌즈를 통해 보아도 매끈하게 빚어진 손이다. 꼭 쥐면 온기가 녹아날 것 같다. 촬영버튼을 누르자 찰칵, 정적을 부수는 셔터음이 짧게 터져 어깨를 떨었다. 황급히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도로 구겨 넣었다. 싸늘한 공기에도 후드 안쪽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한숨을 길게 뽑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온몸이 살얼음으로 뒤덮였다. 아직 주머니에 웅크린 손등 옆으로 애매하게 저 혼자 빠져 나오던 엄지도 패딩 나일론 위에 우뚝 멎었다.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칼바람에 건조한 안구가 한 층 더 뻑뻑이 아려오자 다급히 올라온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수근은 꿈쩍도 않으니 팔을 들어 눈물을 닦을 길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막처럼 시계를 그득 가렸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걷힌 시야로 인형의 얼굴이 다시금 드러났다. 연갈색의 홍채, 그것의 면적은 좀 더 좁혀졌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거든. 입꼬리는 귀에 닿도록 활짝, 꽃잎으로 물을 들인 것 같은 윗입술 아래로는 가지런한 앞니의 일련. 인형이 내게 환하게, 저 젖빛 화광만큼이나 은은하게 웃어주었거든. 위화 없이 천천하고 자연스러운 미소.

 

나는 바로 기도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꼿꼿하게 굳은 몸에서 다리가 삐걱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몇 걸음을 물러나다 조화롭지 않게 튀어나온 보도블록 모서리에 발을 헛디뎠다. 다행히 아주 고꾸라지기 전에 바닥을 짚었다. 인형은 계속해서 웃는 채였다. 손바닥의 엷은 피부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는지 미미하게 쓰라렸지만 나는 허둥지둥 블록을 딛고 일어나 내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지가 빠지도록.

 

영혼이 깃든 인형의 설화에서 뻗어 나온 괴담이 있죠. 제가 보기에는 아주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요.

그게 뭐죠?

이건, 오히려 반대에요. 이렇게 말해볼까요? 인형에 영혼이 깃드는 걸 인형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 말이죠.

그럼 이번 것은 사람이 인형이 되는 것이겠군요.

그런 셈이죠. 인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이었더라, 라는……

 

다음날이었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신발장 앞에 기대어 앉아 밤을 새었다. 오묘한 빛깔의 서광을 보고 나서야 밤이 꼬박 기운 것을 알았다. 나는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를 눌렀다. 매끈한 손. 이렇게 따로 놓고 보니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의 것이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비척비척 일어났다. 장딴지가 찡하게 저렸다. 과연 내가 간밤에 본 것은 헛것이나, 망상에서 비롯된 환영 따위가 아니었을까. 가슴이 섬뜩하게 뛰기 시작했지만 용기를 내어 현관문을 열었다. 날은 밝았고 개장시간은 빠듯하게 십 분 정도가 남았다. 진열장에 멀뚱히 서있을 인형의 손이 여전히 매끄럽다면, 얼굴이 방싯 웃고 있다면 내가 대단한 착각을 한 것으로 치고 이 허튼 짓을 당장에 그만두자. 그렇게 다짐하고는 다시 도보로 나왔다.

 

머뭇거리며 진열장 앞에 섰을 때, 나는 허파 가득 채웠던 공기를 기다랗게 흘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구름 같은 입김이 얼굴을 스쳤다. 마디마디 끊어진 관절, 그 사이를 탄탄하게 조인 이음쇠와 나사의 향연. 반질반질하게 다듬어 코팅을 한 목재 피부, 밋밋한 무표정의 입술, 뚜렷한 연갈색 홍채와 가운데 점처럼 찍힌 동그란 동공. 어제의 일은 마치 꿈과 같다. 하지만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이 꿈이 아니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쇠꾸러미를 든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찢어진 눈으로 나를 진득이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뭐 찾으시는 거 있습니까?

……

……

가게 구경 좀 하려고요.

 

주인은 문을 열어주고는 쪽방 문 앞에 세워두었던 목재부터 안아 옮겼다. 나는 그를 힐금거리고는 진열장 가까이 다가갔다.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얼굴만 보아왔던 인형의 오롯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분주한 쪽방을 곁눈질하고 슬그머니 인형의 소매를 거둬보았다. 팔꿈치 역시 스프링과 나사가 연결되어있었다. 팔목을 덥석 쥐어보았다. 역시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딱딱하고 차디찬 목재였다. 일순간 팔등에 소름이 오돌토돌 돋았다. 나는 그걸 벅벅 긁어 한기를 몰아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이질감이라는 것이 불쑥 공기에 섞여 날았다. 주인은 쪽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 옆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목례를 하고 가게를 빠져 나왔다. 다시 밖으로 나와 두툼한 강화유리 한 겹을 두고 보는 인형은 발그레한 뺨과 어울리지 않게 무감정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른 아침산책을 시작한 사람들이 도보에 슬금슬금 모이기까지, 나는 한참 발을 떼지 못하고 인형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였다. 나는 고민 끝에 텅 빈 채 묵혀두었던 오래된 블로그를 다시 열었다. 간밤에 찍은 인형의 사진과 함께 날짜를 적었다. 키보드 앞에서 몇 번이고 머뭇거렸다. 마음먹고 차분하게 쓰기로 한 관찰일지, 였지만 어째선가 그는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이것은 아무래도 인간人間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쿠토 코타로는 이전부터 일관적으로 귀찮은 축에 속했다. 기운이 넘치면 넘치는 대로, 풀이 죽으면 죽는 대로 줄기차게 사람을 성가시게 했다. 객관적인 사실들을 빌려 말하자면 주변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손이 많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맴도는 이들이 많았으니 그러한 성가심이 오히려 코타로에게 끈끈하게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더 깊은 것은 모르지. 이것은 코노하의 감상에 불과했다.

 

일학년 때 이미 주전으로 발탁되었던 코타로를 기억한다. 코노하 아키노리 역시 몇 번의 연습경기 이후 일찍이 주전이 되었다. 당시 부원들 중에는 삼학년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그저 일 년 정도의 경험이 좀 더 풍부한 게 전부였던 선배들은 떼로 들어온 일학년들에 애를 먹었다. 특히 코타로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때 그의 목줄을 잡았던 건 다름아닌 코노하였다. 코타로와 같은 포지션이기도 했지만 워낙 처세에 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꼭 그런 것만이 그가 코타로를 떠맡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런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두 해라는 시간보다도 훨씬 까마득하게 의문으로 남았다. 그만큼 당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코타로와 코노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나니 겨울 이후에 찾아온 봄만큼이나 낯설어졌다.

 

예정보다 늦게 끝났지, 오늘?

힘들어 죽겠어요, 엉엉.

덜 한다고 덜 힘든 것도 아니잖냐.

…… 보쿠토 얘는 그새 어디 갔지.

그냥 집에 가서 씻는다고 아까 아카아시랑 먼저 하교하더라.

 

사루쿠이는 대답을 마치고 등에 메었던 가방을 가슴으로 끌어 야키소바빵을 꺼냈다. 포장지를 뜯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걸 다 해치울 때까지는 쪽지시험에 관해 불평을 늘어놓고, 그날 유키에가 점심시간에 오므라이스를 두 그릇이나 해치웠던 것을 이야기하며 낄낄댔다. 코노하는 어깨를 으쓱대며 간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수평선이 뺨처럼 붉어질 즈음에 그들은 건너편 도보에서 익숙한 주택을 지나쳤다. 일찍이 하교를 했다던 코타로가 떠올라 코노하는 문득 발걸음이 멎었다. 두어 걸음이 앞선 사루쿠이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는 눈썹을 치켜떴다. 거긴 왜 보냐? 그의 외침에 코노하는 얼버무렸다. 보쿠토 샤워하는 거 구경. 그게 거기서도 보여……? 보일 리가 있냐? 히죽 웃는 코노하의 민둥한 낯을 보며 사루쿠이는 이맛살을 접었다. 그는 빵을 다 먹고 빈 봉지를 버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침묵으로 빈 짧은 간극 이후에 그가 골똘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보쿠토 걔는 너랑 하교를 같이 했었지? 코노하는 보도블록에 밑창을 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이 같으니까.

 

코노하는 좀 더 먼 곳에 살았다. 하굣길에 코타로는 제 집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들은 그림자가 좀 더 길어질 때까지 걸으며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멈춰 서면 그제야 코타로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걸음을 멈출 즈음이 되면 코노하는 제가 매일 여닫는 대문 앞에 서서 코타로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 얕은 과거의 일이 된 것에 두 사람 어느 한 쪽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의심이란 걸 품을 만큼 관계의 간극이 넓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혹 이질감을 느꼈다고 해도 드러내놓을 정도의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나빠진 건 없어. 코노하는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나빠질 것도 없었지…… 코타로도 그렇게 여길 터였다. 사소한 건 따져 묻지 말자. 째째해지니까.

 

이전부터 손이 많이 가던 코타로는 코노하의 손을 탔다. 코타로에겐 좀처럼 적당함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의 극적인 면들이 적당함으로 중화될 수 있는 곳에 살뜰하게 분산시키는 일을 코노하가 주로 자청하곤 했다. 떠맡은 일도 아니거니와 나서서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 해가 흐르고 후배가 들어왔다. 세터일 거야, 짐짓 생각했는데 정말로 세터였다. 그에게는 손마디를 꺾고 어루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코노하는 어째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한숨 놓겠구나. 코타로는 한창 부활동에 재미를 보며 푹 빠져있었고, 후배는 그런 그에게 꽤 만족스러운 스파이크를 칠 수 있는 길을 터줄 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삼학년이 완전히 은퇴를 하게 되었을 때, 후배는 코타로에게 토스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코노하는 더 말할 게 없다고 말한다.

 

손기술이 좋은 후배의 이름은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케이지는 처세에도 능했지만 그보다도 꼼꼼한 구석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그 나이답지 않게 예의가 바르고 생각이 깊었으나 고리타분하거나 원칙주의자 같은 면은 없었다. 펄펄 끓어 냄비 밖으로 넘치기 시작하려는 하얀 거품 같은 코타로에게는 한 컵의 미지근한 정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전부터 코노하가 입이 아프도록 말한 중화에는 꼭 알맞았다. 이제는 케이지의 손을 타게 된 코타로를 보며 부원들이 장난 삼아 계승, 이라고 하는 것에 코노하는 반은 동의했으나 반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물려주는 자리라고 하기에도 민망했고 거창한 제목을 달만한 벼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리어 이것이다. 여태 그래왔듯이 중화를 찾았을 뿐인데 그게 하필 사람이더라. 잠깐 머물다 건져낼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 물연이라는 말은 없어도 인연이라는 말은 있듯이.

 

.

……

주장님이 너무 잘생겼어?

, 존나 키스하고 싶어.

우웩.

 

그렇지, 인연이라는 말은 있듯이. 코노하는 입을 찢어 웃었다. 코타로가 으레 지어 전염이 된 표정이었다. 이것도 일종의 중화인가. 빤한 시선을 포장시키는 너른 웃음이나, 그득 찌푸린 얼굴이나. 이전부터 코타로는 그런 농담을 자주 해왔고, 코노하는 그에 응하는 더욱 찐득한 농담을 몇 배는 더 해왔다. 얼핏 스스럼없음을 호소하기 위해 과격하게 뚫어놓았던 경계가 이제 와 묽어져 돌아보니 손 쓸 수도 없이 너저분하더라는 이야기. 마음껏 후비고 찢어놓아 실밥이 가닥가닥 늘어진 이것을 이제 어찌 할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듯 마주보고 넋을 잃었다. 우웩, 토악질을 하는 시늉을 하던 코타로는 가슴을 문지르며 코노하의 뒷목을 흘깃거렸다. 키스하고 싶어, 가느다란 눈을 하고 능청스레 대꾸하던 코노하 때문에 하마터면 설득 당할 뻔했다. 웃으며 입술을 부딪칠 뻔했다. 우리의 등 뒤에 어느 새 남은, 더럽게 짓이겨진 경계. 코타로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것은 언제까지 인연일 것인가.

 

코노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욕실 문을 닫고 속옷을 내렸다. 수압이 강한 샤워기를 들고 정수리에 그득 쌓인 생각들을 씻어낼 작정이었는데, 고작해야 머리칼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그는 대충 샤워를 마친 뒤 수건을 목에 두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코타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부하냐?」 잠시 후에 예상과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공부를 왜 해! 미쳤어?」 그는 오기로 책장에 꽂아둔 문제집을 몇 권 꺼냈다. 펼치고 나니 금방 풀 마음이 사라졌지만. 방이 인큐베이터처럼 좁다랗게 느껴져 창문을 젖혔다. 샤프가 깔짝대는 소리를 가르고 아득히 차도를 긋는 공기의 움직임이 들려왔다. 문득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코타로였다.

 

.

「심심해.

그럼 공부하세요.

「코노하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지……?

됐고, 목소리가 왜 그래.

「누워있어서.

누워서 뭐 하는데.

「생각.

……쓸데 있는 생각이냐?

「네 생각?

완전 쓸데 있어.

 

코노하는 유쾌하게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왠지 모르게 눈이 뻑뻑해져 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노하는 문제집을 덮고 침대에 꾸역꾸역 올랐다. 함께 막힌 목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했다. 이전부터 갈피 없는 통화를 오래도록 붙들고 있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점점 말이 바닥나는 것을 느꼈다. 그 즈음에 코노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근데 너 안 졸리냐? 코타로도 부정 없이 하품을 하며 통화를 갈무리 지었다. 핸드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고 몸을 완전히 젖혔으나 말과는 달리 졸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코노하는 무늬 없는 밍밍한 천장을 오롯이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말이 바닥나기도 하는구나.

 

*

 

코타로는 다정하면 바닥까지 다정해지는 사람이었다. 우악스러운 유쾌함 밑에는 제 편을 받쳐주는 다정함이 초석처럼 깔려있었다. 아키노, 아키노. 지금은 유별나다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부원들 사이에 약속처럼 굳어진 코노하의 별칭은 다름아닌 코타로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는 스스로 애정을 담아 개조한 이름을 줄기차게 불러댔지만 해가 거듭되며 점차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묘한 일이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야금야금 갉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코노하라는 성씨가 되려 어색했으므로 어깨를 붙잡거나 등을 치는 것으로 부름을 대신했다.

 

코노하 씨! 케이지가 이름을 부르며 공을 보내주었을 때 그는 문득 코타로가 불러주곤 했던 별칭이 그리워졌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부틸고무의 표피를 후려치는 손바닥에 평소보다 몇 배의 힘이 들어갔다. 제법 위력 좋은 스파이크를 날린 후에는 케이지로부터 멀리 에두른 칭찬이 이어졌다. 앞으로 코노하 씨한테 공을 좀 자주 보내야겠어요. 그러자 코타로가 머리털을 바짝 세우며 발을 굴렀다. 그럼 나는, 나는! 그러니까 보쿠토 씨도 선전해야지요. 연습하세요. 케이지는 딱 잘라 그를 끊어먹었다. 코노하는 스스로도 얼추 비슷한 방식으로 코타로의 입을 틀어막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학년이 되고 어느 순간까지 이 수평한 관계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일 터. 너 없을 땐 코노하가 고생을 많이 했지. 사루쿠이는 케이지가 이학년이 되어서야 그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케이지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고정된 시선으로 코노하의 뒤통수를 확대했다. 특수렌즈를 쓰지 않으면 어디로 굴러갔는지 보이지도 않을 자그마한 물체를 관찰하듯이 아주 천천하게 조심스럽게. 그런 눈길이었다고, 적어도 사루쿠이는 주장한다.

 

자자, 아카아시! 스파이커가 연습을 하려면 세터가 필요하지 않겠어? 코타로는 케이지의 등을 떠밀다 말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잠시 주어진 쉬는 시간에 그새 소란스러워졌다. 코미와 사루쿠이가 팔을 얽어 가마를 만드는 것을, 와시오는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넓적다리 하나가 쑥 들어가도록 넓혀놓은 공간에 코노하를 강제로 태웠다. 엉거주춤 다리가 붙들린 채로 코미의 어깻죽지를 후려갈기다, 급기야는 와시오에게 손짓을 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코타로의 심연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버스 뒷좌석에서 멀미를 할 때처럼. 뭔가 딱히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짐짓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아직 고교생이고, 저런 장난들은 삼 년 전부터 줄곧 해온 것들, 익숙한 풍경인데 가슴이 뻐근했다. 토스 올려달라고 해놓고 뭐 하십니까? 케이지는 손마디를 풀며 코타로를 재촉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코노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짚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 눈이 마주쳤다. 보쿠토 코타로와, 혹은 아카아시 케이지와. 찰나에 마주쳤으나 코노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코타로도 어영부영 허리를 숙여 네트 밑으로 넘어갔다.

 

진짜 봄고 예선이 얼마 안 남았네.

한 달? 한 달 맞나?

나 네 옷에 토해도 돼?

미쳤냐 진짜. 근데 전국은 우리 이학년 때도 가봤잖아?

 

코노하는 간만에 코타로와 함께 하교를 했다. 자율연습을 마치고 탈의실에 기어들어갔을 때는 그가 마침 세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턱 밑으로 수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닦아내지도 않고 멍한 표정으로, 너도 이제 집 가냐? 코타로가 그랬다. 옷을 갈아입고 나란히 체육관을 나왔을 때는 비로소 이런 일들이 지금은 아득히 떠나온 고향처럼 낯설다는 걸 알아챘다. 그런 감정들을 증명하듯이 엉뚱하게도 신호등을 앞에 두고 길을 잘못 들었다. 좁다란 골목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며 코노하는 얼마 남지 않은 예선 얘길 꺼냈다. 코타로는 그렇게 초조해 보이지 않았다. 눈썹을 치켜 뜬 채로 입꼬리를 찢었다. 저건 일학년이었을 때부터 줄곧 지어오던 표정이다. 한때 코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긁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태연함이냐, 뻔뻔함이냐, 멍청함이냐, 도대체 무엇이냐. 어렴풋이 답에 근접하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감이었다. 물론 그것도 맞았다.

 

우리 부원들이 좀 강하잖냐? 어디 가서도 안 꿀려. 코타로는 말을 마치고 골목 끄트머리에 위치한 편의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드 먹자. 그는 지갑을 꺼내 흔들며 계단을 밟았다. 코노하는 코를 훌쩍이곤 문 앞에 그 뒤를 따르다 유리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일 년 전 예선을 앞두고 코타로는 사뭇 다른 말을 했던 것 같다. 날 믿어, 에이스잖아! 아주 미미한 변화들을 미리미리 주워담지 못하고 수북이 쌓인 고지서처럼 한꺼번에 훑으려니 두가 지끈거렸다. 쭈그려 앉아있으니 머잖아 계산을 마친 코타로가 하드 두 개를 덜렁덜렁 들고 나왔다. 그는 하드봉지로 코노하의 뺨을 찔렀다. , 차가워. 그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그걸 받아 들고는 포장지를 벗겼다. 두 사람은 혓바닥에서 하드를 녹이며 마저 도보를 걸었다.

 

시시콜콜한 화제로 돌려볼까 하는 노력들은 간단히 무산되었다. 배구로 만났기 때문일까, 이야기는 강화훈련과 봄고에서 맴돌았다. 어느새 하늘이 불그스름했다. 코노하는 눈을 끔벅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대문 앞에서 코노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있잖아, 네 집 지나쳐온 거 같아. 어째 미안한 투였지만 코타로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몇 년 전에는 밥 먹듯이 있던 일. 석양을 우산 삼은 코타로의 뒷목이 붉어졌다. 하드를 다 먹고 남은 막대를 입에 문 채였다. , 그리고 난 너 믿으니까. 그는 코노하의 어깨를 밀며 걸음을 물렸다. 그런 말은 아무래도 너무해. 그는 대문에 선명한 지문을 남기며 고개를 숙였다. 코타로는 뒷걸음질로 그에게서 멀어지며, 그의 연한 머리칼 밑으로 귓불이 해 지는 하늘빛에 젖는 것을 보았다. 과연 하늘빛이었다.

 

차라리 확 비틀어졌다면 어땠을까. 코타로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부스 안에 우두커니 서서 골똘해졌다. 강한 수압이 그의 두피를 강타한 탓에 종일 고된 연습으로 기운이 쑥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속눈썹에 묵직하게 맺힌 물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수도를 잠그었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떨어내며 되뇐다. 차라리 아주 비틀어졌다면, 모두가 움찔할 만큼 뒤집어졌다면. 이런 건 뭐랄까, 아주 자그마한 블록 한 조각이 사라진 레고를 보는 기분이랄까. 못내 성가시지만 그 한 조각이 없어도 별다른 흠 없이 잘만 서있는 조형물을.

 

아아…… 싫다.

뭐가, 공부? 설마 배구가 싫진 않을 테고?

엄마 아들은 공부랑 배구 말고도 신경 쓸 게 많답니다!

여자친구?

아니……

그럼 그냥 친구?

 

어어 친구……, 코타로는 말끝을 잘근 씹었다. 머리가 다 마르자 주저 없이 베개에 뒤통수를 뉘였다. 국어 시간에 좀 더 집중할 걸 그랬어. 개운치 못한 맛, 달콤쌉싸하게 혓바닥을 도는 맛, 잘못 삼킨 생선가시처럼 위장을 날카롭게 긋는 무언가. 각각 다른 곳에서, 코타로와 코노하는 한숨지었다. 나는 내가…… 너에게 좀 더, 아주 조금 더 특별하길 바랐어. 결국은 이것이었다. 유치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짧게 웃었다.

 

코노하 씨한테 올릴게요. 며칠 후, 케이지는 부활이 끝나고서도 코트를 서성거리더니 공을 가지고 다가왔다. 코노하는 짙은 눈꺼풀을 느릿느릿 끔벅였다. ? , 코노하 씨요. 그들이 마주하고 선 거리만큼의 침묵이 마룻바닥을 기었다. 늘 쉴 새 없이 뼈마디를 정리하는 손이 공을 감싸 쥔 채로 가만히 복부 앞에 놓여있었다. 코노하는 이런 것에 그러마, 하고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제 자신이 잠시 싫었다. 그러나 이윽고 뒷목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보쿠토는?

……

……

코노하 씨도 스파이커잖아요.

?

예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스파이크 연습 안 하십니까?

 

아까 시뮬레이션도 했고, 본연습이라면 이미 두 시간 정도, 갖은 핑계가 떠올랐지만 코노하는 머쓱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코타로는 보이지 않아.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코트로 들어왔다. 올립니다. 케이지는 그가 왼편 끄트머리에 선 것을 확인하고 유키에에게 부탁을 했다. 유키에가 공을 던지자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케이지의 손끝에 닿았다. 코노하 씨! 케이지의 목소리로 제 이름이 불리는 건 아무래도 어설펐다. 마침 좋은 위치로 날아온 공을 후려쳤다. 내가 후려친다면 코타로는 찍어 누른다는 느낌이지. 아마 케이지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것이다. 코노하는 그런 생각의 일련을 뽑아놓고 돌아보았으나 케이지의 낯은 읽어내지 못할 만큼 단정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토스를 더 칠 때마다 팔에 힘이 붙었다. 연달아 스파이크의 기회가 떨어진다는 건 상당한 체력소모를 유도하는 일이면서도 반비례적으로 온몸의 열을 돋구는 일이기도 했다. 에이스는 코타로니까, 코노하에게 좀처럼 기회가 없었던 것은 맞았다. 이런 것도 계승일까요. 턱 밑에 고인 땀방울을 닦아내던 케이지가 무심코 중얼댔다. 묻는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투라서, 코노하는 그가 흘려놓은 말을 한 모금 정도 혀끝으로 맛보았을 뿐이었다. 대개는 코타로의 공을 올려오던 케이지가 자신의 타점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칭찬을 해주었더니 저는 세터고 코노하 씨는 우리 팀의 스파이컨데,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 묵묵하게 되받아 쳤다. 문득 네트를 쳐둔 체육관 쇠문 너머로 코타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담 다 받았어, 아카아시! 그는 다리를 힘껏 휘저어 들어오다 땀에 젖은 코노하를 발견하고 문턱에서 멈춰 섰다. 그 역시 턱을 닦다 말고 코타로와 마주했다. 케이지는 네트 너머로 떨어진 공을 주워오며 대꾸했다. 오셨으면 몸 풀고 토스 칠 준비하세요. , , 그래, 코타로는 더듬대며 허둥지둥 가방을 내던지고 탈의실 문을 어깨로 밀었다. 코노하는 손을 털고 허리를 구부려 운동화 뒤축을 고쳐 신었다. 이제는 지켜보며 감탄할 시간이야. 아카아시 케이지만이 유도할 수 있는 보쿠토 코타로의 완벽한 스파이크를. 내가 세터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케이지가 코트 선을 밟아 나왔다. 그림자가 유하게 진 얼굴로 내려다보며 그랬다.

 

코노하 씨는 뭔가 계속 아쉬운 얼굴이네요.

?

……

반년만 있으면 졸업이니까? 하하하.

 

코타로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뭐야, 코노하도 연습하고 있었던 거냐구. 그가 얼띤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코노하는 입술을 내밀어 우스꽝스러운 낯을 만들었다. 그건 뭐냐, 뽀뽀? 코타로는 이맛살을 구기며 맞받아치고는 키트에서 새 공을 하나 꺼내왔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을 세며 코노하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로 헐떡이던 호흡을 메웠다. 뒤축이 단정해진 운동화와 함께 다시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이제 보쿠토 토스 올려줘. 케이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밀어내는 순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덤덤한 케이지의 목소리가 귓불을 잡아당겼다. 아쉬워요. 코노하는 눈썹을 치켜뜨고 돌아보았다. 알 듯 말 듯한 말이었다. 그래서 무어라 대답하지도, 반문하지도 못하고 입꼬리를 찢어 웃어 보였다. 이번에도 케이지는 혼잣말을 하는 투였다.

 

저도 아쉽습니다.

 

*

 

재미있는 사실 알려줄까. 우리 졸업하면 삼학년 주전은 아카아시뿐이야. 코노하가 느닷없이 꺼낸 말에 코타로는 제 옆에 늘어져있던 담벼락을 짚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 아카아시 어떡해! 그들은 다시 간만에 나란히 하교를 하던 중이었다. 코노하의 옅은 머리칼이 좀 더 짙게 얼룩져있었다. 걱정 마, 너 같은 후배만 안 들어오면 되거든요? 코노하는 코타로의 너른 등을 후려치며 볼멘소릴 했다. 너무하잖아! 팔을 꺾어 손바닥으로 등을 비비는 코타로의 왼손에는 샌드위치 한 조각이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코노하가 쏜 것이었다. 남은 빵 조각을 우물거리던 코타로가 잠깐의 침묵 끄트머리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키노.

……

……

.

너 진짜 대학 가?

그럼 안 가? 넌 뭐하게. 실업배구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니까…… 대학 가면, 더 이상 못 보나? 초석의 표면 같은 코타로의 목소리에 코노하는 잠시 발끝을 주춤거렸다. 걸음이 느려졌다. 평소엔 의심치도 않았던 것들이 스물스물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언젠가 깨끗이 씻은 머리에 도로 채워 넣었던 의문들과 비슷한 형상을 띤 언어들의 중추였다. 우리가 그만큼 특별한가. 이것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튀어 올랐다. 코노하는 붙어있던 입술을 겨우 떼었다.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대학 좀 따로 간다고 못 보겠냐?

아니 그러니까,

너 맨날 강의 끝나면 학교 들러서 아카아시 찾아 삼만 리 하는 거 벌써 상상된다, .

나 지금 네 얘기 하고 있는데.

 

코타로는 오랜만에 맹물 같은 표정이었다. 활짝 웃는 게 아니면 마구 일그러뜨리는 애. 그런 애가 물 위를 부유하는 듯 가만한 낯을 하고 있었다. 파도가 친다. 두 사람은 그것을 느꼈다. 코노하의 귀 밑에 저무는 빛은 해 지는 하늘을 닮은 물빛. 아키노, 한 번 더 불러보자 그 색이 더욱 짙어졌다. 비추는 것이 아니라 체내에서 체외로 고여내는 빛. 이 순간까지도 나름의 유치한 고민들을 실타래처럼 뭉쳐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내가 너에게 좀 더 특별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좀 더. 비웃음 살 감정들이 두려워 그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관계는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 삼키듯 닥치는 대로 짙어져, 마침내 그것이 좀 더 정교한 무늬로 옅어지는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진 것이라고. 두 사람은 마침내 골목의 허리에서 오도카니 멈췄다. 좀 더 분명하게 서로의 눈을 살폈다. 확실치 않은 것을 확인하는 시간은 괴로웠다.

 

밀물과 썰물은 몇 번이고 들이닥쳤다 빠져나가, 마침내 그들의 관계를 이만큼까지 깎아놓았다고. 코타로와 코노하가 기억하는 처음의 그것은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바위여서, 그 누구도 함부로 들기 어려운 것이라, 그것이 차라리 개운하고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침식의 시간을 거친 그것을 지금 들여다보니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조약돌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놓았다가 가끔 꺼내 보기에 좋은, 어루만지기에 좋은 것. 코타로가 문득 코노하의 팔목을 움켰다. 가느다란 뼈대를 그러잡은 손아귀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마침내는 부드러이 빠졌다. 매끄러운 눈에 실과 실을 이은 듯 서로를 팽팽하게 마주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묻지 못할 유치한 의문들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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