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서쪽 교외에 터를 잡은 아라시야마風山의 대나무숲길을 한없이 걷다 보면 아카류슈고赤龍

아카아시 家는 데릴사위를 들여 적통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고수했다. 사 대가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운명처럼 여아를 출산했는데, 오 대째에서 문득 처음으로 남아를 낳게 된 것이었다. 조모는 사내라 하더라도 가업을 전수하는 일에 있어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 아이에게 케이지라는 이름을 붙이고 붉은 강보를 둘러 키웠다. 여느 곱슬머리의 아이들과는 달리 어투가 단정했고 차분했다. 처음 세상에 났을 때 어머니의 부름보다도 박새의 지저귐을 가장 먼저 들은 아이는 또래가 없이 자란 탓인지 말수가 적고 낯을 가렸다. 케이지는 집안의 손윗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조그만 산짐승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다. 홀로 별당의 툇마루에 앉아있노라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들이 귀에 들어왔다. 겁도 없이 손가락 위에 내리 앉는 직박구리의 지저귐, 다람쥐가 나무를 오르며 부리는 발재간, 죽창의 꼭대기부터 지상의 해당화 이파리들까지 어루만지는 미풍의 입김. 그리고 이따금 정체 모를 속삭임들이 드높은 하늘로부터 어지러이 쏟아져, 나무와 나무 사이를 돌아나는 바람을 타고 사라지곤 했다.

 

케이지의 일과는 단조로웠으나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었다. 그가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마당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조모와 모친은 그를 신사 뒤켠에 있는 언덕의 사당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매일 동이 트기 전 발걸음을 하여 정수를 떠다 바치고, 언덕 정상에서 뺨에 피는 홍조와 같은 일출을 보고 하산했다. 신사로 돌아오면 문간 곳곳이 내린 발을 걷고 먼지를 털고 바닥을 쓸었다. 아침은 흰 쌀밥과 간장, , 머위뿌리, 연근과 바짝 말린 소의 살코기였다. 식사를 마치면 바로 구슬을 만들어야 했다.

 

구슬은 일 년에 네 번, 사당에 모신 영물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이었다. 승천한 적룡이 입에 물었다는 구슬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아라시야마에 인접한 동네 대장간에서는 유리를 한 묶음 싣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신사를 찾아왔다. 모친은 유리 한 판을 대청에 남겨두고 나머지를 창고에 쟁여놓았다. 이어 조모가 가마에 불을 떼면 케이지는 합판과 염료를 내왔다. 염료는 전에 만든 구슬에 색을 입히기 위함이었고, 합판은 새로이 들여온 유리로 구슬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유리 한 판이 가마에서 모조리 용융되면 솥에 옮겨 부어 내왔다. 그러고 나면 세 사람이 모여 앉아 극비棘匕로 유리를 떠서 합판에 동그랗게 파인 홈들을 채워 넣었다. 합판이 다섯 개 정도 채워지면 뒤뜰 장독과 함께 땅에 묻어 냉각시켰다. 이미 굳은 구슬들은 꺼내어 염료에 담갔다 빼낸 후, 마당에 내놓고 말렸다. 구슬을 만들고 나면 전병과 향초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이후에는 휴식을 취했다.

 

모종의 일과가 끝나고 나면, 케이지는 어김없이 고요한 별당으로 향했다. 감색의 하카마로 갈아입고 책을 읽거나 유백색 이불에 몸을 만 채로 오후 단잠에 빠지곤 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방 안보다는 마루에 나와 있기를 더 좋아했다. 그럴 때는 대개 해를 가린 잿빛 구름과 어둔 빗줄기로 시야가 컴컴했기 때문에 차라리 눈꺼풀을 닫고 있었다. 귀만 열어둔 채 미약하게 숨을 쉬었다. 빗방울이 묵직하게 해당화 꽃잎을 두드리는 소리, 하늘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아득한 천둥소리를 먹먹히 들었다. 그러다 보면 여느 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 빗소리에 불순물처럼 섞여 드는 미묘한 잡음이 귓속으로 흘러 들곤 했다. 케이지가 이것의 정체를 육안으로 처음 확인했던 것은 그가 생의 열다섯 번째 장마를 맞던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케이지는 빗발과 꼭 닮은 청벽색의 장옷을 두른 채 마루 위에 웅크려 앉아있었다. 무릎을 세워 팔뚝을 감싸 안고, 그 안에 머리를 모로 기대어 선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베틀에 매인 실처럼 가닥가닥 곧게 낙하하는 빗줄기 사이를 불청객이 흔들었다. 케이지는 설핏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흐리게 멍울진 빗줄 너머로 백발을 늘어뜨린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은 물웅덩이로 진창이 된 땅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무성하기도 하여 얼굴을 죄 가리우는 것이었다. 그 사이로 실핏줄이 발딱 선 눈자위 하나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케이지는 턱을 무릎에 얹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몸을 휘어잡은 기묘한 느낌에 불현듯 손발이 언 탓이었다. 숲에서 쪽문으로 잘못 들어온 객인이 아닐까. 어머니를 모셔와 안내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케이지는 스스로 품을 옥죄고 있던 팔짱을 찬찬히 풀었다. 마루를 짚고 엉거주춤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 순간, 객인이 손을 들어 검지를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얼굴 언저리에 갖다 대었다. 케이지는 목기둥을 붙잡은 채로 입술을 봉했다. 객인은 여전히 충혈된 눈을 끔찍하게도 둥그러이 뜨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검지를 여전히 입가 어디쯤엔가 붙인 채였다. 말하지 마. 아무런 언어도 오가지 않았지만 케이지는 그가 침묵을 내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색의 꽃잎 사이에 구물구물 기어가는 유록빛 벌레를 본 듯 선뜩하고 짜릿한 이질감이 온몸을 압도했다. 케이지는 한참 만에야 이 낯선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검지를 제외하고 고이 말아 쥔 객인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봉긋이 튀어나온 목젖이 파도를 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일곱 개였던 것이다.

 

객인이 물감이 번지듯 서서히 희미해지고, 이내 완연히 빗속에 젖어 사라지고 나서도 케이지는 한참 기둥 옆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요괴가 분명해. 이윽고 다리가 풀린 케이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등을 처마 밑에 매달고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문득 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것을 깨달은 모친이 이마를 짚으며 걱정했으나 케이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끝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벌건 눈으로 수풀 사이에서 오롯한 시선을 보내며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던 요괴의 잔상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일 년은 어느 분야에서든 적당한 시간이라고보쿠토 코타로는 생각했다접때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휴직서를 냈던 야마모토 씨가 쾌차하고 회사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 년할 줄 아는 영어라곤 간단한 인사말이 전부였던 사촌동생이 영국에 가더니 외국물 먹은 티를 내며 도쿄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도 일 년가려는 학교 허들 높지 않니주전 하려면 그거보단 키가 좀 더 커야 좋을 거야중교를 마칠 무렵 부모님으로부터 그런 소릴 듣기가 무섭게 10cm 남짓 머리꼭지가 훌쩍 크는 데 걸렸던 시간도 일 년그러니 일 년이라는 것은 각양각색의 변화에 거의 공용적으로 적용되는 유통기한임이 틀림없다.


이를 테면 사랑에서도,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늘 불안하게 유동하는 마음을 정착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일 년. 정착했다 싶은 사랑이 변질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일 년 정도. 고민하고 갈등하고 숙고하며, 이별을 결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일 년. 마침내 이별을 선고 받았을 때 이별을 납득하기까지 대략 일 년. 여기서 납득은 종합적인 개념이다. 왜 헤어졌는지,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지, 상대의 부재를 견딜 수 있는지, 그런 총체적인 의문들의 해답이 하나로 좁혀질 때 비로소 이별을 납득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맞물린 톱니바퀴와도 같아 저 중 단 하나라도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납득은 유예된다. 이런 경우에는 가장 일반적인 유효기간인 일 년을 훌쩍 넘길 가능성이 있다. 이때부터 마음이 견디기 힘든 단내를 풍기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코타로는 다행히도 제게 연체는 없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쿠로오 테츠로는? 그걸 제가 어찌 아나. 테츠로의 마음이야 테츠로만 아는 것이다.

 

하지만 테츠로가 저를 까마득히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타로는 그것을 확신했다. 일 년이라는 유통기한은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 하루에도 몇 천 몇 만의 세포가 죽고 새로이 재생되며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지 않듯이, 그 기간 내에 벌어지는 것은 천천한 변화 그 자체였다. 아주 썩거나 아주 사라지지 않을 정도의 변화 말이다. 이후에도 안정적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시간. 따라서 헤어진 지 일 년이 된 연인의 얼굴을 아주 또렷이 알아보거나, 혼잡한 인파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듣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질척한 미련이 남은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적당했기 때문인 것이다. 일 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 동안 정리가 된 것이지 박살이 났다거나, 그래서 산산조각 흩어졌다거나 분해되었다거나 휘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암만 모른 척을 해도 여태 일 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쿠로오 테츠로를 좇는 데에 정성을 들여온 제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냔 말이다. 코타로는 목을 죈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렀다. 그의 이름을 간만에 들은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귀에 익은 이름이었기에 자연스레 한 사람을 연상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귀에 익은, 정도가 아닌 귀에 살던 때는 일 년 전. 그러니 이제 귀에 희미한 것이 되려면 다른 일 년이 더 남은 셈이다.

 

보쿠토 씨는 어때요?

?

쿠로오 씨 실물은 처음 보잖아요. 그렇죠? 국내공연은 팔 년만이니까.

, 그렇죠……

 

코타로는 말끝을 흐지부지 늘어뜨리곤 잔에 반쯤 채워져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맞은편에 앉은 테츠로가 고개를 젖혀 웨이터를 불렀다. 머잖아 물병을 든 웨이터가 걸어와 텅 빈 코타로의 잔에 물을 다시 채워주었다. 저리 태연자약할 수도 있구나. 원래야 천연스러운 것은 테츠로의 특기였지마는. 그 깜냥이 아직 죽지 않아 일 년 전 헤어진 사람을 눈앞에 놓아두고 고기도 썰고 술도 마시고 팀장의 같잖은 농담까지 먹어 치우고, 보쿠토 씨는 한 잔 안 하세요? 제게 넉살 좋게 말문까지 터왔다. 코타로는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결결이 손톱이 박혔다. 곧 축축해져 바지춤에 슬그머니 문질렀다. 손끝과 발끝에 힘이 바짝 들었으나, 이내 맥아리가 풀렸다. 일 년은 적당해도 너무 적당해서 문제야. 코타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이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팀장은 비어가는 테츠로의 잔을 습관적으로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지요.

 

쿠로오 테츠로는 스물둘에,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무용수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코타로와 함께 배구를 했었다. 테츠로가 무용단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뜻밖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전향이라고는 생각지를 않았다. 배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어디까지나 의욕을 태울 만한 취미에 불과했다. 테츠로는 진작 일 년 말미의 자율전공을 택했고, 처음 체교과에 들었던 코타로는 영 제 분야가 아니라며 고생을 해서 전과를 해야 했다. 몇 년 후에 무얼 하고 있을까. 막연했던 고민이 구체화되지는 못하고 불투명한 채로 앞당겨진 것이 전부였다. 무얼 할까. 무얼 해야 하지. 그 무렵에 테츠로는 학교 축제에 마련된 공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무용과 동기를 대신해 무대에 올랐다가 해당과 교수에게 입단을 제의 받았다. 해외에서는 웬만해서 인지도가 높은 무용수들을 졸업시킨 교수라니, 그때부터 테츠로의 방향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코타로가 그에게 고백을 했던 것은 수도권 갈라쇼에서 그의 데뷔무대이자 첫 국내무대가 있던 날의 어둔 밤. 유연한 몸이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라고. 배구를 하던 시절엔 잘 쓰지 않았던 근육의 움직임을 본 것,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몸짓을 본 것, 색다른 환희에 찬 얼굴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라고. 그 이전부터 너를 좋아해왔노라 털어놓았다. 테츠로는 커튼콜에서 받은 백장미 다발을 한아름 안은 채 눈을 찬찬히 끔벅였다. 머잖아 달을 가리운 구름이 걷히듯 희부옇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팔 년 전의 이야기.

 

보쿠토 씨는 택시 타고 들어가려고?

아뇨, 걸어서…… 집이 요 근처입니다.

잘됐네요. 쿠로오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내일모레 뵙시다.

노리오 씨도 살펴 들어가세요.

 

팔 년 전의 이야기. 다시 말하면, 유효기간이 지났어도 한참 지난 이야기. 더 이상 흐드러진 장미 다발이나, 우스꽝스럽게 버벅댄 고백이라든가, 희붓한 웃음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들은 죄 팔 년 전의 명의로 된 시간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테츠로의 말을 빌리자면 코타로는 어울리지도 않는양복을 제법 맵시 좋게 입고 있었고, 테츠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너 진짜 집이 이 근처야? 외투를 여미고 담배를 꺼내던 테츠로가 물었다. 코타로는 고개를 저었다. 헤어진 연인의 은퇴무대 기획 때문에 배급사 상부에서 독촉을 받아온 것이 벌써 몇 달째. 최근 일주일 동안은 밤잠을 설친 탓에 평소보다 축 늘어진 코타로는 편의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강장제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강장제는 계산대 옆에 붙은 소형 냉장고에 구비되어있었다. 테츠로가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것이 생각나 그 옆에 비스듬히 진열된 라이터에 먼저 눈이 갔다. 돌이켜보면 한창 연애를 했을 때도 테츠로가 담배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연애 끝에 조촐한 식을 올렸을 때도, 기분을 내자며 떠났던 프라하 여행에서도 그의 가방에서 담배 보루나 라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테츠로가 피우는 담배의 존재를, 그 상표와 브랜드와 디자인과 맛을 처음 알았던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외 공연이 있었던 당일 새벽에 (그러니까 일본 시간으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단독 보도된 기사를 통해서였다. 까만 코트에 잠기다시피 몸을 한껏 가리고 담배를 문 사진이 한 장, 그리고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낯선 남자와 얼굴이 닿아있는 사진이 한 장. 닿아있었던 것인지 닿기 직전의 순간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보다 한참 거구였던 남자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중년의 신사였다. 테츠로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코타로는 있는 힘을 다해 오해의 여지들을 생각해보았다. 해외투어에서 생긴 인맥에 불과하고, 테츠로는 인상이 원체 어디서든 능수능란해 뵈는 구석이 있으니 아마도 남자가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담배를, 아마도 귓속말을 하려 고개를 구부리다 저런 야릇한 사진이, …… 연인의 귀국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코타로는 베개에 처박았던 고개를 번뜩 세웠다. 아니, 변명해야 하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지금 이 지랄을. 그는 테츠로가 집으로 돌아오면 스스로 해명해주기를 기대했으나, 테츠로는 아무 말도 않았다. 해외투어로 인한 출국이 잦아졌다. 도피일까. 집에 있는 시간이 한 달에 일주일은 될까 말까 한 와중 남자와 함께 찍히는 사진들은 점점 더 노골적인 태를 보였다.

 

코타로는 커다란 캐리어에 옷가지와 화장품과 잡동사니를 있는 대로 구겨 넣었다. 지퍼를 꾸역꾸역 닫고 현관 앞에 놓았다. 그리고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테츠로는,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 캐리어와 마주하게 되었다. 코타로는 소파에 누워 눈을 붙인 채로 중얼거렸다. 네가 나가. 그러자 한동안 마룻바닥에 정적이 끼었다. 쿠로오 테츠로는 제가 뺨을 올려 붙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취재진이 널린 해외에서 무방비하게 다닐 만큼 깡따구가 있는 놈이라면 눈곱만큼도 감사하지 않겠지만, 게다가 도쿄를 지키며 저를 기다리던 연인에게 일말의 면목도 배려도 의리도 없는 새끼라 어쩌면 되려 나더러 나가라고 역정을 낼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마음의 혓바닥이 거기까지 중얼댔을 때, 코타로는 둔탁한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테츠로가 캐리어를 집어 든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그대로 현관을 나섰다. 코타로는 한동안 넋을 놓고 굳게 닫혀버린 현관문을 응시했다. 이것이 일 년 전의 이야기. 코타로는 강장제를 계산대에 내밀며 지갑을 열었다. 점원이 바코드를 찍으려 강장제를 이리저리 돌리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다. 테츠로가 휘파람을 불며 진열대 가장 위쪽에 배치된 콘돔 상자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요즘은 러브모텔은 웬만한 호텔만하네.

……

그리고 코타로 군은 예전처럼 시끄럽지 않네요.

피곤해서 그런 거거든?

피곤한 놈이 두 번이나 싸?

 

두 번이나 쌀만한 몸이고 몸짓이고 목소리였는걸. 코타로는 눈을 껌벅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테츠로가 그 모습을 보고 붕어가 뻐끔거리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는 담배의 허리를 입에 물기 전에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두툼한 커튼을 젖히고 가부키초의 장난감처럼 오밀조밀한 야경을 내다보았다. 코타로는 베개 밑에 넣어놓은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꺼내어 보니 야마모토 씨의 문자였다. 막공 때 회식이 있으니 저녁 스케줄을 비워두라는 내용이었다. 코타로는 다시 핸드폰을 끄고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눈꺼풀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허릿짓을 하는 내내 테츠로의 이름 한 번 부르지 않았던 성대인데 마구 고함을 내지른 듯 목소리가 쉬어있었다.

 

너 막공이 언제냐.

언제였더라…… 돌아오는 주 목요일인가 그럴걸.

, 그래.

그건 왜?

……

커튼콜 때 꽃다발이라도 주게?

 

스물두 송이, 당시 제 나이만큼 꽂힌 백장미 다발을 끌어안고,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다 마침내 누그러지게 웃던 남자애. 그 밤 까만 머리가 주홍빛 가로등에 붉디붉게 젖어가던 애. 코타로는 테츠로의 웃음기 어린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모로 돌아누웠다. 낯선 외제의 담배 향기를 맡았다. 수천 수만의 세포가 죽고 재생되는 날이 거듭되어 일 년 치가 축적되었다. 그 동안 테츠로는 하루에 두세 번의 공연을 소화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골초가 되어있었고, 보다 섹스에 능숙해졌으며, 영양가 없는 농담이 늘어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코타로의 시선이었다. 저는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이것은 테츠로가 말해줄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그가 세 손가락으로 뺨을 지그시 눌러오며 입을 열었다. 코타로 군은 말수가 줄어든 거 빼면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지. 그리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머잖아 불명하게 잦아들었으나.

 

코타로는 무언가 묻고 싶어졌다. 실은 일 년 전, 아니 훨씬 오래 전부터 테츠로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때는 합당하게 들렸을지 몰라도 지금은 뱉어놓기 부끄러운 질문들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들. 그리고 쓸데없는 체력소모는 제게만 불이익이라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착실하게 깨달아온 코타로는 어느 때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한 편인지 가려낼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입술을 닫았다. 침묵을 쌓았다. 그러자 테츠로가 인공적인 고요에 응해주었다. 코타로는 불현듯 등 뒤에 담배를 물고 앉은 이 남자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팔 년 전 가로등 밑의 그와 과연 같은 사람인가. 같다면 돌아갈 수 있는가…… 글쎄. 지금 이 순간에도 테츠로는 몇 초 이전의 테츠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걸. 그렇다면 제 앞에 새로이 나타난 쿠로오 테츠로를 어찌할 것인가. 코타로는 밤을 지새워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납득하자. 그 방법밖에는. 그리고 감히 짐작하건대, 이것은 다시 일 년이 걸릴 것이었다. 여태 그만하면 적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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