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있어 칼이나 도끼 같은 것이 유효했으면 좋겠다. 고기를 썰면 우아한 마블링이 나오고, 나무를 베면 말발굽 같은 나이테가 나오듯이 관계를 잘랐을 때 보여질 깨끗한 절단면을 기대한다. 늘어진 실밥이나 끊어지지 않은 힘줄 없이 깨끗하게 분리될 수는 없을까, 매번 생각하지만 완전한 것은 없다. 먼저 이별을 고하는 쪽이 악惡을 자처하는 것이라면 붙잡는 쪽은 무엇을 자처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분법적인 판단과 결부할 일이 아니다. 지난번 근섬유가 다 찢기고 뼈대만 덜렁덜렁하게 남은 채 토오루에게 한 번 더를 요청 받았을 때 알았다. 이것은 아무래도 더럽다. 왜 또? 헤어지자는 말에 지친 목소리로 인상을 잠시 구겼던 걔를 보면서 짐짓 불평했다. 불공평해. 왜, 대체 왜…… 그런 식의 의문은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라는 간곡함에는 따라붙지 않는다. 공평하게 나누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마침내 절단하는 것이 좋다. 이별을 읊는 내게 왜, 를 묻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절절한 폭력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봐. 그렇게 말하는 걔에게 똑같이 반문한다면 말할 것이 있을까. 그래도 오래 만났잖아. 대개는 그런 식으로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오래 인연을 이어왔다는 사실은 인연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적절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헤어짐에 만남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새 헤어짐은 말뿐인 헤어짐이, 만남에 비해 가벼운 차원의 행위가 되어있다. 헤어짐이 나의 혓바닥 밑에 고여있다. 대개는 토오루가 지쳐 보인다고 말한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걔는 스스로 탈진을 자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에 수치를 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역시 토오루만큼이나 너덜너덜해졌다. 젖은 빨래처럼 햇볕 밑에서, 이 관계에 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노력하고 싶지 않다.
나 오늘 공연하는 거 알잖아.
근데.
꼭 큰일 치르기 전에 그런 말 해야 되겠어?
……
이따 밤에 다시 얘기하자. 공연도 안 보러 올 거지?
갈 거야.
알았어.
안구가 뻐근해졌다. 가로등불 밝은 도보에서 언쟁을 벌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깨가 뭉쳤다. 왜, 도대체 뭣 땜에 그래. 왜 그러는데. 익숙한 패턴이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이다. 왜냐는 질문에 꼭 대답할 필요는 없다. 정확한 답을 제시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이유가 필요해질 때부터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토오루는 돌아앉아 피크를 챙겼고, 나는 등을 구부려 책상에 뺨을 대었다. 기타가방에 지퍼를 채운 걔가 성큼성큼 걸어와 입을 맞추었다. 수명이 다 된 랜턴이 깜빡이듯 아주 잠깐 따뜻했다. 걔의 큼지막한 손이 내 등을 슬슬 어루만졌다.
나중에 얘기하자구. 응? 이따 봐.
현관문이 닫히기까지 나는 대답을 않았다. 얘기라면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입술을 뾰족하게 모아 볼을 부풀렸다가, 이내 바람을 뺐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토오루와 처음 헤어질 뻔하던 날에 걔에게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는 처음으로 걔의 구차한 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역시 오이카와 토오루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다 믿었기에, 이별의 국면을 비껴나갔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나 스스로 걔의 말을 잔뜩 포장하는 불찰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이 관계를 고쳐보자는 의미 따윈 없었잖아. 우리는 망가진 채로 이어졌고, 나는 이 녹슨 느낌이 싫었다. 싫은 것은 아무래도 이 크나큰 마음으로 넘기기에 가볍다. 진저리가 날 때가 정말로 그만두어야 할 때다. 흉부까지 욕지기가 찰 즈음에 이별을 혀에 담고 나면 그걸 먼저 말하는 건 항상 나였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이후로 별다르지 않았던 토오루는 토오루 그 자체였다. 사람도 사랑도 모두 시간을 달리는 것들인데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자연히 변질되는 것에 어거지로 방부제를 친 느낌이다. 나는 속이 곯아터진 지 오래였다.
어스름이 질 즈음에 부스스 일어나 외투를 껴입었다. 신발에 발을 구겨 끼우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쳐 신었다. 로비를 나섰을 때는 핏빛 낙조를 보았다. 나는 메트로에 몸을 싣고 문 옆에 비스듬히 서서 졸린 눈을 했다. 끄트머리 좌석에 앉은 젊은 여자들이 핸드폰 화면을 공유하며 시시덕거렸다. 언뜻 그네들의 입에서 토오루의 이름을 들었다. 같은 역에서 내리겠구나, 짐짓 생각했다.
장내는 안내원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혼잡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어중간한 곳에 끼어 서서, 음향장치가 설치된 무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팜플렛과 핫팩을 든 사람들이 상기된 뺨을 하고 저들끼리 두런거렸다. 발목을 꺾으며 기다렸다. 별안간 장내 조명이 하나 둘씩 꺼져가더니 완전히 소등되었다. 찬찬히 무대 앞쪽과 천장에 설치된 조명이 점화했다. 뱃속까지 둥둥 울리는 악조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드러머가 스틱을 돌리고 베이스가 깊이 깔렸다. 일렉을 쥔 오이카와 토오루가 중앙에 서서는 스탠딩 마이크에 입술을 붙였다. 분해할 수 없는 가사들이 걔의 구강에서 번역되었다. 훌륭한 발성이었음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언뜻, 걔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 명 가까이 되는 객석에서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저것보다 좀 더 구질구질했다. 울먹임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걔가 내지른 가사의 어미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번뜩 그런 언어의 일련이 뇌리에 스쳤을 때, 마치 그것은 애당초 토오루의 혓바닥에 들러붙은 한 구절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앞으로 몇 곡이 더 이어지고, 나는 평소 귀에 익은 데시벨보다 두 배는 큰 음파가 온몸을 휘젓는 탓에 고통스러워졌다. 전력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는 밴드와, 전력을 다해 소리를 지르고 환호하는 관객들은 망가진 채 돌아가는 태엽 같다. 잠시 후 마지막 곡이 멎고, 귀를 찢는 함성 속에서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누군가 앵콜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여섯 명씩 입을 모아 소리를 키워나갔다. 앵콜, 앵콜, 앵콜. 머잖아 장내가 곧 앵콜을 부르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귓구멍이 먹먹해졌다. 이제는 씨근덕대는 호흡을 잠재울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밀도 있게 붙은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역행했다. 아마도 토오루는 미리 지정해놓은 앵콜곡을 부르러 무대 위에 다시 올라올 것이다. 그것은 단 한 번이 될 것이고, 앵콜을 외치던 사람들도 곡이 끝나면 주섬주섬 갈 채비를 할 것이다. 심장이 쿵쿵 뛴다. 하지만 머잖아 진정된다. 다시 듣는 노래는 처음 들었을 때만큼 혈관에 녹지 못할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부른다고 올 리가 있나. 관객들이 부르짖는 앵콜은 사실 오이카와 토오루의 목소리다. 그건 걔가 마지못해하는 것이기도 하고 원하는 대로이기도 하다. 이미 끝나버린 노래인데 다시 불러 무슨 감상을 얻나. 머리를 쨍하게 뒤덮는 앵콜을 뒤로하고 장내를 빠져 나왔다. 무대가 끝나고 비참해질 토오루를 생각하며, 나는 여태 내가 비참했던 횟수를 세었다. 앵콜, 앵콜, 앵콜.
부르지도 않을 것이며,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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