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도 사토리는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뉴질랜드에서 일 년, 프랑스에서 이 년을 있었으니 자그마치 삼 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오사카에서 개최된다는 월드리그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일본 국가대표이자 자신의 고교 동창이기도 한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으며, 심층적으로는 일전 그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국대 팀의 세터로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한때 이빨을 드러냈던 두 사람이 함께 코트를 누비게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시라토리자와, 아오바죠사이의 배구부를 구성하고 있던 동창들에게 모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텐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보 촬영을 위해 하와이로 출국을 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월 중순에 개최될 S&S 시즌 생로랑 컬렉션 런웨이 준비에 돌입하며 다소 바빠졌지만 이번만큼은 꼭 시간을 내서 경기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카토시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데, 거기다 오이카와의 합류라니. 이건 세상에 다시 없을 조합이란 말이야. 경기만 보고 다음날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와카토시는 물론이고 다른 동창들에게도 귀국소식을 귀띔하지 않은 채였다. 본가에도 들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공항 근처 호텔의 싱글룸을 예약하려다가, 키티 (이름만 이렇지, 닥스훈트다. 텐도가 뉴질랜드에서 살 때 새끼를 분양 받아 키운 반려견이다)를 생각해 경기장과 가장 가까운 호텔의 더블룸을 예약했다. 새벽 산책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키티는 기특하게도 공항을 벗어나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까지 하드켄넬 속 몸을 웅크리고 얌전히 잠을 청했다.
텐도는 호텔 입구에서 내리자마자 하드켄넬의 문을 열었다. 키티가 짧은 다리를 힘껏 버둥거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로비로 들어섰다. 카운터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모델로서는 꽤 좋지 않은 버릇이다. 소속 사장이 매번 활동수명을 위해서라도 고치라고 일침을 놓아도 다듬어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였다)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방은 이십삼 층, 조식뷔페는 아침 일곱 시에서 열 시까지 이층 식당에서, 체크아웃 시간은 열두 시까지.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키를 건네 받았다. 텐도 딴에는 그렇게 자세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자세한 사항’은 벨맨이 방까지 안내하며 설명해줄 것이라 했다. 카운터 끄트머리의 선인장 분재에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키티의 하네스 끈을 잡아당기며 재촉할 즈음에, 그는 제 앞에 운반키트와 함께 나타난 벨맨을 발겨나곤 눈썹을 훤히 치켜떴다. 가만 보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일단 흔한 인상이 아니니까 말이지. 텐도 또한 흔한 인상은 아니었기에, 벨맨의 입꼬리가 잔뜩 우그러졌지만 그는 애써 밋밋한 인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텐도는 작은 네 다리를 발발거리는 닥스훈트를 안아 올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벨맨이 이십삼 층 버튼을 누르자 머잖아 엘리베이터 문 두 짝이 맞물리며 닫혔다. 텐도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조용하시지. 졸업한 지 이 년도 더 됐는데.
헤에, 벨맨이 말투가 영 그렇네. 카운터에 컴플레인 넣을까?
……
그렇지, 이래야 팁을 좀 주지.
텐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벨맨이 이빨을 와드득 갈았다. 캐리어와 하드켄넬을 실은 운반키트 기둥을 쥔 채 엘리베이터 전판대의 달라지는 숫자만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텐도는 그의 둥그런 뒤통수부터 발꿈치까지를 주욱 훑었다. 벨맨이라기보다는 벨보이 같은 인상이었다. 저 사나운 미간 덕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조금 길었다는 것만 빼면 예나 지금이나 외관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쿄타니 켄타로. 텐도의 기억이 맞는다면 벨보이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켄타로와는 아는 사이라기보다는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얄팍한 깊이의 관계였다. 텐도가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이 고교 이학년을 지내고 있었을 적이었고, 그것도 고작 당시 늦여름에 열렸던 인터하이 2회전에서였다. 그러니 그 해에 켄타로는 일학년이었다. 깨끗하게 밀어버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하게 새순처럼 듬성듬성 자라있던 머리카락과, 유독 여유가 없이 구기고 있던 미간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통제도 타협도 들어먹질 않는 고약한 성미 때문에 경기 중에도 아오바죠사이 측에서 불필요한 타임아웃을 몇 번 불렀었다. 텐도의 취향은 웬만해서는 함부로 넘겨짚지 않는다는 와카토시의 눈에도 특이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그는 이 점에서 몇 번 본 적 없는 켄타로에게 반해버렸다. 듣기로는 당시 삼학년들과 마찰을 빚고 임시로 퇴부를 했다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텐도가 삼학년이 되던 해의 봄에 개최된 예선에서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다시 코트에서 뛰고 있다는 소식을 스치듯 듣기는 하였으나 그 해 늦여름의 마지막 예선에서 대전 상대는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카라스노가 되었으므로 텐도에게 켄타로에 관한 기억은 까마득한 사 년 전이 끝이었다.
이렇게 볼 줄이야, 너무 신기한데.
카드키는 문고리 밑에 달린 인식기에 갖다 대면 자동으로 문 열리고, 여기 키홀더에 꽂아놓아야 불 들어오니까 알아서 하고…… 잃어버리면 이천 엔이니까 간수 잘하고.
투숙객한테 반말하는 벨보이는 처음 보네.
아, 진짜……
직원 교육이 엉망이네. 카운터에 확실히 문의를 해봐야……
알았다고! ……요.
말 끄트머리에 조그만 경어를 매단 켄타로가 씩씩거리며 객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키트에서 캐리어와 하드켄넬을 내려 방 한가운데에 세워놓았다. 텐도는 문턱을 넘자마자 하네스 클립을 풀고 키티를 풀어놓았다. 이 납작한 닥스훈트는 네 발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방에 배치된 협탁과 화분, 장롱, 화장대 다리에 코를 처박고 킁킁대다 이내 켄타로의 곁을 맴돌며 어슬렁댔다. 그는 다리에 새끼줄이라도 묶인 듯 어쩔 줄을 모르며 움찔거렸다. 그 주인에 그 개구만! 켄타로가 벌게진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는 동안 텐도는 여유가 묻은 눈짓으로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는 이내 구김살 없는 이불이 빳빳하게 덮인 침대에 몸을 던져 앉았다. 탄성력 좋은 매트리스가 철렁, 흔들렸다.
이 개 좀 어떻게 해봐! 요!
안 돼, 하고 말해봐. 우리 키티 이래봬도 말 되게 잘 듣거든.
개 이름이 키티……
잘 어울리지?
……
켄타로 군 고교생 시절 별명이 광견이었다며? 우리 키티도 처음엔 많이 사나웠거든. 이렇게 보니까 켄타로 군 완전 키티네!
그게 뭔 개소리야, 요. 문법적으로도 요상스럽기 그지없는 존대를 억지로 짓이겨 뱉은 켄타로가 당당히 손바닥을 내밀고 팁을 요구했다. 이거 원, 카운터에 컴플레인을 넣어도 더할 나위 없이 불량스러운 태도였지만 텐도는 순순히 지갑을 열어 천 엔짜리 지폐를 그의 유니폼 단추 사이에 끼워주었다. 팁 치고는 상당한 액수였기 때문에, 켄타로는 금세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입을 다물었다. 머잖아 흥미를 잃고 침대로 올라온 닥스훈트가 텐도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는 개를 끌어안은 채 뒤로 나자빠져 누워서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이밀었다. 내일 올라와서 나 깨워주기. 그러자 켄타로가 다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나 내일 월차 써서 안 나오는데, 요. 뭐 하는데? 배구경기를 보러…… 그러자 텐도가 제 턱을 핥고 있던 닥스훈트를 베개 위에 넘겨놓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나도! 큰소리로 대답하자 켄타로의 이마가 더욱 뚜렷하게 구겨졌다.
텐도는 고교 동창을 보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켄타로가 미묘하게 인중을 뒤틀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저도 비슷한 이유에서라고 되받아쳤다. 오이카와 토오루? 텐도가 오랜 이름을 들먹이자 그는 이등분으로 접은 천 엔 지폐가 들린 손을 내보이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별일이네. 그런 부류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정작 ‘그런 부류’에 함께 속하는 편이었던 텐도가 고개를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에 켄타로는 대화를 포기하고 그에게서 받은 팁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문간을 나서며 키트 바퀴를 한 번 걷어찼다. 텐도가 침대의 풋보드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키티 군! 켄타로는 대답을 않고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정교하게 돌아가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는 키트를 질질 끌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한숨을 자았다. 지랄맞게 귀찮네…… 지배인이 들었다면 상스럽다고 펄쩍 뛰었을 어투로 욕지거릴 읊었다.
다음날이었다. 켄타로는 입장줄을 서기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가, 호텔 인근의 분수대 주변에서 닥스훈트를 산책시킨 뒤 줄에 합류한 텐도와 맞닥뜨렸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켄타로는 부러 모른 체하며 고개를 앞사람의 뒤통수에 빳빳이 고정시켰지만, 텐도가 하네스 줄을 잡아당기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키티 군, 부지런하잖아! 도통 어울릴래야 어울리지를 않는 별칭 덕분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이나 그 주변을 지나던 직장인들 몇몇이 두 사람을 힐끔 돌아보았다. 아울러 발치에서 경쾌하게 다리를 놀리던 닥스훈트는 저를 부르는 줄 알고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앞발을 흔들었으니 가관이었다.
빌어먹을 키티 소리 좀 그만하지.
어어, 또 말투 봐.
지금은 업무 중 아니거든.
그렇네, 봐줄게.
텐도는 굳이 친구의 경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켄타로는 골치만 아파지게 오이카와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층 관중석의 난간에서 조금 떨어진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와중에 텐도는 캐러멜맛 팝콘을 한 봉지 샀다. 선수입장식에서 그들은 그새 키가 또 자란 와카토시와, 한층 더 강력해진 서브를 기대할 만큼 근육이 붙은 오이카와를 볼 수 있었다. 오이카와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최악이야”하고 중얼거렸다. 저를 알아볼까 싶어 연신 팝콘봉지로 눈 밑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텐도는 와카토시의 스파이크가 시원하게 성공할 때마다 팝콘이 다 튀도록 봉지를 치우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던 켄타로는 양측이 범실을 낼 때마다 버럭버럭 야유를 하기 일쑤였다. 이러다 쫓겨나겠어, 키티 군. 결국 텐도가 그 망할 놈의 별칭으로 다시 한 번 창피를 주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느긋한 자세를 고수하던 텐도와 달리 켄타로는 다리를 꼬고 있다 급히 벌리고, 등을 한껏 젖혀 앉았다가 앞으로 숙이는 듯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으므로 관중석이 하나 둘 비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지쳐있었다. 처음엔 함성소리에 잔뜩 흥분에 혀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던 닥스훈트도 텐도의 품에 얌전히 안겨 눈을 끔벅였다. 그들은 터덜터덜 일어나 바지춤을 털었다. 의외로 와카토시 군과 오이카와의 합이 좋았어, 와카토시는 그새 더 무시무시해졌는걸, 오이카와는 더 짜증나는 녀석이 되었고! 이런저런 주석을 다는 텐도 옆에서 켄타로는 남은 콜라를 빨며 침묵을 유지했다. 텐도는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중얼댔다. 가자마자 체크아웃 해야 해.
비행기는 오늘 밤에 뜨는데 말이지. 호텔에 짐 맡아달라고 하면 맡아주나?
카운터에 얘기하면 알아서 해줄걸.
호오, 그리고 키티 군은 오늘 월차를 냈고 말이지?
그거랑 이게 뭔 상관인데.
뭔 상관이긴, 비행기 뜰 때까지 나랑 놀아줘야지.
그러려고 낸 월차 아니거든?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텐도는 비죽비죽 웃으며 닥스훈트를 그의 품에 덜컥 안겼다. 켄타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열을 올리다가, 돌연 제 품에 맡겨진 닥스훈트 때문에 소스라치게 어깨를 떨었다. 그렇잖아도 주인을 닮아 사람을 가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이 강아지는 켄타로의 품에 안기자마자 혀를 내밀어 그의 턱을 핥았다. 이 복슬복슬한 짐승을 어디 내팽개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두 손 가득 조심스레 끌어안은 채로 악을 쓰는 켄타로를 두고, 텐도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젖은 손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온 그는 능청스럽게 새로운 예약내역을 띄운 핸드폰 화면을 켄타로에게 보여주며, 그가 뒷목을 잡을 만한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일본을 보내긴 아쉬워. 비행기를 연장해야겠어! 아니나다를까, 그 다음날을 정상출근을 하기로 되어있었던 켄타로는 턱을 발치에 떨어뜨린 채로 텐도의 느물느물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닥스훈트는 끊임없이 그의 턱과 입술을 구석구석 핥았다.
그래 놓고 호텔에서는 체크아웃 절차를 척척 진행했다. 예약이 이미 들어차있어 투숙일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조차 확인하지 않고 비행기는 하루를 더 연장해버렸으니 닥스훈트를 끌어안은 채 호텔 밖에서 발장난을 치고 있었던 켄타로는 정문 밖으로 나온 텐도에게서 뒤늦은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려고? 기껏 눈곱만큼의 걱정을 담아 물은 데에 텐도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태연한 형안으로 대답했다. 어디긴, 너네 집이지. 켄타로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낮게 신음했다. 이런 인간이랑은 애초에 엮일 구실을 만들지를 않는 건데…… 텐도가 등을 떠밀며 택시를 잡으려 하자 그가 질색을 하며 앞장을 섰다. 켄타로는 텐도를 버스정류장으로 이끌었다. 대중교통이 영 시원치 않은 곳에서 몇 년을 살았던 텐도는 간만에 오르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만져보고 차창에 코를 붙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켄타로는 그의 몫까지 차비를 계산한 후에 옆자리에 앉아 연신 촌스럽다느니, 정신 없다느니 투덜거리며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켄타로는 일본식 연립주택에서 월세를 내고 생활하는 중이었다. 현관부터 비좁았기 때문에 그 동안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구라파식 양관에서 지내왔던 텐도는 신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켄타로를 앞질러가다 뒷덜미가 붙들렸다. 닥스훈트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연신 힐끔거리는 켄타로 때문에 텐도는 하드켄넬 안에 비치해두었던 배변시트를 꺼내어 거실 한 구석에 깔아야 했다. 얼마나 똑똑한데, 변도 스스로 가린다고? 텐도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켄타로가 손을 씻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닥스훈트는 배변시트 위에 오줌을 누었다. 그래도 그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 언성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난 저거 못 건드려! 여기까지 보고 나니 그는 원체 화법이 그런 식인 듯싶었다. 텐도는 두루마리 휴지를 돌돌 풀어 팔랑거려 보이며 입꼬리를 히죽 찢었다. 내가 아무리 예의를 쌈 싸먹었어도 우리집 개 실례를 키티 군한테 치우라고 할까? 켄타로는 거기에까지 무어라 중얼거리며 토를 달기는 하였지만 냉동고를 열어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던져주는 친절을 베풀기까지 했다.
그들은 어쩌면 알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게다가 알 필요도 없었던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캔맥주에 아이스크림이라는 엉뚱한 조합과 함께였다. 텐도는 졸업을 하자마자 배구를 그만두었으며, 해외소재의 모델대학에 합격해 외국으로 날랐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활동을 하지 않아 국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극히 적은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검색창에 이름을 검색하면 맨 첫 면을 장식하는 위인이었으므로 이에 켄타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켄타로는 성질머리가 고약하여 좀처럼 한 군데에 정착을 하질 못했다. 그나마 배구가 아직까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레저스포츠가 전공이었고, 교수들과의 마찰이 조금 있어 일 년 동안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거 고교 때도 있었던 패턴 아니야? 텐도는 중간에 그의 말을 끊고 얄궂은 내용으로 끼어들었다가 예상대로 면박을 당했다. 어쨌든 그렇게 휴학조치를 내린 켄타로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는데, 호텔 벨맨도 그 중 하나라고 했다. 여기서 ‘그 중 하나’라 함은, 그가 휴학을 한 지 아직 반 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아르바이트를 여러 번 갈아치웠다는 것이다. 스낵 체인점, 편의점 등에서 서빙을 하거나 카운트 업무를 보다가 곧 때려치우고 호텔 벨보이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머리를 다시 염색했다고 해서 텐도는 눈을 휘둥그래 뜨곤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기억하는 시점의 켄타로는 흑발이었기 때문에 그가 고교 이학년이 될 무렵에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했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가만 들여다보니 그의 머리에 어렴풋이 어두운 갈색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염색을 하고도 부루퉁해 보이기까지 하는 더러운 인상에서 흠집이 조금 잡혔으나 과묵하다는 점 (사실 심기만 안 건드리면 과묵한 편이었다)에서 어렵게 합격이 되어 벨보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때, 벨보이는 할만 해?
아니. 이것도 곧 때려치울 거야.
켄타로가 맥주로 조금 흥건해진 아랫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대꾸하자, 텐도가 무릎을 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켄타로는 기분 나쁜 웃음이라고 지적하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털어놓고는 우적우적 씹었다. 계속해서 거실과 부엌을 바삐 오가던 닥스훈트는 어느 정도 지쳤는지, 소파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개털 묻는데, 아. 켄타로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맥주가 세 캔 정도 들어간 후였기 때문에 말투는 조금 유순해져 있었다. 별안간 텐도가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았다. 엄지와 검지로 그의 턱을 쥐고는 이리저리 돌렸다. 이건 뭐야, 켄타로가 재빨리 팔을 들어 그의 뼈다귀 같은 손을 쳐냈다. 텐도가 고개를 바짝 들이밀며 의문형으로 중얼댔다.
키티 군은 진짜 서비스직종은 안 맞는 거 같은데.
알아.
페이스는 너무 내 스타일인데 말이야, 모델 해볼 생각은 없어?
헛소리 하는 거 보니까, 맥주로 취했냐?
완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야.
헛소리 다 했으면 이거 치우고 씻어라.
나랑 내일 프랑스로 가지 않을래? 제대로 정착시켜줄게.
아 좀, 떨어지라고.
안 통하네…… 아쉽다.
텐도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물렸다. 켄타로는 그가 떨어져나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캔과 아이스크림 봉지를 주섬주섬 주웠다. 내가 치우라며? 텐도가 소파 등받이에 뒤통수를 뉘이고 느긋하게 묻자, 그가 다시금 버럭 언성을 높였다. 치워줘도 지랄이야! 텐도는 이제 무거워진 눈꺼풀을 끔벅끔벅 떨어뜨리기 시작한 닥스훈트의 등허리를 어루만져주며 입꼬리를 찢어 웃었다. 재수없어. 켄타로는 어깨를 떨며 부리나케 부엌으로 도망쳤다.
수평선을 벌겋게 태우던 낙조가 사라지고 나서야 텐도는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건네 받았다. 그래도 손님 취급은 해주는구나. 그저 내뱉어본 혼잣말에 켄타로는 거실 바닥에 앉아 건조대에 넣어놓은 빨래를 개며 뺨이 달아오르도록 볼멘소리를 했다. 목욕하면 죽여버린다, 샤워해, 샤워! 그래 놓고는 삼 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보일러를 꺼버린다는 둥 그렇게 효력은 없는 협박을 했고, 텐도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옷을 벗어놓고 샤워부스를 열자마자 선반에 꼴랑 샴푸와 둥그런 비누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것을 보고는 잇새로 푸시식, 풍선 바람이 빠지는 듯한 헛웃음을 지었다. 암만 둘러보았지만 변변한 린스나 바디코롱 같은 것은 코빼기도 뵈지 않았다. 거 참 투박한 인간일세. 하지만 텐도는 휘파람까지 불며 샴푸로 머리카락을 뭉치고, 비누로 몸을 문질렀다. 그는 피부를 부드럽게 가르는 비누로 사타구니를 비비며 악랄하게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안에서 뭐 하는데 웃고 지랄이야! 문간 너머로 켄타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있잖아, 정말 여기 생활이 지루해지면 연락 때려. 프랑스로 와!
똑같은 비누향기를 그득 묻히고 싱글침대에 몸을 구겨 누운 텐도가 그의 뒷목에다 대고 속삭였다. 켄타로는 엉뚱하게도 주인을 놔두고 제 가슴께에 웅크려 누운 닥스훈트를 실수로 밀어낼까 싶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 말을 잘근잘근 씹어 들었다. 댁한테 내가 왜.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켄타로의 목소리에 텐도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우리 업계는 너처럼 인간이 좀 싸가지가 없어도 괜찮거든. 비아냥거리기는커녕 활달하기까지 한 대꾸에 켄타로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가 머잖아 입을 열었다.
댁이야 말로 말본새가……
알았지, 키티 군?
켄타로의 말을 댕강 끊어버린 텐도는 비척비척 일어나 켄타로의 뺨에 입술을 가벼이 붙였다. 방 안에 젖어 든 적요를 응시하던 켄타로는 여태 저린 팔뚝을 감당하며 모로 누워있던 자세를 단번에 뒤집었다. 귀를 움찔거리며 꽤 단잠에 들었던 닥스훈트가 눈을 화들짝 떴다. 켄타로는 제 뺨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버벅거렸다. 너, 너…… 너…… 텐도는 다시 누워 베개 위에 뺨을 묻으며 능청스럽게 눈썹을 꿈틀댔다. 프랑스에선 이렇게 인사한다구? 켄타로는 턱 언저리까지 시뻘게진 채 바락바락 악을 썼다. 거짓말하지 마, 이 변태새끼…… 텐도는 이번엔 욕을 씨부렁거리는 그의 입술을 덮었다. 혀를 넣었다간 송곳니로 씹힐 거야. 영리한 판단을 한 텐도는 달착지근하게 아랫입술만 물고 떨어졌다. 이제는 그 무슨 단어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게 된 켄타로의 뺨을 잡아당기며 유쾌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이건 프랑스식 밤인사야. 켄타로는 굳어버린 사고회로에 간신히 기름칠을 해서 가장 상스러운 욕을 엄선해보았지만, 곧 허리를 넘어온 닥스훈트가 (어쩜 그렇게도 주인을 닮았는지) 입술을 핥는 바람에 입을 꾹 닫는 수밖에 없었다.
텐도는 눈을 둥그렇게 휘어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천장을 바로 보고 푹신한 매트리스에 등을 붙였다. 아직까지 씩씩거리며 당혹스런 숨을 몰아 쉬는 켄타로를 내버려둔 채 눈꺼풀을 닫았다. 아무 말도 않는 켄타로 대신 입술을 열어 인사했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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